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할머니의 시
김승희
저기 파출소가 있네
잘 외워둬야지
나를 분실할까 두려워
외출할 땐 주민등록증을 손에 꼭 쥐고
내 신체의 일부에 아이들 외국 전화번호를 새겨둬야 하는데
팔에 새겨둘까 다리에 새겨둘까
가슴에 새겨둘까
유방 위부터 쇄골 있는 곳까지 거기 가운데가 좋겠어?
아니면 둥글넓적한 복부 한가운데
잊어야 좋은 것들
잊으면 안 되는 것들 사이사이로
백발에 맨발로 거리를 배회하다가
착한 경찰관 아저씨의 안내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면
아무도 없는 집
할머니, 집에 아무도 없어요? 자제분들 안 계세요?
그러면 바지를 내리고
복부 한가운데 새겨둔 아이들 이름과 전화번호를 보여줘야 해?
신이 말했잖아,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그러므로 나의 배에다 이름과 전화번호를 새겨놔야 해?
아 그건 좀 아무래도......
그러면 가슴 한복판, 양쪽 유방 위 쇄골의 영역에다 새겨서
옷을 올리고 보여줘야 해? 하하, 그래도 그게 좀 낫겠다
인생은 다 재미있어,
똥오줌 그게 문젠데
너무 제정신으로 똑 부러지게 인생을 살 필요는 없어
초월을 못하잖아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중에서
픽~ 웃음이 나는 시다. 웃기지만 슬프다. 요즘 말로 웃픈, 시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치매‘라는 단어만 들어도 두려움이 슬금슬금 파고든다. 치매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고,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을 시인도 알고 있다. 한때는 머리를 쓰지 않으면 치매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해서 어른들 사이에 고스톱 치는 게 유행이기도 했다. 고스톱은 점수를 계산해야 하고 상대방이 가진 패를 짐작해야 하고 손을 움직이는 운동이 계속되기 때문에 치매 예방에 좋다는 썰이 떠돌던 시절이었다.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맞는지 어떤지 모르겠다. 그런데 사유가 깊은 시인의 치매에 대한 근심은 그저 기우이기만 한 것은 아님 또한 알고 있다. 저렇게 자연스럽고 적나라한 감정 변화와 걱정들이라니 시인의 의식은 명료하다. 혼자 지내기에 더욱 걱정의 종류는 많아질 것이다. 어디다가 연락할 곳을 적어두지, 하루하루 달라지는 기억력은 몸의 어느 부분에 문신처럼 새겨놓아야 할까? 이 현실적인 고민들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노인을 본다. 노인, 쉬운 단어이면서 어려운 단어이기도 하다. 누구도 노인이 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노인이 되는 것도 순식간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늙으니까. 영원히 나이들 것 같지 않았지만 지금 내 나이 또한 노인을 향해 성큼 다가가고 있다. 치매도, 노인도, 그 사람이 바로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언제나 하고 있다. 어쩌면 죽음보다 ‘치매‘와 ‘노인‘이 더 심각한 걱정거리다. 그러나 걱정한다고 뭐가 달라지랴~! ˝인생은 다 재미있어˝ 앞서서 걱정하지 말고 오늘을 재미있게 살자고 시인은 결론 내린다. ˝너무 제정신으로 똑 부러지게 인생을 살 필요는 없어˝
활동을 위한 시간이 있다면 게으름을 피우기 위한 시간도 있다. 카이로스다. 우리 문화는 후자가 아닌 전자만 중요시한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왕성하게 활동한 작가였지만 가끔은 모든 일을 멈추고 쉬기도 했다. 두 사람이 로마에서 보낸 여름들은 무無를 확장하는 시간이었다. 보부아르는 자신의 여러 프로젝트와 끝없는 분투를 잠시 옆에 치워두고 로마에 ˝몸을 담갔다.˝ 비버는 쉬고 있었다.
‘수용‘은 보부아르가 자주 쓴 단어가 아니었지만 그녀는 수용과 유사한 무언가를 이뤄냈다. 일흔다섯 번째 생일을 하루 앞둔 날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했다. ˝나이 드는 데에도 장점이 있다.˝ 니체처럼 보부아르도 지난 삶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나는 모든 것을 최대한 많이, 최대한 오랫동안 즐겼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 -p 47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