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글이 (그 글을 쓴 당시의) 나다." 사람과 글은 일치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지나친 개작이나 윤문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욕망일 뿐이다. 얼마 전 TV에서 캐럴 리드감독의 1949년작 영화 <제3의 사나이>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보았는데, 진행자가 "70년이 지난 지금 봐도 걸작이다."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오손 웰스의연기!) 이런 방식의 상찬은 흔하다. 문학이든 영화든 음악, 미술모두 "시공간을 초월한 걸작, 클래식". - P11

일반적으로 소설가는 ‘감동적인 재미있는 스토리텔러(이야기꾼)‘로 여겨진다. 하지만 나는 소설가는 사상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학위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평가 요소는, 기존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질문, 문제 제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역시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실패하기 쉬운 도전이다. 새로운 질문은 새로운 연구 방법과글쓰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문제의식에 맞는 형식미를 갖추기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의식 자체가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 - P12

이 책은 ‘글쓰기 이론‘의 맥락에서, 글을 쓰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내게 글쓰기는 삶이자 생계이다. 계속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이리저리 서가를 기웃거리고 혼란스러워하다가 깨달은 사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앎(knowledge)의 목표와 - P13

방법은 같다는 것이다. 거칠게 말해, 플라톤과 주디스 버틀러는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앎의 이유와 목표는 자신을 우리 자신을 아는 데 있다. "주제 파악을 하라, 너 자신을 알라."라는의미라기보다는 행위는 곧 행위자라는 뜻이다. 행위자(나)를알려면 자기 행위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내가 아는 지식을, 내가 쓴 글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는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는 ‘나‘를 알기 힘들다. 이 질문은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탐구로 바뀌어야 한다. - P14

내가 알고 싶은 나, 내가 추구하는 나는 협상과 성찰의 산물이지 외부의 규정이어서는 안 되므로/아니므로 우리는 늘 생각의 긴장을 놓을 수 없다. 글은 그 과정의 산물이다. - P14

다만, 여성주의와 글쓰기의 관계에 대해서는 잠깐 언급하고 싶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성주의만큼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학문은 드물다. 아니, 글쓰기와 여성학의 인식론, 방법론은 거의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문학은 언어의 역사이고, 여성주의는 언어의 역사가 형성된 과정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 - P15

다. 언어를 자명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개입된 권력 관계를 질문한다면, 기존 여성주의를 포함해 세상의 모든 언어는 상대화와 붕괴(의미의 다변화)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여성주의와 글쓰기 공부는 별개의실천이 될 수 없다. 여성주의는 하나의 분과 학문(국문학, 영문학・・・・・・)이 아니라 평화학이나 탈식민주의나 생태학처럼 일종의인식론이다. - P16

두 번째 인용구는 스무 살에 최초의 공상 과학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의 어머니이자 그를 출산하다 서른여덟살에 산욕열로 사망한 영국의 근대 사상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년)의 목소리다. 인쇄술이 발달하고 여성 저자와독자가 생길 무렵에 활동했던 그의 처지와 2백여 년이 지난 지금 나의 처지가 다르지 않음에 절망과 슬픔을 지나 ‘안도‘했다.
나는 송고할 때쯤 스스로에 대한 비참함으로 마음속 땅으로 꺼졌다가 책상에 얼굴을 박고 머리를 흔드는 버릇이 있다. 편집자에게 늘 하는 말도 "시간에 쫓겨 완성도가 부족한 글을 보내 죄 - P16

송합니다."이다.
근대 페미니즘의 선구자, 울스턴크래프트의 걸작도 생계 수단으로 탄생했다는 사실이 나를 위로한다. 《여성의 권리 옹호》도 작가 자신의 말대로 "상업적 목적으로 ‘부실하게 나온 책"
이라니! 겸손의 뜻도 있겠지만 절박성이 느껴진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 독립 연구자‘로서 매문(文)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나는 매일매일 글의 수위를 놓고 나 자신과 사회와 협상을 거듭한다. 그렇다고 내 생각이 모두 ‘훌륭한 것도 아니고 ‘좋은‘ 사유가 모두 글로 표현되는 것도 아니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이야기는 나의 스트레스와 부끄러움에 ‘역사성‘을 부여했다. 나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 용기를내리라. 물러서지 않고 기다리리라.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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