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한 순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집이 있을 뿐,

이제 이를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도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꽃 
병 



아 
다 

자서

이 시집 중의 어느 시에서 부턴가 내가 직업적으로 능청을 떨기 시작했다는 느낌이든다. 그참, 벌써 능청이라니, 하고 말하면, 그것도 능청스럽게 들린다. 그렇다면더욱 더 시적으로 능청을 떨든가 아니면 ..
1984년 가을최 승 자

망 제

기도하십시요, 주여.
기도하십시요, 우리에게.
우리가 가까왔읍니다.
——파울 첼란, 암야행」에서


봄에는 속이 환히 비치는 옷을 입고,
일곱 송이의 꽃을 머리에 꽂고
마지막으로 신발을 벗어 버리고서,
청파동에서 수유리까지 손가락질하며
희죽거리며 걸어가고 싶다.
봄에는 황사처럼 아지랭이처럼 미쳐
수유리 하늘 끝에서
고요히 가물거리다 스러지고 싶다.

그러나 모든 까무러치지 못하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아찔한 한 시절이 가고 아득한 또 한 시절이 와,
남쪽 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안> 날고,
꽃잎은 하염 없이 바람에 <안> 지고
이제 위로받아야 할 것은 우리,
무릎 꿇고 먼 세월을 기어가는 우리.
- P30

"우리 청춘의 유적지에선 아직도 비가 내린다더라.
그래서 멀리 누운 우리의 발가락에도
때로 빗물이 튀긴다고 하더라.
그리고 우리가 살아 있다는 헛소문이 간간이 들린다고도 하더라."

올 봄에도 하나님은 하늘의 궁창에 새를 심고 계시고
들판 식물들은 일시에 버혀짐으로써 향내를 풍기지만
당신들은 이제 진흙과 먼지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발목으로 그리운 옛 시가지를 헤매며
당신들은 살아 잠든 우리의 몸뚱어리를 노린다.

당신들을 무사히 물리쳐 버릴 수 있을까.
당신들을 무사히 죽음으로 되돌려 보낼 수 있을까.
죽음과 삶이 상피붙는 신성 코리아여
우리가 당신들을 다시 낳을 수 있을까.
자자손손 거듭 낳을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발목들의 낮은 헤매임을
한반도 막막한 보편으로 흐르게 할 수 있을까.
- P51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한 순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집이 있을 뿐,

이제 이를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도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 P32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꽃 
병 



아 
다 
- P33



동의하지 않아도
봄은 온다.
삼십 삼 세 미혼 고독녀의 봄
실업자의 봄
납세 의무자의 봄.

봄에는 산천초목이 되살아나고
쓰레기들도 싱싱하게 자라나고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이
내 입안에서 오물이 자꾸 커 간다.
믿을 수 없이, 기적처럼, 벌써 
터널만큼 늘어난 내 목구멍 속으로
쉴 새 없이 덤프 트럭이 들어와
플라스틱과 고철과 때와 땀과 똥을
쿵 하고 부려놓고 가고

내 주여 네 때가 가까왔나이다
이 말도 나는 발음하지 못하고
다만 오물로 가득찬 내 아가리만
찢어질 듯 터져 내릴 듯
허공에 동동 떠 있다.
- P44

즐거운 일기

오늘 나는 기쁘다. 어머니는 건강하심이 증명되었고 밀린번역료를 받았고 낮의 어느 모임에서 수수한 남자를 소개 받았으므로,

오늘도 여의도 강변에선 날개들이 풍선돋친 듯 팔렸고 도곡동 개나리 아파트의 밤하늘에선 달님이 별님들을 둘러앉히고 맥주 한 잔씩 돌리며 봉봉 크랙카를 깨물고 잠든 기린이의 망막에선 노란 불립 꽃들이 까르르거리고 기린이 엄마의 꿈 속에선 포니 자가용이 휘발유도 없이 잘 나가고 피곤한 기린이 아빠의 겨드랑이에선 지금 남몰래 일 센티 미터의 날개가 돋고.…

수영이 삼촌 별아저씨 오늘도 캄사캄사합니다. 아저씨들이우리 조카들을 많이 많이 사랑해 주신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코리아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 놀아났습니다.

아싸라비아
도로아미타불 - P45

비극

죽고 싶음의 절정에서
죽지 못한다. 혹은
죽지 않는다.
드라마가 되지 않고,
비극이 되지 않고,
클라이막스가 되지 않는다.
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견뎌내야 할 비극이다.
시시하고 미미하고 지지하고 데데한 비극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 물을 건너 갈 수밖에 없다.
맞은편에서 병신 같은 죽음이 날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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