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세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트고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우리 철판깔았네




봄밤

적막히 녹아드는 햇빛소리만
굴러다니는 비인 바람 소리만
실은 겨우내 말라붙은 꿈을 적시다
오늘밤 어질머리 푸는 비의 관능을
떠도는 발들의 아픔을

어둠 속 잇몸들의 덧없는 입맞춤 사이
밤새 홀로 사무치는 머리칼 사이
실은 고적한 곳으로 흘러가는 마음을
조금씩 서걱이며 부서지며
아직도 남아 있는 부끄러운 뼈를

묻지는 말고 그대여
눈물처럼 애욕처럼
그대의 혀 끝으로 적셔 주려나
깊게, 절망보다 깊게.
- P71

황혼

저무는 어디에서 기다리리.
알 수 없는 뿌리로 떠돌다
병의 끝에서 만나는그리운 그리운 육신들
지친 홀로의 이름들이
저세상 바람 소리 빗소리
독한 노래로 젖어들 때
이 무게를 지워다오.
이 무게를 지워다오
몸부림치는 저승의 달빛

사물이 저 혼자서 저문다
세상 밖으로 그대는
그대의 뿌리를 내린다.
- P72

이 시대의 사랑

불러도 삼월에는 주인이 없다.
동대문 발치에서 풀잎이 비밀에 젖는다.

늘 그대로의 길목에서 집으로
우리는 익숙하게 빠져들어
세상 밖의 잠 속으로 내려가고
꿈의 깊은 늪 안에서 너희는 부르지만
애인아 사천 년 하늘 빛이 무거워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물에〉
우리는 발이 묶인 구름이다.

밤마다 복면한 바람이
우리를 불러내는
이 무렵의 뜨거운 암호를
죽음이 죽음을 따르는
이 시대의 무서운 사랑을
우리는 풀지 못한다 - P75

가을의 끝

자 이제는 놓아 버리자
우리의 메마른 신경을.
바람 저물고
풀꽃 눈을 감듯.

지난 여름 수액처럼 솟던 꿈
아직 남아도는 푸른 피와 함께
땅 속으로 땅 속으로
오래 전에 죽은 용암의 중심으로
부끄러움 더러움 모두 데리고
터지지 않는 그 울음 속
한 점 무늬로 사라져야겠네.
- P46

어느 여인의 종말

어느 빛 밝은 아침
잠실 독신자 아파트 방에
한 여자의 시체가 누워 있다.

식은 몸뚱어리로부터
한때 뜨거웠던 숨결
한때 빛났던 꿈결이
꾸륵꾸륵 새어나오고,
세상을 향한 영원한 부끄러움.
그녀의 맨발 한 짝이
이불 밖으로 미안한 듯 빠져나와 있다.
산발한 머리카락으로부터
회푸른 희푸른 연기가
자욱이 피어오르고
일찌기 절망의 골수분자였던
그녀의 뇌 세포가 방바닥에
흥건하게 쏟아져 나와
구더기처럼 꿈들거린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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