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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한 손 ㅣ 창비시선 297
고영민 지음 / 창비 / 2009년 1월
평점 :
내가 갈아엎기 전의 봄 흙에게
고영민
산비알 흙이
노랗게 말라 있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푸석푸석 들떠 있다
저 밭의 마른 겉흙이
올봄 갈아엎어져 속흙이 되는 동안
낯을 주고 익힌 환한 기억을
땅속에서 조금씩
잊는 동안
축축한 너를,
캄캄한 너를,
나는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나
슬픔이라고 불러야 하나
시집 [공손한 손] 중에서
봄이다. 마른 흙을 뚫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삐죽빼죽한 새싹들은 왕성한 생명력으로 세상 한 귀퉁이를 밀고 나오고 누가 보든 말든 스스로 피어나는 꽃들은 이어달리기를 시작하는 봄, 어느 곳으로라도 바라보기 좋은 계절 봄이다. 벚꽃들이 막 피기 시작하는 꽃구름 동산을 걸어 다른 세계, 내가 아직 갈아엎기 전인 '노랗게 마른' 흙의 세계로 들어간다. '올봄 갈아엎어져 속흙이 되는 동안 낯을 주고 익힌 환한 기억을' 가질 나의 새로운 직장, 개나리색 빌딩으로 출근한 지 딱 40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