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구원
임경선 지음 / 미디어창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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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경선 작가의 이름을 들은 건 "어떤 날에 그녀들이" 책 광고에서 처음이다. 그리고 "태도에 관하여"라는 궁금했지만 온라인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건 "다정한 구원"이었다. 제목에서 끌렸다. "구원"도 좋은데 "다정"하기까지 하다니 완벽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산문집이려니 했는데 뜻밖에도 리스본 여행기다. 리. 스. 본.

 

  세상이 온통 회색빛이기만 하던 때였을 것이다. 특별하게 무엇을 주신 적은 없지만 거기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던 엄마가 세상을 떠나신 뒤 부엌을 같이 쓰는 방을 얻어 동생과 둘이 지냈다. 많이 다르고 많이 닮기도 한 여동생과는 떨어져 있을 땐 그리운 존재였으나 함께하면서 우리는 애증의 절벽에서 서로에게 창을 겨누는 순간들이 많아졌다. 둘 다 고아처럼 의지가지없이 지내온 세월의 보호색이 되어준 뾰족한 창이 정작 고아가 되어버렸을 때는 상대를 향해 겨누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 휴전의 시간은 한수산 소설을 읽으며 같은 페이지에 눈물 자국을 남기거나 라디오를 같이 들을 때뿐이었다. 그렇게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검은 돛배"를 들었다.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는 외로움의 방에 갇힌 우리를 거센 파도가 청청한 해변으로 데려다주었다. 가슴을 두드리는 전주와 애절한 목소리는 아직도 피를 철철 흘리는 상처에 연고처럼 스며들어 딱지를 만들어주었다. 창이 무뎌진 것은 아니지만 창을 내려놓은 순간들이 늘어났다. 파두를 그렇게 만났고 파두의 본고장 리스본을 알게 되었다. 내게 리스본은 파두와 동의어다. 아련하고 먹먹하게 그립고도 머나먼 곳. 혹은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20대 같은.

 

  여행을 다녀온 적이 언제인가 돌아본다. 짧게 든 길게 든, 가깝게 든 멀리든, 혼자든 여럿이든... 오래되었다. 코로나가 성행하기 이전 겨울이었나 싶다. 천만 년 전 일처럼 아득하다. 그런데 리스본, 아직 직항로도 없는 심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머나먼 곳 리스본에 가볼 수 있을까? 나지막한 천정의 식당에 앉아 파두를 듣게 될 수 있을까.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 리스본을 작가를 통해 만난다. 그에게 리스본은 열 살 때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곳이고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상실감에 허우적거릴 때 열 살의 딸아이를 데리고 열 살의 자신을 찾아서, 그 시절을 함께한 부모님을 찾아서 그렇게 만나는 리스본이다. 여느 여행기와도 달랐고 기대했던 "구원"을 내게 주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에게는 "구원"이었겠기에 부러운 시선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 추억을 가지고 있는 작가에게 부러웠고 그런 추억을 가질 열 살 윤서(딸)도 부러웠다. 열 살, 열한 살 내 인생에서도 가장 따뜻한 유년이었을 그 나이. 아직 아버지가 계시던 집안은 평화로웠다. 쑥불이 타는 마당의 평상에 누워서 탱자나무 가시로 다슬기를 빼내먹으면 별들이 얼굴 위로 우수수 쏟아져 내리고는 했다. 다음 날 아침에 보면 별 대신 다슬기 껍데기가 가득했다. 어느 날 엄마는 키우던 닭을 잡아서 쫄깃한 살이 씹히던 닭죽을 끓여주셨고, 어떤 날은 팥을 삶고 칼국수를 밀어 팥칼국수를 만들어 주시곤 했다. 나는 그 이후로 그 팥칼국수보다 맛있는 팥칼국수를 먹지 못했고 그 여름밤의 별 보다 더 많은 별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아니,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이다. 같은 분위기, 같은 사람들은 없으니까. 양수장 집 마당의 평상이 나에겐 리스본이었고 드들강이 테주강이었구나 싶다.

 

  책을 덮고 오랜만에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파두들을 들었다. 여러 버전의 "검은 돛배(Barco Negro)"를 찾아들었다. 여전하다. 파두, 진실은 심금을 울린다. 그런데 달라진 것이 있다. "어두운 숙명(Maldcao)"이 더 좋았다. 그 차이는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른다. 그래도 꿈꾼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도시 리스본을 만나게 될 어느 때를. 그 오래된 골목의 오래된 식당에서 식당만큼 나이 든 의자에 앉아 파두를 듣게 될 자유로운 어느 때를. 우리에게 "다정한 구원"은 그 어느 때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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