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시는 승인하고 구성하고 조직할 수있으며, 거부하고 파괴하고 해체할 수 있다. 그러나 거부는 승인의마지막 패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기 위해서다. 시는 제가 부르는 노래를 비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비웃음으로 다시 확인되는 것은노래의 존재다. 분석의식에서 떠날 수 없는 시는 제가 완전하고 절대적인 세계를 실현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시는(만)그 세계의 전문가다. 시는 순진하면서도 순진하지 않아서, 자유와평등을 완전하게 누리고 생명이 모욕받지 않는, 풍요로운 세계가실현된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 풍요로운 세계가 존재할 수없다고도 믿지 않는다. 불행의 끝까지 가게 하는, 어떤 불행의 말이라도 그 말을 시 되게 하는, 고양된 감정을 그 세계가 아니라면어디서 얻어올 것인가. 시는 현실에 내재하는 현실 아닌 것의 알레고리다. 그 점에서 시는 진보주의자다.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 외에 다른 어떤 말로 진보주의를 정의할 것인가, 사물을, 말을, 사람을 시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옳은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높이로 정신을 들어 올린다는 뜻이다.
시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시의 윤리다

내 생각이 시에서 벗어난 적은 없으며, 내 삶과 크고 작게 연결된 제반 문제를 시와 연결지어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다. 나는 늘 시에 대해서 말하고, 시와말을 하면서, 일상에 쫓기고 있는 한 마음의 평범한 상태가 어떻게시적 상태로 바뀌는가를 알려고 애썼다. 어떤 사람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기억을 기억 속으로 다시 불러오는 기술이 시라고 말했지만, 나에게 시는 말 저편에 있는 말을 지금 이 시간의 말 속으로끌어당기는 계기이다.
시는 모든 것에 대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끝까지 말하려 한다.
말의 이치가 부족하면 말의 박자만 가지고도 뜻을 전하고, 때로는이치도 박자도 부족한 말이 그 부족함을 드러내어 사람의 마음을움직인다. 능변의 재능을 지닌 사람이 시를 잘 쓰는 것은 그럴 만도 한 일이겠지만, 어눌하게 말을 잇다가 자주 입을 다무는 사람들 - P6

도 좋은 시를 쓴다. 물을 떠낸 자리에 다시 샘물이 고이듯 시가 수시로 찾아오는 사람도 있지만, 유장한 말이 되기에는 너무 기막힌생각이나 너무 복잡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마음의 특별한 상태에서 그 생각이 돌처럼 단단한 것이 되거나 공기처럼 숨 쉴 수 있는것이 되기를 기다린다. 시는 사람들이 보았다고 믿는 것을 명백하게 볼 수 있을 때까지 저를 지우고 다시 돋아나기를 반복하며, 진실한 것이건 아름다운 것이건 인간의 척도로 파악하기 어려운 것에까지 닿으려고 정진하는 시의 용기와 훈련은 우리가 상상했던것이 이 세상의 것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지극히 절망적인 순간에 그 절망을 말하면서까지도, 포기하지 않는다. 시는 포기하지 않음의 윤리이며 그 기술이다. 이 비평집에 어떤 통일성이 있다면,
그것은 저 시적 상태의 계기와 그 상태의 은총으로만 얻게 되는 정진의 용기를 어느 시에서나 발견하려고 애써온 도정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P7

바타유는 잘 알려진 그의 저서 ‘에로티즘』에서 에로티즘이 야기하는 존재론적 효과에 관해 이렇게 쓴다. "이내적 체험은 내가 추측으로는 느낄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원칙적으로 이 체힘은 그 밑바닥에서 어떤 종류의 ‘자아감(感)‘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을 나는 모르지 않는다. 이 기본 감정은 ‘자의식‘이 아니다.
자의식은 사물에 대한 의식의 결과로, 명백하게 인간에게만 주어진다. 그러나 자아감은 필연적으로 그 감정을 느끼는 자가 불연속성 속에 갇혀 고립을 느끼는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 P17

위에 솟아오를 "교향악"이바타유에게서도, 랭보에게서도, 이 내적 체험을 위해 우선 중요한 것은 육체이다. 그러나 바타유에게서는 자아의 고립감을 깨뜨리는 성적 환상의 관점에서나 생식을 통한 지속성 유지의 관점에서나 고찰해야 할 것은 오직 육체에 국한되지만, 시인인 랭보에게서는 육체적·감각적 착란"의 밑바탕에 말이 있다. "사색의 개화"
는 줄곧 말의 이치에 의지하고, 그 결과인 "미지"는 말에 의해 표현된다. 말은 육체의 연장일 뿐만 아니라 다른 육체,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생각되는 자‘의 육체이다. 서정의 주체에 관해 말하기위해서는 이 육체와 말에 대해 말해야 한다. - P20

의식의 실제 텍스트가 다를 뿐이다. 몸의 텍스트가다른 것일 수 없다고 믿는 주체의 환상이 있을 뿐이다. 랭보가 고문하려던 것은 사실 몸이 아니다. 감각을 착란하면서 그가 원하는 것은 의식 주체가 몸에서 읽으려는 읽은, 또는 읽었다고 믿는 텍스트를 거부하고 파괴하려는 것이다. 주체는 세계라고 부르는 거대한 몸에 둘러싸여 있으며, 한편으로는 제 시선으로 그 거대한 육체를 끌어안는다. 주체가 이 세계의 육체와 소통하는 것은 그에게 부속된 육체를 통해서이다. 내가 자판을 두들겨 글을 쓸 때, 내 주체는 손가락 끝으로 세계와 만난다. 오래된 자판은 내 손가락을 알아본다. 글을 쓸 때 내 주체는 이 손가락이며 자판이고, 자판이 놓여있는 책상이다. 책상까지 연결된 나의 몸은 또 다른 몸과 만난다.
보는 자이며 보이는 자인 주체는 자기 시선의 주체이면서, 타자의시선에 주제가 된다. 게다가 나와 손가락과 자판과 책상의 관계에서처럼 주체와 주제의 경계는 모호하다.  - P22

중요한 것은 감각적형상과 모험의 구체적 개별성이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은유의 기능과 환유의 기능일 텐데, 이때 환유는 그 기능의 관점에서만 본다면은유와 구별되는 다른 기능이 아니다. 그 동시적 기능 속에서 은유는 환유의 확장된 외연이며 환유는 은유의 구체적 실현이다. 전통적으로 보편적 아날로지의 상징체계에 종속되어 거기서 원관념을빌려와야 했던 은유는 이제 환유의 개별적 모험의 도움으로 천상의 일을 인간세계로 끌어내리고, 환유는 그 고립에서 벗어나 제 안에 묶여 있던 은유의 힘을 발휘하여 한 세상사의 보편적 구조에 접근한다. 문학적 글쓰기에서 주체와 타자가 역전하는 것도 이때이다. 은유와 환유의 동시적 기능화는 보편적 표상으로서의 주체와구체적으로 운동하는 타자의 대질이며 그 상호 간섭이자 자리바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대질과 간섭, 이 자리바꿈보다 더 정치적인 것은 없다. 그것이야말로 ‘삶을 바꾸는‘ 일이며, 문학적 자율성의 원칙이 거기 있다. - P47

우리가 역사를 믿는다면, 아니 최소한의 변화라도 변화의 가능성을 믿는다면, 저 폐쇄된 자율성이 문학의 목표일 수는 없다. 자율성은 목표의 원칙이 아니라 방법의 원칙이다. 최초의 의도에 따른 문학의 자율성은 낡고 억압적인 관념을 전도하는 방법이며, 세속과 타협하지 않는 방법이며, 우리 존재의 집인 언어에 대해 가장거룩한 개념을 돌출하려는 방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실을말하기 위한 비범한 방법이다. 내가 어떤 것을 진실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그렇게 말하기로 결정하는 이유에 대해 내가 자유로워야한다. 무엇에 대한 진실은 무엇에 대한 자유이다. 문학은 자율성으로 그 자유를 확보한다. 그래서 문학의 자율성은 그 이름으로가 아니라 그 실천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실천한 것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실천하려는 것에 의해서도, 실천하려 했으나 실패한 것에 의해서도 평가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 고립과 증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긍지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 P49

이 일이 쉽지 않았다는것은 우리의 현대시사가 말해준다. 젊은 시인들이 변방의식에서벗어나게 된 것은 이 땅이 행복하고 풍요로워졌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 불행이 우리의 불행이 아니라 이 다국적 자본의 시대에어떤 사람도 피할 수 없는 불행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며, 그 불행을 훌륭하게 표현하려는 용기를 지녔기 때문이다. ‘무분별한 서구편향‘ 따위의 말은 이제 통용될 수 없으며, 해체니 일탈이니 하는무의미한 말로 그들의 작업이 환원될 수도 없다. 좋은 시는 어느땅 어느 곳에서나 쓰이고 있지만, 이 풍성한 동력을 편향되게 휩쓸어갈 물결은 어디에도 없다. 아니 어떤 물결도 벌써 우리의 물결이다. 젊은 시인들이 두려워하기보다는 안타까워해야 할 것은 어두운 안개 속에서 정처 없이 쏠리는 뒷공론들뿐이다. 잘 알지도 못하고 내뱉는 말들은 얼마나 위험한가. 내가 시 세 편을 거의 췌언에가깝게 분석한 것도 그 때문이다. - P68

문학은 언어를 도구로 사용할 뿐만 아니라 언어에 모든 기대를 걸고 자주 언어를 목표로 삼기까지 하기에 어떤 예술 장르보다도 더 이성적이다. 문학은 가진 바 수단을 다하여 미지의 것을 파헤쳐 그 현상 하나하나를 말로 표현하려고 애쓰며, 혼란을 정리하고 분석하여 거기에 언어적 질서를 부여한다. 그러나 동시에 안다고 생각해왔던 것이 실제로는 모르는 것임을 폭로하고, 그래서 질서를 혼란으로 전복하는 것도 문학의 일이다. 오만한 성급한질서가 반성하지 않는 현실의 우둔함을 더욱 두텁게 할 때, 자각된 모름과 품 넓은 혼란이 명석성에 이르는 길을 더욱 넓힐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문학의 가장 효과적인 무기인 이미지도 그 가치는 양면적이다. 이미지는 한편으로 혼란과 미지에 언어의 초벌 그림을 그려주어 우리를 안심시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친근한 얼굴을 낯선 얼굴로 바꿔놓아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미지가 가장 아름다운 것도 그때이다. - P71

사실, 말이 사물을 유연하면서도 명확하고 깨끗하게 지시하는 일에서 늘 실패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순수 언어에 대한 시의 소망은 저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부정하는 언어에 이른다. 그러나 이 부정은 사물의 깊은 속내를 말로다 드러낼 수 있을 때까지, 현실 속에 ‘숨은 신들‘이 (다시 말해서타자들이) 저마다 제 말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고쳐 말하고 다시고쳐 말하려는 노력과 그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부정의 언어, 곧시의 언어는 늘 다시 말하는 언어이며, 따라서 끝나지 않는 언어이다. 모든 주체가 타자가 되고, 그 모든 타자가 또다시 주체가 된다고 믿는 희망이 이 언어의 기획 속에 들어 있다. 시는 꿈과 현실이,
상상할 수 있는 것과 상상할 수 없는 것이, 작은 나와 큰 나가, 비루한 사물과 너그러운 말이, 불모의 현실과 생산하는 현실이 갈등하기를 그치는 자리가 우리의 정신 속에 있다고 믿는다. 시의 길이거기 있다기보다는 시가 그 길을 믿는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 P75

어떤 언어의 찌꺼기도 없이 순결하게 태어날 음악이태로나마 존재한다고 믿게 하는 것도, 어떤 초월적인 힘의 은총이나 개입이 아니라, 역시 인간의 실천이다. 순수시가 지향하는 침묵은 도달할 수 없는 것을 괄호 속에 묶어두고 관상하려는 조치가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 도달할 수 없는 바로 그것이 거기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극진한 노력과 항상 연결되어 있음을 끝없이 확인하는언어적 노력이다. 이 점에서, 순수시가 시의 이상일 수는 없어도,
순수시의 이상이 시의 이상이자 모든 윤리적 기획의 이상인 것은확실하다.
시는 포기하지 않는 법을 가르치고 시범한다. 탈출과 해방의 상승의지와 그 강도에 비례하여 더욱 강화되는 현실 분석의 악마적의식이 현실에 내재하는 초극의 가능성에서 서로 만날 때, 아직 걷히지 않은 저 베일이 존재하는 것의 시적 알레고리를 형성한다. 현실이 또 하나의 현실과 겹쳐 나타나는 이 알레고리의 공간을 어떤방식으로든 포함하지 않는 시는 없다. - P83

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시는 승인하고 구성하고 조직할 수있으며, 거부하고 파괴하고 해체할 수 있다. 그러나 거부는 승인의마지막 패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기 위해서다. 시는 제가 부르는 노래를 비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비웃음으로 다시 확인되는 것은노래의 존재다. 분석의식에서 떠날 수 없는 시는 제가 완전하고 절대적인 세계를 실현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시는(만)그 세계의 전문가다. 시는 순진하면서도 순진하지 않아서, 자유와평등을 완전하게 누리고 생명이 모욕받지 않는, 풍요로운 세계가실현된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 풍요로운 세계가 존재할 수없다고도 믿지 않는다. 불행의 끝까지 가게 하는, 어떤 불행의 말이라도 그 말을 시 되게 하는, 고양된 감정을 그 세계가 아니라면어디서 얻어올 것인가. 시는 현실에 내재하는 현실 아닌 것의 알레고리다. 그 점에서 시는 진보주의자다.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 외에 다른 어떤 말로 진보주의를 정의할 것인가, 사물을, 말을, 사람을 시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옳은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높이로 정신을 들어 올린다는 뜻이다.
시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시의 윤리다. - P85

한 언어가 다른 언어와 대면할 때 그 말의 결을 깨뜨리는 균열을경험하게 되지만,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도 함께 만나게 된다. 우리의 짧은 논의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모국어 속의 외국어성‘을정의한다면, 그것은 말이 그 일상성에서 벗어나려는 내재적 성격이라고 할 수 있으며, 모국어로부터 외국어성을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이란 것은 말이 제시하는 사실들 사이의 관계맥락을 다양하고 새롭게 해석해낼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하겠다. 이 성격과 능력이 두 언어 사이의 번역을 가능하게 하고, 번역에 시적 성격을 부여한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보면, 우리의 심층의식과 외부 사물이 깊이 조응하는 자리에 모국어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 조응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탈과 흠결에 크게 의지하는 번역은 기형도의 사랑없는 글쓰기와 닮은 점이 있다는 점도 덧붙여 말해야겠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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