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생각에서 여전히 감탄할 만한 요소를 많이 찾았지만 그의 생각 전부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둘이 유스턴 역에 앉아 있을때 사르트르는 런던이 세계에 대한 자신의 전반적인 이해에 얼마나 잘 맞아 들어가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보부아르는 결핏하면 일반화하는 그의 습관에 짜증이 났고 그 가설이 허술하다고 생각 했다. 전에도 논쟁을 한 적이 있어서 새삼스러운 얘기도 아니었지만 보부아르는 말이 현실을 평가할 수는 없으며, 현실은 모호하고 불확실할지언정 있는 그대로 부딪처야 하는 거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사르트르는 세계를 관찰하고 반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대꾸했다. 그는 세계를 언어로 정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보부아르는 그건 말이 안 된다고 했다. 런던을 고작 12일 여행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사르트르는 경험을 살아내는 대신 글로 쓰려했고, 그 점이 보부아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에 대한 지금여기의 현실에 대한 충실성에 거슬렸다. - P168
개인적으로 보부아르는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학생 시절일기에서 이미 고민했던, 자기를 얼마만큼 내어주고 얼마만큼 지켜야 하는가라고 보았다. "독립에 대한 갈망"과 "너무나 맹렬하게 타인에게 끌려가는 감정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보부아르는 수업 시간에 "여자들이 세상에 아이를 낳고 기르라고만 있는 게 아니다." 같은 주장을 펴거나 학부모들이 문제 삼을만한 책을 학생들에게 빌려주었다. 일부 학부모가 공식적으로 항의를 제기했지만 다행히 장학사가 보부아르의 편을 들어주었다. - P171
다음 프로젝트를 생각해도 좋을 만큼 소설 작업은 막바지에 와 있었다. 보부아르는 "온전한 삶에 대한 소설을 쓰고싶었다. 자기 작업 외에 사르트르의 원고 검토 작업도 병행하고 있었다. 사르트르는 자유 개념으로 글을 쓰면서 원고가 진전되는 대로조금씩 보내 왔다. 보부아르는 원고를 베르그송과 칸트 철학에 비교해 가며 칭찬했지만 논증 전체를 보지 않고는 제대로 비판할 수 없다. 고 했다. 그리고 그 단계에서 반문하자면 자기는 이렇게 묻고 싶다고썼다. 일단 자유를 인식했다면 그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보부아르는 베르그송, 푸예, 라뇨, 그 외 철학자들을 탐독하던 십대 시절부터 자유의 철학에 관심을 두었다. 교수자격시험의 주요 주제였기 때문에 사르트르와도 토론을 많이 했다. 자유를 추상적 개념으로 생각하고 사르트르처럼 모든 자유가 평등하다고 주장해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보부아르는 ‘살아낼 수 있는 철학을 원했다. 게다가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자유가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중에 말했듯이) "상황이 각기 다르기에 자유 또한그러하다. " - P221
보부아르는 이미 1930년대에 사르트르의 주장이 틀렸다고 확신했다. 사르트르는 상황이 어떻든 인간은 다양한 반응 양식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롭다고 보았다. 보부아르는 이렇게 반문한다. "하렘에 갇혀 사는 여성에게 어떤 유의 초월이 가능할까?")자유로운 것(원칙적으로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과 실제로 선택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은 다르다. 보부아르는이러한 철학적 비판을 피로스와 키네아스 와 애매성의 윤리를 위하여〉라는 두 편의 에세이로 남긴다. 하지만 그 전에 초대받은 여자때문에 사생활에 튄 불똥을 처리해야 했다. 어머니는 딸의 첫 소설이 나오기 전까지는 사생활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래도 보부아르가 "착한 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초대받은 여자》 출간 이후 "세상의 소문이 어머니의 환상을 무참히 부수었다." 프랑수아즈는 그 책에 충격을 받았지만 딸이 유명 작가가 됐기때문에 한편으로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제 보부아르가 가장이었으므로 그녀의 성공은 가족 모두에게 도움이 되었다.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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