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닫혔었다

문이 탁 하고 닫혔었다
뒤편에서 점점 어두워지는 세계
그 안으로 급하게 빨려들었다

(왜 그 세계는 내 등 뒤에 있었을까?)

잠이 시간이었습니다
모릅니다
그간의 나와
저간의 나와
혹은 저 너머의 나와

p75


시인의 말

오랜만에 詩集을 펴낸다.
오랫동안 아팠다.
이제 비로소 깨어나는 기분이다.

2010년 1월최승자

쓸쓸해서 머나먼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 동방삭이 살던 세계
먼 데 갔다 이리 오는 세계
짬이 나면 다시 가보는 세계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
그 세계 속에서 노자가 살았고
장자가 살았고 예수가 살았고
오늘도 비 내리고 눈 내리고
먼 세계 이 세계

(저기 기독교가 지나가고
불교가 지나가고
도가가 지나간다)

쓸쓸해서 머나먼 이야기올시다.
- P7

하얀 낮달

하얀 낮달,
푸른 붕새
멀고 먼 길
가다 가다 지치는 하늘

푸른 붕새 몇 점 띄워놓고
다리 절룩이며 가는 하늘 - P9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아도 없는 것은 아니다
나무들 사이에 풀이 있듯
숲 사이에 오솔길이 있듯

중요한 것은 삶이었다
죽음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 거꾸로도 참이었다는 것이다.

원론과 원론 사이에서
야구방망이질 핑퐁질을 해대면서
중요한 것은 죽음도 삶도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삶 뒤에 또 삶이 있다는 것이었다
죽음 뒤에 또 죽음이 있다는 것이었다.
- P45

다른 세상

한 육체였었으나
이미 한 생각이었으므로

아무 일도 없이
학이 날고 푸른 새가 지고
하염없는 바다와 바다 사이에서
(아, 나는 너무 오래 잤을까)
학이 날고 푸른 새가 지고
어떻게 된 것일까

이 다른 것들은 어디에서 오나
다른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
이미 있었으나, 없었으나, 다시 있는
만지고 또 만져본 세상, 그러나
다시 있는, 언제나 천억 년 다시 있을,
바다빛 하늘빛처럼 푸르른
다른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 - P46

깊고 고요하다

검은 활시위
검은 화살

깊고 고요하다

내가 닫아버렸던 고통의 門을
누가 다시 열어놓았을까

가만히 스쳐만 가시라
잠의 꿈결에서인 듯
꿈의 잠결에서인 듯 - P57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사막이 있었다

그 사막 한가운데서 나 혼자였었다
하늘 위로 바람이 불어가고
나는 배고팠고 슬펐다

어디선가 한 강물이 흘러갔고
(그러나 바다는 넘치지 않았고)

어디선가 한 하늘이 흘러갔고
(그러나 시간은 멈추지 않았고)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사막이 있었다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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