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조선미술 순례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반비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시안컵이 한창이다. 한국이 결승에 올라 열기가 더욱 뜨겁다. 응원의 열기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렸을 때의 모습을 방불케 했다. 오랜 기간의 침체를 딛고 우리 축구대표팀이 승승장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같은 국가대항전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라는 기치 아래 하나됨(oneness)을 느끼곤 한다.

 

우리라는 개념은 우리 아닌 자를 규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부르짖었던 나치독일이 순수한 게르만 혈통을 도출해낸 방법은 여러 인종이 섞여 있는 국민 속에서 게르만 혈통을 도려낸 것이 아니었다. 유태인, 동성애자, 집시 등을 배제한 나머지를 순수한 게르만 혈통이라 불렀다. 우리라는 개념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배제하고 남은 잔여물이며, 상상의 공동체인 것이다.

 

그렇다면 본래 우리였으나 모종의 이유로 우리라는 집단에서 배제된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예컨대 일제강점기에 나타난 재일조선인과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타국으로 입양된 자 등을 비롯해 북한 주민들이나 탈북인들까지 이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근원에서부터 거세된 자들이며, 뿌리 없이 경계에서 살아가는 이방인이다.

 

한국이 아니라 조선인 이유

 

이 책의 제목에 나는 조선미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한국미술이라는 호칭을 일부러 쓰지 않은 이유는 한국이라는 용어가 제시하는 범위가 민족 전체를 나타내기에는 협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이라는 호칭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물론이고 재일과 재중 동포 등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포함되어 있지 않기에 모든 조선 민족에 의한 미술 행위를 한국미술로 한데 묶어 부르기에도 무리가 따른다.(8-9)

 

서경식은 타의에 의해 우리라는 뿌리가 거세된 자들에 관해 천착하는 인물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재일조선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던 프리모 레비의 흔적을 더듬었던 <시대의 증언자 프리모레비를 찾아서><디아스포라의 눈>과 같은 저작은 그가 끈임없이 경계를 탐구한 결과물들이다.

 

<나의 조선미술 순례> 역시 미술 순례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앞선 책들과 동일한 맥락 하에 있다. 저자는 신경호, 정연두, 윤석남, 이쾌대, 신윤복, 미희=나탈리 르무안, 홍성담, 송현숙 등의 작가를 입을 빌어 5.18 광주민주화운동, 청년, 여성, 일제 식민지 시기, 남북 분단, 디아스포라 등의 문제를 우회적으로 다룬다. 저자는 미술을 미학적 관점에서 다루는 것은 물론, 미술이라는 창을 통해서 나타나는 배제 또는 소외된 자의 모습을 포착해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우리미술에 관한 재정립

 

보편적으로 우리라는 개념의 전제에는 우월성이 깔려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한국인에게 우리라는 수사를 붙여 내세우는 까닭은 한국인이 세계를 상대로 우월함을 드러냈다는 데서 기인한다. 미술도 여기에 자유로울 수만은 없다. “미술을 둘러싼 이야기는 많은 경우 어떠어떠한 사람들이 지닌 미의식이라는 정해진 문구에 따라 통용되면서 자민족 중심주의를 강화하는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해왔다.”(245) 재일조선인인 저자도 완강히 거부하려했지만 일본적 미의식의 침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장승업이 그린 원숭이 그림을 별 생각 없이 바라보면서 동시대 일본의 화가와 비교하려는 미숙한 견해밖에 가지지 못했다. 조선 쪽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으쓱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별로 잘 그리지 않았다고 보일 때는 분하다는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내 안에 존재했던 우열의 기준 그 자체가 일본에서의 긴 시간을 걸쳐 내 속에 침투해버린 이데올로기는 아니었을까?(246-247)

 

저자는 우월성이라는 미술의 이데올로기적인 속성을 제거하기 위해 미술계의 주류가 아닌 주변부에 머무는 작가와 그들의 작품으로 순례를 떠난다. 그것은 주변부에서부터 중심으로의 개입을 통해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묻혀있는 조선미술을 캐내는 작업이다. 다시 말하면 저자의 순례는 한국의 위대한 문화적 전통이나 민족적 미의식을 발견해 내려는 것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문맥을 선명히 드러내려는 것이다. 이는 재일조선인인 저자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순례다.

 

저자는 환갑이 넘는 노구를 이끌고 조선미술 순례를 감행했고,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지난한 여정이었음이 분명함에도 저자는 책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미술가들이 있음을 아쉬워했다. 특히 옌볜의 조선족 미술가들을 다루지 못한 것을 자신의 능력부족 탓이라 여기며 안타까워했다. 저자는 이제 순례의 지팡이를 내려넣고 나무 등걸에 앉아 쉬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의 조선미술 순례>끝나지 않은 여행의 중간보고라고 말했다. 그가 다시 순례 길에 오르는 날을 고대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족의 발견 - 가족에게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은 나를 위한 심리학
최광현 지음, 윤나리 그림 / 부키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족의 발견>은 <가족의 두 얼굴>이란 책으로 가정 문제 전문가로 이름을 알린 최광현 교수의 두 번째 책이다. <가족의 두 얼굴>이 가족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중점을 뒀다면, <가족의 발견>은 가족이 받는 상처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지 밝혀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민낯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안식처는 어떻게 지옥으로 바뀌나

지옥이라 일컬어지는 세상에서 개인에게 최후의 보루가 있다면, 그것 중 하나는 분명 혈연(血緣)일 것이다. 피로 묶인 사이라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최근 천만 관객을 넘긴 영화 <국제시장>의 초반부에서 잃어버린 딸을 찾기 위해 전쟁터로 몸을 던지는 아버지처럼, 불가피한 상황에서도 끊을 수 없는 것이 혈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족의 친밀함은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부작용은 친밀함이 관성(慣性)으로 변하면서 시작된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안다'는 어떤 영화의 대사처럼,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내재한 친밀함은 어느새 당연한 것이 된다. 당연시된다는 것은 폭력적 관계의 전조다.

자신이 갖고 싶던 물건을 구매했을 때를 기억해보자. 누구든 그 물건을 애지중지 다룰 것은 자명하다. 신줏단지 모시듯 조심스럽게 다루고, 누군가 그것을 건들면 버럭 화를 낸 적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의 소중함은 저물고, 아무렇게나 버려두어도 별 감흥이 없다. 이렇듯 타성에 젖은 가족의 친밀함이란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는 오래된 물건과 같다. 

이는 심심찮게 들리는 가정폭력 사건과 여러 가정 문제의 발단이 된다. 보편적으로 가족 공동체의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은 아버지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아버지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정 문제의 시작은 보통 권력을 가진 이, 즉 아버지에게서 먼저 일어난다(물론 생계를 아버지가 아닌 다른 이가 책임지고 있다면 권력 관계는 달라진다).

우리의 의식은 모순도, 아픔도 애써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려 하지만, 무의식 속에 있는 그림자 인격은 그러한 자아를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 그림자는 더욱 커지게 되고, 이로 인한 심리적 불균형은 어떤 식으로든 그림자를 해소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들은 자기도 모르게 가족을 그림자 해소 도구로 사용하게 된다. (113쪽)

현재 사회는 부조리와 부정 부패 등이 만연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간다. 우리는 '좋은 게 좋은 것'이라 생각하고, 그냥 지나가면 될 일이라 여긴다. 하지만 억압 당한 상태의 잔여물은 우리 내면의 보이지 않는 장소에 켜켜이 쌓여 있다. 저자는 그것을 '그림자'라고 명명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회에서 받은 스트레스는 '그림자'란 형태로 변해 우리의 내면에 지속적으로 쌓인다. 그림자를 건전한 방법으로 해소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쌓여있는 그림자를 배출할 수 있는 건전한 해소의 통로는 일부의 몫일 뿐,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부재한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그림자는 누군가를 향해 터질 수밖에 없다. 건전한 해소의 통로가 부재한 상태에서 가장 쉽게 해소의 도구로 이용되는 것이 바로 가족이다.

가족은 충분히 자신의 그림자를 감당할 수 있다는 안일함이 안식처를 지옥으로 만들어버린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폭력을 당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외부에서 당한 억울함을 가족을 상대로 한 폭력으로 풀거나, 자신이 당한 억압을 대신 해소해주길 원하는 등의 일은 지금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거기서 끝난다면 좋겠지만 대물림되기까지 한다. 악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경계 긋기와 접근성 사이에서

경계를 존중받지 못하면 아이는 독립된 한 사람으로 성장할 기회를 빼앗기게 된다. 그러면 부모 자녀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기보다는 지긋지긋한 애증의 관계가 된다. (중략) 경계가 존재한다면 이번에는 접근성이 필요하다. 아이는 부모 둘 중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치지 않고 양쪽 모두에게 다가갈 수 있으며 가족 모두와 정서적으로 교류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194쪽)

가족이 화목하다는 것에는 친밀함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화목한 가족 사이에는 확연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확실한 경계가 그어져 있다. 마냥 친밀한 것보다 각자의 사생활을 상호 존중하고 경계를 넘지 않는 것이 화목함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다. 가족은 관념적인 집단이 아니라 독자적인 개인이 모인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가족끼리 경계를 그으라고 해서 서로 벽을 치라는 뜻은 아니다. 접근성 역시 중요하다. 같이 산다는 것은 상호 소통과 협력이 전제된 것이다. 같은 집에 산다고 해도 소통과 협력이 없다면 그것은 그저 '사는' 것이지 '함께' 사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능력은 서로의 사생활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접근성을 유지하는 거리 조절 능력이다. 일정한 경계와 적절한 접근성이 가족의 화목을 지키고, 부모의 그림자를 대물림하지 않을 수 있다. 가족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에서 개인을 발견하고, 관념 속에서 개인을 끄집어 내 서로 소통하고 존중하는 것이 진짜 '가족을 발견'하는 일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회적 영성 - 세월호 이후에도 ‘삶’은 가능한가
김진호 외 지음 / 현암사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 <쿼바디스>라는 영화가 화제다. <쿼바디스>는 고통받는 자와 함께 했던 예수의 삶을 잊고 세속의 논리에 편승해가는 한국교회의 실상을 고발한 영화다아직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한 명의 비판적 개신교인으로써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지는 불 보듯 뻔하다예컨대 개신교 성직자인 목사의 여러 성추문바벨탑처럼 끝없이 올라가는 교회의 모습교회가 사유재산인 양 자식에게 세습하는 목사 등의 행태일 것이다이러한 개신교의 모습은 소위 '개독교'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더불어 개신교는 세월호 사건 이후 막말 행렬에도 끼어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사단이 빚어졌는지 모르겠다.", "하나님이 공연히 이렇게 (세월호를침몰시킨 게 아니다나라를 침몰하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대한민국 그래도 안 되니이 어린 학생들이 꽃다운 애들을 침몰시키면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등의 말은 믿을 수 없지만 목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한국교회의 이러한 행태로 인해 개신교는 사람들에게 있어 본연의 모습을 잃고 개독교의 모습으로 각인되었다하지만 개신교 주류의 부적절한 행태를 비판하며 자정하려는 노력도 있다예컨대 개신교언론인 <뉴스앤조이>는 멈추지 않고 개신교의 부적절한 면을 비판하고팟캐스트 방송 <내가 복음이다등도 왜곡된 복음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더불어 민중신학자 김진호를 필두로 여러 학자들이 모여 출간한 <사회적 영성>이라는 책도 동일한 맥락에 있다. <사회적 영성>은 세월호 이후의 삶세월호 이후의 신학을 묻고 있다.


사회성이 결여된 한국교회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장 18)


한국교회는 이제 사람들에게 완전한 개독교로 자리 잡았다예수는 만민의 구원을 외쳤으나 그를 따르는 자라고 자처하는 신도들은 스스로의 구원에 천착하고 있다또한 예수는 가난한 자포로된 자눈 먼 자눌린 자 등에게 집중했으나 그를 믿는 자라고 자처하는 이들은 스스로의 복을 구하는데 바쁘다누군가는 진정한 예수의 삶을 실천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의 눈에 비친 한국교회는 자신의 구원자신의 복만을 간절히 구하는 곳이 되었다.


요컨대 한국교회는 사회성이 결여되어 있다아무리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것이라도 모든 것이 신의 이름으로 용인되는 것이 한국교회다그렇지 않고서는 세월호 참사로 인해 학생들이 희생된 것이 "하나님이 기회를 준 것"이라고는 감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이렇듯 사회와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세월호 참사에 있어 종교로써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이는 당시 방한한 프란체스코 교황이 열렬한 환호를 받은 것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사회적 영성>은 기존 개신교의 이 같은 문제점을 파고든다. <사회적 영성>은 교회적 영성을 비판하고 사회적 영성으로의 전환을 꾀한다그들이 말하는 교회적 영성이란 교회 안에 한계 지어진 영성다시 말하면 "자기중심의 배타적인 교리 도그마"(245)에 빠져 있고, "뇌물사기편법 건축부당한 펀드 투자 등으로 수십수백억아니 수천억 원을 남용"(245)하는 영성이다그들은 이러한 교회적 영성에서 지적도덕적 성찰을 기반으로 "타인과 함께 수평적으로 나누는 관계의 품성"(246)을 갖춘 사회적 영성으로 도약하고자 하는 것이다.


교회적 영성에서 사회적 영성으로


"한국교회가 희생자가 아니라 가해자인 권력과 자본과 동맹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그들의 신정론과 관련이 있다. (중략전통적인 신정론의 목적은 하느님을 변호하는 것이다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전능함과 의로움이 부정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전통적 신정론은 결국 고통과 악을 신적 의지와 계획의 일부로 설명한다."(127~128)

 

한국교회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지향의 문제다한국교회의 지향점은 자신이 구원받는 것이며 죽음 이후 천국과 지옥 중에 천국에 가는 것이다그들은 모두 위를 바라볼 뿐 아래는 내려다보지 않는다신의 은총과 은혜를 바랄 뿐 현재의 삶은 그저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그렇기 때문에 교회적 영성은 고립적이며죽음 이후에 있을 삶을 누리기 위한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전도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민중신학적 신정론은 하느님이 아니라 민중을 변호하고 편든다. (중략예수는 민중과 함께민중의 하나로 고통을 겪는다전능하신 하느님 예수가 민중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나약한 민중이 교권과 금권에 갇힌 예수를 구원한다민중이 스스로를그리고 하느님을 구원한다이런 민중신학적 신정론은 인정론이다."(128~129)

 

세월호 이후 한국교회의 실상은 사회에 낱낱이 고발되었다배타적이며 자기중심적인 한국교회는 이제 암적인 존재로써 사회에서 소멸되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이들이 종교로써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은 사회적 영성으로의 전환 외에는 남지 않았다위를 향했던 지향을 아래로 향하고고통 받는 자와 함께 했던 예수처럼 함께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신을 변호하는 것 이전에인간을 변호해야 한다.

 

나치를 저지하기 위해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했다가 처형당한 신학자이자 목사인 디트리히 본회퍼는 히틀러가 선거로 독일수상에 뽑힌 뒤 교회가 국가에 대처할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을 내놓았다첫 번째는 성경이 규정하는 대로 법과 질서의 환경을 조성하지 않을 때 교회가 국가의 결함을 지적하고두 번째는 국가의 행위에 희생당한 이들을 도와야 하며세 번째는 바퀴에 짓밟힌 희생자들을 싸매어줄 뿐 아니라 바퀴 자체도 저지해야 한다고 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신학자이자 목사임에도 사회문제에 침묵하지 않았고 신보다 인간을 먼저 변호했다이는 아마도 그가 사회적 영성을 가졌기 때문이지 않을까한국교회에게 이러한 모습을 바라기에는 아직까지 요원하다맹신하고 있는 교회적 영성을 버리고 사회적 영성으로 변하지 않는다면 한국교회는 살아남을 수 없다이제 한국교회는 자문해야 한다. “쿼바디스.” 한국교회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란의 도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반란의 도시 -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령운동까지
데이비드 하비 지음, 한상연 옮김 / 에이도스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최근 정치권에서 사자방이라는 단어가 핵심적인 키워드로 떠올랐다. 사자방이란 4대강 사업, 자원외교, 방위산업을 뜻하는 말로 최근 밝혀져 논란이 된 자원외교와 방위산업 비리를 해결하고 관련자를 처벌해야 한다며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이 사자방 국정조사를 요구하면서 이슈가 됐다.

 

사자방 비리뿐만 아니라 허울뿐인 부동산 대책, 정부나 지자체가 경기를 부양하겠다며 내놓는 여러 토건 사업 등도 마찬가지다. 항상 야심차게 시작하곤 하지만 끝은 비리와 재정적자로 얼룩지는 일이 대부분이다. 여러 개발 사업으로 서민 경제에 이바지하겠다는 정치인의 공약은 사실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 공약(空約)이거나 정치적 레토릭(rhetoric)에 불과한 것이다.

 

정치인이나 많은 부를 축적한 이들, 즉 특권 계층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부패하는 사회에서 권력과는 상관이 없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아닌가. 이 같은 고민을 담은 책이 있다. 바로 데이비드 하비의 <반란의 도시>. <반란의 도시>에서 하비는 도시권, 즉 도시에 관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특권계층에 의한 도시권의 전용(專用)

 

기득권층의 부패를 논하면서 도시권이라는 생소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일견 이상해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하비에게 있어 도시권은 중요한 개념이다. 하비의 논의에 따르면 도시는 잉여자본의 해소, 요컨대 도시는 자본주의의 화장실로 기능해왔다. “자본주의는 도시 공간의 형성에 필요한 잉여생산물을 끊임없이 생산해야 한다. 정반대의 관계도 성립한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생산한 잉여생산물을 흡수하려면 도시 공간의 형성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으므로, 자본주의 발전과 도시화 사이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29) 인 것이다.

 

잉여생산물을 생산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진 이는 자본가다. 다시 말하면 도시가 자본가의 이해관계와 논리에 따라 발전해왔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뉴욕 시장인 억만장자 마이클 블룸버그는 개발업자와 월스트리트, 초국적 자본가계급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뉴욕을 재편”(58) 한 것만 봐도 도시가 얼마나 자본의 논리에 충실하게 변해왔는지 알 수 있다. 뉴욕뿐만 아니라 미국 내 다수의 도시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도 예외일 수는 없다. 앞서 언급한 4대강 사업이나 부동산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한 여러 부동산 대책, 각 지역의 여러 토건 사업들은 도시권을 무분별하게 전용(專用)한 사례들이다. “특권적 부동산 소유자의 개인적 자산 가치를 증진하는 무언가를 생산하는 쪽으로 공공 투자를 분배하려는 욕심”(146) 때문에 벌어진 참극인 것이다.

 

도시의 역사가 자본의 논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시권이 자본가에게만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하비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도시는 해당 도시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구성해낸 결과물이고, 도시권은 자본가뿐만 아니라 도시의 구성원 모두가 누려야하는 권리라고 말한다. 과거 특권적 계층에 의해 도시권이 전용(專用)되어 온 역사를 끊어내려는 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도시권을 되찾으려면

 

도시권을 쟁취하기 위한 핵심은 먼저 도시의 구성원들 스스로 자신들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수많은 대도시에서는 취약계층을 상대로 착취와 약탈이 끊이지 않고 자행된다. 노동자가 자본가와 싸워 실질임금을 얻어 냈다 해도 소비 영역에서 벌어지는 착취 활동이나 약탈 활동을 통해 자본가는 그만큼을, 아니 그 이상을 손쉽게 도로 가져간다. 도시 저소득층 대다수는 노동을 과도하게 착취당하는 것도 모자라 빈약한 자산마저 약탈당하고 있다.”(108)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다음 단계인 연대로 이행할 수조차 없다.

 

자본의 논리에 편승하려는 정부와 일부 특권 계층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사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도시 구성원 간의 연대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처럼 경제 민주주의 역시 시민의 조직된 힘이 가장 필요하다.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도시권을 가지고 있지만 연대하고 조직하지 않으면 너무나 미미한 힘일 수밖에 없다.

 

도시는 파편화된 현대인을 묶을 수 있는 좋은 매개다. 같은 지역에 산다는 것은 동질감과 이해관계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조직이라는 것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나서서 총대를 메어야 한다. 도시의 구성원들을 묶어줄 구심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비는 이를 각 지역의 노동조합이 담당해야 한다고 말한다. 노동조합은 이미 조직된 단체이며, 도시 안에서 직접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역민들과의 연대도 용이하다.

 

계급적 착취의 역학은 일터에만 한정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착취의 이차적 형태는 주로 상인, 지주와 건물주, 금융업자가 조직적으로 저지른다. 그 영향은 공장뿐만 아니라 생활공간에서 주로 감지된다. 착취의 이차적 형태는 자본축적의 역동성을 유지하고 계급권력을 영속화하기 위해 언제나 필요한 것이었다. ‘약탈에 의한 축적’, 지대와 임대료 갈취, 화폐와 이익의 부당한 착취 등은 일상생활의 질을 둘러싸고 대다수 주민들이 느끼는 수많은 불만의 핵심을 이룬다. 도시의 사회운동은 보통 이런 문제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노동은 물론 생활을 둘러싸고 계급권력의 영속화가 조직되는 데서 도시 사회 운동이 발생한다. (221)

 

노동조합에서 시작해 도시 사회 운동까지 진화해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비의 전략이다. “수많은 노동 분업 안에서 뿔뿔이 흩어져 존재하는 사회적 공간과 장소의 엄청난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모색”(234)함으로써 도시권을 쟁취하는 것이 하비의 궁극적인 목표다.

 

반란의 도시를 위하여

 

평소 우리나라 국민들은 도시권에 관한 인식이 아주 미비하다. 노동조합 조직률도 매우 낮다. 뿐만 아니라 정치인의 스캔들보다 연예인의 스캔들에 더 관심이 많다. 하지만 때로는 2008년 광우병 반대 촛불시위나 세월호 진상조사 촛불 시위처럼 폭발적인 정치참여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이라는 것이다.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드는 것은 필요한 일이나 충분한 일은 아니다. 2008년 광우병 반대 촛불시위는 정부에게 큰 영향을 끼쳤을지 모르나 그 다음부터는 면역이 생기기 마련이다. 촛불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과격해져야 한다. 촛불시위에 참여했다는 것으로 모든 일을 다 해냈다고 자위해서도 안 된다. 참여를 넘어 촛불의 힘을 조직화하고, 한 목소리로 정부에게 요구해야만 한다.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반란의 도시로 진화하는 것. 그것이 하비가 우리들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아닐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 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 종교 이야기]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세 종교 이야기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믿음과 분쟁의 역사
홍익희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 다시 국제적인 이슈로 떠올랐다. 이스라엘이 가한 가자 지구의 폭격은 분쟁에 대한 정당방위의 수준을 넘어 학살에 가까웠다. 압도적인 전력의 비대칭성을 바탕으로 고립된 가자 지구에 행한 폭격은 히틀러의 나치 시대에서 연원한 이스라엘의 피해의식 혹은 자기방어가 극단으로 치달아 스스로 나치화된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분쟁은 보통 정치적이거나 사회경제적인 맥락에서 일어난다. 예컨대 석유라는 희소한 자원을 쟁취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거나, 부동항을 얻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것 등이다. 하지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비롯한 중동 문제는 정치적, 사회경제적 맥락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변수가 끼어있다. 바로 종교적인 역학관계다. 종교는 정치사회적인 결정을 할 때 명분으로 사용되곤 하지만,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는 중요한 변수다.

 

홍익희 작가가 쓴 <세 종교 이야기>는 최근 국제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이슬람 국가(IS) 사태 등이 발생하게 된 핵심적인 요인 중 하나인 세 종교, 즉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이야기다. 이 책은 세 종교 간의 관계를 쉽게 풀어낸 인문교양서로 세 종교의 기원에서부터 현재의 상태까지, 세 종교의 역사 전반을 아울러 풀어냄으로써 독자들에게 그들의 관계를 일목요연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뿌리 깊은 세 종교 간의 갈등

 

유대교, 유대교에서 파생된 기독교와 이슬람교. 이 세 가지 종교에 의해 벌어진 분쟁은 현재뿐만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어진다. 모세로부터 발생한 유대인의 엑소더스, 유대인의 정착을 위해 가나안(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진 전쟁,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충돌인 십자군 전쟁 등 세 종교 간의 분쟁은 아주 깊은 뿌리를 갖고 있다.

 

그런데 근대 이전의 역사에서 대대적인 정복전쟁이나 국지적인 침략, 약탈 등의 행위는 전세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세 종교 간의 물리적인 분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는 과거와는 정 반대다. 국가 간의 전쟁을 웬만하면 피하려 하고, 테러와 같은 물리력을 동원한 행동을 경원시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럼에도 세 종교 간의 갈등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유럽의 유대인 박해와 유대인의 피해의식

 

<세 종교 이야기>는 세 종교의 기원과 역사를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특별히 마지막 챕터를 할애해 유대인의 박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가 <세 종교 이야기>를 집필하기 이전에 이미 <유대인 이야기>라는 유대인에 관한 책을 쓰기도 했고, 잘 알려진 유대인 전문가이기도 해서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 종교 간 갈등의 핵심적인 원인 중 하나가 유대인 박해라는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나치독일의 히틀러에 의해 자행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유대인의 박해는 꽤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유대인 박해는 유대인이 예수를 죽였다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초기 기독교세력은 약했기 때문에 사실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예수의 위상은 갈수록 커졌고, 그러한 예수를 죽인 유대인은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유대인이 금융업이나 고리대금업에 종사한 것도 문제가 되었다. 기독교에서는 고리대금업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토지소유가 인정되지 않아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참작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은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기도 했는데, 이는 독자적인 생활관습과 종교생활을 지키려는 노력 때문이었다.

 

유럽에 융화되지 못한 유대인은 계속해서 고립되었다. 이 같은 고립은 고립에서 끝나지 않고 유럽인들에 의한 유대인의 배제로 이어졌다. 브레이크가 없는 열차처럼 달리던 유대인 박해는 히틀러의 나치독일에 이르러 충돌하고 말았다. 히틀러는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을 주창했는데, 히틀러가 말한 해결방법은 유대인의 절멸, 즉 제노사이드였다. 희생자가 600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이 학살에서 유대인은 인간의 극단을 맛봤을 것이다.

 

유럽에서 받았던 박해로 유대인은 천여 년을 디아스포라 상태에 있었고, 나치독일에 의해 영문도 모른 채 600만에 달하는 죽음을 겪었다. 유대인들이 겪었던 경멸과 학살의 경험은 필연적으로 피해의식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이러한 피해의식은 이스라엘에 유대인의 새로운 국가를 만들겠다는 시오니즘(Zionism)을 만들어냈고, 결국엔 이스라엘이라는 유대인 국가를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유대인은 나치독일의 제노사이드라는 극단적인 상실을 발판으로 전세계적인 유감을 얻어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국가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은 주인 없는 땅이 아니었고, 유대인은 기존에 살고 있던 이들을 일방적으로 밀어냈다. 이는 당연히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고, 결국 전쟁까지 벌어지게 된다. 이스라엘이 네 번의 중동전쟁을 치르고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알다시피 끊임없는 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쉼 없는 분쟁은 유대인의 피해의식을 극단으로 몰고 있다. 오죽하면 이스라엘이 나치의 전철을 밟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들릴까.

 

거리를 두고 객관화하기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이 외신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보도될 때, 인터넷 상에서 이슈가 된 사진이 있었다. 가자지구가 폭격당하는 모습을 즐겁게 구경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찍힌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 유대인들을 비난했다. 물론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과 유대인의 그러한 모습은 옳지 못하다. 하지만 우리는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방적인 동조보다는 조금 더 객관적인 시선이 필요하다.

 

저자가 <세 종교 이야기>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아마도 독자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그것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파악함으로써, 조금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세 종교 간의 갈등을 판단했으면 하는 것일 테다. 지금도 외신들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 이슬람 국가(IS)의 충격적인 행위들이 실시간으로 우리에게 보도되고 있다. 언론을 마냥 맹신하기 보다는 <세 종교 이야기>와 같은 책을 통해 자극적인 언론기사에서 거리를 둔다면, 독자 자신만의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 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