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11권 펴내는 동안 박물관·미술관을 주요답사처로 삼은 적은 없다. 그러나 이번 서울 답사기에서는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겸재정선미술관‘과 ‘허준박물관‘으로 향한다. 이 미술관과 박물관은 국립도 시립도 아닌 구립(區)으로 규모가 큰것도 아니고 건물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유물이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땅에 역사가 열린 이후 우리의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들어준문화사의 두 위인, 화성(聖) 겸재(謙齋) 정선(鄭, 1676~1759)과 의성(醫聖) 구암(龜巖) 허준(許浚, 1537~1615)을 기리는 기념관이기에 답사처로서 충분한 의의를 가진다. - P239
겸재정선미술관은 겸재가 65세부터 70세까지 5년간 현령으로 근무했던 양천현의 관아가 있던 자리로 ‘양천향교‘가 그 옛날을 증언하고 있고, 허준박물관은 그의 관향(貫鄕)에 세워진 것으로 여기엔 ‘허가바위‘가 있다. 이 미술관과 박물관은 서로 가까이 있으며 주변 환경이 아주 아름답다. 겸재정선미술관은 한강변의 궁산(해발 76미터)이라는 야트막한 동산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궁산 산책로를 따라 오르면 겸재가 그림으로도 그린 정자 소악루(小岳樓)가 복원되어 있어 여기서 한강을 조망할 수있다. 허준박물관 곁에는 구암근린공원이 있고 올림픽대로를 가로질러한강변으로 나아갈 수 있는 구름다리도 있다. 그래서 이 답사 코스는 한강의 어제와 오늘을 그려보는 한 차례 여로가 된다. - P240
겸재가 그린 <양천현아도>(간송미술관 소장)가 있어 양천현 관아의 모습을 여실히 복원해볼 수 있다. 현감의 집무실인 동헌(軒)을 중심으로 하면서 외삼문과 내삼문의 행랑채가 겹으로 감싸고 있는 것이 아주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겸재가 남의 집을 제3자의 입장에서 본 것이 아니라자신이 생활하는 공간을 그렸기 때문에 더욱 정감있게 그린 것 같다. 그림 우측 상단의 화제는 겸재가 양천으로 떠날 때 그의 절친한 벗이자 당대의 시인이었던 사천(桂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이 써준 전별시의 첫 구절이다.
양천을 박(薄)하다고 말하지 말라莫謂陽川薄 - P242
양천의 흥(興)에 여유가 있을지니陽川興有餘
화제 글자 중 박(薄) 자를 낙(落) 자로 읽기도 하지만 문집을 보면 박자임이 분명하다. 실제로 양천은 물산이 박하지 않아 종6품의 현감(縣監)이 아니라 종5품의 현령(縣令)이 다스리는 한 급수 높은 고을이었다. 양천현아를 그린 그림으로 겸재의 제자인 김희겸(金喜謙)이 그린 <양천현해도(陽川縣廨圖)〉(리움미술관 소장)도 있다. 김희겸의 또 다른 이름은김희성(金喜誠)이고 호는 불염자(不染)인데, 그는 겸재의 제자로 도화 - P243
서 회원이 되어 어진과 의궤 제작에 참여하여 사천현감까지 지냈고 중인문학 서클인 송석원시사에도 참여하여 풍요속선(風謠續選)』에 그의시가 실려 있기도 하다. 불행히도 요절하여 표암 강세황이 그의 단명을애도한 글을 지은 바 있다. 그는 아마도 스승을 뵈러 양천현을 방문하여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두 그림을 보고 있으면 진경산수는 회화적 아름다움과 동시에 카메라가 없던 시절 당시의 풍광을 그대로 전해준다는 시각적 기록의 기능이 따로 있음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이런 그림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양천현의 옛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겠는가. - P244
조선시대에 관아가 있는 고을엔 반드시 향교가 있었습니다. 유교는종교이면서 동시에 학문이었기 때문에 향교에서는 교(敎)와 학(學)이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 향교는 공자를 모신 사당인 대성전과 교육이행해지는 명륜당, 그리고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로 구성되어있습니다. 향교의 학생 정원은 『경국대전』에 따르면 목사 고을엔 90명, 각 현에는 30명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학업은 7, 8세부터 서당에서 시작되고 향교의 입학은 16세부터로 제한했습니다. 이는 16세부터가 바로 군역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향교생에게는 군역이 면제되고 학업 성적이 우수한 경우 생원진사 시험에 직접 응시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었습니다. 향교의 대성전에는 공자와 맹자를 비롯한 유교의 4성(聖), 그리고 설총, 최치원을 비롯한 우리나라 18현(賢)의 위패를 모시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향교는 일종의 종교 건축이었기 때문에 조선왕조의 멸망 후에도 각 고을의 유림들에 의해 그대로 보존되어 현재 남한에만 234개의향교가 있습니다. 그 많은 향교 중 서울특별시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이 양천향교입니다." - P245
현재의 양천향교는 1981년에 복원된 것으로 옛날에 관아 앞에 있었더 역대 현령 공덕비가 이곳으로 옮겨져 줄지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정작 겸재 정선 현령의 공덕비는 없다. 이에 겸재정선미술관 개관부터관장을 맡았던 고(故) 이석우 관장은 지금이라도 세워보려고 노력하셨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 뜻을 이루지 못하셨다. 이석우 관장은 참으로 조용하고 성실한 분으로 경희대 역사학과 교수를 정년퇴임한 뒤 일생의 후반을 겸재정선미술관장으로 보낸 ‘박물관인생‘으로 나와 가까이 지냈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고 나니 허전한마음이 일면서 더욱 그리워진다. - P247
양천향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겸재정선미술관(양천로47길36)이 있다. 2009년에 개관한 미술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에 연면적1,000평(3,300제곱미터) 규모로 궁산을 등지고 있고 넓은 호수를 낀 서울식물원이 내려다보이는 풍광 수려한 곳에 위치해 있다. 겸재정선미술관은 ‘겸재정선기념실‘ ‘진경문화체험실‘이 상설전시실로 꾸며져 있고 기획전시실, 세미나실이 따로 마련되어 겸재 정선에 관한 학술행사와 지역 미술인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박물관 액티비티 (활동)‘가 자못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어린이 미술관이 활성화되어 있고, 미술관 한쪽에는 겸재 정선이 툇마루에 앉아 국화꽃을 감상하는 장면이 그려진 <독서여가도(입체적으로 재현하여 겸圖)>를재와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만든 포토존도 있다. 그중 겸재정선미술관을 답사하는 참 의의는 영상실의 11분짜리 동영 - P247
상과 연대기를 소개한 패널을 통해 겸재의 일생과 예술세계를 새겨보는데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친절성이 좀 지나쳐 설명문은 미세한사항까지 쓰여 있어 너무 길고, 작품 사진이 너무 많아서 관객들은 오히려 찬찬히 읽어보지 않고 게걸음으로 지나쳐버리게 하는 것 같다. 본래 안내판의 정보는 짧고 쉽고 간단하게‘ 하는 것이 친절한 것이다. 지난번 답사 때 새로 부임한 김용권 관장에게 내 생각을 말하니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리노베이션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하니 그때를 기대해보며내가 알고 있는 겸재 정선의 삶과 예술을 여기에 옮긴다. - P248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그동안 우리나라 산수화가들은 산수의 윤곽과 구도를 잡을 때 (중국 화본에 나오는 16준법(法, 산주름을 표현하는 법)을 따랐기 때문에 (…) 오직 한 가지 수묵법으로만 표현하였으니 (…)어찌 (진정한) 산수화가 있다고 하겠는가. 겸재는 일찍이 백악산 아래 살면서 그림을 그릴 뜻이 서면 앞산을마주하고 그렸고 (・・) 금강산 안팎을 두루 드나들고 영남을 편력하면서 여러 경승지에 올라가 유람하여 그 물과 산의 형태를 다 알았다. 그리고 그가 작품에 얼마나 공력을 다했는가를 보면, 쓰고 버린 붓을땅에 묻으면 무덤이 될 정도였다. 이리하여 스스로 새로운 화법을 창출하여 우리나라 산수화가들의병폐와 누습을 씻어버리니, 조선적인 산수화법은 겸재에서 비로소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 할 것이다.
이어서 관아재는 겸재 정선의 예술적 역량과 성취는 중국회화사상 최고의 화가로 지칭되는 송나라 미불(米), 명나라 동기창(董其昌)과 거의필적할 만하다며 이는 조선 300년 역사 속에 볼 수 없는 경지라고까지말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오늘날 겸재를 화성으로 기리고 있는 것이다. - P249
겸재정선기념실 맨 마지막 진열장에는 ‘원화전시실‘이 따로 마련되어이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겸재의 진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미술관에원화전시실이 따로 있는 곳은 아마도 여기뿐일지 모른다. 사실 미술관에 원화를 전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겸재의 중요 작품들은 이미 국립중앙박물관, 간송미술관, 리움미술관 등 유명한 박물관과 유수한 개인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어 원화를 들이기가 너무 어려워 많은 부분을복제화로 대신하고 어렵사리 소장하고 있는 원화를 한곳에 전시하며 한편으로는 원화도 있음을 자랑하는 것이다. 겸재정선미술관은 개관 때부터 고 이석우 관장과 지역 유지인 전 강서문화원 김병희 원장이 열과 성을 다하여 현재 10건 12점(수탁 소장 포함 24점)의 원화를 소장하고 있으니그것만으로도 장하다고 할 만하다. 원화전시실 한가운데 전시되어 있고 근래에 구입한 <동작진도(銅雀津圖)〉는 비록 소품이지만 한강의 동작나루의 풍광이 아련하게 그려져 있는 진경산수의 걸작이다. 이미 공개된 사실이어서 밝혀두자면2021년 6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치열한 경쟁 끝에 강서구가 4억 4천만원(수수료 포함 약 5억 원)에 낙찰받은 것이다. - P254
겸재의 <경교명승<경교명승첩>에서 겸재가 그림을 그리고 제목까지 붙인 <양천십경도>에 사천 이병연이 지은 시를 예쁜 시전지에 써서 함께 장황한 작품은 다음과 같다.
〈목멱조돈도(木覓朝圖)> : 목멱산(남산)의 해돋이 <안현석봉도(鞍峴夕烽圖)> : 안산(모악산)의 저녁 봉화 〈공암층탑도(孔巖層塔圖)>: 공암의 다층탑 <금성평사도(錦城平沙圖)> : 금성(난지도)의 모래톱 <양화환도도(楊花渡圖)> : 양화진에서 나룻배를 부르다 〈행호관어도(杏湖觀漁圖) : 행호(행주산성)에서 물고기를 바라보다 〈종해청조도(宗海聽潮圖)〉 : 종해헌(양천현아 건물)에서 조수 소리를 듣다 <소악후월도(小岳候月圖) : 소악루(궁산의 정자)에서 달을 기다리다<설평기려도(坪騎驢圖)> : 설평(눈내린 들판에 나귀 타고 가는 사람 <빙천부신도(氷遷負薪圖)〉 : 빙천(얼어붙은 길에 나뭇짐 지고 오는 사람 - P259
정선의 <목멱조돈도〉, 에는 사천이 예쁜 시전지에 쓴 시가 붙어 있중 서울 남산의 해돋이를 그린 <목멱조돈도>를 보면 예쁜 시전지에 이병연의 다음과 같은 시가 실려 있다.
새벽빛 한강에 떠오르니 높은 산봉우리들 희미하게 나타나네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첫 햇살 남산에서 오르네 曙色浮江漢 觚棱隱約參 朝朝轉危坐 初日上終南
<목멱조돈도>에는 아침 햇살이 목멱산에 걸린 은은하면서도 평화로운 강변 풍경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서울 남산(목멱산)의 봉우리가 지금과 사뭇 다른 모습인데 겸재 당년에는 실제로 이처럼 뾰족했다고 한다. 그러던 남산 봉우리가 세월의 흐름 속에 점점 깎이어 일제강점기 사진 - P260
에는 뾰족한 봉우리가 사라져 있다. 근대 한국화 6대가 중 한 명인 심산 노수현은 한국전쟁 때 피란 가지못하고 서울 명륜동 집에 있었는데, 9.28 서울 수복 3일 전부터 서울에폭격이 있어 밖에 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폭격이 끝나고 나와보니 남산봉우리가 더 낮아져 있어 옛 모습을 회상하며 <남산고의>(南山古意, 남산의 옛 모습)라는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경교명승첩>에는 겸재가 누군가와 한강을 따라 뱃놀이를 한 뒤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강 유람도가 있다. 양수리부터 양천까지 한강을따라 내려오는 명승 여덟 곳을 그린 것이다. - P261
소악루 답사로 겸재정선미술관의 답사는 끝나고 곧바로 한강변의 또 다른 옛 명승인 공암(서울시기념물 제11호)으로 향한다. 공암은 공암(巖), 공암(孔), 또는 구멍바위라고도 하는데 겸재정선박물관에서 걸어서 15분, 차로 5분 거리인 같은 가양동에 있으며 가까이 허준박물관이 있다. 공암은 현재 올림픽대로 안쪽에 위치해 있지만 겸재의 그림에서는한강변에 우뚝한 벼랑으로 그려져 있다. 겸재는 이 공암을 즐겨 그린 듯<경교명승첩>에 <공암층탑도>가 들어 있고 <안현석봉도>에서는 오른쪽강변에 공암을 그려넣었고 <양천팔경첩>에 있는 <소요정도> 그림은 사실상 공암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들은 보면 공암 절벽 위에는 석탑이 있었던 모양인데 지금은사라지고 탑산이라는 이름만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세 폭의 그림에는 한결같이 공암 바로 곁에 2개의 바위가 섬처럼 물속에 잠겨 있는데 이 중 - P268
가 있다. 하나는 광주바위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경기도 광주에서 떠내려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광주바위는 오늘날 구암근린공원 안의 연못 속에 장식 바위처럼윗부분만 보일 뿐이다. 이로써 한강변의 지형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실감하게 되는데 광주바위 뒤쪽으로는 ‘서울탑산초등학교‘라는 팻말이 크게 붙어 있어 그 옛날을 상상하게 한다. - P269
"『동의보감』은 『의방유취(醫方類聚)』,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등조선의 의학서를 집대성했을 뿐 아니라 중국 한나라부터 명나라에 이르는 200여 종의 문헌을 두루 참고했습니다. 특히 중국의 의학책은 책마다 다르게 말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허준은 자신의 학식과 경험으로 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의학과 양생이 별개로 전개되었지만 『동의보감』에서는 병났을 때의 치료는 물론이고 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추구하는양생을 하나로 합쳐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책은 총 25권 중 목차만 2권일 정도로 자세히 분류하여 백과사전의 색인 구실을 할 수 있도록 했고 참고자료의 인용처를 일일이 밝힘으로써 근거를 명확히 한 것입니다."
들을수록 감탄이 절로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잠시 말을 잊고 있었는데 유기덕 회장은 힘주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P274
『동의보감』의 동(東)은 동국(우리나라)의 의학서라는 뜻이지만 실제그 내용은 동양(東洋)의학의 보감입니다."
이에 나는 곧바로 문화재청 실무자를 불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국제자문위원인 서경호 교수(당시 서울대 중문과)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아태지역 위원인 조은수 교수(서울대 철학과)의 자문을 받아 진행하라고 했다. 그리고 2년 뒤인 2009년 7월 동의보감』은 카리브해의 작은 나라인 바베이도스에서 열린 제9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P275
이렇게 개장된 망우리 공동묘지를 경성부에서는 보통묘지, 가족묘지, 단체묘지 3종으로 나누고, 이를 또 1등지에서 5등지, 그리고 등외지까지 분류하여 불하 가격에 차등을 두었다. 보통묘지의 경우 1등지는 1평에 10원, 5등지는 1원, 등외지는 50전에 불하한다는 세칙까지 마련했다. 그리고 1933년 9월 8일자 ‘경성부 고시 제118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고시했다.
양주군 구리면 망우리와 교문리, 그리고 고,양군 뚝도면 면목리 소재 공동묘지를 망우리묘지라 칭함.
이렇게 시작된 망우리 공동묘지는 40년 동안 47,700여 기가 들어서면서 묘역이 가득 차게 되었다. 이에 1973년 3월에 폐장시킴으로써 매장이 종료되었다. 이후 망우리 공동묘지는 신규 분묘 조성이 금지되었고 이장과 폐묘만 허용되면서 현재 약 7,000기의 무덤이 남아 있다. 이것이 오늘날 망우리 공동묘지이다. - P290
삶과 죽음, 있음과 없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불이(不二) 의 사상이 깔려 있어 한 줌의 재가 되는 화장 문화를 낳았다. 이에 반해 유교에서는 인간은 죽으면 혼과 백으로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여 혼은 사당에 모시고 백은 무덤으로 정성스럽게 조성했던 것이다. 봉분을 조성하는 문화는 산지가 70퍼센트를 차지하는 우리나라 산천의 자연환경에 어울리는 장례 풍습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조선왕조는신분에 따라 주택 크기에 제한을 두고 호화주택을 금지했듯이 분묘에도엄격한 제한 규정을 두었다. 조선왕조 국가 운영의 기본 틀로 제정된 『경국대전』에서는 양반 사대부 무덤의 규모를 다음과 같이 제한했다.
종친 1품은 사방 100보로 하고 이하 10보씩 줄여 문무관 1품은 사방 90보, 문무관 2품은 사방 80보, 문무관 3품은 사방 70보, 문무관4품은 사방 60보, 문무관 5품은 사방 50보, 문무관 6품 이하 및 생원 · 진사는 사방 40보. - P291
나는 왼쪽 초입에 동떨어져 있는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비(利泰院墓地 無緣墳墓 合葬碑)‘ 부터 찾아갔다. 여기는 본래 묘지로 쓰기에는 부적절한 ‘등외지‘인데 1935년 이태원 공동묘지에 있던 무연고 묘 2만 8천 기를 화장하여 합장하고 작은 위령비를세워놓았다.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에 세워놓은 비석 앞면에는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비‘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설립 날짜와 함께 시행처로 ‘소화 11년(1936) 12월 경성부(昭和十一年十二月京城府)‘라고 쓰여있다. 연고가 없어 제대로 위로받지 못하는 2만 8천 혼백들이 이렇게 작은봉분 속에 묻혔다는 사실에 처연한 마음이 일어난다. 그 합동묘에는 다른 분도 아닌 유관순(柳寬順, 1902~20) 열사도 있다는 사실에 더욱 가슴이 아려온다. - P303
평범한 둥근 무덤이지만 무덤 곁에는 이중섭을 무한히 존경했던 조각가 차근호가 세운 아담한 묘비가 있다. 묘비에는 두 아이가 꼭 부둥켜안고 있는 애잔한 모습을 담은 이중섭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무덤 곁에는 구상 시인이 장례 때 심은 소나무가 굳세게 자라 이 불우했던천재 화가의 넋을 기리고 있다. 그때 3년생을 심었다면 이제 수령 60년이 넘는 노송이다. ‘황소의 화가‘ 이중섭은 국민화가라 일컬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그의 예술은 위대하지만 삶은 불행했다. 41세로 생을 마친 그의 마지막은 너무도 슬프다. 함흥 철수 때 남하하여 부산, 통영, 제주도를 전전하며 살았다.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 처갓집으로 보내고 헤어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한 그는 폭음을 하며 몸부림치다 - P310
마침내 육신은 병들고 정신은 방향을 잃어갔다. 1955년 그림자 같은 벗인 시인 구상과 와사등의 시인 김광균을 비롯한 친구들의 도움으로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을 연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전시는 그의 예술을 꽃피운 향연이자 행복이었다. 전시회에 성공하면 가족을 만나러 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으나 그림판매는 여지없이 실패했고 그 좌절 속에 몸과 정신은 점점 더 피폐해졌다. 이따금 그는 발작을 일으켰다. 우울증과 영양실조, 거기에 거식증과 간염까지 겹쳤다. 친구들은 그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정신병원에서 그가 그린 정신병 환자 특유의 그림을 보면 더욱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그는 몇 차례의 탈출 소동으로 여러 병원을 옮겨다니다 결국 1956년 9월 6일에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반은 이곳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히고, 반은 일본으로 보내졌다. 죽어서야 혼백의 일부가 그리워하던 아내와 아이들 곁으로 돌아간 것이다. 나에게 이중섭을 한마디로 소개하라면 ‘그리움의 화가‘라고 하겠다. 인간 누구나 품고 있는 그리움의 감정을 이중섭처럼 가슴 저미게 형상화한 화가는 드물다. 이중섭의 <황소> <달과 까마귀> <매화꽃 그리고수많은 은지화(紙) 모두 그리움의 감정으로 읽으면 그의 예술이 더욱 절절히 다가올 것이다. 시에 소원이 있다면 그림에 이중섭이 있다. - P311
설산의 무덤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오른쪽으로는 동락정이라는 육각정자가 있고 조금 더 가면 왼쪽 산자락에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1899~1959)의 무덤이 나온다. 죽산을 생각하면 누구나 가슴이 먹먹해질것이다. 묘소 입구에는 그를 기리는 죽산 당신의 어록 하나가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 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 P317
국내외에서 활동하다가 신의주 감옥에서 7년간 복역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공산당 주요 지도자 중 한사람이었지만 해방 후에는 조선공산당과 결별하고 중도파의 길을 걷기시작하여 1948년 인천에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56년에는 진보당을 창당하고 제2대,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연이어 2위를 차지하여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떠올랐다. 그런 죽산이 갑자기 체포되어 ‘북한과 내통해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결국 1959년 7월 31일 사형에 처해졌다. 이후 죽산 조봉암을 언급하는 것은 금기시됐다. 그리하여 조봉암의묘비는 이름 외에 아무런 글이 새겨져 있지 않은 무자비(無字碑)로 세워져 있다. 아무 글씨가 없는 이 백비(白碑)야말로 어떤 장문의 비문보다도 - P318
많은 말을 담고 있다. 세상이 민주화되어 죽산 사후 40년 뒤인 1999년에서야 그의 명예회복을 위한 범민족 추진 준비위원회가 발족했고 2007년 9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조봉암에 대한 사과와 그의 명예회복을 국가에 권고했으며,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대법관 13명 전원 일치 판결로 무죄를 선고했다. 이후 조봉암의 묘역은 자연석과 회양목으로 돌 축대를 반듯하게 쌓고 장명등과 망주석을 세워 품격있는 무덤으로 정비했으며, 주변의 잡목도 제거하여 묘소에 아주 밝은 기상이 감돈다. 그렇게 해서 죽산은 복권되었지만 영혼이 온전히 신원(伸寃)된 것은 아니었다. 그간에 받아온 ‘빨간 딱지‘는 지금까지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아 2009년에 열린 서거 50주기 행사에는 진보적인 정치인 몇몇과 그의 고향 인천의 후배 정 - P319
치인 몇몇만이 모였다. 그날 아침 갑자기 비가 쏟아져 흰 천막을 쳤는데추모식이 시작되자 언제 그랬냐는듯이 비가 그쳐 맑은 하늘 아래 식을치르며 모두들 죽산의 혼이 모처럼 밝은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라고들여겼다고 한다.
죽산의 무덤에서 내려와 우리는 길 건너 있는 육각정자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벌써 1시간 반을 걸었다. 정자에 오르니 시야가 갑자기 넓게트이면서 오른쪽 잡목들 사이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한강이 보였다. 정자 아래쪽으로는 샛길이 나 있는데 이 길을 따라가면 고구려시대의 아차산 보루(堡)들이 나온다. - P320
/아차산가 국가사적 제455호로. 정자에서 내려와 다시 답사를 시작하니 순환도로가 멀리까지 뻗어있는 것이 보인다. 이제부터는 사뭇 산등성을 따라가는 편안한 산책길이다. 망우역사문화공원이 당당히 ‘인문학의 길‘이라는 이름을 내걸 만름이 길에는 역사문화 인물들의 묘소가 집중적으로 모여 있다. 만해 한용운에서 호암 문일평, 위창 오세창, 아사카와 다쿠미, 소파 방정환, 유상규 의사와 도산 안창호 선생 가묘(假墓), 화가 이인성, 조각가권진규, 종두법의 지석영, 시인 김상용 등의 무덤으로 이어진다. 우리는그 길을 따라 심기일전의 발걸음으로 다시 답사를 이어갔다. - P323
망우리 공동묘지를 답사하면서 나는 우리나라 장례 문화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죽음이란 결국 자연 생물계의 공통된 숙명인데 지구상의 동물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장례를 치른다. 그러나 그 시신을 어떻게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가는 민족마다 종교마다 다르다. 티베트의유목민들은 시신을 새의 먹이로 바치는 조장(葬)을 치르고, 어느 섬의원주민들은 바다에서 수장 한다고 한다. 을우리나라는 청동기시대 이래로 매장(葬) 문화를 갖고 있다. 지하에안치하는 방식에 따라토광묘·옹관묘·목관묘·적석묘·석실묘 등이 있고 지배층의 무덤은 지석묘(고인돌), 적석목곽묘(돌무지덧널무덤), 전축분(벽돌무덤), 석실봉토분(돌방흙무덤) 등 시대마다 나라마다 다르게 나타났다. - P325
장례 풍습은 인간의 생활방식 중에서 가장 보수적이어서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장례 풍습이 바뀌었다는 것은 세상이 다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화장한 유골을 모시는 납골묘가 새롭게 등장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매장 문화의 풍습은 좀처럼바뀌지 않았다. 특히 조선왕조가 이데올로기로 삼은 유교에는 사람이죽으면 혼백이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 사당에 모시고 백은 땅에묻고 무덤을 만드는 장례 풍습이 있어서 매장 문화는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장례 풍습이 알게 모르게 많이 바뀌고 있다. 전통적으로 우리의 장례는 집에서 치러졌다. 20여 년 전, 금세기 초만 해도 상갓집으로 문상을 가는 것이 상례였다. 그때만 해도 아파트로 문상가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당시 병원의 영안실은 거의 혐오시설에 가까웠다. - P326
설에 가까웠다. 그러다가 1994년 삼성의료원에 장례식장이 문을 연 것을 시작으로영안실은 장례식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결혼예식장처럼 그 이용이 일반화되었다. 요즘은 궁벽한 농촌에서도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일이 거의 없다. 이와 동시에 매장보다 화장이 더 선호되고 있고 개인 분묘가아니라 납골당에 안치하는 문화가 일반화되었다. 이로 인해 요즘 새로조성되는 공동묘지는 공원묘원이라는 이름으로 종래의 어두운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있다. 망우리공동묘지가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이름을 바꾸며 ‘공동묘지‘ 에서 벗어나 ‘공원‘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은 우리 장례 문화의 이런 변화와 궤를 같이한다. 국가유공자를 따로 모시는 현충원은 처음부터 공원으로 조성되었지만, 경기도 남양주 마석의 모란공원묘지에 민주열사 묘역이 따로 조성된 것은 우리 시대 사회상을 반영한 결과이다. - P326
오스트리아 빈의 중앙묘지(Wiener Zentralfriedhof)에는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심지어 주검을 찾지 못한 모차르트의 기념비까지 있다. 고암 이응노의 무덤이 있는 파리의 페르라셰즈 묘지는 소설가 발자크, 화가 쇠라, 대중가수 피아프 등이 묻혀 있는 명소다. 무덤에 있는 조각이나 비석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거기 그분들이 있기 때문에 찾아가는것이다. 망우역사문화공원에는 현재까지 조사된 것만 살펴봐도 역사문화 인물 50여 분의 묘소가 있다. 서양의 공동묘지처럼 요란한 돌 치장을 하는대신 양지바른 산자락에서 나무들의 호위를 받는다. 이 묘소들은 돌아가신 분들이 풀에 덮여 흙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성되었다는 점도 특색이다.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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