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은 겪은 것이 아니다. 선택적인 기억이다. 경험은 철저히정치적인 것이다. 무엇을 잊고, 무엇을 의미화하는가, 내가 겪은 일은 어떤 것인가. 경험은 저절로 기억되지 않는다. 자신의경험을 인식할 수 있는 시각이 생길 때 비로소 ‘떠오르고‘ 인지되고 해석된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에게는 자기 경험을 바로 볼 수 있는 렌즈가 주어지지 않는다. 남성의 언어가 여성의삶을 규정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자기 경험을 믿지 못한다. 자기가 겪은 일을 남 이야기하듯 말한다. 나도 그랬다. 가부장제는 모든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한다. - P102
장애인, 이주 노동자, 동성애자 ‘문제‘, 심지어 저출산도 무관심할지언정 사소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여성‘이 맞고 강간당하고 죽으니까 ‘사소한 것이다. 사소하지 않다는 말에는이미 사소하다는 인식이 포함되어 있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사소하지 않다는 것이 곧 중대하다는 뜻은 아니다. 아예 ‘사소‘라는 말의 궤도를 벗어나야 한다. - P104
지난 30년 동안 남성 중심 사회에서 이 공간을 위해 노력한수많은 여성들을 존경한다. 우리는 ‘노벨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우리는 살아남았다. 이 책에 실린 글은 살아남은 이들의 궤적이고, 우리가 살아갈 방향이다. - P107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살아 있는 전설 샬럿 번치는 아내 폭력이 그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역설적으로 "여자가 가정에서 구타당하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아내 폭력처럼 가사 노동과 육아를 여성의 일로 간주하는 사고가 거의 ‘진리‘처럼 통용되고 있다. 문제는 가정 폭력과 가사 노동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사태의 심각성에 비해 너무나 낮고 무지하다는 것이다. ‘집밖의변화 속도와 집 안의 변화 속도의 차이‘가 이만큼 큰 사회 문제가또 있을까? - P107
20세기에 출간된 책 중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과 베티 프리던의 《여성성의 신화》만큼 찬사와 논쟁의 대상이된 텍스트도 드물 것이다. 특히 <여성성의 신화》는 이론 자체에서 여전히 내파와 여진. 확장과 변태(變態)를 거듭하고 있는 자유주의 사상의 특징을 잘보여준다는 점에서 영원한 필독서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알고 있는 근대의 거의 모든 지식체계가 자유주의의 자장場)에서 자유롭지않기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이 책을 읽지 않으면 남녀를 불문하고 자신과 사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이해할 수 없다. - P115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문제는 미국 남성이나 한국 남성이나별 차이 없음을 알게 된 것이 반갑다면 반가운 일이었다. 그리고 아직 한국 사회에서 저자와 같은 여성 지식인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사이보그 선언문(A Cyborg Manifesto)‘으로 근대 철학에 인식론적 전환을 가져온 영장류 생물학자 도나 해러웨이는 1970년대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동물 행동을 기술하는 과학자의 언어는 객관적이지 않다는 주장으로 당시 학계에서 추방되었다. 자연과학의 언어는 그 사회의 정치, 사회문화적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중립적인 학문은 없다는 주장이생물학을 모욕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해러웨이는 세계적인석학이지만, 자연과학자들의 중립적, 보편적 주체라는 자기 환상은 여전하다. - P123
겸손도 아니고 두려움 때문도 아니다. 나는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페미니스트‘가 뭐하는 사람인지 잘 모른다. 그런데도 페미니즘 책읽기와 쓰기를 계속하는 가장 큰 이유는 쾌락 때문이다. 정의감, 타인을 돕는다, 세상을 바꾼다…………. 만일 이런 일이 있다면이는 우연일 것이다. 어쨌든 단언하건대 여성주의만이 주는 즐거움이 있다. 그것도 ‘여성스러운‘ 행복감(joy)이 아니라 ‘남성적인 쾌감(pleasure)이다. 지적인 쾌락, 깨닫는 쾌락(열반‘!), 분노와 분열과 고통이주는 쾌락, ‘나쁜 사람‘을 골탕 먹이는 쾌락, ‘대세‘에않고 비웃으며 무시할 수 있는 힘의 느낌…. - P136
나는 "페미니즘은 무능력한 여자들의 투정"이라고 생각하는 ‘명예 남성‘으로 살다가 졸업했다. 그런데 완전히 우연한 제기로 졸업하자마자 곧장 여성 단체에서 일하게 되었다. 전혀 관심이 없던 분야에서 새로운 20대가 시작되었다. 거기서 만난 가정 폭력, 성폭력 현실은 나를 완전히 ‘전향시켰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페미니즘을 접하게 된 것은 서른 살에 여성학과 대학원에 입학하면서부터였고 그뒤로 20여년이 흘렀다. 여성 단체에상근한 기간까지 포함하면 20여 년 넘게 이 분야에서 지낸 셈이다. 그런데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 말하는(275쪽) 의미에서도 아니고, 타인의 시선 때문에 숨기려는 것도 아니다. 나의 착한 여자 콤플렉스, 신데렐라 콤플렉스, 아버지 콤플렉스는 거의 중독에 가까우며 매일 이 문제와 사투를 벌이며 분열 속에 살고 있다. - P146
하지만 나는 페미니즘을 ‘열심히 공부한다‘. 내가 아는 한 페미니즘은 인류가 만들어낸 그 어떤 지식보다 수월(越)하다. 정치적, 이론적, 학문적으로 다른 어떤 언설보다 세련되고 앞서 있으며 상상력조차 뛰어넘는 참신한 문제의식과 질문을 던지는 사상 체계다. 지식이 지속적으로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행위라면, 또 지식이 윤리적이어야 한다면, 그리고 지식이 사유 능력을 의미한다면 최소한 페미니즘을 따라올 지식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페미니즘은 지난 모든 언어에 대한 의문과 개입에서 시작됐으며, - P146
캐럴 길리건과 주디스 버틀러는 자주 오해받는 페미니스트사상가들인데, 이들의 사상을 이렇게 쉽고 분별력 있게 ‘정리한‘ 저자의 지적 역량과 글쓰기 능력이 놀랍다. 길리건은 여성성의 재평가보다는 돌봄 노동의 언어화와 여성적 윤리가 공적영역의 규범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단순한 모성찬양이 아니다. 길리건은 자신의 논의가 남성다움, 여성다움운운하는 젠더 문제가 아니라고("This is not gender issue.") 책서두에 못 박았는데도 그녀를 향한 페미니즘 진영 내부의 비판 - P148
버틀러가 주장한 것은 여성 범주의 정치학과 그 구성, 효과에관한 것이다. 여성 운동이 반드시 같은 여성 정체성으로부터 시작할 필요는 없다는 것인데, 이 논의 역시 지금까지도 오해에서자유롭지 못하다. 《젠더 트러블》의 부제는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보‘이다.) ‘남자‘와 ‘여자‘라는 우리의 개념은 원본 없는 복사본에 불과하지만(395쪽, 주디스 버틀러 재인용) 여성이라는 범주의수행 가능성을 확장하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401쪽). 또한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 다루고 있는 뤼스 이리가레이, 엘렌 식수, 자크 라캉의 이론은 구조주의나 영미 페미니즘에 익숙한 한국 독자들에게는 쉽지 않는 내용이다. 우리에게어려운, 아니 익숙지 않은 일부 페미니즘 이론을 명료하게 설명하는 저자의 뛰어난 능력은 기본적으로 지적 감수성에 기인한것이겠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에 대한 관찰력이 남다른 ‘예술가‘ 만의 특권이기도 하다. 이 점이 이 책의 실질적인 유용성 중 하나다. - P149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러므로 이 책은 ‘그들의‘ 교과서임에 분명하고, 저자 또한 이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이 세상에는 현장(local)에 따라 수많은 페미니즘이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사회학이나 물리학에 한 가지 입장만 있겠는가? 그런데 왜유독 페미니즘만 ‘한 가지‘로 인식되는가? 이는 마치 ‘유색 인종대 백색 인종‘의 패러다임과 비슷하다. 주체는 개별성으로 인식되지만 타자는 집단으로 지칭된다. 이 책에서도 다루고 있지만같은 페미니즘이라도 포르노, 성매매, 가족, 출산, 모성 등에 서로 상반된 입장을 취하며, 1970년대 미국의 포르노 금지 법안제정 운동 때 전투는 남녀가 아니라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급진주의 페미니즘 사이에서 벌어졌고 자유주의의 승리로 끝났다. 페미니즘을 ‘하나‘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성차별이다. 나는평소 숱한 사람이 사상가들을 언급할 때 마르크스, 프로이트, 푸코, 루소.... 그리고 페미니스트 식으로 나열하는 데 분노한다. 남성들은 ‘개인‘으로 호명되는데, 어째서 페미니즘은 한 덩어리로 간주되는가? 이는 마르크스 한 사람과 모든 여성이라는식의 발상이다. 물론 이러한 경계의 정치학은 페미니즘 내부에도 있다. - P150
내가 생각하는 지식으로서 페미니즘의 가장 큰 매력은 나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준다는 점이지만, 페미니즘의 정수는 스스로 내파와 파생을 거듭하는 지식이라는 데 있다. 이 변화는 멈출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여성의 현실, 그리고 현실의 운동이 끊임없이 언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해 모든 진보적 사상이 그러하다. 지식은 현실의 필요에 의한것이지 유행을 타는 공부가 아니다. ‘한물가거나‘ ‘이제는 필요없는‘ 페미니스트는 있을지 몰라도 페미니즘 자체가 그럴 일은절대 없다. 이 과정이 진화다. 아직도 혁명과 개량, 진화와 일상을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다면 어쩔 수 없다. - P151
거듭 강조하건대 알선업자들이 다루는 것은 상품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강제냐 아니냐 혹은 협의의 강제성이냐 광의의 강제성이냐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문제는 강제성 여부라기보다는 전쟁에서의 철저한 성별 분업에 있는 것이 아닐까? 강제성 담론은 여성 인권의 시각에서 보면 문제의 본질을 비껴가게 만드는 ‘맥거핀‘이다. 왜 남성의 성은 여성을 위해 강제든 자발이든 봉사하지 않는가? 왜 국가든 알선업자든 남성의 성을매매하는 제도는 만들지 않는가? 이 질문이 황당한가? 자발적 ‘담요 부대‘든 납치든 여성의 성을 종군(從軍)의 상수(常數)로놓는 전제부터 문제시하는 논의를 시작하자. - P171
《대화》를 읽고 리영희를 한국 최초의 평화학자라고 생각했다. 그의 삶은 인생의 매 순간을 새롭게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누구나 몰두해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다. 이것은 그가 뛰어난비판적 지식인인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는 유치환의 시에 등장하는 ‘바람‘처럼 평생을 쉼 없이 뉘우치고 탄식하고 회의하고헤맸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에는 정박의 흔적이 없다. 평화는 변화이다. 폭력의 반대말은 평화라기보다는 ‘대화‘인데, 여기서 대화는 비폭력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 관계의 격렬한(violent) 변화를 뜻한다. ‘주례사 비평‘을 피하기 위한 비판을위한 비판, 경의의 헌사 모두 대화 단절의 언어이며 텍스트를외롭게 만든다. - P175
인간은 무지하다. 그러나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어쩔 수 없이벌어지는 일은 없다. 이 책은 불가피하게 희생된 피해자에게 인도적 차원의 사과와 용서를 구하는 책이 아니다. 그 반대 입장에서 논쟁이 시작되어야 한다. 역사가 전진한다는 것을 믿지 않지만, 이런 책의 존재는 항상 그렇지만은 않다는 위로를 준다. 알려졌다시피 베트남은 한중일과 더불어 세계 4대 한자 문화권국가이다. 중국과 베트남 관계는 국제정치학 교재에 모델로 등장하는 강대국 - 약소국 평화 지속 관계의 모범이다. 베트남의지혜가 낳은 결과다. 한미 관계는 비정상적 동맹의 모델로서 국제정치학의 ‘시조‘인 한스 모겐소가 쓴 책 《국가 간의 정치》에서 등장한다. 우리는 베트남에게서 배울 것이 많다 - P189
팬데믹의 원인은 ‘돌봄 노동‘ (살림)을 비하하고 ‘자연 파괴‘ (죽임)를 추구해 온 인간의 경제 활동이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이팬데믹의 대안으로 돌봄 윤리에 관심을 보이지만, 이런 흐름은지금 여기의 ‘여성 해방‘과는 거리가 멀다. 팬데믹의 결과로 또다시 여성들이 강도 높은 보살핌 노동을 도맡고 있기 때문이다. 돌봄 노동의 내용은 그 자체로도 재평가해야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은 돌봄이 공적 영역의 가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 그 자체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현재 인류가 욕망하는 주된 가치인 물질적 풍요와 경쟁과 승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고, 많은 가치 중에 ‘돌봄‘도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돌봄노동의 의미와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이해가 필요하고 돌봄노동에 대한 인식론적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 P203
많이 ‘배울수록 좋은 것과 많이 알수록 좋은 것은 다르다. 인간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몰라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모르는 방법이 작동하는 기제는 이데올로기, 개인의 방어 심리, 정보 통제와 같은 통치 기술, 몰라도 되는 권력, 회피 등 여러가지가 있다. 지금 우리 앞의 진실은 이렇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2022년까지는 마스크를 써야 하며, 코로나19가 ‘해결‘된다해도 다른 전염병이 찾아오고 그 주기는 사스, 메르스, 코로나 - P204
팬데믹 시대에 국가의 역할, 개인의 자유, 경제 활동, 봉쇄와방역의 조건, 극도로 성별화되고 계급화된 ‘집‘의 의미, 정치 지도자나 자본가들이 ‘결정할 수밖에 없는‘ 현재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진단, 인류의 미래에 대한 구상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근본적인 사유의 전환을 요청하려면 각자가 자기의 공간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광범위하게 기록하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 구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추상적인 논의로는 이 시대를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우리는 밤마다 수다를 떨었고, 나는 매일 일기를 썼다》들이 나와야 한다. - P209
부르주아 여성인 시몬 드 보부아르는 위 세 여성과 또 다른삶을 살았다. 제국주의 프랑스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실존주의 페미니즘 이론을 정립했고, 《제2의 성》은 지금도 여성학입문서이다. 또한 그녀는 《제2의 성》 분량의 ‘연애 편지‘ (사르트르에게 쓴 것이 아니다)를 썼다. 나는 이들의 삶을 비평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여성들의 삶을다르게 만들었던 20세기 역사. 서구의 근대성과 자본의 발달은식민 지배로 가능했고, 그 ‘덕분에‘ 스메들리나 보부아르는 우리의 선배들처럼 독립 운동이나 ‘건국‘에 참여하기를 요구받지도 않았고 친일이니 부역이니 하는 역사적 짐 없이 ‘개인적 삶을 살 수 있었다. 미국이나 프랑스 여성은 빈부와 상관없이 자기 실현으로서 페미니즘이 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자기 실현이페미니즘의 본령은 아니다.) - P224
남성성이 자국 여성과의 관계, 가족 내에서 발현되기보다 남성들끼리의 경쟁 논리가 되고 자신의 ‘대의‘에 여성을 동원하는것. 이것을 패권적(헤게모니적) 남성성과는 대비되는 식민지 남성성(colonial masculinity)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여성은 동등한 시민이 아니라 남성 사회의 ‘자원‘이 된다. 이 책은가부장제 사회의 근본 구조인 남성들 간의 투쟁에 동원되는 여성이 스스로 그 위치성을 거부하고 시민으로서 거듭나는 이야기로 읽혀야 한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가아니라 한국 사회 남성성에 대한 질문으로 보아야 한다.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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