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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의 오후 - 남자, 나이듦에 대하여
우에노 지즈코 지음, 오경순 옮김 / 현실문화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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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대한민국은 고령화 사회다. 의료기술이 발전하면서 죽음은 늦춰지고 있는데 반해, 출산율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대한민국은 낮은 출산율과 높은 노인 인구 때문에 발생하는 여러 사회문제 때문에 다양한 대책을 세우고 있지만 별다른 실속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고령화 사회에서 나타날 수 있는 사회문제 중에서 고독사(孤獨死) 문제가 있다. 고독사란 사회에 속하지 못하고 고립되어 혼자 쓸쓸히 죽는 것을 말한다. 고독사는 여러 나이 대에서 발생하지만 50대 이상의 나이가 60%를 차지할 정도로 고령화와 관계가 깊다. 고독사는 특히 남성에게서 많이 발생하는데, 그 비율이 70%가 넘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대한민국 사회의 공동체가 파괴되고 파편화되는 것은 성별을 불문하고 공통적으로 겪는 일인데도 왜 남성에게서 유독 고독사가 많이 일어나는 것일까. 모든 것을 알 수는 없겠지만 우에노 지즈코라는 작가가 쓴 <독신의 오후>라는 책에서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더군다나 대한민국이 일본의 모습을 답습한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이 듦에 대하여

 

나이가 들어가면서 가장 괴로운 것은 스스로가 예전의 자유를 잃고 기력을 잃는 거다. 그리고 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게 디는 현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자존심을 산산조각으로 무너뜨린다. 이런 아픔은 과거 권력이나 지위를 누렸던 사람일수록 더 커진다. 여성은 원래부터 대단한 힘을 갖고 있지 않았던 터라 노후에 연착륙할 수 있지만, 남자의 경우엔 힘 좀 있었던 남성일수록 나이듦이 경착륙이 되기 쉽다. 그러곤 상처받을 것이다.(7)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왔던 사회에서 영향력을 잃는다는 것과 같다. 청년에서부터 시작해 중장년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사회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며 타인의 인정과 사회의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하고, 인정받음을 통해 삶의 만족감을 느낀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자의가 아닌 자연의 섭리라는 타의에 의해 은퇴를 하게 되고, 소위 뒷방 늙은이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이는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원동력인 인정욕구를 충족할 수 없다는 것과 다름없다. 지금과는 달리 과거에는 나이가 든다는 것은 굉장히 존중받을 만한 것이었다.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수많은 세월을 지내면서 축적한 경험이 있다는 뜻이었고, 그것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사람들의 이러한 존경은 개인의 인정욕구를 충분히 충족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 시대는 수많은 세월동안 축적한 경험이 무용지물로 변해버린 시대다. 자연의 섭리를 온 몸으로 겪어낸 경험을 가진 노인보다 팔팔한 젊음으로 무장한 노동력이 필요한 시대다. 때문에 노동력을 더 이상 행사할 수 없는 노인은 현대 사회에서 점점 소외되고 만다. 과거의 나이 듦이 존경으로 향하는 것이었다면 현재의 나이 듦은 사회에서 배제되는 것을 뜻한다.


특히 대한민국은 개인의 영역보다 사회의 영역이 훨씬 큰 사회이기 때문에 나이가 들면서 가해지는 배제의 폭력은 엄청난 강도를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현재 대한민국 남성은 여성보다 더 사회에 밀착되어 있고 더 강한 인정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이가 들면서 가해지는 사회의 배제를 견딜 수 있는 힘이 약할 수밖에 없다.

 

나이 듦을 거부하는 사회

 

오르막길 반, 내리막길 반. 인생 100세 시대를 맞이했는데도 달리는 기차에서 내리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거부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중략) 늙는다는 것은 보기도 싫고 듣기도 싫고 피하고 싶다며 부인하며 노화에 저항하는 사람에게는 어느 날 아침에 덜컥 가는 것이야말로 이상일 것이다.(96)

 

나이든 사람을 배제하는 사회에서는 당연히 나이 듦을 거부하는 풍조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자신이 늙었다는 징후를 보이면 배제가 될 것이 뻔한데, 어떻게 나이 듦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예컨대 지금까지도 횡행하고 있는 동안 신드롬은 대한민국 사회가 얼마나 나이 듦을 배척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명백한 상징이다.

 

동안 외모를 유지하기 위한 성형이 성행하고, 젊은 육체처럼 보이기 위한 프로그램이 유행하는 이상, 나이 듦을 인정하고 나이 듦에 어울리는 인생을 구축하려는 시도는 요원한 일일 수밖에 없다. 또한 고독사를 비롯한 여러 노인 문제는 더욱 심각한 지경에 이를 것이다. 사회적 인식이 바뀌지 않는 이상 근본적인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싱글력이 필요한 시대

 

대한민국 사회가 노인 문제를 당장 해결할 수 없다면, 개인적인 차원에서 나이 듦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나이 듦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을 싱글력이라고 칭한다. 싱글력이란 혼자 스스로의 생활을 살아낼 수 있는 힘이다. 특히 싱글력은 남성이 길러야 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예컨대 고독사가 남성의 비율이 높은 것도 현재 남성이 여성의 돌봄에 의존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독신의 오후>에 따르면 자립할 수 있는 힘, 즉 싱글력을 기르고 난 후 필요한 것은 바로 인간관계다. 공동체가 파괴된 현대 사회에서 인간관계를 이루기란 참 어려운 일이지만 혼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간관계가 필수적이다.

 

책에서는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여러 금기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특히 자신과 상대의 전력(前歷)은 말하지도 묻지도 않는다는 금기가 인상적이다. 대한민국 장년 남성들이 자주 떠벌리는, 소위 왕년에~’로 시작하는 말들이 얼마나 꼴불견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나 홀로 죽음고독사와 완전 다르다. 고독사는 혼자 고립되어 쓸쓸하게 생을 마치는 죽음인 데 반해 나 홀로 죽음이란 홀로 살아온 인생의 연장선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뿐이다. 싱글의 삶이 결코 고독하지 않은 것처럼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단지 병구완을 할 사람이 없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죽음은 누가 대신해줄 수도 없는 일이며 홀로 완수해야 할 사업. 누군가가 입회해주지 않으면 저세상으로 갈 수 없는 것도 아니다.(260~261)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여러 금기들을 제시하는 것과 더불어 책은 돈으로 돌봄을 산다는 것이나 홀로 죽는다는 것등과 같은 유의미한 논의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대한민국 사회가 당면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논의되지 않는 이야기들을 이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다.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것을 넘어 고착화된 대한민국 사회에서 노인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당장에 필요한 일이다. <독신의 오후>와 같은 책을 읽고 개인이 노년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노인 문제가 대한민국 사회가 당면한 사회문제라면, 사회적 차원에서 이에 관해 논의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 대한민국 사회가 나이 듦을 사회에서 배제하고 거부하기보다는 포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할 때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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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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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하이데거카를 슈미트는 누구나 이름은 들어봤을 법한 아주 유명한 독일 철학자다이 둘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바로 나치 독일에 부역한 철학자라는 사실이다처음 이 사실을 접했을 때는 꽤나 충격적이었다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위대한 철학자들이 나치부역자들이었다니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이 사실은 <히틀러의 철학자들>이란 제목의 책에서 처음 접하게 됐다이 책은 이본 셰라트라는 영국인 학자가 쓴 것으로나치 시대에 히틀러에게 동조했던 지식인이 아무런 내적 청산이 없었음에도 버젓이 활동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됐다고 한다저자는 이를 파헤치기 위해 방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하고 검토한 후 다큐멘터리 기법을 활용해 정치와 철학의 빗나간 만남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천재적인 철학 바텐더 히틀러

 

홀로코스트라고 지칭되는 유대인 집단 학살은 제노사이드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히틀러의 나치에 의해 자행된 이 재앙은 지금까지 회자되면서인간의 폭력성과 잔혹성의 극단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는 반면교사로 작동하고 있다그런데 어떻게 히틀러는 유대인 학살을 실행할 수 있었을까. 600만 명에 달하는 한 인종을 몰살시키겠다는 마음을 먹기 위해서는 살인에서 오는 죄책감을 초월할 수 있는 신념 체계가 필요하다더군다나 그것이 집단 학살에 이르기까지는 어떤 신념 체계에 대한 광신(狂信)이 동반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히틀러가 동원한 신념 체계는 바로 반유대주의였다반유대주의는 당시 유럽 사회에 만연해 있었다반유대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라는 굴레에서 기원했다고 보고 있다예수의 죽음에서 비롯된 반유대주의는 수천 년간 지속적으로 쌓여 있었는데히틀러가 그것이 극단적으로 표출될 수 있는 구멍을 뚫어낸 것이다.

 

히틀러가 자신만의 반유대주의를 구성하게 된 것은 독일 바이에른 주에 있는 란츠베르크 교도소에 수감되면서부터다히틀러는 시간만 넘치는 교도소 독방에서 독서에 매진했다거기서 다양한 독일 철학자들을 접했다지금까지도 추앙받는 여러 독일 철학자들예컨대 임마누엘 칸트게오르크 헤겔프리드리히 실러요한 피히테프리드리히 니체리하르트 바그너 등에게서 히틀러는 그들의 철학적 영감 대신 반유대주의의 영감을 얻었다.

 

극소수의 계몽된 유대인을 제외하면 대다수 유대인은 도덕적정치적으로 게르만인과 동등하지 않다따라서 그들은 배제되어야 마땅하다.(임마누엘 칸트)”

 

나는 유대인들에게 시민의 권리를 부여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본다만약 그들의 머리를 잘라낸 다음 유대인적 사고가 단 하나도 들어 있지 않은 새로운 머리를 갖다 붙인다면 그들에게도 시민의 권리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요한 피히테)”

 

유대인은 그들의 존재 이유가 사라진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생존해 있다사실상 진정한 의미의 유대인 역사는 오래전에 사라졌다본질은 사라지고 단지 송장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게오르크 헤겔)”

 

히틀러가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이 증명된 것 같았다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반유대주의 사상은 계몽주의에서 낭만주의까지민족주의에서 과학까지 독일 사상의 모든 분야 속에 스며들어 있었다.(본문 102)” 히틀러는 천재적인 바텐더 기질을 발휘해 독일 사상의 모든 문야 속에 스며들어 있는 반유대주의를 뽑아내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라는 칵테일을 만들어냈다란츠베르크 교도소 수감시절의 왜곡된 독서가 만들어낸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재앙을 일으킨 시작점이었다.

 

히틀러의 철학자들

 

히틀러가 바텐더로서 천재적인 기질을 발휘해 자신만의 반유대주의를 구축했다면히틀러의 반유대주의가 독일인들에게 소위 먹히도록’ 뒷받침한 철학자들이 있다바로 앞서 언급한 카를 슈미트와 마르틴 하이데거다저자는 슈미트와 하이데거를 각각 히틀러의 법률가히틀러의 슈퍼맨으로 칭한다.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때 히틀러 총통과 동료 투사들이 명예로운 나치의 표지 아래에서 했던 연설은 유대인과의 이념 투쟁에서 현재의 전투를 감동적이고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우리는 유대인의 거짓말에서 독일 정신을 해방시켜야 합니다.”(카를 슈미트본문 153~154)

 

국가라는 실체를 보호하고 정부의 가장 핵심적인 힘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용기를 끊임없이 불러일으키십시오……오직 총통 한 사람만이 독일의 현실이며 독일의 오늘독일의 미래입니다그리고 독일의 법입니다……히틀러 만세!(마르틴 하이데거본문 181)

 

현재 실존주의 철학 및 현상학의 대표주자로 알려져 있는 하이데거조르조 아감벤과 같이 현대에 인기 있는 철학자들에게 끊임없이 호명되고 있는 슈미트이들은 사실 나치에게 부역하고 히틀러를 미화하는데 앞장섰다그들이 히틀러의 반유대주의가 홀로코스트로 귀결되리라는 것을 알았는지는 알 수 없다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나치에 부역했고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당시 슈미트와 하이데거처럼 나치에 부역한 철학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저자는 발터 벤야민테오도어 아도르노한나 아렌트쿠르트 후버 등의 철학자를 언급하면서 이들을 히틀러의 적들이라고 표현한다슈미트와 하이데거가 나치에 부역하고도 처벌받지 않고 지금까지 위명을 떨치고 있는 것과 달리 히틀러의 적들은 불운한 삶을 살게 된다.

 

발터 벤야민은 유대인으로 히틀러의 나치 치하에서 나치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파리로 망명했다이후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면서 스페인으로 다시 망명을 시도했지만 망명 도중 국경에서 나치의 추격에 버티지 못하고 자살한다테오도어 아도르노와 한나 아렌트는 나치가 집권하자 독일에서 추방되었고나치가 패망하기 전까지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쿠르트 후버의 경우에는 독일 내에서 나치에 반하는 운동을 펼치다 죽기까지 한다.

 

나치에 부역한 철학자와 나치에 반대한 철학자의 생애는 극단적으로 대비되어 보인다절대적인 악을 추종했던 철학자는 지금까지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과 달리 나치에 불복한 철학자는 자살하거나 죽거나다른 나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그런데 저자는 왜 이런 사실을 고발하고 있는 것일까.

 

공과(功過)의 딜레마

 

철학 분야에서는 많은 쟁점이 잠을 자고 있다가장 강렬하게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널리 보급된 사상 가운데 일부는 하이데거처럼 단 한 번도 유대인 대학살을 비난한 적이 없는 철학자들의 사상이다우리는 그들의 사상을 가르쳐야 하는가우리는 그들이 쓴 언어의 맥락을 무시한 채 거리낌 없이 학생들에게 <존재와 시간>을 읽으라고 권하고 슈미트의 저작과 논리학자 프레게의 책을 읽으라고 권해야 하는가? (중략방금 한 질문들은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본문 378~379)

 

저자가 <히틀러의 철학자들>과 같은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나치에 부역한 철학자들의 사상을 배워야하는가 또는 나치의 생체실험을 통해 얻은 의술로 사람을 치료해야하는가 등과 같은 딜레마 때문이다대한민국에도 이런 딜레마의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서다.

 

박정희는 16여 년 동안 독재자로서 민주주의를 가장할 뿐 부정하고자신의 권력을 수호하려했다때문에 대통령이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유신을 단행하고계엄령과 긴급조치 등을 통해 국민들을 탄압한 것이다하지만 이런 과오에도 박정희에게 우호적인 사람들도 많다당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던 대한민국의 경제를 성장시켰다는 공()이 있기 때문이다물론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은 대한민국 국민의 힘으로 이뤄낸 것임이 분명하지만당시 대통령이 박정희였기 때문에 박정희가 경제성장을 했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이렇듯 공과 과가 공존하는 인물에 대한 평가는 어렵다옹호하는 사람은 과를 공으로 덮으려고 하고비판하는 사람은 과로 공을 덮으려고 한다슈미트와 하이데거그리고 박정희 역시 이런 딜레마가 존재한다하지만 공으로 과를 덮을 수는 없다그렇다고 해서 과로 공을 덮을 수도 없다공과(功過)라는 것은 한 인물의 인생에서 배제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슈미트와 하이데거가 나치 부역자라면(그들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처벌받지 않은 것은 분명 잘못이다그들의 사상을 공부할 때 그들이 나치 부역자라는 사실을 인지하고그들의 사상을 반유대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지양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박정희에 대해 배운다면 아무리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을 이뤄냈더라도 그가 독재자였던 것을 알고 있으면 될 것이다다시 말하면 한 인물의 인생은 공이나 과라는 한 단면으로 판단할 수 없다인생에 있어서 공과(功過)란 공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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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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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문학 열풍이 불면서 관련 책이 많이 판매되고 있다. 때문에 인문학에 관한 인식까지 좋아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실은 다르다. 아직까지 인문학은 팍팍한 현실을 살아가는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공부이며, 일상의 생활을 전제해야만 하는 부차적인 것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다시 말하면 인문학 혹은 철학은 가난을 벗어나야만 공부할 마음이 동하는 그런 학문이라는 것이다.

 

반면 철학자는 이런 말에 발끈할지도 모르겠다. 철학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이라면서 말이다. 이처럼 철학자와 일반 대중 간의 괴리는 상당히 크다. 현실을 외면하는 철학이나 삶의 본질을 성찰하지 않는 현실은 이 괴리를 좁히기 힘들다. 하지만 철학자 중에는 일반 대중과의 괴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있다.

 

고병권은 이런 시도를 하는 철학자 중 하나다. 그는 철학하기란 불가능과 무능력, 궁핍과 빈곤을 양산하고 규정하는 모든 조건에 맞서 분투하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현실에 집중하는 철학자다. 또한 그는 11번째 책 <철학자와 하녀>라는 책을 통해 현실을 외면하는 철학이 아니라 현실까지 포용할 수 있는 철학을 보여주고 있다.

 

철학자와 하녀의 이야기

 

저자는 그리스의 대표적인 철학자 탈레스와 트리케의 하녀에 관한 우화를 인용하면서 철학자와 일반 대중의 관계를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본문에 따르면 탈레스는 어느 날, 별을 보며 걷다가 우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것을 본 하녀가 깔깔대며 탈레스는 하늘의 것을 보는 데는 열심이면서 발치 앞에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우화는 일반 대중이 당장의 현실을 보지 못하는 철학자를 비웃는 지금의 모습과 상당히 유사하다. 하지만 철학자는 이런 재치가 넘치는 이들을 무지한 대중이라 폄하했다. 소크라테스는 아마 이들은 철학자의 높이에 세워놓으면 높은 곳에 처음 매달린 탓에 어지럼증을 느낄 것이라며 하녀와 같은 이들을 비웃었다.

 

서로 조롱하고 적대하면서 철학과 가난한 사람이 함께 불행하다면, 역설적이게도 각자의 구원은 서로에게서 오는 게 아닐까. 삶의 절실함과 대면하면서 철학자는 새로 철학을 배우고, 앎의 각성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은 삶을 새로 살지 않을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7)

 

사실 이 둘의 말은 모두 옳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철학에 아무리 고매한 뜻이 있다 하더라도 일상의 삶과 무관하다면, 철학은 자족적인 유희로만 머물 수밖에 없고, 현실 감각을 통해 성공적 삶을 살 수 있다 하더라도 삶의 성찰이 없는 현실 감각은 현실에 얽매인 노예의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옳으면서도 완벽한 것은 철학자와 하녀가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하며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철학은 지옥에서만 가능하다.” 이는 철학에 대한 저자의 가치관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철학은 배부른 자들의 고상한 유희이자 현실 바깥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시선이다. 하지만 저자는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철학은 천국과 같은 유토피아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철학은 인간 안에 자기 극복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중략) 깨달음은 천국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천국에는 우리 자신에 대한 극복의 가능성도 필요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국에는 철학이 없고 신은 철학자가 아니다. 철학은 지옥에서 도망치지 않고 또 거기서 낙담하지 않고, 지옥을 생존조건으로 삼아 거기서도 좋은 삶을 꾸리려는 자의 것이다.(20)

 

보통 사람들은 현실을 속된말로 지옥이라고 부르곤 한다. 철학은 지옥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이 중단된 곳, 즉 누구도 띄어들고 싶지 않아 하는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란 뜻이다. 다시 말하면 철학은 현실이라는 지옥에 천착해야만 가능 한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철학이 가지는 가치이자 본분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그동안 일반 대중이 가졌던 철학에 관한 통념을 깸과 동시에 현실과 괴리된 철학을 하는 철학자들에게 일침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현실에 천착함으로써 꽃피는 것이 철학이라는 선언을 한 저자는 이어 현실에 관한 여러 통찰을 독자들에게 내놓는다. 책 내용의 전반을 이루는 철학적 성찰을 저자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이라고 부른다. 이 철학의 내용은 다양하다. 거대한 담론에 매몰돼 미처 보지 못하는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중요하고 위대한 것인지 니체를 끌어들여 설명한다.

 

또한 저자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해석노동에 관한 문제,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핵 발전에 관한 문제, 성소수자를 비롯한 여러 소수자들의 문제 등 여러 사회문제까지도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유감없이 발휘해 독자들에게 지적인 달콤함을 선사한다.

 

구경꾼에서 체험하는 자로

 

예수를 믿는 사람, 그 믿음을 과시하는 사람은 많아도 예수처럼 사는 사람은 드물다. (중략) 우리는 무소유 정신을 갈파한 어느 스님의 책을 백만 권 넘게 사지만 정작 무소유를 실천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좋은 말을, 박물관이나 명승지를 관람하듯, 그저 듣고 구경하면서 입장료로 책값을 내는 것이다.(248~249)

 

<철학자와 하녀>는 철학자인 저자가 하녀인 일반 대중에게 건네는 말을 모은 책이다. 저자는 책 말미에 독자들에게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을 던진다. “세상에 옳은 말은 많다. 하지만 옳은 말은 옳은 말일 뿐이다. 그것이 내 것이 되려면 내 안에서 다시 체험되어야 한다.”

 

최근 인문학에 관한 대중의 관심과 출판시장에 쏟아져 나오는 인문학 서적처럼 현재 우리 사회에 옳은 말은 흘러넘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들을 읽고 소비할 뿐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하지 않는다. 대부분 구경꾼으로 머물 뿐이다. 저자는 <철학자와 하녀>라는 책을 통해 철학자로서 하녀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제 독자들이 철학자의 말을 구경하는 구경꾼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 것으로 체험함으로써 화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 하녀가 나설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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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 스티븐 제이 굴드 자연학 에세이 선집 3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현암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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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은 평소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어릴 때 학교에서 과학에 대한 교양을 배우기는 하지만 시험을 치기 위한 공부일 뿐 대부분 그것에 대해 흥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과학은 전문적인 영역으로 여겨져 사람들은 쉽게 말하기를 꺼려한다. 또한 과학자가 아님에도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보면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과학은 대중과 괴리되어 있다.

 

그만큼 대중에게 과학은 어려운 것으로, 범접할 수 없는 미지의 것으로 여겨진다. 수많은 전문 용어들이 난무하고, 이해할 수 없는 기호와 숫자가 머리를 어지럽히기 시작하면 일반 사람들은 진절머리를 칠 수밖에 없다. 대중에게 보다 쉽게 과학을 전하려는 일부 과학자들은 다양한 교양서적을 집필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쉽지는 않다.

 

이런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과학 교양작가로 대중성을 확보한 사람이 있다. 바로 스티븐 제이 굴드(이하 굴드). 굴드는 <네추럴 히스토리>에 기고한 과학 칼럼들과 진화에 관한 베스트셀러의 출간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의 칼럼들은 책으로 묶여 출판되었는데 <다윈 이후>, <판다의 엄지>, <풀하우스> 등이 유명하다.

 

이외에도 굴드는 수많은 저작들을 남겼지만 아쉽게도 본 글에서 다룰 책은 과학에세이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 한 권이다. 이 책은 스티븐 제이 굴드 자연학 에세이 중 세 번째 책으로 굴드의 끝없는 지식욕의 다채로움을 보여준다. 굴드는 자신의 홈그라운드인 과학과 과학사의 경계를 넘어 철학, 신학, 종교, 야구, 미술, 소설, 광고, 영화, 학생들의 은어, 심지어 자신의 병까지 온갖 이야깃거리를 동원해 지적 곡예를 벌인다.

 

독자의 흥미를 돋우는 지적 묘기에도 불구하고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788쪽에 달하는 방대한 책이라 한 번에 독파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방대한 양뿐만 아니라 굴드가 축적한 여러 가지 지적 유산이 에세이 한 편마다 녹아있기 때문에 한 번에 독파하는 것보다 곱씹으며 음미하는 것이 더 좋은 책이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은 시간을 내 조용한 장소에서 끝까지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나는 대로 짬짬이 한 꼭지씩 읽는 재미가 읽는 책이다. 만약 이 책을 한 번에 읽어내려 했다가는 도리어 과학에 질려버릴지도 모른다.

 

일상과 접목한 과학 에세이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는 방대한 양으로 독자의 기를 죽이는 책이지만 책 속의 내용은 다르다.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는 과학이라는 전문적인 영역에만 천착하지 않는다. 과학 에세이라는 형식이지만 굴드는 과학보다 에세이에 방점을 찍고 있다. 분명 과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일상에서 충분히 볼법한 제재와 표현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에세이라는 장르가 주는 편안함이 책에 담겨 있다.

 

또한 굴드는 독자가 자주 접하는 일상 속에서 자신이 쓸 에세이의 제재를 찾아내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굴드는 야구의 역사, 쿼티 자판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 아무리 봐도 쓸모없는 남자의 젖꼭지와 여자의 음핵에 대한 이야기 등 보통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질만한, 그리고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사소한 제재를 통해서 진화를 비롯한 과학에 대해 설명한다.

 

즉 인간 형태의 의식(두 개의 눈과 두 개의 다리, 근육질의 넓적다리로 된 몸에 들어 있고, 기이하고 기능 장애적인 대물림으로 과도하게 무거워지고 선천적인 비논리적 경로라는 재앙을 물려받은 뇌에 의거하는)은 역사의 사소한 사실이며, 수백만의 있을 법하지 않은 사건들의 결과며, 결코 반복되도록 예정되지 않았다. (중략) 우리가 역사의 시시콜콜한 사소함에 빠져드는 까닭은 그 작은 것들이 우리 존재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본문 40-41)

 

과학이라는 거대 담론 속에서 굴드의 에세이는 어쩌면 쓸모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또한 역사라는 거대 담론 속에서 우리의 존재 역시 미천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의 시시콜콜한 사소함에 빠져드는 까닭은 그 작은 것들이 우리 존재의 원천이기 때문이라고 굴드의 말했듯이 우리의 존재는 우리가 사소한 것이라 여기는 일상들이 모여 이뤄진다. 이것이 굴드의 에세이가 거대 담론보다 사소한 일상의 것에 천착하는 이유이다.

 

지식인의 책무

 

과학자들은 다윈과 생물학적 진화의 원리를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탄하곤 한다. 그러나 문제는 훨씬 깊은 곳에 있다. 어떤 식으로든 진화적 설명에 익숙한 사람이 너무 적다. (중략) 그렇지만 우리는 진실과 갈망, 사실과 안락함 사이의 상관관계가 필연적이지 않으며, 심지어 우선적이지도 않다(우연히 일치할 때만 부합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지식인에게 부여된 가장 오래되고 힘겨운 책무는 아무리 귀찮고 해로운 결과를 얻게 되더라도 이 단순한 사실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주장하는 것이다, (본문 78-79)

 

특별한 일이 없을 때면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새로 나온 책은 어떤 게 있나 둘러보곤 한다. 사회과학, 과학, 인문학, 역사 등에 관심이 많아 관련 카테고리를 주로 찾아본다. 특이한 것은 사회과학, 인문학 역사 등의 카테고리에는 200여 권의 신간이 있는데 반해 과학 관련 카테고리에는 신간이 100권도 안 된다는 점이다.

 

아마 과학 관련 서적은 대중에게 인기가 없어 잘 팔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수익이 나지 않는 책은 출판사에서도 출간하기 꺼려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과학자들 역시 과학자 간에만 통용되는 전문용어를 굳이 일상어로 번역해낼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과학 관련 대중서적을 집필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식인이라면 대중과 소통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굴드가 언급한 것처럼 지식인에게 부여된 가장 오래되고 힘겨운 책무는 아무리 귀찮고 해로운 결과를 얻게 되더라도 이 단순한 사실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주장하는 것이다.” 지식인의 책무가 지난할지라도 우리나라 과학계에 몸담고 있는 과학자들이 굴드의 말을 금언(金言)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와 같은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책을 출판시장에서 더 많이 볼 수 있지 않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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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평전 - 조선 후기 민족 최고의 실천적 학자
박석무 지음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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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이하 다산)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존재한 위대한 학자를 열거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전 생애를 통틀어 모두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일표이서라고 불리는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이 있다. 다산은 왕성한 저술 활동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다산의 생애를 들춰보는 것은 조선 후기의 상황, 조선 후기에 태동했던 실학사상 등 조선 후기의 전반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작업이다. 한 인물의 생애를 전반적으로, 약간은 전문적으로 훑을 수 있는 방법은 그 인물의 평전을 읽는 것이다. 최근 민음사에서 <다산 정약용 평전>이 나왔다. 이는 다산에 관한 권위자인 박석무 선생이 집필한 것이라 다른 책보다 풍성할 것 같은 느낌이다.

 

채 피지 못한 꽃

 

박석무 선생의 <다산 정약용 평전>은 다산에 대한 예찬, 그리고 다산의 재능이 만개하지 못하고 도중에 꺾여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의 정서가 책 전반에 깔려있다. 박석무 선생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산 정약용을 떠올리면 가진 재능을 세상에 다 펼쳐 보이지도 못한 채 귀양살이로 인생을 보냈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정조가 칭찬했던 대로 100년 만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재상의 재목은 채제공을 이어 정약용이 거듭 나왔으나, 그 재목을 알아주는 군주는 정조 이후에 다시 나오지 않았다. (본문 289)

 

책에서는 다산이 제대로 능력을 펼치지 못한 이유로 인재를 제대로 등용할 수 있는 용인술을 가진 군주의 부재, 서학과 관련된 책을 학문으로만 접했음에도 그것을 꼬투리 삼아 다산을 음해하는 정적들을 꼽는다. 다산의 웅비를 막는 음해 세력만 없었다면, 자신을 알아봐주는 정조와 함께 제대로 된 정치를 했을 것이라고 계속해서 언급한다. 책을 읽을 때마다 문체에서 안타까움이 계속해서 느껴졌다.

 

과거나 현재나 세상사는 모습은 똑같은 것 같다. 최근 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문창극 씨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대한민국에 수많은 인재가 있을진대 권력자가 제대로 된 용인술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사단이 난 것이다. 또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재가 등용된다 하더라도 자신의 이익을 해칠까 두려운 기득권 세력들이 음해하려 드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다산에 대한 박석무 선생의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떼려야 뗄 수 없는 정조와의 관계

 

다산이라고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그가 군주로 섬겼던 정조다. 다산은 남인 출신이다. 당시 조선은 서인 중에서도 노론이 장악하고 있었다. 노론은 한 왕조의 대통을 이을 세자도 죽일 수 있을 만큼 노론 세력이 강했는데(사도세자가 죽은 일을 뜻함), 이런 상황에서 남인 출신이 입신양명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산이 활발히 활동을 할 시기는 달랐다. 당시 조선의 군주는 정조였다. 정조는 선대에 시행됐던 탕평책을 이어받아 적극적으로 다양한 출신의 인재를 등용했다. 다산은 그 정책의 시혜를 받아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었다. 정조와 같은 군주가 없었다면 다산은 귀양시절 때처럼 초야에 묻혀 글만 쓰고 있을지 모른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다산이었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흠결이 있었다. 바로 천주교와 관련된 자라는 낙인이다. 박석무 선생은 평전에서 다산 정약용은 서학과 관련된 서적을 학문적으로만 접했을 뿐 실제로 천주교를 믿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다산의 정적들은 그 점을 이용해 끊임없이 다산을 괴롭힌다. 정조는 다산을 총애해 정적들의 공격을 막아줬지만 그것도 정조가 살아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정조가 죽기 9년 전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일이 터진다. 천주교 신자가 부모의 신주를 태우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일 이후 조선 내에서 천주교는 극심한 탄압(신해박해)을 받는다. 정조가 있었기 때문에 다산은 무사했다. 하지만 정조가 죽고 1년 뒤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신유박해)을 가한다. 이 일을 계기로 다산을 비롯한 서학과 관련이 있는 자들은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된다.

 

다산이라는 인물이 아무리 걸출하더라도 그를 기용할 줄 알았던 정조라는 군주가 없었다면 그저 필부로 살았을지 모른다. 다산과 정조와의 관계는 저 옛날 촉한의 유비와 제갈공명처럼 수어지교(水魚之交)의 관계였다. 물이 없으면 물고기가 살 수 없는 것처럼 다산은 정조가 없었다면 싹을 틔어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작금에 가장 필요한 다산의 목민에 관한 생각

 

관장이 밝게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까닭은 백성들이 자기 몸을 위해서만 교활해져 다른 백성들이 당하는 폐막을 보고도 관장에게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관에서 마땅히 천 냥의 돈을 주고라도 사야 할 사람이다. (본문 232)

 

<다산 정약용 평전>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대목이 있다. 한 고을에서 한 인물이 마을 사람들을 모아 관아에서 행한 부당한 일에 대해 고발하는 일이 있었는데, 우연찮게 그 고을에 다산이 수령으로 부임했다. 행차하던 중에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 다산에게 다가와 그 일을 고하고 자수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때 다산은 너 같은 사람은 관에서 마땅히 천 냥의 돈을 주고라도 사야 할 사람이라고 말한다.

 

처벌을 주장하던 주변 사람들은 아마 이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했을지도 모른다. 이 일화를 읽고 다산에 대해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됐다. 21세기에 이른 현재 대한민국은 내부고발자나 부당한 일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이들을 고깝게 여기는데, 19세기의 인물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지금 목민관의 위치에 있는 자들이 마음에 두고두고 새겨야 할 고사(古事).

이런 일화들 외에도 다산이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베푼 일은 허다하다. 더불어 귀양살이를 할 때도 목민에 대한 다산의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다산이 목민에 관해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했던 결과물이 바로 <목민심서>. 목민관이 가져야할 마음에 관한 책이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박석무 선생은 다산이 마음으로나마 목민의 도를 수행하고 싶었음을 보여준다고 책에서 언급하고 있다.

 

중요하지만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책

 

<다산 정약용 평전>은 다산의 인생 전반을 다루면서 그 속에 있는 학문적, 정치적 업적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또한 다산의 글을 적재적소에, 그리고 꽤 많은 양을 인용하고 있어서 다산의 다양한 글을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더불어 책 말미에 현재 다산의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고 어떤 수준에 이르렀는지 설명하고 있어 다산을 연구하는 학자가 참고할 만한 책이기도 하다.

 

유익한 책이었음에도 아쉬운 점이 있다. 박석무 선생의 다산에 대한 애정 때문인지, <다산 정약용 평전> 전체의 문체가 다산을 예찬하려고 하는 느낌이 강하다. 책의 제목에 평전이라는 단어가 들어감에도 다산에 너무 몰입한 탓인지 전적으로 다산의 입장에서 다산의 전기를 서술한 느낌이었다. 다산이 조선에서 비상하지 못한 점은 나 안타까우나, 천주교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정적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다산의 역량 역시 비판적으로 다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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