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는 이처럼 말년을 봉은사에서 지내며 대웅전 서편에 있는 판전에 기념비적 작품을 남겼다. 판전은 당대에 화엄 강의로 이름 높았던 남호(南湖) 영기 1820-72) 스님이 봉은사에 간경소(刊經所)를 차리고왕실 내탕금(판공비)과 대신들의 시주를 모아 『화엄경 소초본(疏鈔本)』80권 등을 목판으로 새기는 불사를 일으켜 마침내 3,175매의 목판으로완성하고, 이를 보관할 경판고로 지은 건물이다. - P229
이때 봉은사에 머물고 있던 추사는 병들고 쇠약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현판으로 걸 <판전(板殿)> 두 글자를 대자(大字)로 쓰고는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 病中)‘이라고 낙관했다. 즉 ‘71세 된 과천 사람이 병중에 쓰다‘라는 뜻이다. 이 판전의 현판 액틀에는 작은 글씨로 누군가가 써놓은 오래된 글씨가 하나 있었다. 내용인즉, 추사가 이 글씨를 쓰고 3일 뒤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판전이 건립된 때가 1856년 9월 말이었고 추사가 세상을떠난 날이 10월 10일이었으니 대략 들어맞는다. 이 <판전>은 추사의 절필(絶筆)인 것이다. 추사의 <판전〉 글씨를 보면 추사체의 졸()함이 극치에 달해 있다. 어린아이 글씨 같은 고졸한 멋이 우러나온다. 이쯤 되면 뛰어난 솜씨는어리숙해 보인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의 경지라고 할 것이다. - P230
30여 년 전의 일이다. 내가 추사의 일대기로 『완당평전』을 준비하면서 어느 날 틈을 내어 봉은사에 갔다. <판> 글씨를 보고 있자니 홀연히추사가 7세 때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글씨와 꼭 닮아 보였다. 참으로 신기한 느낌이었다. 그날 저녁 은사이신 동주 이용희 선생을 뵐 일이 있어오늘 본 판전 글씨가 추사의 어릴 때 글씨 같아 보였다고 말씀드렸더니동주 선생은 한참을 생각하시고 나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우리 아버님은 아흔여섯에 세상을 떠나셨어요. 본래 아버님은 경주와 대구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려서 경상도 사투리를 썼지만 젊어서 서울로 올라와 사시면서 경상도 말투는 다 없어지고 서울말을 하게 되어사람들은 아버지가 서울 사람인 줄로만 알았죠. 그런데 돌아가시던 그해 어느 날부터 갑자기 아버님이 경상도 사투리로 말하기 시작하셨어요. 그러고는 얼마 안 되어 운명하셨죠." 이승만 대통 - P231
이와 비슷한 또 하나의 전설적인 얘기가 하나 있다. 령은 유언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진실은 그렇지않다. 이승만은 하와이에 망명했을 당시 부인 프란체스카와 단둘이 쓸쓸히 지냈다. 두 분은 항시 영어로 대화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한국어를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운명할 때만큼은 침상에 누운 채로 프란체스카를 바라보며 힘들여 한국어로 유언을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란체스카 여사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끝내 그의 유언은 세상에 전해질 수 없었다. 이렇게 인생이 처음 모습으로 돌아가는가보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겠지. - P231
〈판전〉을 보고 일주문 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길 바로 아래에는 돌기와 담장을 낮게 두른 한옥이 한 채 보인다. 여기는 주지 스님의 거처로사용되고 있는 다래헌(茶來軒)이다. 한때 법정 스님은 여기에 기거했다. 법정의 대표적인 산문인 『무소유』에는 이 다래헌 때 이야기가 실려 있다.
나는 지난해(1968) 여름까지 난초 두 분(盆)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으로 옮겨왔을 때 어떤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준 것이다. (..…)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이른 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정했었다. 우리 다래헌을 찾아온 사람마다싱싱한 난을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 했다. (…) - P232
(그러나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해버린 것이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승가의 유행기遊行期)에도 나그네 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 못하고 말았다. (・・・)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분을 안겨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듯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有情)‘을 떠나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뜨게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理)이니까.
이것이 법정 스님이 무소유 사상을 펴는 계기가 되었다. - P233
다래헌을 곁에 두고 일주문을 향해 비탈길을 걸어 내려오다 잠시 발길을 멈추었다. 봉은사 경내를 다시 한번 사방으로 훑어보니 빈 하늘엔늠름하게 잘 자란 미송들이 곳곳에서 준수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저 앞쪽으로는 찻집 연회원 앞마당에 있는 수령 300년의 라 - P234
일락 노목 두 그루가 여전히 기품있는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한그루는분홍 꽃, 또 한 그루는 흰 꽃을 피우는데 부처님오신날 무렵 만개하면그 짙은 향기가 온 봉은사에 가득하다. 판전 옆에는 추사와 깊은 인연이 있는 백송 두 그루가 자못 싱싱히 자라고 있다. 어려서 추사는 서울 통의동 백송나무가 있는 동네에서 살았 - P235
고, 예산 추사고택의 김흥경(추사의 고조부 묘소 앞에는 추사가 북경에 다녀올 때 가져다 심은 백송나무(천연기념물 제106호)가 있다. 문화재청장 시절 나는 명진당이 봉은사에 한창 노송을 심는 것을 보고 문화재청에서 유적지에 심기 위해 기르고 있는 수령 30년 백송 두 그루를 보내주었다. 그 백송들이 고맙게도 잘 자라고 있다. 백송의 줄기는처음엔 초록빛을 띠다가 수령 50년을 넘기면 비로소 껍질을 벗고 흰빛을 띤다고 한다. 이제 5년만 더 지나면 아름다운 백송이 되겠거니 하는기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발길을 돌려 다시 법왕루 아래로 내려와 일주문을 향해 내려가자니부도밭 돌축대 위쪽에 구불구불하게 몸을 비틀고 자란 산사나무 노목새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봉은사에서 간행하는 잡지 판전」(현 월간 『명은판전』)에는 이 나무에서 유래한 ‘산사나무 아래서‘라는 고정지면이 있었다. 이 산사나무는 오랫동안 잡목 속에 갇혀 보이지 않았는데 부도밭을 정비하면서 환히 드러나게 되었다. 다른 나무들과 어울리며 자라는 바람에 이처럼 기굴한 모습이 되어 오히려 귀한 정원수인 양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 P236
신경림 선생의 <나무1 지리산에서> 라는 시가 절로 떠오른다.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나고 큰 나무는 제 치레 하느라 오히려 좋은 열매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한 군데쯤 부러졌거나 가지를 친 나무에 - P236
또는 못나고 볼품없이 자란 나무에 보다 실하고 단단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우쭐대며 웃자란 나무는 이웃 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햇빛과 바람을 독차지해서 동무 나무가 꽃피고 열매 맺는 것을 훼방한다는 것을 그래서 뽑거나 베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이 사는 일이 어찌 꼭 이와 같을까만
예부터 전하는 말대로 ‘절집의 큰 자산은 노스님과 노목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산사나무를 뒤로 하고 다시 일주문을 향해 걸어나갔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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