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봄, 파울라 모데르존 베커 Paula Mouldersohn Becker, 1876 ~ 1907는 파리의 작은 스튜디오에서 몇 점의 자화상을 완성했다. 그녀는 독일 브레멘 근교의 화가촌인 보르프스베데를 떠나 혼자 파리에 왔다. 네번의 파리 체류를 통해 세잔과 고갱 등을 만나며 새로운 예술적 자극과 토양을 접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보르프스베데에서 그리던 목가적 풍경화에서 벗어나 아주 개성적인인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남성 화가들도 누드 자화상을거의 그리지 않던 시대에 여성 화가로서 누드 자화상을 그린 것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이 반라의 자화상에서 커다란 호박 목걸이 아래 불룩한 배는 만삭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실제로 임신한 상태가 아니었다. 가난과 싸우면서도 그림에대한 열정과 포부로 충만하게 차오른 모습을 만삭의 상태로 표현한 것이다. 둥근 배를 두 손으로 감싼 채 세상을 향해 ‘이게 나아"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그리고 굳게 다문 입 - P70
내면에서 발현되는 여성성에 힘입어 그녀는 그림 속 어머니와 아이라는 타자와 자연스럽게 하나가될 수 있었다. 이 무렵 파울라는 언니에게 돈을 보내달라는 편지를쓰면서 이렇게 적었다. "나는 뭔가가 되어가고 있어.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격렬하게 행복한 순간을 살고 있어."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리면서 느끼는 말할수 없는 충일감이 이 그림에도 잘 나타나 있다. 앞에서 말한자화상뿐 아니라 옆으로 누운 어머니와 아이 IⅡ> 역시 파울라가 아기를 잉태하기 전에 그린 것이다. 남편의 전처가 낳은 아기가 아니라 자신의 아기를 갖고 싶었던 파울라의 소망이 이런 상상적 이미지로 나타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파리로 찾아온 남편과 지내면서 임신을한 그녀는 결국 남편과 함께 보르프스베데로 돌아가야 했다. 화가로서 어렵게 독립을 시도했지만, 파울라는 출산과경제적 조건 때문에 남편과 재결합할 수밖에 없었다. - P74
책장에서 케테 콜비츠KtheKollwirp. 1867~1945에 관한 책들과 화집을 오랜만에 꺼내 든 것은 뮤리얼 루카이저의 시집 『어둠의 속도』를 읽으면서였다. 어둠의 속도에는 「케테 콜비츠」라는 꽤 긴 시가 실려있다. 뮤리얼 루카이저는 시인이자 저널리스트로서 1930년대부터 나치 체제나 스페인 내전에 관해 다양한 글을 썼고, 인종, 여성, 노동 분야의 사회운동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어둠의 속도는 옮긴이의 말처럼 "사적 발화로 여겨졌던여성의 목소리가 어떻게 정치적인 힘을 갖게 되는지에 대한 다양한 시적 탐색들이 수행되는 장" 이라고 할 만하다. 유대인이자 싱글맘으로서 미국 사회의 온갖 편견에 맞서 싸웠던 그녀는 다른 여성들의 체험에 공감하는 시를 여러 편남겼는데, 「케테 콜비츠」도 그중 한 편이다. - P86
한 여자가 본다. 그 폭력을, 수그러들지 않는알몸의 움직임을 ‘아니오‘라는 고백을위대한 연약함의 고백을, 전쟁을, 모두가 흘러 한 아들, 피터의 죽음으로, 살아남은 아들에게로, 반복적으로그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로, 그들의 손자또 다른 전쟁에서 죽은 또 다른 피터에게로, 폭풍처럼번지는 불로어둠과 빛 , 두 개의 손처럼, 이 극과 저 극이 마치 두 개의 문처럼. 한 여자가 자기 삶의 진실을 말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세계는 터져버릴 것이다. - 뮤리엘 루카이저, 「케테 콜비츠(부분) " - P87
다시, 뮤리얼 루카이저의시 「케테 콜비츠」로 돌아가 보자. 루카이저는 이 시에서 특히 콜비츠의 피에타‘에 주목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콜비즈의 후기작들은 제목은 달라도 거의 모든 작품이 피에타의변주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 에서 어머니의 오른손은 아들의 군게 단힌 두 눈을 감싸고, 왼손으로는 축 서진손을 받아내고 있다. 나중에 원본보다 좀더 크게 제작되어베를린의 추모 시설 ‘노이에 바헤‘에 전시된 이 작품은 전쟁피해자들을 위한 추모관을 홀로 지키는 피에타상이 되었다. 전시장 천장에 둥근 구멍이 뚫려 있어서 이 청동상은 눈과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세월의 무게를 더해가고 있다.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는 가장 고전적인 미켈란젤로의〈피에타>와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피에타 Pieta‘는 ‘슬픔, 비탄‘ 또는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로, 14세기부터 유럽 회화와 조각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안고 비탄에 빠진 성모마리아의 모습은 시대와 작가에 따라 그 자세와 표정, 비례와 구도 등이 다양하다. - P93
어머니는 젊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늙었지만 강인한 모습으로 아들을 품어 안고세상에 내어주지 않으려는 비장한 의지가 느껴진다. 거리감이 완전히 제거된 채 아들을 부둥켜안은 어머니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 덩어리의 슬픔이다. 이런 포즈와 형상은 게테 콜비츠의 판화에서 익숙한 편이지만, 조각으로 표현되면서 좀더 입체적이고 둔중한 물질성을 지니게 된다. 나는케테 콜비츠의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를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 견주어 검은 피에타‘라고 부르고 싶다. - P94
1915년 7월의 일기에는 기도에 대한 언급도 나온다기도란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합일된 상태에 이르는것이라고 하지만, 자신은 간청하는 기도밖에는 할 줄 모른다고 고백한다. 전사한 아들 페터의 기념비를 만드는 일이케테 콜비츠에게는 추모의 기도였던 셈이다. 그녀는 죽은아들에 대한 애도의 마음을 모두 이 작업에 쏟아부었다. 그일은 마치 페터와 영성체를 나누는 것과도 같았다. 그런데 돌을 깎으며 죽은 아들을 떠올리는 일이 고통스러웠던 콜비츠는 결국 2년 동안 매달리던 페터의 조각상을 부수고 만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925년 콜비츠는 석고로된 부모 상을 가족도 모르게 만들기 시작한다. 아버지와어머니 사이, 아들 페터의 모습이 사라진 그 자리에는 결코메꿀 수 없는 거대한 침묵이 자리 잡고 있다. 돌 속에서 죽은 아들의 형상을 꺼내는 일보다 자식을 앞세우고 남겨진부모로서 속죄와 기원을 담아내는 일이 그나마 정직하고실현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두 팔을 품에 숨겨 넣고 무릎 꿇은 아버지와 몸을 앞으로 숙인 채 두 손을 모은 어머니의 모습에서 우리는 종교적인 느낌을 받게 된다. 콜비츠는 평소 종교에 대해 불분명하거나 비판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하지만 전쟁으로 자식을 - P95
잃은 슬픔과 고난을 겪으면서 운명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절망을 간절한 기도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아들에 대한이 사적인 기념비는 청회색 화강암으로도 만들어져 1932년벨기에의 로게펠데 군인 평화묘지에 위령비로 세워졌다. 아들이 죽은 뒤 17년에 걸쳐 완성된 부모라는 조각상은 ‘검은 피에타‘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다. - P9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