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창비시선 374
안현미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 봄으로 한 여자가 입장한다 맨발이다 일순간 일제히 모든 시선이 여자가 끌고 온 여행가방의 테두리처럼 상처투성이인 그 발에 주목한다 사위는 적막을 껴입은 듯 고요하다 여행가방처럼 먼 길을 끌려다닌 여자의 그림자가 여자를 끌어안고 먼저 쓰러진다 누가 누구의 배후인가 눈물이 고인다 문제를 풀기 위해선 문제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눈물도 그와 같다 문제는 뜻밖의 문제가 늘 다시 되풀이된 다는 것

 

   그 봄으로 바퀴 달린 신발을 신은 아이가 등장한다 그 봄의 입구에는 19금(禁) 표시가 붙어 있다 누가 누구를 금지하는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봄이 이어진다 봄을 사용하기 위해선 봄 안으로 입장해야 한다 문제는 뜻밖의 문제가 늘 다시 되풀이된다는 것

 

 

 

 

   봄밤

 

 

 

  봄이고 밤이다

  목련이 피어오르는 봄밤이다

 

  노천카페 가로등처럼

  덧니를 지닌 처녀들처럼

  노랑 껌의 민트향처럼

  모든 게 가짜 같은

  도둑도 고양이도 빨간 장화도

  오늘은 모두 봄이다

  오늘은 모두 밤이다

 

  봄이고 밤이다

  마음이 비상착륙하는 봄밤이다

 

  활주로의 빨간 등처럼

  콧수염을 기른 사내들처럼

  눈깔사탕의 불투명처럼

  모든 게 진짜 같은

  연두도 분홍도 현기증도

  오늘은 모두 비상이다

  오늘은 모두 비상이다

 

  사랑에 관한 한 우리는 모두 조금씩 이방인이 될 수 있다

  그해 봄밤 미친 여자가 뛰어와 내 그림자를 자신의 것이라 주장했던 것처럼

 

 

 

 

  봄봄

 

 

  그 봄으로 한 여자가 입장한다

 

  망할 놈의 봄비

  망할 놈의 제비

 

  그 봄에 한 여자가 아프다

 

  봄이 두개라면?

  봄이 두부라면?

 

  그 봄에 한 여자가 웃는다

 

  자신이 끌고 다닌 바퀴 달린 가방처럼

  테두리가 사라지고 있는 영혼처럼

 

  다시 테두리로 되풀이되는

  다시 테두리만 되풀이되는

 

 

                       안현미 시집[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중에서

 

 

 

  안현미 시인의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에는 세 편의 봄이 있다. 봄만 있는 것은 아니고 사계절이 뚜렷한데 그중 봄에 관한 시편이 세 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제목에는 세 편이지만 내용 중에는 하나 더 있다.(꼭 정확하지는 않다. 또한 중요하지도 않다)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라는 김수영시인의 『달나라의 장난』에서 차용해온 긴 제목의 시는 이렇다.
 
 

 

  봄이고 밤이다. 목련꽃이 촛불처럼 피는 봄밤이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분리장벽 설치, 중국의 티베트 독립 유혈진압 사태 등 지구 곳곳이 아픈 밤이다. 가장 늦은 통일을 가장 멋진 통일로 이루어내야 할 국가의 새로운 장관은 색깔이 다른 사람들은 눈앞에서 꺼져버리라고 호통치는 시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련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최첨단에서 꽃을 피우는 밤이다. 그리하여 절망할 수 없는 밤이다. 온몸으로 , 온몸으로, 힘을 주라, 힘을 주라, 꾹꾹 눌러쓰는 봄이다.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 아아 봄은 갔다. 그러나 다시 봄은 온다. 와야만 한다. 그리하여 절망할 수 없는 봄이다. 바람이 분다. 비가 온다. 분단과 분쟁의 이 미친 비바람 앞에서도 싸우라, 싸우라, 목련이여 설움이여! 나 자신의 절망이라는 검은 짐승과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 목련이여 설움이여!

 

 

 

 

 

 

   '콩콩두부家' 시절 가게 앞에 목련 두 그루가 있었다. 나무를 본 순간부터 설레었다. 끼니도 거르던 가난한 시절 수원 성곽길을 걸으면 집집마다 꽃등이 내걸리듯 목련이 피어있는 생김새 비슷비슷한 집들이 부러웠다. 혹시라도 나중에 나도 내 집을 갖는다면 목련 한 그루 꼭 심으리라 다짐하던 그 목련이 두 그루라니. 뒷마당 가득한 벚나무보다 두 그루 목련이 우리들 남은 생을 꽃등으로 우뚝 걸릴 거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역시나 목련은 꽃을 장하게 피워냈다. 저절로 '봄이고 밤이다. 목련이 촛불처럼 피는 봄밤이다'라고 중얼거리고는 했다. 목련을 보면 여전히 그 시절이 오롯이 떠오른다. 긴 생에서 삼 년에 불과한 시간이었는데 뚜렷한 흔적을 남긴 시간이었고 목련이다. 목련이 피어나길 간절하게 기다리던 그 시절 자주 읽던 안현미 시인을 다시 읽었다. 새롭다. 나이를 먹고 생각이 바뀌고 환경이 바뀐다는 건 시를 읽는 시야도 바뀌는 건가 싶다. 그때는 목련이나 봄에 마음을 뺏겼다면 지금은 바퀴달린 가방을 끌고 등장하는 한 여자의 맨발에 자꾸만 마음이 쓰인다. 가방의 바퀴처럼 테두리가 닳아빠진 여자의 맨발이 이미지로 살아나는 것이다. 봄과 여자는 매번 같이 등장하는데 화들짝 피어나는 봄 앞에 시나브로 스러져가는 여자의 모습이 중첩된다. 시인은 집집마다 등을 켜 놓은 듯 환해지는 목련에도 소멸해가는 아픈 상처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시인의 봄은 찬란한 만큼 아팠던 것이다. 그 여자는 바로 나 자신이기도 하고, 너이기도 하면서, 우리 모두의 모습인 것을 시인은 한 여자의 등장으로 지구의 봄을 완성했다.

  늘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았다 생각했다. 아니었다. 그냥 살아지니까 살아온 시간이었단 생각이 든다. 살아온 시간이 켜켜이 쌓인 사람들을 만나면서 삶은 사람의 준말일 수도 있다는 시인의 생각에 동의한다.

  비가 내린다. '망할 놈의 봄비'는 아니다. 건조한 세상, 먼지 가득한 세상을 씻어내는 고마운 봄비다. 꽃은 저 홀로 피어나며 자리를 지키고 봄은 속절없이 흘러갈 것이다. '연두도 분홍도 현기증도 오늘은 모두 비상' 인 날들은 계속될 것이다. '다시 테두리로 되풀이되는' 삶을 지켜보는 시선도 계속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