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발음하기
이임숙 지음 / 창조문예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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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작년              

                              이임숙

 

 

   푸르고 슬픈 기억이여 너를 놓아 줄 수가 없구나

   한때의 척박한 사랑을 옹졸한 고뇌를 누렇게 색이 바랜

   치사한 이율배반을 옆구리에 낀 채 잘도 살아왔구나

 

   빗살무늬토기처럼 흠집 많은 과거를 들추었더니

   오글거리는 열매들 말라서 비틀어진 열매들

   찰랑거린다 눈 밝은 세상을 차분차분 걸어오느라

   숨 한 번 제대로 쉰 적 없어도 불꽃으로 나부댈

   새싹 고스란 고스란 돋는다 이미 그렇게

 

                     시집[를 발음하기] 중에서

 

 

   작년, 작년, 작년 같은 작년들을 쉼 없이 흘려보낸 지금에서야 이 시집을 마주한 일주일이었다.

   지나온 세월의 너비가 처음 보던 남한강처럼 넓고 유장하다. 애써 감추려는 시인을 닮았다. 2006년, 이임숙시인을 처음 만났다. 그렇게 오른손 손가락만큼이나 뵈었을까, 함에도 "눈 밝은 세상을 차분차분 걸어"온 그 걸음 온전히 알 듯한 세월이었다. 시인은 처음 보았을 때부터 내게는 쭈욱 "새싹 고스란 고스란 돋는"분이셨다. 아셨으면 좋겠다.

 

 

 

   '를' 발음하기*

 

   '를'은 '을'과 자매지간이지만 입천장을 떨게 한단다

   그렇지만 조바심이 일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야

   그는 받침 없는 곳에서 바닥에 닿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거지

 

  '을'이 받침 있는 섬돌을 믿고

   방자하게 입을 떼다가

   황급히 혀를 말아 쥐고 입 천장을 짚지 않았다면

   아무도 누구의 주인 행세를 할 수 없었을 텐데

   받침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차이가 나지

 

   가슴 울리는 떨림이 있었는가

   처음부터 그 떨림 다 보고 있었는가

   귀가 멍멍해지도록 아득한 그 소리 듣고 있었는가

   영원을 믿고 믿지 않고의 차이는

  '을'과 '를'의 발음처럼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데서

   시작된 것이겠지

 

   홀로 된 네 소리를 듣고 있으려면 나는 벌써부터

   가늘게 가늘게 버들피리 불던 그날 그 소리가

   무엇을 어떻게 떨치고 나온 소리였는가를

   가만히 생각해 보는 거야

 

   떨림이 없다면

   아무도 누구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시작이 아니라면, 가슴이 없었다면

 

    *'를' 발음과 '을' 발음이 정확하게 되지 않은 아이가 있다.

    발음되지 않은 것이 그 발음뿐일까만 듣지 못하고 내는 소리들은 어눌하고 갑갑했다. 얇고 미세한 울림으로만 감지되는 소리들, 태초의 빛이 그러했을 것이다.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이 시는 읽노라면 매번 가슴이 서늘해지곤 한다. 그래서 애써 모른 척하고 싶어지는.

   이 세월에 담긴 시인의 마음을, 시선을 짐작조차도 할 수 없는데 이렇게 담담하게 풀어놓을 수 있다니 무릎이 꺾인다. 이 시가 아니었다면 '그까짓 을'이 '고까짓 를'도 이토록 중요하다는 걸 영원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꼭 '조사'에만 해당할까만은 '를'을 앞세운 그 먹먹하고도 결기 세운 마음을 생각이라도 해보는 것이다. 겨우 생각이란 걸 할 줄 아는 한 명의 독자로서.

 

   내가 안다고 거들먹거리는 얄팍한 것들은 티끌보다 작고 가벼우며 그때 까불다 지은 죄들은 들보보다 무겁다. 하여'복음'은 나 같은 사람에게 맞춤하다. 내게는 시인의 사는 모습 그대로가, 마음 길이 '福音'이다.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겠지만/ 내 마음대로도 어떻게 좀 안 될까요?" 가끔은 만사 제치고 떼쓰고 싶어진다. 시인도 알 것이다.

   훌쩍 세월이 흐른 다음에도, 우리는 여전할 것이다. 사람, 안 변한다. 혹시 모른다. 왼손 손가락만큼 만나서 숲길을 걷고 같이 고개를 숙이고 작은 꽃들에게 눈 맞춤할지도. 또 혹시 모른다. 찻잔을 앞에 두고 말없이 창밖의 풍경을 같이 바라볼지도.

   그래도 지금, 내가 항상 감사해 한다는 걸 아셨으면 좋겠다.

 

 

 

  복음

 

   위층 사람과 마트 가는 길,

   할아버지 한 분이 찬송가 부르시네

   예수 천당! 붉은 글씨가 한눈에 들어오기에

   교회라면 질색 팔색인 위층 사람에게

   저 할아버지 믿는 구석은 하나님인데

   죽고 나면 믿을 구석 있느냐고 물어보았네

 

   있구 말구요, 보험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데

   그거면 우리 애들 한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거예요

 

   애들 말고 당신, 했더니

   나야 어찌 되든 애들만 잘 살면 되지

   죽고 난 다음인데 어쩌겠어요

 

   어딘가로 푹 빠져들어가는 이 느낌

   나는 진짜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일까

   죽고 난 다음인데 어쩌겠어요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겠지만

   내 마음대로도 어떻게 좀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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