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처음엔 한나 아렌트가 어려웠습니다


2006년 독일은 ‘사상과 이념의 나라‘라는 슬로건 아래 한나 아렌트 탄생 100주년을 공식적으로 기념했다. 실제로 한나 아렌트는 21세기에 더욱 이름을 얻은 20세기 철학자다. 돌이켜보면, 2003년 여름 박사학위 과정을 밟기 위해 도착한 뉴스쿨은 한나 아렌트에 대한 열기로 가득차 있었다. 자신의 전공 분야가 무엇인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모두가 한나 아렌트에 대해 논쟁하고 있었다. 한나 아렌트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으면 때론 사적인 대화에조차 끼어들기 힘들 정도였다. 처음에는 그 열기가 너무나 이상했다. 석사학위로 존 롤스에 대한 논문을 썼던 나로선 그 열기가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존 롤스와 비교하면 한나 아렌트의 이론은 아무리 읽어봐도 방법론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너무 허술해 보였다. ‘처음엔‘ 그랬다.
- P6

한나 아렌트의 저작중 가장 먼저 읽은 <전체주의의 기원》이 특히 그랬다. 이 저작의 영문 제목은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으로 우리말로 대할 땐 아무 문제가 없지만, 영문 그대로의 의미에집중하면 기원이 여러 개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방법론적으로 보자면 전체주의의 원인이 여러 개라는 뜻이고 한편으론 그중 무엇이진정한 원인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제목부터 이상했던 이책을 열어보니 막상 전체주의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한마디도 없었다. 분명 ‘기원‘에 관한 책인데 그 여러 기원들 중 단 하나의 기원도보이질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전체주의의 기원>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의 다른 저작 역시 이와 비슷했다. - P7

한나 아렌트는 자신은 철학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녀에게 철학이란 ‘홀로 되어 이 세계를 관조하는 일‘이었다. 이런 활동은 필연적으로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인간 조건에 상응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한나 아렌트는 스스로를 정치 이론가라 불렀다.
하지만 오늘날 수많은 이들이 한나 아렌트를 정치 이론가가 아니라철학자라 부른다. 그 까닭은 명백히 한나 아렌트가 이 세계에 던졌던질문에 있다.
한나 아렌트는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사람들이 하지 않는 질문을 던졌다. "20세기에 새롭게 탄생한 전체주의란 무엇인가?" "노동에 대한 숭상은 어떻게 근대를 병들게 했는가?" "폭력이 아닌, 말로 하는 혁명은 가능한가?" 한나 아렌트는 이런 도전적인 질문을《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혁명론》으로 구성된 3부작에담아내는 동시에 자신만의 독특한 진단과 해법을 제시했다. - P8

특히 《인간의 조건》에서 던진 "우리는 열심히 노동하는 삶 이후의 세계에 대해 제대로 사유해본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현시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잠시 멈춰 서서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보자. 당신은 열심히 노동하는 삶, 그다음 세계에 대해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로봇과인공지능이 인간의 수많은 노동을 대체하는 이 순간에도 대부분의사람들은 그저 열심히 일하는 삶만이 가치가 있다고 믿고 있다. 대체왜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는 걸까?


이런 질문들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문제는 한나 아렌트 - P8

의 저작이 읽기가 만만치 않다는 데 있다. 한나 아렌트 강의를 다니며만난 많은 수강생들은 한나 아렌트의 책이 책장에 꽂힌 채 그럴듯한장식품이 되어버렸다고 털어놓았다. 앞서 고백했듯 전공자인 나 역시 한나아렌트의 저작을 처음 대했을 때 비슷한 경험을 했다. 다행히도 당시 나에겐 뛰어난 철학자들이 열어놓은 관련 수업이 있었다. 만약 그 수업들이 없었다면 나는 확신 없이 더 오래 헤매었을 것이다.


사만다 로즈 힐의 《한나 아렌트 평전>을 처음 읽었을 때 기뻤던건 입문자들이 느낄 난감함을 해소해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은 한나 아렌트의 일대기를 따라가며 아렌트가 ‘어떤 저작‘을 ‘왜 그 시기‘에 쓰게 되었는지 소개해준다는 데 있다. 물론 각 저작의 핵심 내용 역시 모두 다루고 있다. 소위
‘삶의 방식으로서의 철학 philosophy as a way of life‘이라는 방법론을 바탕한나 아렌트의 삶과 저작을 조화롭게, 무엇보다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 더하여 젊은 연구자답게, 내가 아는 한 한나아렌트에 대한 가장 최근의 연구 결과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도 큰 장점이다. - P9

열망의 덫에갇히다


우리는 진주처럼 보일 때까지
진흙을 만지작거린다.
그러고는 진흙을 털어내고
자신을 바보라고 여긴다.
그래도 모양은 비슷했다.
우리의 새로운 손은
모래로 보석 만드는 법을
연습했던 것이다.
_에밀리 디킨슨


"생각의 바탕은 무엇일까요? 경험! 그것 말고는 없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1972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한 회담에서 이같이 외쳤다.  - P15

한나의 저서들은 이모저모 살펴봐도 사유에 관한 것이다. 한나는 자신의 생각을 적은 <사유 일기>에서 이렇게 물었다.
"폭압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을까?"
그리고 《인간의 조건》 초반부에서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밝혔다.
"내가 제안하는 건 그러므로 아주 간단하다. 우리가 지금 뭘 하는지 생각하라는 것, 그뿐이다."

한나는 《뉴요커》에 게재할 목적으로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직접 취재했고 이때 아이히만이 성찰적 사고를 하지도 못하고, 타인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도 못한다고 느꼈다. 한나의 마지막 저작 <정신의 삶》 1부 제목은 바로 ‘사유‘이다.
한나는 사유와 경험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20세기의 사회적·정치적 상황이 그녀의 삶과 사상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분명하다. 1906년 독일의 한 중산층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한나는 일찍이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한나는 국외자였고 반역자였다. 또는 훗날 스스로가 말했듯이떠돌이 망명자였다. 한나의 삶이 이를 증명한다.  - P16

아마도 한나에 대해 가장 이해하기어려운 부분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듯 가히 범접할 수 없는그녀만의 독창성이 아닐까.
한나 아렌트의 젊은 시절 자화상 <그림자Die Schatten>(The Shadows)에서 한나는 세상 경험을 향한 자신의 갈망을 "열망의 덫에 갇혔다"고 표현했다. 한나가 일찍이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세상을 경험하고 이해하고 싶다는 이 채워지지 않는 갈망 때문이었다."세월이 흐른 뒤 한나가 말했듯 이해는, 알고자 하는 욕구와 달리 멈추지 않는 사유 활동을 요한다. 이는 언제든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나가 작가가 된 건 전적으로 우연이었다. 자신의 생각과 기억할 가치가 있는 일들을 기록하기 위해 그리고 글쓰기가 이해에 절대적으로 필요했기에 글을 쓴 것뿐이다. 그녀의 일기와 저작들이 이를증명하며 한나에게 글쓰기란 일종의 ‘사유 훈련‘이었다. 한나는 《과거와 미래 사이: 정치사상에 관한 여덟 가지 철학 연습> 서문에서 말했다. - P18

"생각은 살아 있는 경험에서 나오며, 방향을 알려주는 유일한 이정표로서 항상 경험과 함께 가야 한다."
한나에게 사유 훈련은 이해의 필수조건이자 스스로 독일철학의전통을 깨고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P19

한나는 이른바‘전문 사상가‘라는 사람들이 국가사회주의의 태동을 알지 못했을 뿐아니라 심지어 나치당의 문화·정치 제도 장악에 동조한 사실에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이 ‘전문 사상가‘들은 히틀러가 정권을 잡는 것에저항하는 대신 그저 역사의 물결에 휩쓸리는 편을 선택했다. 한나는이런 ‘환경 milieu‘과 선을 긋고, "앞으로 어떠한 학문적인 일도 일절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한나의 사유 일기》를 보면 "폭압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을까?"라는 질문에 이어서 "아예 처음부터 물결에 휩쓸리지 않는 방법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직업이 사상가인 사람들에게 사유는 전혀 어려운 활동이 아니다. ‘지적 intellectual‘이라는 단어를 가리켜 한나는 혐오스럽다고 말했다. 한나는, 사람은 누구나 자아 성찰적인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으며, 눈앞의 파시즘 앞에서 이데올로기적 사상의 흐름을 거스르고 개인의 책임을 주장하려면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 P19

한나는 고독해야만 사유와 이해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사적영역과 사방이 뚫린 공적영역을철저히 구분했다. 한나는 고독을 좋아하는 동시에 인정을 갈망했으며 아주 어릴 적부터 이 둘 사이에서 갈등했다. 심지어 책을 읽는 것조차 어느 정도 고립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사유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스포트라이트에서 빠져나와 고독한 대화를나눠야 한다.
한나는 이 같은 대화를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뜻하는 ‘하나 안의둘‘로 표현했다. 사유는 또한 나에 대해 아는, 즉 나 자신을 이해하는과정이다. 고독한 대화, 즉 사유는 자아를 둘로 나누고, 내가 다시 세상에 나갔을 때 둘로 나뉜 자아는 다시 하나로 합쳐진다. 나는 이 사유라는 공간 안에서 내 경험과 신념 그리고 내가 안다고 믿는 것과 마주한다고 한나는 말했다.
"어떤 생각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같은 생각은 잘못이다. 생각은 원래 그 자체로 모든 교리와 신념, 견해에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한나의 사유 훈련이 위험을 수반하는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경험과 실험은 모두 ‘시도하다‘라는 뜻의 experiri라는 어원에서 나왔으며 이는 ‘위험‘을 뜻하는 periculum과 관련되 - P21

어 있다. 한나가 "위험한 생각은 없다. 단지 생각 그 자체가 위험할뿐이다"라고 말할 때 이 점을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른다. 사유 활동, 세상을 이해하게 되는 이 활동은 내가 믿는 모든 것을 뒤흔드는힘을 갖고 있다. 사유는 내 빗장을 여는 힘을 갖고 있다.
한나는 이념적 사고라면 깡그리 거부했다. 특정 사상이나 철학적 교리를 따르지 않았으며, 자신의 삶과 저서를 통해서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 몸소 알려주었다.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 가르치려고하기보다 사유하는 방법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 결과 한나의 저서를읽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런저런 정치 전통의 틀 안에서 한나를 규정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이는 아이러니한 일인데, 사실 한나의관심은 오로지 ‘이해‘였으며 이처럼 규정하려는 사고방식을 완전히멀리했기 때문이다. ‘이해‘는 복잡한 과정으로 올바른 정보나 과학적지식을 얻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사유하고 또 사유하는활동을 통해서 나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현실을 감내할 수 있다.  - P22

우리는 지금 자유민주주의 쇠퇴, 가짜뉴스 확산, 사회적 영역의 부상, 고도로 발달한 기술, 사적영역의 상실, 외로움으로 물든 사회를 경험하고 있다. 이런세태 속에서 한나의 삶과 저서는 다시금 새롭게 조명받는다. 왜 오늘날 많은 사람이 한나의 말에 공감할까? 21세기의 정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한나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나가 과거를 되돌아보았다면 그건 현대와의 유사점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귀중하고 신비한 보석을 발견하기 위해서였다. 한나가 건져 올린 보석은 우리가 최근에 겪은 현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이해하도록 도와줄지 모른다. 장담하건대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한나를 찾는 이유다. - P23

한나는 무신론자였다. 성경이나 유대교 경전을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고 진보 신화도 믿지 않았다. 오로지 보통 사람들의 일상, 즉현재에만 관심을 가졌다. 미래가 지금보다 나으리란 생각에서 미래중심으로 삶을 꾸리고 정치를 구성하기보다 지금 해야 할 바람직한일들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나는 만족을 모르고, 변명하지 않으며, 굽히지 않는 성격이었다. 페미니스트가 아니었고 마르크스주의자, 진보주의자, 보수주의자가 아니었으며, 민주주의자나 공화주의자도 아니었다. 그저 세상을 사랑하고 인간의 조건이라고 생각한 근본적 특징을 진실로 받아들인 사람일 뿐이었다. 그 근본적 특징은, 우리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각자 다르며, 이 세상에서 태어났다가 사라진다는 걸 말한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이 공간에 무언가로 존재하며, 그렇게 존재하는 우리는 지구를 보살피고 함께 공동 세계를 건설해야 한다. - P24

민족국가 체제는 실패했으며 철학은 파시즘의 물결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한나는 전통과 결별했다.
한나는 프랑스 저항시인 르네 샤르가 했던 말을 즐겨 인용했다.
"우리의 유산은 우리에게 유서 없이 남겨졌다."
한나가 남긴 저서는 우리의 유산이 되었고, 이 유산은 우리에게‘이해‘와 관련한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정치적 위기와 닮은 점을 찾고자 한나의 저서를 읽는다면 그녀는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한 인터뷰에서 한나는 이렇게 말했다.
"제 생각으론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와 닮은 점을 과거에서 찾으려고 하는 건 터무니없는 일이에요."
한나는 사유하는 방법, 즉 행동을 멈추고 최근의 경험과 내 마음속 두려움, 욕망을 바탕으로 나의 행동을 되돌아보는 방법을 가르치려 했을 뿐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냉전 체제와 테러와의 전쟁, 디지털 기술의 출현으로 정의되는 20세기 초중반과는 다르다. 한나는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서구 전통 정치사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법을 알려주었다.  - P25

반면 이 책은 아주 쾌활한 한 여성에 관한 글이다. 그녀가 정신의 삶만큼이나 활동적인 삶을 살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한나의 이해를 향한 열정과 삶에 대한 갈망은 그녀의 자아비판적 사유 능력만큼이나 중요하다. 이 둘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세상을 깊이 이해하지 않고서는 세상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나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는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어자살을 생각할 때였다. 그녀는 삶을 너무 사랑했기에 결국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고 살겠다고 결심한 다음에는 그저 웃어버렸다. 그러한삶의 어둠 속에서 한나가 보인 용기는 "지금까지의 세상 중 가장 아름답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로 하여금 눈앞의 어둠과 싸울용기를 준다. - P27

"독일 하노버 린덴, 1906년 10월14일 일요일 저녁 9시 15분, 내 딸 요한나 아렌트가 태어나다."
딸의 출생을 기념하여 한나 아렌트의 어머니 마르타 콘이 육아노트에 적은 문장이다. 마르타는 22시간 산고 끝에 3.695그램의 한나 아렌트를 출산했다.
한나 아렌트는 사회적·정치적 격변이 한창이던 20세기 초에 태어났다. 훗날 한나는 이 시대를 "끊임없는 전쟁과 혁명의 연속으로정의했다. 마르타와 파울 아렌트 부부에게 한나는 처음이자 유일한자식이었다. 전기 엔지니어였던 아버지 파울은 고대 그리스·로마 서적을 능숙하게 읽었고 어머니 마르타는 독일에 오기 전 가정교사에게 프랑스어와 음악을 배웠다. 파울과 마르타 두 사람 모두 조부모님과 함께 부모님을 따라 러시아에서 독일로 이주했으나, 가족들과 달리 정치적으로 좌파 성향이었고 독실한 신앙생활도 하지 않았다. - P31

1919년 1월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독일 자유군단 손에살해당한 해, 한나는 고작 열세 살이었다. 그럼에도 한나의 정신에는룩셈부르크의 철학이 배어들었고 어머니 마르타의 정치적 행동주의를 느낄 수 있었다. 룩셈부르크의 영향을 받은 한나는 훗날 《전체주의의 기원>에서는 정치 경제와 제국주의에 대해, <인간의 조건>에서는 몰수에 대해 논하기도 했다. 한나는 룩셈부르크에게서 닮고 싶은독립적이고 열정적인 여성을, 자유와 사회참여를 위해 자신을 헌신한한 인간을 보았다.
하지만 한나의 정치 세계 입문까지는 그 후로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2차 세계대전이 한나가 공적영역에 집중하도록 했다면, 1차 세계대전과 독일의 경제불황은 한나로 하여금 지식인의 삶과 시, 철학,
문학에 심취하도록 했다. 독일혁명기 동안 한나는 거의 두문불출했으며, 아버지 서재에 틀어박혀 프리드리히 실러 (독일 시인, 극작가), 괴테, 프리드리히 횔덜린(독일 시인)과 호메로스를 읽고 외웠으며, 철학을 탐구하면서 카를 야스퍼스(실존철학을 대표하는 독일 철학자)의 《세계관의 심리학>(1919)과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1781)을 탐독했다. - P44

"언젠가는 철학을 공부할 거란 사실을 항상 알았어요. 열네 살때부터요. 그것 말곤 달리 할말이 없네요."
가우스가 재차 그 까닭을 묻자 아렌트는 다시 대답했다.
"칸트를 읽었어요. 왜 칸트냐고 물으시겠죠? 굳이 대답하자면철학을 공부하든가 물에 빠져 죽든가 둘 중 하나였어요 이를테면 그랬죠."
한나는 삶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해하고 싶어서‘ 철학을 택했다고 가우스에게 분명히 말했다. 아버지 서재에 들어서는 순간에도한나의 이해 욕구는 존재했다.
"집 서재에는 모든 책이 있었어요. 책장에서 그 가운데 하나를꺼내면 그만이었죠."1"
10어린 시절 한나가 마주한 작품들은 일평생 그녀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전후 시대 독일을 이해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그중에서도단연 독일의 시와 철학이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 P47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현상학의 기존 문제를 해결할새로운 언어의 발굴에 힘썼다. 신학 이전의 사유 조건을 알고 싶었던그는 새로운 차원의 사유를 제시할 목적으로 서양 전통철학을 파헤쳐, 서로 광범위하게 연결된 사유의 길과 그 길의 자취를 찾아냈다.
1951년 한나는 하이데거의 언어를 빌려 짧은 시 한 편에서 이러한 사유의 개념을 묘사했다.

사유는 내게로 오고,
나는 더 이상 사유가 낯설지 않다.
나는 자라서 사유의 집이 된다.
마치 밭갈이를 마친 들판처럼.‘ - P54

하이데거는 연구실에서 처음 단둘이 만났을 때 한나에게 반해버렸다. 1925년 3월 21일 편지에서 하이데거는, 한나가 비옷을 입고연구실에 들어서는 모습, ‘큰 눈‘을 모자에 가리고 수줍게 질문에 답하는 모습을 묘사하며 처음 본 순간을 회상했다. ‘첫 만남 며칠 후 하이데거는 한나에게 편지를 썼다.

1925년 2월 10일
친애하는 아렌트!
오늘 저녁 꼭 만나서 말할 거야.
우리 사이는 모든 게 단순하고 깨끗하고 순수해야 해.
그래야만 우리에겐 만날 자격이 주어질 거야.
아렌트는 내 제자고 나는 스승, 그게 우리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유일한 기회지.
아렌트를 결코 내 것이라 부르진 못할 테지만 이제부터 아렌트는
내 삶의 일부이며, 내 삶은 아렌트와 함께 나아갈 거야."

연구실에서 처음 만난 지 2주도 안 돼 하이데거는 한나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첫 한 해 두 사람은 하이데거의 사무실에서, 한나의다락방에서, 숲속에서 오랜 시간 산책하며 남몰래 만났다.  - P57

한나는 하이데거와 17 년 동안 말을 섞지 않았다. 
한나는 하이데거와의 관계를 함구했다. 낭만적 사랑에 대해서도, 열정적 사랑에 대해서도 별로 쓰지 않았다. 한나는 사랑이 정치적인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랑에 빠지면 모두가 함께인 이 세계가둘만의 세계로 변해버린다. 그럼에도 한나에 대한 사랑은 커다란 구원을 가지고 왔다.
한나는 마지막 저서 《정신의 삶》(1977)에서 ‘의지‘를 다루었다. 가장 쓰기 어려운 부분이었고 하이데거의 현존재 개념, 사랑 그리고 악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부분이었다. 한나는 어떻게 어떤 사람들은 악을 행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이에 저항하는지 알고 싶었다.
의지를 분석하면서 한나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노력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을 읽었는데 그는 악을 인간이 신에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선의 결핍이라고 정의했다. 신은 악을 주지 않았으나 인간이 죄를 저지른 결과로서 고통을 겪도록 내버려둔다.  - P64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가능성도 허용하는 것이다.
한나가 아우구스티누스를 읽은 건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함이아니었다. 한나는 심지어 영혼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나에 따르면 우리가 마주해야 할 세계는 단 하나,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다. 한나는 신의 구원 대신 세속적 사랑에 기댔다. 사랑으로변모한 의지는 무게, 즉 성격을 형성하는 중력을 지녔고, 어떤 행동을 취할지 스스로 의사 결정을 하도록 자아를 길들인다.
한나는 "사랑은 영혼의 무게다"라고 썼다.
사랑에는 세 가지가 있다.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 그리고 사랑 그 자체‘이다. 사랑은 특정 대상에 대해 느끼는 애정, 감상적 형태가 아니라 정신에 감명을 주는 ‘발자국‘ 내지 ‘지성적 행동‘이다. 정신이 지성으로 변모한 이 영속성의 발자국은 사랑하는 자도 사랑받는 자도 아닌 사랑 그 자체이며, 이 사랑은 서로 주고받는 사랑이다.
의지가 사랑으로 변모할 때 그 힘은 그대로다 - P65

"사물이든 사람이든 그 대상을 사랑하는 것만큼 그 대상에 대해깊은 말을 하는 건 없다. 다시 말해, 사랑은 상대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길 바라는 것이다. ‘Amo: Volo ut sis‘, 즉 사랑이란 있는 그대로너이길 바라는 것이다."
이 사랑만이 영생과 구원을 가져오며, 이는 정신이 할 수 없는일로, 이 사랑은 해방을 필요로 한다. - P65

야스퍼스가 생각하기에 철학은 살아 있는 경험을 향한다. 정신과 의사로서의 그가 과학적 지식의 심리학적 측면에 관심을 보였다면, 철학자로서의 그는 인식론에 관심을 가졌다. 그 결과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독일관념론 전통과 자기 이해 selbstbewusstsein 를 배경으로, 야스퍼스는 자신만의 실존철학 Existenzphilosophie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그는 독일관념론 전통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훨씬 넓은 범위에서 철학을 이해했다. 이 점은 야스퍼스와 리케르트의 토론에서 분명히 드러나는데 리케르트 역시 베버와 함께 공부한 적이 있다. - P68

플라톤의 <향연>에서 소크라테스가 아가톤에게 말했듯이 야스퍼스도 지혜란 이 병의 와인을 빈병에 붓는 것처럼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 옮겨 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여겼다. 그 대신 배움은 대화하는과정에서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언어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언어는인간에게 경험의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그러려면 대화를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독일관념론 사상가 프리드리히 폰셸링에 대한 세미나 및 사유하는 방식과 그 과정에 대한 세미나를 열어 철학의 본질을 다루기도 했다.
야스퍼스의 사유와 가르침에 대한 방법론은 이상적 유형, 인간행동, 문화 현상 그리고 사람들이 특정한 세계관을 갖는 이유, 쉽게말해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사유하고 행동하고 특정한 선택을 하게 하는지 밝히려는 유형론의 한계를 분석한 베버의 체계에 영향을받았다. 야스퍼스는 순수한 철학적 사색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 세계와 마주하는 현실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믿었다. - P69

야스퍼스 철학의 이러한 핵심 요소들은 한나의 사상에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한나의 사유 개념의 핵심도 대화였으며, 한나는 나 자신과 대화하는 ‘하나 안의 둘‘을 이야기한다. 야스퍼스에게 가르침을받는다는 것은 한나에게 사유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영역에 국한되는 게 아님을 의미했다. 한나의 박사학위 논문주제는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였다. 한나는 신학과 철학을 하나로 접목해, 그가 말하는 이웃 사랑을 이 세계에서 타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세속적 가치로서 재해석했다. - P69

한나는 이 논문을 쓸 때 아우구스티누스를 연구하는 학자들이나문헌을 의도적으로 찾아 읽지 않았다. 그를 신학자 혹은 초기 기독교사상의 역사를 널리 알린 인물로 바라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안에서 그의 <고백론>을 읽은 한나는 그가 말하는 다원성과 이웃 사랑을 공동 세계 건설에 필요한 하나의 구성 요소로만 이해했다.
야스퍼스의 실존철학은 한나에게 참된 존재란 속세와 떨어질 수 없다고 가르쳤다. 여러 비판 세력이 있었으나 한나의 사랑 개념과 성아우구스티누스는 독창성과 통찰력 면에서 만점을 받았다.
이후 1950년대 중반까지 한나는 오랫동안 아우구스티누스를 찾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그는 일평생 한나의 대화 친구였다. 새로운 시작이라는 표현 및 이웃 사랑, 세계 사랑은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혁명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과거와 미래 사이》,
《정신의 삶》 등 한나의 여러 저서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한나가 아우구스티누스를 다시 찾은 것은 1953년 《전체주의의기원》 마지막 장 ‘이데올로기와 테러‘를 쓸 때였다. ‘새로운 시작‘을성찰하며, 독자들이 제대로 된 희망을 일별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 P72

하지만 역사에서 모든 끝은 반드시 새로운 시작을 내포한다는 진실이 여전히 남아 있다. 시작은 가능성이자 끝이 유일하게 줄 수있는 ‘메시지‘다. 시작은, 하나의 역사가 되기 전까지는 인간이 지닌 최고의 능력이다. 정치적 측면에서는 인간의 자유와 다름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다. "Initium ut esset homo creatus est", 즉시작이 있고 나서 인간이 창조되었다. 시작은 새로운 탄생이 있을때마다 생겨난다. 새로운 탄생은 바로 인간의 탄생이다. - P73

국회의사당 방화사건 이후에는 시민권 정지 명령을 내렸다.
한나는 독일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관두고 눈앞에 벌어지는 정치적 일들에 전면 맞서기로 결심했다. 철학이 도덕적 행동을 낳는다는 가정은 현실에선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나치 정권과 마주한 지식인은 그 누구보다도 용기가 없고 무능했다. 글라이히샤일퉁Gleischschaltung(획일화를 뜻하는 나치 용어로, 나치체제에서 강제 조정을 통해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전체주의적 통제를 확립한 일련의과정) 또는 정치적 협력이 원칙이 되었다. 대학교수와 지식인은 저항이 아니라 자리를 보전하는 편을 선택했다.
1946년 한나는 미국 월간지 《코멘터리 Commentary》에 <지옥의이미지>라는 논평을 실어, 당시 일부 독일 지식인들이 자신이 나치정권에 협조한 것을 어떤 식으로 합리화했는지 밝혔다. - P98

히틀러 체제하에서 독일 대학교수들의 자세가 대개 어떠했는지조금이라도 궁금하다면 1946년 4월 프라이부르크대학교 역사학교수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발표한 일종의 고해성사 《정치학 비평》을 읽기 바란다. 리히터 교수는 실상 반나치주의자였지만 본심을 꼭꼭 숨겼다.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거의 알지 못했기에 고작 "히틀러 제국이라는 기계는 .… 잘 작동하지 않았다" 정도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는 "지식인으로서의 삶에 몰두해 "
"불가피한 피해가 너무 커지지 않도록 막느라 바빴다. 또한 "학자로서의 자유에는 한계가 있어도 역사적 · 정치적 문제에 독자적 - P98

의견을 개진할 기회"가 왔다고 확신했다. 그가 어찌나 그 기회를확신했는지 게슈타포는 리히터 교수를 해외 선전에 이용하기로결정했다"


이 구절에서 한나의 반어적 어조는 ‘판단‘에 대한 그녀의 이해를보여준다. 초창기 홀로코스트에 대한 글에서도 반어적 어조를 취했으며 1963년 출간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도 이런 어조가 두드러진다. 반어법은 한 걸음 떨어져 희화적으로 논리적 모순을 꼬집는다는 특징이 있다. 한나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하기를 거부했으며, 그녀의 어조는 형식을 통해 비평을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매우진지한 방식으로 글을 쓰는 건 어느 모로 보아도 비논리적이고 끔찍한 것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되었으리라. 한나에 따르면악인 앞에서도 웃을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웃음만으로도 내 존엄성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 P99

나치 같은 악에 직면한 한나는 최초로 반유대주의와 맞닥뜨렸을때 어머니에게 들은 말을 떠올렸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놀림받았다면, 다른 무엇이 아닌 유대인으로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독일인으로서도, 세계시민으로서도아닌, 또 인권을 옹호하는 사람으로서도 아닌, 바로 유대인으로서 말이다."
한나의 질문은 분명했다.
"유대인으로서 특별히 무엇을 할수 있을까?" - P99

유대인들은 대략 2,000 년을 짐을 든 채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을그리워하며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타향살이에서 물건을 잃어버리는 건 다반사였다. 얻은 건 뭘까? 슬픈 경험 그리고 어디서든 적응하고 나를 지키는 능력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자신의 운명을 알기도 전에 모두 다 잃었다. 안정된 집, 평범한 일상, 고향, 친구, 언어.… 모두 다. 터전을 잃었고, 이내 어디로 갈지 길도 잃었다. - P115

블뤼허는 학자가 아니었고 자기 자신을 지식인으로 생각하지도않았다. 출판이나 집필에 관심이 없는 것만큼이나 사상에도 관심이없었다. 블뤼허는 한나에게 자신은 태어날 때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받았다며, 선한 요정이 명석한 두뇌를 주었으되 악한 요정이 작가적재능을 주지 않았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고 어머니는 세탁부였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베를린 거리를걷다가 블뤼허는 우연히 정치에 눈을 떴다.
자수성가한 그는 대화를 무척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여자도 좋아했다. 한나는 파리에서 블뤼허를 만나 함께 사는 2년 동안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그의 아내나타샤 제프로이킨Natasha Jefroikyn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 P121

한나는 강제수용소 생활을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고 이를 언급한 적은 단 세 번뿐이다. 그중 한 번은 <우리는 난민>(1943)에서다.


귀르스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적이 있는데 이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살에 대해 들었다. 나는 집단자살을 제안받았다. 프랑스정부를 자극하기 위한 일종의 시위였다. 누군가 이곳에 온 것 자체가 죽을 운명을 뜻한다고 하자 사람들은 갑자기 삶을 향해 맹렬한 용기를 보였다. 이 일을 그저 나의 사사로운 불운에 불과하다고 여겨 개인적으로 목숨을 끊는다면, 우리는 그 밖의 사건들에도자기중심적이고 무심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어야 했으나 그렇지 않다는 게 다수 의견이었다. - P131

그런데 그때까지도 루르드에 있던 한나의 소중한 친구 벤야민은미국 비자를 받지 못했다. 1940년 8월 사회연구소는 마침내 그의 긴급 비자를 발급받았고 벤야민은 소식을 들은 즉시 마르세유에 가서미국 영사관에 비자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이렇게 해서 벤야민, 한나, 블뤼허 세 사람은 마르세유에서 다시 만났다. 한나가 마르세유에서 벤야민을 마지막으로 본 날은 1940년 9월 19일이다. 그녀가 마르세유를 떠나고 7일 후 스페인 국경 마을 포르트보우에 도착한 벤야민은 국경을 통과할 수 없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벤야민의 사망 소식을 거의 4주가 지나서야 알게 된 한나는 리사 피트코와, 에리히 프롬의 아내로 철학자이자 사진작가인 헤니 구어란트에게 자초지종을 듣는다. 피트코와 구어란트는 벤야민과 난민들을 데리고 피레네산맥 넘어 스페인 국경 마을 포르트보우에 도착했다. 밀출국하려는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이용하는 경로였다. 피트코에 따르면 벤야민은 10분 걸으면 10분 쉴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 P140

것이다. "
뉴욕행 기니호Guiné에 승선했을 때 한나는 서른다섯 살이었다.
그 나이에 이르기까지 한나는 세계대전을 두 번 겪으며 망명자가 되고, 게슈타포에 체포되고, 강제수용소를 탈출하기도 했다.
벤야민의 《계몽》을 펴내며 한나는 서문에서 불운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죽음으로 승리를 거둔 사람들‘의 삶에는 콕 집어 정의하기는 힘든, 객관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뭔가가 존재했다. 그건 불운이었다" 다행히 한나의 인생에는 불운이 작용하지 않았다. 철학자들이오랫동안 잔인하다고 생각해온, 행운이라는 이 예측할 수 없는 신비의 여신은 필요할 때마다 한나를 찾아왔다. - P144

미국에 온 뒤 시오니즘을 향한 한나의 태도가 달라졌다. 독일과프랑스에 있을 때 한나는 적극적 시오니스트였다. 유대인 단체 브네이브리스B‘nai B‘rith 후원으로 유대인 대상 강연을 진행하고, 히브리어 강좌를 개설했으며, 유대인 청년들을 인솔해 직접 팔레스타인을방문했던 한나였다.
미국에서 한나는 주다 매그니스와 함께 일했는데 그는 팔레스타인의 이쿠드Ikhud 당을 창당하고 이쿠드당 소개 자료를 UN에 제출하고자 UN 사무총장이 임명한 정무 담당자를 만나기도 했다. 그는 한나에게 이쿠드당 대변인 자리를 제안했으나 한나는 매그니스식 정치행보를 따르지는 않았다. - P154

한나에게 유대인 문제는 언제나정치적 문제였다.
<전체주의의 기원> 서문에서 한나는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의 역사에서 유감스러운 사실 중 하나는, 유대인 문제가정치적 문제임을 적군은 알았으나 정작 유대인 친구들(유대인 자신들)은 몰랐다는 것이다. "13한나는 유대인에게 고향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유대 민족국가 건립은 반대했다. 《아우프바우》에 게재한 칼럼에서 한나는 모든 유대인이 고향을 가질 수 있는 유럽식 연방제를 지지했다. 그래야만 유럽에서 그랬듯 민족국가 체제가 실패하더라도 안전을 보장받기때문이다. 한나는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지 않으면 이에 항의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한나는 이를 "권리를 가질 권리"로 공식화했다. 한나는 유대인 전선을 원했고여러 국가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의 연대를 바랐다.  - P157

어둠은 두 사람의 만남을 비밀에 부쳐야 했음을 뜻한다. 하이데거가 직접 배달했으나 한나가 읽지 못한 그 편지에서 하이데거는 엘프리데가 그들의 관계를 안다고 고백했고 다음날 오후엔 분위기를바꾸려고 직접 점심을 준비했다. 한나에게 그날 밤과 다음날 아침은
"평생 잊을수 없는 순간"이었다. "
한나에 관한 많은 책이 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과 이후 한나와하이데거의 관계를 다룬다. 모든 책이 둘의 관계에 주목한다. 한나는<인간의 조건>에서,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심 inter-esse(사이에 존재함)에 대해 논했다. 한나와 하이데거, 둘의 관계는 그저 추측만 가능한 주제로 남겠지만 한글속에 등장하는 두 가지 개념이 두사람의 관계를 설명해준다. 첫 번째는 용서, 두 번째는 화해다. 한나는 용서는 개인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 P185

"용서와 그 용서를 받아들인 관계는 반드시 개인적이거나 사적일 필요는 없지만 언제나 지극히 개인적 일로서, 용서는 잘못을 저지른 상대에 대한 배려다."
사랑하는 사이는 정치적 관계가 아니다. 그렇기에 한나에 따르면 사랑은 계산적이지 않다.
상대를 사랑하고 용서함으로써, 서로의 ‘장점과 단점, 잘한 일과 못한 일, 잘못‘을 토대로 두 사람의 과거를 돌아보고 앞으로 어떤사이가 되어야 할지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다. 잘못을 용서해주는 건순전히 상대가 일평생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매몰되어 있지 않기를바라는 마음에서다. 용서가 개인적인 성격에 복잡한 인간의 감정을 - P185

다룬다면 화해는 이성을 바탕으로 평정심과 판단을 요구한다.
유럽에서 돌아온 직후 한나는 사유 일기에 자신의 생각을 적었다.
1950년부터 쓴 사유 일기 앞부분에는 용서 verzeihung와 화해 Versöhnung에 대한 생각을 담은 긴 글이 적혀 있다. 여기서 한나는 용서가 용서한 자와 용서받는 자 사이에 계급을 형성함으로써 어떻게 평등한 인간관계를 망치는지 고찰한다. 용서를 하는 자는 용서를 구하는 자보다 자신이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는 제삼자나 어느 누구도 아닌 오직 상대방에게만 용서를 구할 수 있기 때문에용서라는 행위는 인간관계를 망친다. 이 같은 용서의 대안이 화해다.
화해는 용서라는 행위를 하지 않고도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 P186

훗날 발간한 《인간의 조건》에서도 복수를 비롯해 용서와 화해를 논하지만 이때만큼 용서와 화해를 뚜렷하게 구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시작‘이라는 그 근본 특징은 변함이 없다. 이 세상에서 새로운 시작은 무한하며 행동할 때마다 주어진다.
한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함으로써 용서와 화해를 논할수 있었다.
유럽을 돌아다니며 반가운 친구들을 다시 만났지만 집을 비운3개월 동안 블뤼허와의 사이는 틀어졌다. 블뤼허는 답장을았다. 한나가 답장을 재촉해도 그에겐 들리지 않았다. - P186

한나가 생각하는 결혼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말하는 사랑을실현하는 것이었고, 그 사랑은 상대만의 고독을 지켜주는 것이었다.
한나와 블뤼허, 두 사람의 결혼은 그들 사상의 구현이었고, 이 부부에게 결혼이란 서로에게 비밀을 만들지 않고, 상대를 구속하지 않으며, 언제나 새로움의 가능성을 열어둔 채 각자에게 생각을 위해 필요한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인간사에서 사랑도 우정과 마찬가지로 공적영역과 분리된 사적영역에 속한다. 사적영역은 자유를 필요로 하고, 자유가 있어야만이 두 영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내 사생활을 지킬 수 있다. 한나는 끊임없이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을 구분했다. 이 두 영역을 구분하지 않으면 자유가 제한된다. 자유가 제한되면 우리는 그 두 영역을 오고갈수 없다. 생각과 이 두 영역 간 이동을 제한받는다면 그건 전체주의가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다. - P188

한나는 1951년 《전체주의의 기원》을 출간했다. 그해 한나는 미국 시민권을 받기도 했다. 한나는 18년이 지나고서야 마침내 ‘무국적자라는 대단히 복잡하고 붉은 딱지를붙인 존재"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시민권 선서식에 참석한 한나는 새로운 시작을 기념하며 요한나 블뤼허에서 한나 아렌트 블뤼허로 개명했다.
한나는 1941년부터 《전체주의의 기원> 집필을 시작해 1949년유럽 방문을 코앞에 두고 완성했다. 이 책은 20세기에 전체주의가 출현한 현상을 설명하는 거의 600쪽에 달하는 서사 작품이다. 히틀러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스탈린만 남았을 때 쓰기 시작했고, 그간 유럽에서 일어난 일들과 소비에트연방에서 벌어진 일들을점차 알게 되면서 그 스타일도 조금씩 변화를 겪었다. - P189

한나는 강제수용소와 절멸수용소가 무서운 진짜 이유를 이렇게말한다.
"어쩌다 살아남는다 해도, 수감자들은 죽음으로 세상과 단절되는 것보다 더한 단절을 겪는다. 공포가 망각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1948년 2월, 책의 진행 방향을 설정한 한나는 휴튼 미플린 출판사에 편지를 보내, 책은 모두 3부로 구성할 예정이며 각각의 제목은
‘반유대주의 Antisemitism‘, ‘제국주의 Imperialism‘, ‘나치즘Nazism‘이고,
이제 막 시작한 3부 ‘나치즘‘에서는 나치즘을 인종차별적 형태를 띠는 하나의 전체주의 체제로 다루겠다고 전했다. - P192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핵심은 2부 ‘제국주의‘에 포함된 5장‘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해방‘이다. 한나는 여기서 공적영역과 사적영역 간 경계의 무너짐에 대해 논했다. 개인의 경제적 이익이 공공의정치영역에서 힘을 발휘할 때, 다시 말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정치사유화 현상이 발생할 때 공적영역과 사적영역 간 경계가 무너진다.
예를 들어, 한때 사업가들은 소비 생활을 즐기며 가족과 개인의 사생활에만 신경썼으나 이제는 개인의 사업모델을 가지고 공적영역에 적극 뛰어든다.
2부 ‘제국주의‘에서 한나는 민간 기업이 어떻게 국가의 기능을점점 더 많이 넘겨받았는지 자세히 논한다. 계속 성장하기 위해 그들에게는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다. - P195

더욱 근본적으로는 공적영역을 파괴해 안정적 정치 제도를 무너뜨림으로써 사적영역과 공적영역 간 차이를 허물고 모두 사회화시킨다. 한나는 전체주의가 이러한 현상으로 말미암아 개인의정치 행동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전체주의는 사람들이자발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기 때문이다.
행동하는 힘이 다른 사람과 ‘함께일 때‘ 나온다면 각자 고립된개개인은 당연히 무력할 수밖에 없다. 전체주의 정권은 공포를 통해개개인을 타인에게서 분리하고, 외롭게 고립된 개개인을 다른 모두의 적으로 돌린다. 세상은 황무지로 변하고 한나의 말처럼 경험도 생각도 모두 불가능해진다.
전체주의가 사람을 고립되고 외로운 개인으로 만드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체계적으로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공포가 확산될 때 힘을 얻는데 이러한 이데올로기와 마주했을 때 분별 있게 판단하거나 생각하지 못하면 현실과 가상을 구분할 수가 없다. - P196

한나는 마르틴 루터의 말을 인용해 사람이 외로울 때 얼마나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는지 강조했다. 외로운 사람은 현실이 아닌 상상에 뿌리를 두고 생각의 논리를 펼치기 때문이다.
한나는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외로운 상태에서, 자명하다는 말은 더 이상 지식을나타내 보이지 않고, 나만의 독자적인 생각이 발달했음을 보여줄 뿐이다. 전체주의운동에서 가장 악명이 높은 극단주의는 진정한 급진주의와는 거리가 멀고, ‘이 모든 것을 최악으로 생각하는 것이며, 이러한 연역 방식으로 언제나 가능한 한 최악의 결론에 도달한다."
현대 세계에서 의미 상실은 돌아갈 곳 없음, 뿌리 없음, 외로움이라는 근본 조건들을 특징으로 한다. 한나는 <전체주의의 기원> 마지막 장에서, 외로움이 모든 전체주의운동을 초래한 근본 원인이라고 말했다. 한나가 말하길, 공포의 기저에는 대개 외로움이 있다. 고립은 "삶의 정치적 영역에만 영향을 미치는 반면 외로움은 인생을 송두리째 흔든다" 폭정은 개인을 고립시켜 정치 행동을 할 수 없게 만듦으로써 공적영역을 파괴하지만 전체주의는 또한 개인의 사적 삶도파괴할 것을 주장한다. 전체주의의 "기반은 이 세계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경험, 즉 외로움에 기반한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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