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독자들에게


나는 이 책을 사십 년 전에 썼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 책에 담긴 생각들을 믿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도 이 책을 새로운 한국어번역본으로 볼 수 있게 되었음을 축하드립니다.
이와 함께 나는 여러분들께 위대한 일본 시인 고바야시 잇사(小林茶, 1763-1827)가 두 세기 전에 쓴 하이쿠 한 편을 보냅니다. 그는 단열한 단어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부자들을 위해
새 눈에 대해 너절한 글을 쓰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계속 싸워 나가시기 바랍니다!

2012년 6월
존 버거

말 이전에 보는 행위가 있다. 아이들은 말을 배우기에 앞서 사물을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러나 보는 행위가 말에 앞선다는 것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보는 행위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결정해 준다. 우리는 우리 주위으로를에워싼 이 세계를 말로 설명하고는 있지만, 어떻게 이야기하든 우리가보는 이 세계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보는 것과 아는 것의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결코 한가지 방식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매일 저녁 해가 지는 것을 볼 때, 우리는해가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기 때 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지식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광경과 꼭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다. - P9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또는 우리가 믿고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지옥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던 중세 사람들이 보는 불타는 광경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불타는 광경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에 대한 그들의 관념은 불에 타서 재만 남고 모든 것이다 소멸되는 시각적 정경과 불에 덴 고통의 체험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은 완벽해 보인다. 그 어떤 단어도 이 완벽함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으며, 사랑의 행위만이 일시적으로 그 완벽함을 표현할 수 있다. - P10

우리가 어떤 것을 볼 수 있게 되자마자, 타인도 우리를 볼 수 있다는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이렇게 타인의 시선이 우리의 시선과 결합함으로써 우리 자신 역시 가시적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납득할 수 있게된다.
만약 우리가 저 너머의 언덕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그 언덕에서도 역시 우리가 보일 거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시각의 상호작용적 성격은 대화의 상호작용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다. 때로는 문자 그대로 또는 은유적인 의미에서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보았는지‘ 상대방에게 설명하기 위해, 그리고 ‘상대방은 무엇을 어떻게 보았는지 알아내기 위해 대화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이 책에서 사용하는 이미지라는 단어는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가리킨다. - P11

세잔(P. Cézanne)이 화가의 입장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있다. "세상의 삶에서 한순간이 지나간다!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잊어버리는 것! 바로 그 순간이 되고, 예민한 감광판(感光板)이 되는 것… 우리가 본 것을 이미지로 남기고, 우리 시대 전에 나타났던 것들은 모두 잊어버리는 것…." 그림에 그려진 순간이 눈앞에 바로 나타났을 때 그것을 어떻게 그리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미술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고, 그러한 기대는 우리가 복제를 통해서 체험한 그림들의 의미가 어떤 것이었느냐에 달려 있다.
그렇다고 모든 미술이 저절로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아니다. 누군가 잡지에서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떠올리게 하는 고대그리스 두상의 복제 사진을 오려, 판때기에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다른 이미지들 옆에 붙여 놓는다고 해서 그 두상의 의미를 온전히 알게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 P38

이미지의 새로운 언어를 다르게 사용할 수 있다면, 이를 통해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다. 그 새로운 언어를 통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영역의 경험들을 더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말 이전에 보는행위가 있다.) 이때 경험이란 개인적 경험뿐 아니라, 과거에 대한 우리의 관계라는 본질적인 역사적 경험을 말한다. 즉, 우리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경험, 우리 자신이 능동적인 주체가 될 수 있는 그런역사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경험 말이다. - P40

과거의 예술은 더 이상 과거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권위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이미지의 언어가 들어섰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언어를 누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복제본의 저작권 문제, 미술 매체와 출판사의 소유권 문제, 공공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정책 같은 문제로 이어진다. 일반적으로 이런 문제들은 극히 작은 전문적인 문제인 것처럼 보이는데, 이 책의 목적 중 하나는 현재의 위기가 훨씬 광범위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다. 스스로의 과거와 단절된 개인이나 계급은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있는 개인이나 계급에 비해, 선택이나 행동을 함에 있어 훨씬 덜 자유롭다. 바로 그 점이 과거의 예술 전체가 이제 정치적 문제가 된 이유-단 하나의 이유-이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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