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92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황인숙 시집 [문학과 지성사(2016)]

 

우울

나는 지금

알 수 없는 영역에 있다

깍지 낀 두 손을 턱 밑에 괴고

짐짓 눈을 치켜떠보고

가늘게도 떠보고

끔벅끔벅, 골똘해보지만

도무지

부팅이 되지 않는다

풍경이 없다

소리도 없다

전혀 틈이 없는

알 수 없는 영역을

내 몸이 부풀며 채운다

알 수 없는 영역에

하염없이 뚱뚱한 나

덩그러니 붙박여 있다

    나는 지금/ 알 수 없는 영역에 있다/ 깍지 낀 두 손을 턱 밑에 괴고// 짐짓 눈을 치켜떠보고 / 가늘게도 떠보고/ 끔벅끔벅, 골똘해보지만/ 도무지/ 부팅이 되지 않는다// 풍경이 없다/ 소리도 없다// 전혀 틈이 없는/ 알 수 없는 영역을/ 내 몸이 부풀며 채운다// 알 수 없는 영역에/ 하염없이 뚱뚱한 나/ 덩그러니 붙박여 있다

    이런 증상이 우울이었다니, 아마도 시인이란 말씀의 사원[ 言+寺=詩]에서 수행하는 구도자임이 분명하다.

  

 

마음의 황지

아침신문에서

느닷없이 마주친

얼굴,

영원히 젊은 그 얼굴을 보며

끄덕끄덕끄덕끄덕 끄덕끄덕

칼로 베인 듯 쓰라린 마음

오래전 죽은 친구를 본 순간

기껏

졌다, 내가 졌다,

졌다는 생각 벼락처럼

그에겐 주어지지 않고 내게는 주어진 시간

졌다, 이토록 내가 비루해졌다

졌다, 시간에

나는 졌다

묽어지는 나

이상하다

거품이 일지 않는다

어제는 팔팔했는데

괜히 기진맥진한 오늘의 나

거품이, 거품이 일지 않는다

쓰지 않아도 저절로

소진돼버리는

생의 비누의 거품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하얗게

하얗게

눈이 시리게

심장이 시리게

하얗게

네 밥그릇처럼 내 머릿속

아, 잔인한, 돌이킬 수 없는 하양!

외로운 하양, 고통스런 하양,

불가항력의 하양을 들여다보며

미안하고, 미안하고,

그립고 또 그립고

            시인의 말

    매사 내가 고마운 줄 모르고 미안한 줄 모르며

    살아왔나 보다. 언제부턴가 고맙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렇게 됐다.

    인생 총량의 법칙?

    그렇다면 앞으로는 시를 끝내주게 쓰는 날이 남은 거지!

                                         2016년 가을

                                                          황인숙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