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

세번째 시집을 펴낸다. 낙엽 지는 가을이나
겨울이 아니라 꽃 피는 오월에 시집을 낸다는사실이 왠지 기분좋다. 그 동안, 본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내 시의 소재가 되어주었던 모든 분들께, 그리고 나의 시집들을 만드느라 애쓰신 모든 분들께, 한꺼번에 감사드리자.

1989년 5월 최승자


문득 시가 그리워

문득 詩가 그리워
글씨를 써봅니다.
글씨를 읽어 봅니다.

문득 내 얼굴을 확인하고 싶어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어 봅니다.

언젠가 잘라버린 내 팔,
베어진 그 부위의 기억이 소름돋습니다.
고통처럼 행복처럼 소름돋습니다. .

문득 詩가 그리워
글씨를 써봅니다.
글씨를 읽어봅니다.

언젠가 잘려져나간 내 팔,
혼자서 헤맬 내 팔의 기억이
악몽처럼 다시 일어섭니다.
- P11

자칭 시

그러면 다시 말해볼까.
삶에 관하여, 삶의 풍경에 관하여,
주리를 틀 시대에 관하여.
아니 아니, 잘못하면 자칭 詩가 쏟아질 것 같아
나는 모든 틈을 잠그고
나 자신을 잠근다.
(詩여 모가지여,
가늘고도 모진 詩의 모가지여)
그러나 비틀어 잠가도, 새어나온다.
썩은 물처럼,
송장이 썩어나오는 물처럼.

내 삶의 썩은 즙,
한잔 드시겠습니까?
(극소량의 詩를 토해내고 싶어하는
귀신이 내 속에서 살고 있다. ) - P12

詩 혹은 길 닦기

그래, 나는 용감하게,
또 꺾일지도 모를 그런 생각에 도달한다.
詩는 그나마 길이다.
아직 열리지 않은,
내가 닦아나가야 할 길이다.
아니 길 닦기이다.
내가 닦아나가 다른 길들과
만나야 할 길 닦기이다.

길을 만들며,
길의 흔적을 남기며,
이 길이 다른 누구의 길과 만나길 바라며,
이 길이 너무나 멀리
혼자 나가는 길이 아니길 바라며,
누군가 섭섭지 않을 만큼만
가까이 따라와주길 바라며.
- P13

그 거

술은 끊어도 담배는 못 끊겠는 거, 그거.
담배는 끊어도 커피는 못 끊겠는 거, 그거.
커피는 끊어도 목숨은 못 끊겠는 거, 그거.

믿지 못하는 사이
두 발이 푹푹 빠져들어 간다.
빠져들어 간다는 것까지도
믿지 못하는 사이로
두 발은 더욱 습한 곳으로
푹푹 빠져 들어 간다.

(나의 이성과 감정은 언제나
나의 현실보다 뒤지는 거, 그거.) - P65

노을을 보며

살아 있는 나날의, 소금에
,절여지는 취기 같은 저 갈증,
누군가의 망막에 증기처럼 번져오르는 통증.
하지만 그래도 난 아냐, 난 못 해.

전라도인지 조지아인지
어디서 또 아픈 일몰이 시작되고

봐, 봐, 저 붉은 노을 좀 봐.
죽을동 살동 온 유리창에 피칠을 하며
누군가 나 대신 죽어가고 있잖아.

심혈을 기울여 해가 지고
심혈을 기울여 한 사람이 죽고
심혈을 기울여 지구가 돈다. 돌 때,
나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세계를 내다보고

내 할 일은 그대 마저 다 죽고 난 뒤

흰 장갑 끼고 - P70

싸늘하게 빛나며
그대의 죽음에 비로소 입장하는 것뿐.
- P71

오월

한 개의 머리를 치면
두 개의 성난 머리가
돋아나는 히드라의 달,
오월은 피참한 달.

언제나 아이들은
세계의 상처 위에서 죽으며
언제나 아이들은
세계의 상처를 먹고 자라며,
오월의 일기 예보는 또다시,
어쩔 수가 없다고 말하고,

이 세상 아직도
잎 반 꽃반
봄은 늘 아름답지만

이 세상 아직도
언 강 먼 땅,
以下同文의
깊은 밤.
- P72

당대의 당대의

내가 믿지 않았던, 내가 인정하지 않았던
그 세월 위에 그래도 녹이 슬고,
또 싹이 트느니

이제 내가 불러도 대답하지 않을 當代여

당신의 외로움이 날 불러냈나,
내 그리움이 당신을 불러냈나,
외로움과 그리움이 만나
찬란하구나,
이 밤의 숱한 슬픔의 천적들이 만나
다정히 꼬리를 깨물고 깨물리우는
이 밤 슬픔의 불꽃놀이여,
當代의 當代의 슬픔의 집합들이여.
- P73

겨울 들판에서

굴복할 때 사람은 가장 아름다워 -
가장 강한 강함이든
가장 약한 약함이든
그것에 굴복할 때
사랑은 가장 아름다워 -

슬픔이여 이 논과 숲
이 낮은 산하에
내가 낮게 더 낮게 가라앉느니,

거두어다오
한평생의 열에 들떴던 이마를,

감기워다오.
보지 말았어야 했을
모든 것을 보아온 이 사악한 두 눈을.

(이제 누가 새로이 건너기 시작하리라.
저 들판, 오래도록, 사람아가로지르지 못했던 저 들판을.
- P80

그리고 너는 아직 햇빛이 허락되는 동안
너의 젖은 이승의 그림자를 말려야만 한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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