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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 (어나더커버 특별판, 양장 합본) - 20세기의 봄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0월
평점 :
절판
세 여자 --20세기의 봄
조선희 장편소설 (한겨레출판)
몽양이 고명자에게
이건 너무 늦은 충고인 것 같네만 60년 살아본 경험에서 나오는 얘길세. 우리는 일생을 살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지. 그중에 어떤 사람은 지나가버리고 어떤 사람은 머무르네. 한때 자기 몸처럼 소중했던 사람이 짧은 인연으로 끝나기도 하고 금석처럼 굳세고 단단할 것 같은 관계가 어이없이 깨지기도 하네. 사람들은 각기 자기만의 인생 사이클이 있게 마련이니까. 저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것인데 남이 어찌할 수 있겠나. 억지로 어찌하려다 보면 집착이 되고 그게 우리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을 도둑질해가버린다네. 그러니 지나가는 사람은 지나가게 두고 머무는 사람은 머무르게 두게. p661
1945년 당시 조선에 관한 한 루스벨트는 스탈린보다 무지했고, 미국 정부는 아시아보다 유럽에 관심 있었고, 태평양 사령관 맥아더는 조선보다는 일본에 몰두했으며, 군정 책임자인 하지 중장은 한국엔 처음이었다. 하지는 어느 정파가 자신의 우군인지, 이 난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될 정치 지도자가 누군인지 헷갈렸다. 미 군정이 남로당을 불법화시키는 한편 이승만, 김구 같은 극우로도 복잡한 한국 문제를 풀기 어렵다는 판단에 도달한 끝에 그 중간 지대의 여운형과 김규식을 자신의 파트너로 찍었을 때 여운형이 암살돼버렸다.
분할 점령이 영구 분단으로 흘러가는 와중에 분할을 피할 수 있는 선택의 기회들이 주어졌지만 불발의 역사에 그치고 만 것은 남북을 통틀어 그것을 현실화 시킬 능력을 가진 정치 지도자가 없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다만 가장 근접한 인물이라면 그건 여운형이었을 것이다.
맹목적으로 자신을 정의로, 타인을 불의로 설정하는 지점에서 역사의 비극이 싹튼다. 미국과 소련이 남과 북을 점령한 것은 분단의 시작일 뿐이었다. 분단을 완성한 것은 어리석음과 아집과 독선이었다. 극악한 식민지 상태에서 갓 벗어난 사람들에게 대화와 타협의 매너를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관대함과 현명함의 미덕은 굶주림과 인권유린이 없는 환경에서 훈련되는 것이다. P672
이월부터 새롭게 출근하는 직장 근처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교차해서 걸려있는 교회가 있다. 처음에는 무슨 외교공관이거나 군부대 사무실이겠거니 지나쳤다. 요란한 극우 표현의 현수막들에 덕분에 교회임을 알게 되었는데 출퇴근마다 앞을 지나면서 [세 여자]를 생각했다. 우리 역사가 잃어버린 세 여자의 삶과, 몽양에 대해, 우리의 근대사에 대해 무지하고 몽매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
"분단을 완성한 것은 어리석음과 아집과 독선이었다. 극악한 식민지 상태에서 갓 벗어난 사람들에게 대화와 타협의 매너를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관대함과 현명함의 미덕은 굶주림과 인권유린이 없는 환경에서 훈련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어리석음과 아집과 독선의 덫에 갇혀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지나가는 사람은 지나가게 두고 머무는 사람은 머무르게 두"어 야만 할까? 봄 햇살 눈부신 3월 19일이다. 이곳에서 한 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