한 아이에게
한 아이가 햇빛의 우화와
푸른 예배당의 전설과
귀에 젖은 아이 시절의 들판을 통하여
엄마와 거닐던 아침들을
너무나도 선명히 되살렸기에
아이의 눈물이 내 뺨 적시고
아이의 심장이 내 심장 안에 움직였다.
-딜런 토머스

그날 이후
아빠 미안 2킬로그램 조금 넘게, 너무 조그맣게 태어나서 미안 스무 살도 못 되게, 너무 조금 곁에 머물러서 미안
엄마 미안 밤에 학원 갈 때 휴대폰 충전 안 해놓고 걱정시켜 미안 이번에 배에서 돌아올 때도 일주일이나 연락 못 해서미안
할머니, 지나간 세월의 눈물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해서 미안 할머니랑 함께 부침개를 부치며 나의 삶이 노릇노릇 따듯하게 익어가는 걸 보여주지못해서 미안
아빠 엄마 미안 아빠의 지친 머리 위로 비가 눈물처럼 내리게 해서미안 아빠, 자꾸만 바람이 서글픈 속삭임으로 불게 해서 - P44
미안 엄마, 가을의 모든 빛깔이 어울리는 엄마에게 검은 셔츠만 입게 해서 미안
엄마, 여기에도 아빠의 넓은 등처럼 나를 업어주는 뭉게구름이 있어 여기에도 친구들이 달아준 리본처럼 구름 사이에 햇빛이 따듯하게 펄럭이고 여기에도 똑같이 주홍빛 해가 저물어 엄마 아빠가 기억의 기둥들 사이에 매달아놓은 해먹이있어 그 해먹에 누워 한숨 자고 나면 여전히 나는 볼이 통통하고, 얌전한 귀 뒤로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아이 슬픔의 대가족들 사이에서도 힘을 내는 씩씩한 엄마 아빠의 아이
아빠, 여기에는 친구들도 있어 이렇게 말해주는 국어 선생님도 있어 - P45
"쌍꺼풀 없이 고요하게 둥그레지는 눈매가 넌 참 예뻐" "너는 어쩌면 그리 목소리가 곱니, 생머리가 물 위의 별빛처럼 그리 빛나니"
엄마! 아빠! 벚꽃 지는 벤치에서 내가 친구들과 부르던 노래 기억나? 나는 기타 치는 소년과 노래 부르는 소녀들 사이에 있어 음악을 만지는 것처럼 부드러운 털을 가진 고양이들과 있어 내가 좋아하는 엄마의 밤길 마중과 분홍색 손거울과 함께 있어 거울에 담긴 열일곱 살, 맑은 내 얼굴과 함께, 여기 사이좋게 있어
아빠, 내가 애들과 노느라 꿈에 자주 못 가도 슬퍼하지마 아빠, 새벽 세 시에 안 자고 일어나 내 사진 자꾸 보 - P46
지마 아빠, 내가 친구들이 더 좋아져도 삐치지 마
엄마, 아빠 삐치면 나 대신 꼭 안아줘 하은 언니, 엄마 슬퍼하면 나 대신 꼭 안아줘성은아, 언니 슬퍼하면 네가 좋아하는 레모네이드를 타줘 지은아, 성은이가 슬퍼하면 나 대신 노래 불러줘 아빠, 지은이가 슬퍼하면 나 대신 두둥실 업어줘 이모, 엄마 아빠의 지친 어깨를 꼭 감싸줘 친구들아, 우리 가족의 눈물을 닦아줘
나의 쌍둥이, 하은 언니 고마워 나와 손잡고 세상에 와줘서 정말 고마워 나는 여기서, 언니는 거기서 엄마 아빠 동생들을 지키자 나는 언니가 행복한 시간만큼 똑같이 행복하고 나는 언니가 사랑받는 시간만큼 똑같이 사랑받을 거야 그니까 언니, 알지? - P47
아빠 아빠 나는 슬픔의 큰 홍수 뒤에 뜨는 무지개 같은 아이 하늘에서 제일 멋진 이름을 가진 아이로 만들어줘 고마워 엄마 엄마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들 중 가장 맑은 노래진실을 밝히는 노래를 함께 불러줘 고마워
엄마 아빠, 그날 이후에도 더 많이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아프게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나를 위해 걷고, 나를 위해 굶고, 나를 위해 외치고 싸우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정직한 엄마 아빠로 살려는 두 사람의 아이 예은이야 나는 그날 이후에도 영원히 사랑받는 아이, 우리 모두의 예은이
오늘은 나의 생일이야 - P48
유예은은 2014년의 4·16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안산 단원고 2학년 3반 학생입니다. 10월 15일, 안산의 치유공간 ‘이웃‘에 예은이 부모님과 하은, 성은, 지은 세 자매, 그리고친구들이 모여 아이의 열일곱번째 생일모임을 했습니다. 그날은 쌍둥이 언니 하은이의 생일이기도 했습니다. 생일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예은이를 대신하여 시인 진은영이 예은이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 P49
천칭자리 위에서 스무 살이 된 예은에게
슬픔은 가장 사랑스러운 보석일 거요. 모든 사람이 그리 아름답게 슬픔을 착용한다면, ㅡ셰익스피어, 리어왕
너와 만났다면 가을 하늘에 대해 이야기 나눴을 거야 서정주나 셰익스피어, 딜런 토머스 너와 같은 별자리에서 태어난 시인들에 대해종이배처럼 흘러가버린 봄날의 수학여행과친구들의 달라진 옷맵시에 대해
나뭇잎이 초록에서 주황으로 빠르게 변하는 그늘 아래 우리가 함께 있었다면 너는 가수가 되는 꿈에서 시인이 되는 꿈으로도에서 라로, 혹은 시에서 미로 건너뛰었을지도 모르지 노래에서 노래로, 삶에서 삶으로
그것들은 서로 가까이 있으니까 - P52
누군가의 손으로 흩어졌다 그 손에 붙들려 한곳에 모여드는 카드 패들처럼
그러면 흰머리가 많이 늘어난 아빠는 네가 2학년 3반이었는지, 4반이었는지 잘 기억나지않아 얘야 그때 네가 몇 반이었더라, 허허 웃으며 계속 되물으셨을 텐데 예은아 이쪽의 새치 좀 뽑아다오, 웃으셨을 텐데
너는 이제 다 커버렸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똑같다 바뀐 그림 하나 없이
어린 소녀에서 어린 청년으로 아이에서 농민으로 바다에서 지하도로, 혹은 공장으로 너무 푸른 죽음의 잎들 가을인데, 떨어지지 않고 전부 붙어 있다 - P53
그렇지만 네가 사는 별, 모든 것이 제때에 지는 법을 배우는 거기에서 얘야, 너의 시인들은 여전히 아름다운 시를 쓰고 있겠지? 바람 소리로 귀뚜라미의 은반지로 침묵의 소네트로
예은아 거기서도 들리니? 아빠의 목소리가 "얘들아, 어서 벗자 이건 너희들이 입기엔 너무 사이즈가 큰 슬픔이다" 예은아 거기서도 보이니? 모두에게 제대로 마른 걸 입히려고 진실의 옷을 짓는 엄마가
너와 친구들 얼굴이 맑은 물, 돌들 밑 은빛 물고기처럼 숨어 있다 나타난다 모두 알고 있다 안 보이지만 너희가 거기 있다는 걸
예은아, 진실과 영혼은 너무 가볍구나 - P54
거짓됨에 비해, 진실과 영혼은 너무 가볍구나 모시옷처럼 등 뒤에 돋는 날개처럼
양팔 저울의 접시에 고이는 네 눈물 너의 별 쪽으로 더 기울어지려고광장 위 가을 하늘이 자꾸만 태어났다 쏟아진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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