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서 마음으로 - 생각하지 말고 느끼기, 알려하지 말고 깨닫기
이외수 지음, 하창수 엮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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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 작가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바로 '트위터 대통령'이다. 사실 이외수 작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아는 것이라고는 『글쓰기의 공중부양』을 쓴 작가이고, 트위터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작가라는 것 뿐이다. 따로 이외수 작가가 쓴 소설을 읽어 본 것도 아니고, 이외수 작가가 저술한 책 중에서 읽어본 것은 글쓰기 방법론을 다룬 책 『글쓰기의 공중부양』뿐이다. 


언론이나 인터넷에서 들리는 소식 외에는 이외수 작가에 대해 큰 관심도 없었다. 이외수 작가에게 혼외자식이 있고, 그것을 조선일보에서 악의적으로 보도를 했다는 사실. 화천에서 이외수 작가에게 지원한 감성마을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들.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이외수 작가의 기이한 모습들. 이런 것들은 잠시간의 가십거리일 뿐 이외수 작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기 힘들었다. 그만큼 나는 이외수라는 사람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마음에서 마음으로』란 책을 접하게 됐다. 『마음에서 마음으로』는 이외수 작가가 가지고 있는 예술, 인생, 세상, 우주에 대한 가치관을 담은 책이다. 책은 이외수 작가와 하창수 작가의 대담으로 이뤄져 있다. 대담의 형식을 가진 책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이외수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알 수 있다는 사실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예술은 감성과 직관이다


『마음에서 마음으로』는 예술, 인생, 세상, 우주 등 총 네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각 부분마다 이외수 작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잘 나타나 있다. 아직 이외수 작가의 소설을 읽어보지 못한 터라 그의 작품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대한 평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있다. 그의 예술관이다. 이외수 작가의 예술관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바로 감성이다. 철저한 감성, 그것이 내가 느낀 이외수 작가의 예술관이다. 


나는 비평가를 준비하고 있는 대학원생이다. 그래서인지 이외수 작가가 말하는 감성과 직관에 대한 이야기가 쉽게 와닿지 않았다. 대담에서 감성과 직관에 대해 역설하는 이외수 작가의 말은 무언가 단호했고, 엄정했다. 감성이 아니라면 다른 것은 다 옳지 않다는 그런 느낌까지 받았다. 마음이 불편했다.


그리고 글을 쓰는 데 있어서 '에너지'를 중시하고 있었다. 판타지 소설에서나 볼 법한 '기'와 '에너지' 등을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이외수 작가의 입에서 들으니 엄청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마음에서 마음으로』는 첫 부분부터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글쓰기와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배척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외수 작가는 글을 쓰는 데 있어서 일가를 이룬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경지를 이룬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이유에 대해서 배우고 싶었다. 





이외수의 인생과 그가 사는 세상


강호동이 진행했던 프로그램인 <무릎팍 도사>에서 본 것이나 『마음에서 마음으로』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외수 작가의 인생은 정말 파란만장했다. 아니 파란만장이라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험난한 인생이었다. 자발적으로 선택한 인생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책에 나온대로라면 그가 대중적인 작가로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계기는 가족이었다. 이외수 작가는 자신이 가난하고 배를 곯는 것은 자신이 선택한 일이라 참을 수 있었지만, 그로 인해 자신이 책임져야할 가족이 배를 곯고 아픈 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외수 작가는 자신의 아내가 아프자 자신의 신념을 굽히고 딱 한 번, 돈을 벌기 위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 글이 계기가 되어 이외수 작가는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고,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 이제까지 읽은 책을 보면 각 부분에서 일정한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 큰 역경을 겪는 사람이 많았다. 이외수 작가의 인생을 보면서 나의 인생을 되돌아보니 참 평탄한 인생을 살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외수 작가의 인생은 좀 더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했다.


책에 이외수 작가의 혼외자식 이야기가 짧은 내용으로 언급돼 있었다. 대중에게 자신의 전반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혼외자식 논란에 대해서 쓸 수 있다니, 참 대담한 사람이란 생각도 했다. 이외수 작가의 모든 인생을 알지 못하기에 그의 도덕적인 부분에 무어라 말을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가 감당해야할 몫이기에.





이외수 작가는 우주인?


이외수 작가의 우주에 대한 생각을 글로 접하면서 참 혼란스러웠다. 그는 과연 인간이 맞을까.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물론 나도 개신교를 다니면서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믿음을 가졌었지만 그것은 믿음뿐이었지 실제로 외계인과 교신을 하거나 어떤 행위를 한 것은 아니었다. 이외수 작가는 그것을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채널링, 아카식 레코드, 정령, 육안, 뇌안, 영안 등 중학교 시절에 읽던 판타지소설에서나 나오는 단어들을 유명 작가의 대담집에서 볼 수 있다니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이외수 작가가 외계 지성체나 그와의 채널링, 아카식 레코드를 이야기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더이상 얻을 것이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외수 작가가 감성과 직관을 말하는 것은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을 꺼려하기 때문이고, 자연이 만든 세상을 꺼려하기에 초자연적인 것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초자연적인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천착하기 보다는 '나'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을 파고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외수란 작가가 이렇게 거침없는 것은 인기가 많아서가 아니라 세상에 미련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스스로가 그의 전 재산일 테니까 말이다.


이외수는 이외수다


이외수 작가는 말 그대로 이외수다. 누군가의 잣대로 평가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누가 그를 평가하고 재단할 수 있겠는가. 이외수 작가를 칭송하거나 폄훼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보이는 그대로, 그가 행하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면 그것이 이외수 작가일 것이라 생각한다.


『마음에서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지만 나이가 들고 많은 경험을 한다면 언젠가 이외수 작가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 이해하기 힘든 것 중에서도 마음에 새길만한 글이 있었다. 불안한 20대를 살고 있어서 그런지 이 글이 참 위안이 됐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이를 통해 위로를 받으셨으면 좋겠다.


"10대는 다몽기다. 꿈이 많은 시기다. 보는 것마다 꿈이 된다. 20대는 선몽기다. 여러 가지 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기다. 딱 하나의 꿈, 나를 온전히 바쳐도 아깝지 않을 꿈을 찾는 것이 20대가 할 일이다. 20대에 출세를 꿈꾸는 건 옳지 않다. 30대는 전심기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10년을 바쳐서 온 생을 불태우겠다는 각오로 전력을 다하면, 40대의 용비기에 다다른다.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다. 인생이란 40대에 비로소 펼처진다. 이것이 정석이다. 이것이 정석이다. 50대부터는 소요기에 접어든다. 노닌다. 40대에 다 펼치고, 50대는 즐기고 노니는 것이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274-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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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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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는 나치가 자행한 유럽유대인의 절멸(이하 절멸)’을 뜻한다. 처음 이 단어를 접했을 때는 단지 절멸을 뜻하는 고유명사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홀로코스트는 본래 번제물이라는 뜻을 가진다. 번제물은 신에게 바치는 희생양이라는 뜻이다. 과연 절멸이 신을 위한 번제물이었나. 지금에 와서야 이런 의문이 들었다. 조르조 아감벤은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에서 홀로코스트를 무의미한 죽음을 정당화하려는, 즉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것에 의미를 되돌려주려는 무의식적인 요구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절멸의 증언자인 프리모 레비도 마찬가지였다.

 

아감벤과 레비의 말처럼 절멸에 의한 유대인의 죽음은 무가치한, 무의미한 죽음이었다. 무가치한 죽음을 목격하고 증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더군다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죽음이 육백 만에 달한다면 그곳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어떤 심경일까. 당시를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인간의 죽음이 그토록 무가치하다는 사실은, 그 시기에 관심을 가지게 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죽음의 수용소를 겪지 못한 자들은 증언자를 통해서만 그때를 구성할 수 있다. 증언자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프리모 레비.

 

프리모 레비는 절멸의 당사자인 유대인의 충실한 대변자였다. 그는 아우슈비츠라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나와 나치가 벌인 유대인 대학살에 대해 증언하려 펜을 들었다. 이것이 인간인가등 여러 책들과 인터뷰를 통해 당시의 참상을 낱낱이 증언했다. 그런데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가 돌연 아파트 3층 난간에서 뛰어내려 죽어버렸다. 자살한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 대다수는 증언하는 것을 꺼렸다. 아마 그때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살아남은 자들 중에서도 레비는 증언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그가 왜 돌연 자살한 것일까.

 

증언할 수 없는 증언자

 

증언한다는 것은, 자신이 겪었던 것을 세상에 토해내는 작업이다. 증언한다는 것은, 증언하려고 하는 사건의 당사자여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그 당사자가 죽었다면 어떻게 할까. 그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을 과연 증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당사자들이 없는 증언에는 메울 수 없는 공백이 있다. 그것은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들의 증언에는 죽은 자들이 없다. 살아남은 자들은 그 공백 때문에, 어떤 상실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것은 증언자나 침묵하는 자나 동일하게 느끼는 것이리라.

 

프리모 레비도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증언자임에도 우리 생존자들은 진정한 증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증언조차 이것은 내가 다른 사람의 회상을 읽고 자신의 회상을 세월이 지나읽는 사이에 조금씩 희석하게 된 이상한 생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증언의 공백에서 온 어떤 상실감 때문에 프리모 레비는 돌연 자살한 것이 아닐까.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증언하면서 처음 그 공백을 느끼고, 그것이 점점 그의 몸을 잠식해가는 느낌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을 것이다. 증언의 공백이 레비의 몸을 집어삼켰을 때쯤 그는 아파트 3층 난간에서 뛰어내려야 한다는 내면의 외침을 외면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인간에 대한 의문

 

과연 증언의 공백만이 그를 자살로 내몰았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프리모 레비는 죽음의 수용소를 경험하면서 인간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그것은 수용소를 경험했다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물음이었을 것이다. 절멸이 과연 인간이 할 수 있는 행위인가. 절멸이 인간적이라는 수사에 포함될 수 있는가. 절멸 이후 인간이라는 것은 그 의미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인간이라는 명제에 금이 간 시대에 그 균열을 메워보려 한 자였다. 그는 수용소에서 해방된 이후 줄곧 그러한 삶을 살아왔다.

 

그는 독일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독일인들은 절멸이란 행위를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모른 체 했다. 절멸에 대한 침묵은 암묵적인 동의였음에도 말이다. 조해진의 단편 빛의 호위에는 이런 독일인을 본 레비의 심정이 그대로 담겨 있는 문장이 있다.

 

사람들이 노먼을 시대의 양심이니 유대인의 마지막 희망이니 하는 수식어로 포장하는 걸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어요. 그런 거창한 수식어 뒤에 숨어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정의의 증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건, 뭐랄까, 나에겐 천진한 기만 같아 보였죠. 알려 했다면 알았을 것들을 모른 척해놓고 나중에야 자신은 몰랐으므로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홀로코스트의 잔인함에 양심적으로 경악하던 그 수많은 비유대인들을 나는 기억하고 있어요. 화가 나진 않았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그저 무기력해졌을 뿐이에요. 무기력한 환멸 같은 거, 그런 거였죠.”

 

무기력, 무기력한 환멸. 프리모 레비는 아마 이와 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홀로코스트의 잔인함에 양심적으로 경악하던 그 수만은 비유대인들을 목격하면서 그는 인간이란 것이 과연 인간인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그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절멸을 은폐하려는 독일 수정주의 학자들의 움직임은 그의 감정을 더 격화시켰을 것이다. 그의 돌연적 죽음은 절멸 이후 인간이라는 명제에 난 균열을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음을 폭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다는 수치

 

모두가 죽었는데, 나만 살아남았다는 사실. 이것은 분명 안도의 감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죽음의 수용소라면 안도의 감정보다는 수치의 감정이 더 클 것이다.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은 자의든 타의든 나치에 일정한 도움을 줬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절멸에 동조했다는 수치로 바뀌게 된다. 남이 그것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위로할지라도 당사자에게는 수치일 수밖에 없다.

 

프리모 레비는 너희는 타자를 대신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수치스러운가? 게다가 자신보다 마음이 넓고 섬세하며 유용하고 현명하며 살아 있을 가치가 있는 누군가를 대신해서…… 이 감정을 억누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절규하는 듯 했다. 또 그는 누구나가 그 형제들에게 카인이라고, 그것이 우리를 좀먹고 초조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레비는 살아남은 자들을 자신의 동생인 아벨을 죽인 카인이라고 칭한다. 그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오로지 수치 때문이다.

 

프리모 레비는 앞서 언급한 것들 외에 수많은 이유 때문에 스스로의 몸을 던졌을 것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살아남은 자들의 처절함에도 그와 같아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를 내는 이도 있다. 한나 아렌트는 망명 유대인들의 돌연한 죽음을 자기본위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들은 누군가 죽으면 이제야 그 사람이 완전히 어깨의 짐을 벗었구나 하고 쾌활하게 생각하곤 했고, 결국에는 자신도 얼마나마 어깨의 짐을 벗을 수 있길 원하게 되고, 그래서 실제로 자살하고 만다는 것이다. 아렌트의 글은 프리모 레비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자기본위적 죽음을 감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그는 자신이 빚진 자들의 무게를 그때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을 완수했다고 여긴 것일까.

 

증언하지 않는다면 공백조차 없다

 

죽은 자들은 증언할 수 없다.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자들도 증언을 그쳐야만 하는가.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증언은 계속 되어야 한다. 증언하지 않는다면 공백조차 생기지 않을 것이다. 프리모 레비의 증언이 의미 있는 것은 죽은 자들이 남긴 공백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이 없다면 죽은 자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증언 속 공백은 죽은 자들이 남긴 흔적이다.

 

나치의 친위대원은 죽음의 수용소의 수인들에게 너희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낄낄댔다고 한다. 이것이 증언이 필요한 이유다. 인간이라는 명제는 이미 균열되었다. 절멸은 다시 한 번 그것이 일어날 가능성을 제시했다. 인간 아닌 인간적 행위를 막기 위해서라도 증언은 계속되어야 한다.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만이 죽은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 증언의 공백을 통해서만 증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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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아침을 열다 - 마음이 한 뼘씩 자라는 이야기
사색의향기문화원 지음, 이영철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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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아침을 열다』 리뷰



 

책을 읽을 때 얻는 깨달음은 짜릿함을 준다. 하지만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서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적이 있다. 끙끙대며 읽은 책인데도 뭔가를 얻지 못해 자괴감에 빠질 때도 있다. 그런데 어떤 때는 한 줄의 문장을 읽었을 뿐인데도 말할 수 없는 상쾌함을 느끼고, 척박한 삶을 살아갈 힘을 얻은 적이 있다.

 

책 한 권뿐만 아니라 한 문장에도 이렇게 강력한 힘이 있다면 누군가 나를 위해 좋은 문장, 삶을 돌아보게 하는 문장들을 보내주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누군가 그런 문장을 보내온다면, 그 문장을 읽고 곱씹는 하루는 왠지 멋진 하루가 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그런 좋은 문장들을 매일 아침 보내주는 곳이 있었다. 바로 사색의 향기 문화원이다.

 

사색의 향기 문화원은 매일 명언산책, 책속의글, 세상보기, 독자의글, 문화읽기 등을 주제로 한 향기 메일을 회원들에게 보내주고 있다. 향기 메일은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통해 자극적이고, 단발적인 인터넷 콘텐츠에 익숙해진 현대인을 위해 사색하고 곱씹을 수 있는 문장을 전달해주는 서비스다.

 




현대인은 팍팍한 삶 때문에 책 읽을 시간도 없고, 생계에 바빠 생각할 여유조차 없다. 이럴 때 마음을 울리는 한 문장이 주어진다면 그 삶은 조금이라도 나은 삶이 아닐까. 향기 메일은 이러한 취지에서 시작됐다. 사색의 향기 문화원은 지난 10년 간 보낸 2,400여 건의 향기 메일 중 120편을 선별해서 올해 사색의 향기, 아침을 열다란 책으로 묶었다.

 

사람, 희망, 마음, 사랑의 잠언집

 

사색의 향기, 아침을 열다를 펼치면서 류시화 시인이 엮은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란 책이 떠올랐다. 삶의 지침으로 삼을 수 있는 잠언들의 모음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는 상투적인 경구일 수도 있는 것들이다. 나도 처음에 책을 읽었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책을 읽다가 사색의 향기 문화원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사색한 것들을 서로 공유하고 있었다. 아마 이들은 아무런 공통점도 없을 것이다. 오로지 향기 메일을 통해서 소통하고 공감하는 이들일 것이다. 사색과 공감의 장이 사색의 향기 문화원이란 곳에 열린 것을 보니 내심 나도 향기 메일을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몇 줄의 문장이

우리의 삶을 전면적으로 돌아보게 하지요.

몇 줄의 이야기가

상처받은 우리의 마음에

깊은 위안을 주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할 때가 있습니다.


서문 중에서

 

그제야 사색의 향기, 아침을 열다란 책은 향기 메일을 통해 소통하고 공감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상투적이면 어떤가. 상투적인 문장도 읽는 이의 상황, 기분, 환경에 따라서 큰 감동을 줄 수 있다. 어떤 때는 그냥 스쳐지나갔던 문장이 또 어떤 때는 눈물을 왈칵 쏟게 만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경구만 곱씹어 보는 것도 좋다

 

사색의 향기, 아침을 열다는 명사들의 문장과 그 문장을 풀어낸 짧은 글귀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사색이라는 것을 처음 하는 사람들은 명사들의 문장과 그 문장을 풀어낸 짧은 글귀를 같이 읽는 것이 좋다. 명사들의 문장이 어려울 수도 있고, 짧은 글귀가 사색을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색을 좀 해본 사람이라면 명사들의 문장만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명사들이 남긴 글이나 말은 문장이긴 하지만 시에 가깝다. 그 문장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이렇게해석될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저렇게해석될 수도 있다. 명사들의 문장에 담긴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또한 직접 그 의미를 발굴해 낸다면, 거기서 오는 쾌감은 더 클 것이다.

 

사색은 문화의 향기를 피워 올린다

 

사색의 향기 문화원은 사색의 향기란 명칭의 뜻을 이렇게 말한다. “사색을 통해서 사고와 분별과 견해를 갖게 된다. 그것이 곧 생각이다. 생각이 자리 잡으면 그 생각으로부터 상상력이 발휘된다. 그리고 그 상상력은 새로운 문화를 창출한다. 사색을 통하여 문화의 향기를 피워 올리는 것이다. 그 문화는 공유되고 나누어지면서 행복한 문화나눔터를 만들어 나가게 된다.”

 


▲ 사색의 향기 문화원 홈페이지



사색의 향기, 아침을 열다를 통해 사색의 첫 출발을 시작하는 건 어떨까. 한 문장에서 시작하다보면 한 문단이 될 것이고, 그것은 결국 책 한 권이 될 것이다. 또 이 책을 읽고 마음이 동한다면 사색의 향기 문화원이 보내는 향기 메일도 한 번 받아보는 것은 어떨까. 삭막한 메일함 속에서 따뜻한 한 문장이 담긴 메일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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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공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에리카 종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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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飛行)에 대한 공포. 그것은 어떤 공포일까. 단어 그대로 날 수 없다는, 고소공포증과 비슷한 공포일까. 아니면 세상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 없는, 세상이 주는 치명적 달콤함을 이길 수 없다는 그런 뜻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비행(非行)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억압적 상황에 대한 공포일까. 비행공포라는 제목만으로는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에리카 종의 비행공포는 남성중심사회가 만들어낸 여성성이라고 할 수 있는 가사와 육아를 끔찍이도 싫어하지만, 동시에 남자에게 구속당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진 주인공 이사도라 화이트 윙의 이야기다. 소설은 주인공인 이사도라의 삶 전체를 관통하면서, 남성중심사회 속의 여성과 혼란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비행공포를 주인공인 이사도라가 네 명의 남자를 길잡이로 삼아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정의하고 싶다. 소설 속에서 이사도라는 항상 자신이 만나는 남성에게서만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는다. 하지만 그것은 공허한 몸짓에 불과하다. 이사도라 자신이 없는 결혼생활은 매번 결핍을 만들어냈고, 남편과는 항상 불화했다. 그래서 이사도라는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지퍼 터지는 섹스를 갈망했다.

 




그 욕망은 세 번째 남자인 베넷과 정신분석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떠났을 때 달아올랐다. 거기서 에이드리언을 만났기 때문이다. 당시 이사도라는 자신이 환상으로만 생각했던 지퍼 터지는 섹스를 에이드리언과 경험했다고 믿었다. 그것은 베넷과의 결혼이 주는 안정감을 던질 수 있게 만드는 강력한 믿음이었다. 결국 이사도라는 베넷을 포기하고 에이드리언과 사랑의 여행을 떠난다.

 

이사도라는 에이드리언을 자신이 선택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판이었다. 그것은 앞선 세 명의 남자와 마찬가지로 에이드리언을 자신의 존재가치로 삼는 것이었다. ‘자신이 없는 욕망은 끝내 스스로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에이드리언은 자신의 부인과 자식을 만나기 위해 이사도라를 버리고 떠난다. 이사도라는 분노하지만 남은 것은 단지 자신 밖에는 없었다.

 

에이드리언을 쫓아 햄프스테드로 가지 않을 것이다. 자기파괴적인 열정 때문에 내 삶을 망치지 않을 것이다. 따라가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다. 내 안의 또다른 나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던지지 못하는 이사도라를 경멸한다. 그러나 이제 가식은 필요치 않다.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자기희생 다윈 이제 관심 없다. 로맨틱한 여주인공이 될 수 없을지는 몰라도 나는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건 그것뿐이었다.”

-『비행공포554

 

나는 여전히 살아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건 그것뿐이었다.” 이사도라는 자신이 지퍼 터지는 섹스를 했다고 믿었던 에이드리언에게 배신(?)을 당하면서, 이제까지 자신이 가진 것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 외에는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이 바로 이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르트르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실존이 조금은 선명해지는 느낌이었다.

 




이사도라는 다시 베넷을 찾아 런던으로 떠난다. 그것은 이사도라에게 이전과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 이전의 사랑과 의존성이 사라진 상태, 그것은 아마 에이드리언에게 버림(?)받고 난 이후 호텔에서 이사도라 스스로 씻어낸 것이리라. “살아남는다는 건 자꾸만 다시 태어나는 걸 의미했다는 이사도라의 말처럼, 이사도라는 다시 태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껏 사랑이 실망 외에 무엇을 주었던가? 아니면 내가 사랑에 잘못된 기대를 품었던가? 나는 남자 속에서 나 자신을 잃고 싶었고, 나 자신이기를 멈추고 싶었으며, 빌린 날개로 천국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이사도라 이카루스라고 불러주세요. 그러나 빌린 날개들은 내가 필요로 할 때 붙어 있어주질 않았다. 아무래도 내 날개를 길러야 할 것 같다.“

-『비행공포555

 

베넷이 들어오면서 소설은 끝난다. 베넷이 들어온 이후 어떤 말을 했을지 궁금하다. 갑작스런 등장에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을 수도 있고,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쉴지도 모른다. 또 이사도라의 비행(非行)을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TV를 켤 수도 있다. 아마 베넷은 욕조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이사도라를 감싸는 날개를 봤을지도 모른다. ‘비행(飛行)의 공포를 이길 수 있게 하는 커다란 날개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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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뚱해서 죄송합니까? - 예뻐지느라 아픈 그녀들의 이야기 생활의 발견 시리즈 1
사단법인 한국여성민우회 지음 / 후마니타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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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회는 외모가 계급인 사회다. 물론 외모 외에도 직업, 학벌, 돈 등 계급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가 있지만 가장 큰 요소는 외모일 수밖에 없다. 사람을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첫인상이라고 하는데, 첫인상에는 외모가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제 외모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암담한 시대가 됐다. 연애도, 취업 면접도, 인간관계도. 외모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면 불이익을 받는 어처구니없는 세상이 돼버렸다.

 

자기 관리가 외모 관리가 된 시대다. 무릇 자기 관리라면 능력을 계발하거나 시간과 건강을 관리하는 뜻이어야 마땅하지만, 다른 어떤 것이 뛰어나든 뚱뚱하면 자기관리에 실패한 사람 취급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황당하면서도 견디기 힘들다. 이런 주변의 시선은 대부분 여성들이 받게 된다. 최근 남성들도 외모 관리의 대열에 뛰어들었지만 여성들에 비하면 그것은 상당히 견딜만한 것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사회의 시선을 견디며 침묵해온 여성들이 드디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를 한국여성민우회가 모아 뚱뚱해서 죄송합니까?란 책으로 만들었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성평등한 민주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운동 단체다. 만약 다른 단체나 연구자가 이런 책을 썼다면 모르겠지만, 여성을 위해 노력하는 한국여성민우회가 낸 책이라 그 진정성이 느껴진다.


대한민국에서 지금까지 뚱뚱해서 죄송합니까?와 같은 책이 나오지 못한 것은 못생긴 오크녀의 자기변명이자 피해의식이라는 재갈에 물려 거의 모든 여성들은 발언권뿐만 아니라 신체적·심리적·사회적 생사여탈권을 박탈당해왔기 때문이다.(124)” 여성의 권리를 찾기 위한 운동을 보는 시선에서 마저 외모지상주의가 깔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족이 더 무서운 이유

 

뚱뚱해서 죄송합니까?의 내용처럼 뚱뚱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첫 장소는 가정에서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집에서 가장 많이 듣는 것은 살 빼라는 소리다. 매번 볼 때마다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지겨울 만도 한데 그칠 줄을 모른다. 이제는 무덤덤하지만 뚱뚱한 아들은 창피하다는 말을 듣고 있으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주변의 시선을 감당하고 온 사람을 보듬어줘야 할 가족마저도 그런 눈치를 주니 어느 누가 세상을 견딜 수 있을까.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는 일이 있어요. 제가 초등학교 때 어머니랑 같이 고층 아파트 사는 친척 집에 갔다가 나오는 길에 있었던 일이에요.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다가 중간에 멈추고 어떤 아저씨가 타는 순간, 무게가 다 차서 ~’하는 거예요. 저는 아무 생각 없이 있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완전 소심하게, “죄송합니다이러시는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제가 엄마한테 엄마가 뭐가 죄송해, 우리가 먼저 탄 건데!” 그러니까 엄마가 내가 뚱뚱해서 그래그러시는데……. 어린 마음에 가슴이 너무 아픈 거예요. 왜 우리 엄마가 먼저 탔는데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싶고요.”

- 『뚱뚱해서 죄송합니까?빅뷰티의 인터뷰 중에서

 

이 인터뷰를 보고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엘리베이터를 탈 때면 가장 앞에서 타려고 한다. 조금 늦게 엘리베이터를 타 소리라도 울리면 내가 조금 더 먼저 탔음에도 덩치 때문에 스스로 눈총을 받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대한민국이 이런 사회가 됐는지 알 수 없다. 뚱뚱한 게 인 사회, 예쁘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사회 생각하면 할수록 최악이라고 느낀다.


뚱뚱한 사람도 당당할 수 있다


뚱뚱한 사람들은 차별받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나서거나 뭉치지 못한다. 미국처럼 뚱뚱한 사람이 그렇게 많지도 않을뿐더러 이미 뚱뚱한 것이 라는 것을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뚱뚱한 사람마저도 그렇게 믿어버리는 마당에 어떤 변화를 만들 수 있을까. 하지만 뚱뚱해서 죄송합니까?란 책이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의 2부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의 목소리는 힘이 약하지만 다수의 목소리는 어떤 강력한 힘을 가진다. 대한민국 사회의 외모지상주의에 대해 비판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끊임없이 외모 관리를 해야 사랑을 받고, 취직이 되며, 자신감과 자기애가 생기는 현실 자체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124)” 뚱뚱해서 죄송합니까?가 비록 작은 책이지만, 그 작은 씨앗을 통해 언젠가는 뚱뚱한 사람들이 득은 없을지언정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 오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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