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그렉 버렌트 외 지음, 공경희 옮김 / 해냄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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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이 남자 말은 화끈하고 시원하게 잘 하는데 너무 자기 위주잖아?’는 인상을 가졌던 책이다. 저자는 대부분 결론에서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보라,로 대안 제시를 하고 있다. 과연, 사랑이라는 게 지금 만나는 남자랑 문제가 있다고 해서 그 남자를 차버리고 새로운 상대를 찾아가는 것만이 최선일까? 그런 경우도 있겠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이 책에 나오는 여자들이 만나는 남자들은 관계를 발전시켜 보려는 노력조차 해볼 가치가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남자들인 걸까? 보다 나은 관계를 위한 발전적 충고라면 남자도 꼭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법이 없다. 내가 이 남자에게 여전히 마음이 있다면 불만을 토로하고, 시정요구를 해서 개선의 정도를 본 다음 그래도 가망이 없어 보이면 그때 떠나도 늦지 않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저자의 충고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남자랑 어떻게 문제를 풀어가라고 조언해주기 보다 당신이 만나고 있는 남자보다 더 훌륭한 남자가 널렸으니 그런 남자를 찾아보라고 한다.

손바닥은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그런 남자를 계속 방치하는 거 자체가 여성 자신이 남자에게 가진 바로 그 불만을 더 키우고 있는 건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책의 메시지는 “당신은 사랑을 해서는 안 되고, 사랑을 받기만 해야되는 존재예요. 그러니 다른 남자 찾아봐요.” 줄곧 이런 메시지를 띤다. 정작 필요한 조언은 당신과 당신이 만나는 남자의 문제는 이러이러한 점인 것 같으니 이러이러한 점은 당신이 고쳐보는 게 어떠냐, 이러이러한 점은 남자분에게 말해보라, 그래도 안 되면 다른 남자를 찾아봐라 이런 발전적 조언 아닌가.

부분부분 새겨들을 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전체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이 저자의 말은 여성이 자신을 주체적 존재로 인식하는 걸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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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랑하는 거야 미워하는 거야 - 커플의 영원한 딜레마 '성격 차이'를 극복하는 법
임정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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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부부싸움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달라서 싸우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르다는 걸 몰라서 혹은 인정하기 싫어서 싸우는 것이다. 알면 사랑할 수밖에 없다지 않은가. 이책을 읽으며 ‘알면 사랑한다’는 최재천 교수의 명언이 내내 생각났다. 상대방을 알기 위해선 알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부부싸움은 결국 상대방에 대한 파악노력부재는 간과한 채 상대방이 나의 본심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걸 드러내는 것이고, 너는 왜 나와 다르냐고 싸우는 일이겠다. 결국 분노는 무지, 무능, 게으름 이런 걸 증명하는 것이라고 봐야할 것 같다.

나의 진실은 내가 외향형이냐/내향형이냐, 오감형이냐/직관형이냐, 사고형이냐/감정형이냐, 판단형이냐/인식형이냐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고, 또 상대방이 저 유형중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받아들인다. 많은 남녀들이 진실이 성격에 따라 다르게 드러난다는 것 이걸 감지하지 못했기에 아까운 시간을 분노하는 데 소비하는 것이다. 남녀 사이에서의 분노는 소통통로를 개발할 의지와 능력이 없는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죽을 때까지도 내가 살대고 사는 사람에 대한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싸우기만 하다가 간다면... 으... 생각하기도 싫다. 남자/여자를 볼 때 상대방이 가진 외적 조건에만 눈이 멀게 아니라 정말 인간관계에 눈을 뜬다면 평수 넓은 집, 그럴듯한 살림, 번듯한 직장, 내눈을 즐겁게 해주는 외모, 학벌(‘S/K/Y대 이상, 석사/박사 과정 이상’을 전제로 남자를 찾는 여자들이 정말 있는 줄 몰랐다.) ... 이런 게 다 뭔소용이란 말인가. 속물근성을 버리지 못해 자초한 자신의 결혼을 깨닫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상대방 탓만 하며 살다가는 인생에서 깨어날 일이다. 행복이 별 건가. 속물근성을 벗어나면 본질이 보인다. 성숙하고 발전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남녀라면, 언제나 깨어있는 삶이라면 결혼에서의 내 불행을 상대방과의 성격탓 문제로 돌릴 게 아니다.


사실, 제목과 표지가 가벼워 보여서 간과했던 책이었다. 남녀 사이의 분석에 관한한 비교적 최근에 ‘여성 그대의 사명은’이라는 책을 인상깊게 읽었던 터라 한동안은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 책은 뜻밖의 횡재다.

오래전에 헤어진 남자친구가 자주 하던 말이 있었다. “사람은 이해나 설득의 대상이지 평가나 비판의 대상이 아니다.” 남자친구가 어떤 맥락으로 이 말을 하고 살았는 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고 그동안 내가 사람들과 부딪히며 얼마나 동전의 한쪽 면만을 보고 살았는지 남자 친구가 한 이 말을 나 나름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이제 사람에 대한 이해가 한층 넓어질 것 같다. 내가 이 책에 나온대로 다 실행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사람들의 행동을 읽을 수는 있겠다는 점에서 갈등과 마찰을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남녀 사이를 떠나 모든 인간관계가 다시 보인다. 남자친구가 생기면 꼭 선물해야겠다.

마침 이 책과 ‘영원한 어린아이, 인간’이라는 책을 같이 읽게 되었는데 거기에도 인간의 ‘네 가지 유형’이 나온다. 이책처럼 남녀에 관한 분류는 아니지만 사람을 읽는다는 점에서 이책과 같이 읽어도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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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앵티아 (Science) - 과학에 불어넣는 철학적 상상력
최종덕 지음 / 당대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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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나무에서 사과가 ‘어떤 궤도로, 얼마나 빠르게 떨어지는가’에 대한 답은 주지만 '왜 떨어지는가'에 대한 답은 주지 않는다. 과학은 유전자가 어떤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 지는 밝혀주지만, 유전자가 왜 존재하는 지는 증명해주지 않는다. 즉, 과학은 “자연이 ‘어떻게’ 운행되는가”에 대한 답은 주지만, “자연이 ‘왜’ 우리 눈앞에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은 주지 않는다.

과학은 자연현상을 발견하고 다루는 분야이다 보니 가치중립적이라고 받아들여지지만, ‘왜?’라는 질문이 던져지지 않은 과학이 가치중립적이라고 보긴 어려울 것 같다. 과학은 더 나은 기술을 만들어 내고, 기술은 과학을 발전시키므로 과학과 기술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그 기술을 다루는 것도 어차피 인간이고, 과학이 발전해야 하는 이유도 인간을 위해서다. 인간을 생각하지 않는 과학이라면 아무리 정교한 과학일지라도 인간에게 위험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아인슈타인이 발명한 원자폭탄이 전쟁의 무기가 되었던 것처럼. 여기서, 왜?라는 물음을 과학에도 던져야하는 이유가 생긴다. 이 물음에 답을 얻으려면 철학으로 눈을 돌려야할 것 같다. 이 책은 바로 이 ‘어떻게’와 ‘왜’가 만나는 지점에서 쓰여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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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의 동물학
비투스 B. 드뢰셔 지음, 이영희 옮김 / 이마고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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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인간의 눈높이에서 동물세계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여겨져왔던 사실을 뒤집는 책들이 출판되고 있다. 이 책도 그런 책 중의 하나다. 다만, 이 책은 인간이 동물세계를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가에서 한발 더 나아가 각 글의 마무리 부분에 인간세계에 던지는 저자의 비판과 교훈이 인상적이다.

동물세계는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것만이 법칙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책은 동물은 암컷과 수컷이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이기도 하고, 무리 전체가 협력하고 공존하며 평화를 이루는 체제이기도 하다는 걸 말해준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동물세계에 대해 그렇게 오해해왔을까? 이는 남성적 지배가 확고한 남존여비의 가부장적 선입견이 투사되었기 때문이다. 사오십년 전에는 동물행동학자들이 모두가 남성이었다. 저자는 단기적인 현장관찰로 인해 수컷에게만 배타적인 관심을 쏟았으며 수컷의 행동에 자신들의 남성적 세계상을 투사하여 해석했고, 그런 해석이 생각이 비슷한 다른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가부장적 이론은 동물들을 자연적 생활공간에서 벌써 수십 년씩 직접 관찰하는 많은 현장연구가들에 의해 오해가 벗겨지고 있다. 특이하게도 그 연구자들은 대개가 여성들이었다. 남성 동물행동학 연구자들은 그동안 연구소의 담장 안에서 학자로서 출세하기에 바빴단다.

가부장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학문적 이론에까지 시대적 상황에 따라 정치적 힘이 미쳤다는 사실에 맥이 빠진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많은 이론들, 유명한 인물들의 사상이 여기에서 벗어난다는 걸 뭘로 보장할 수 있을까... 누가 얼마동안 관찰하느냐에 따라 동물의 세계가 다르게 보인다는 걸 감안한다면 TV에서 보여주는 동물의 왕국은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역시 단기 관찰로 순간의 포착을 통해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수컷이 암컷을 지배한다는 의식을 여전히 인간에게 심어주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의심마저 든다. 동물을 다시 보게 해준 책이었지만 결국 인간을 다시 보게 해준 책이다.

책을 읽으며 한가지 아쉬웠던 점이 있었다.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입장에서 읽었더라면 좀 더 공감할 수 있지 않았을까...


5부로 나뉘어 30개의 글로 구성된 모든 내용들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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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차별과 억압
최봉영 지음 / 지식산업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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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한국말이 존비어체계로 인해 서로를 어떻게 옭아매는지, 한국말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피곤하게 살아가는 지 보여준다.

한국말은 개인을 개인으로 인식할 수 없는 언어이다. 오로지 상대방 나이나 직위를 기준으로 나와 상대방이 어떤 ‘관계’이냐에 입각해 내가 쓸 언어가 정해진다. 내가 쓰는 언어의 자유를 누리자면 상대방이 쓰는 언어의 자유까지 보장되어야 하는데 한국말은 상대방의 언어에 희생을 요구하며 내 언어의 자유만을 고집한다. 나와 상대방의 언어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범위는 오로지 동갑을 만날 때이다. 나이를 알고나면 내가 사용해야할 언어의 범위가 정해지기 때문에 한국 사람은 사람을 만나면 상대방의 나이에 예민하다.

한국말은 이미 언어 자체가 인간관계를 좌우해 버리는 희한한 언어이다. 나이가 많거나 적으면 나와 대등한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 일찍 태어나고 늦게 태어남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인데, 한국사람들은 이런 태생적 문제에 의미를 부여해 인간을 상하로 구분해 놓고 스스로를 들들볶으며 살아간다. 똑같은 인간이라는 코드로 접근하자면 내가 늦게 태어났다고 해서 상대방에게 나를 낮출 이유가 없다. 나이가 많으면 소중한 존재이고, 나이가 적으면 덜 소중한 존재이기라도 한 건 지 사람들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일단 한 수 먹고 들어가려고 한다. 나이가 많지 않아 존대를 해야하는 사람들은 존비어체계에 이의를 제기하기보다 자신도 언젠가는 나이 어린 사람으로부터 존대를 받을만큼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에 희망을 갖는다. 저자의 말처럼 오히려 존대를 해야만이 예의를 지킬 수 있다고까지 생각한다.

일상에서 “내가 나이 더 많으니까 말 놔도 되지?” 주로 이런 말을 듣다가 언제부터인가 “저보다 나이 많으니까 말 놓으세요.” 이런 말을 더 많이 듣게 되었다. 이런 말은 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아니, 불편한 것보다 서글프다. 나이라는 장벽 앞에서 나와 상대방이 대등한 눈높이의 대화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무리 친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나이가 무기인 언어의 장벽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한 나라의 언어는 그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쓰는 언어이다. 그런 언어가 왜 나이가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을 가르고 나이가 많은 사람만에게만 유리하게 작용할까? 이런 점에 주목할 때마다 난 한국말이 조폭언어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한국 사람들이 ‘친구’를 비롯해 조폭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한국말 자체가 조폭의 발상을 담은 언어라 사람들에게 그런 영화가 호소력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일상이, 한국말이 조폭문화, 조폭언어가 아니라면 그런 영화에 거부감이 들었을 것이다. 또, 유난히 또래 문화가 발달하고, 끼리끼리 패거리주의가 유난히 발달한 이유도 한국말이 가지는 폐쇄성 때문이라고 본다.


“비록 강력한 차별과 억압이 존재할지라도 일상화되면, 그것을 의식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 이런 까닭에 오늘날 한국인은 차별과 억압의 일상화로 갖은 괴로움을 겪고 있지만, 그것의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1장 첫머리에 쓰여있는 말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수도없이 한국말이 가진 모순을 지적했지만 사람들은 나를 이단아 취급했고, 내가 건드리지 말아야할 부분을 건드린 신성구역 침범자로 여겼다. 한 예로, 한국말은 나이를 기준으로 자기가 사용해야할 말의 범위가 결정되는 언어라 너무 답답하다고 누군가에게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의 말이 자신은 회사에서 인정을 받는 자리에 오르고 보니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한테 존대말을 써준다며 존대말이 꼭 나쁜 것도 아니며, 존대말이 꼭 나이 기준으로 쓰인다고만 볼 수도 없다며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식으로 얘기를 했다.

대학 때 영국 친구가 한국말을 배우는데 너무 어렵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래서 한국말을 빨리 배우는 비결 중의 하나가 나이를 기준으로 어투가 어떻게 달라지는 지를 익히면 빨리 배울 수 있다고 가르쳐주었다. 몇 년 후 그 친구가 하는 말이 “한국말은 비인간적이다. 똑같은 인간인데 어떻게 나이를 기준으로 자기가 쓰는 말이 달라질 수 있냐?” 고 했다. 주변 사람들한테 이 얘기를 해주었다. 그 영국친구는 한글이 얼마나 과학적인 글자인 지도 모르냐, 어른을 공경하는 문화랑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구랑 같냐... 별의별 반박이 다 나왔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정말 한국말의 차별 문제이기만 할까?

나이차별이든 성차별이든 결국 차별문제는 파고보면 개인을 개인으로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가정에서부터 개인을 개인으로 인식해 위냐 아래냐를 구분해 ‘관계’에 의한 호칭으로 부르는 일이 없이 서로가 서로를 대등한 주체로 인식한다면 가정을 넘어선 밖에서도 개인을 개인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가정에서부터 형, 누나, 언니, 오빠, 동생... 이렇게 줄을 세우는데 학교에서, 직장에서라고 다를까? 

앞에서 한국말은 개인을 개인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언어라고 했지만, 개인을 개인으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존비어가 발달한 걸까? 존비어가 발달해서 개인을 개인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서로를 ‘관계’에 의한 호칭으로 부르는 걸까?


저자 역시 너무 존비어에만 비중을 두다보니 호칭문제를 간과해 버렸다. 232페이지에 “또한 형이 재혼을 한 경우에, 새로 들어온 형의 처가 시동생이나 시누이보다 나이가 훨씬 적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시동생이나 시누이는 형의 처를 형수님이나 언니로 부르면서 높임말을 써야 한다.” 이런 내용이 보인다.

이 말은 이상하다. 일단, 이말대로라면 남편의 남동생은 ‘시동생’인데, 여동생은 ‘시동생’이 아니라는 얘기다. 동생이라는 말은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쓰는 말인데 남편의 여동생은 시동생이 아니라 ‘시누이’라는 호칭이 따로 있다. 더 웃긴 건 남편의 남동생은 시동생이고, 남편의 형은 시아주버니이고, 남편의 누나는 ‘형님’이고, 남편의 여동생은 ‘시누이’다. 그리고, ‘시동생이나 시누이는 형의 처를 형수님이나 언니로 부르면서 높임말을 써야 한다’는 부분에서 남편의 남동생 입장에서는 형의 처가 되겠지만 남편의 여동생 입장에서는 오빠의 처가 된다. 이런 호칭 문제가 바로 개인을 ‘개인’으로 부르지 못하고 나이에다 성별까지 대입한 ‘관계’를 파악한 호칭으로 부르다 보니 생기는 문제다.

사정이 이런데, 이땅의 여성운동은 서구이론만 열심히 쏟아내고, 제도적 차별 제거에만 급급하다. 언어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한국의 여성운동은 엘리트 여성들만의 잔치라는 게 확연해진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말이 가정에서 어떻게 차별되는 지 주목했어야 했다. 제도적 차별이 제거된다한들 언어적 차별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그게 평등인가?


옛날엔 생활에 필요한 모든 정보가 어른의 경험에서 나왔기에 나이는 곧 생활의 지혜와 정보가 쌓임을 말했다. 오늘날은 정보가 발달함에 따라 굳이 어른들의 경험을 빌지 않더라도 삶에 필요한 생활의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어른이라는 이유만으로 존대를 해야만 하는가?

존대어는 ‘상하존중’이 아닌 ‘상호존중’일 때 의미를 가져야 한다. 상하존중은 조폭집단에서나 가능한 발상이다. 민주사회는 상호존중이 요구되는 체제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나라에서 언어가 민주적이지 않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걸 보면 한국사람들은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면서 민주주의 타령을 하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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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3-31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저도 대체로 동의를 합니다만 한꺼번에 바꿀 수 있다거나 논쟁을 통해서 바꿀 문젠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에요. 논쟁보다는 토의를 통해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사람이 차츰 더 많아지면 그리고 지금 세대가 좀 더 나이가 많아졌을 때 그걸 잊지 않고 실천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는 인생을 한 반은 산 사람에게 사는 방식을 너무 많이 바꾸기를 요구하는 건 새로운 세대의 폭력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고뭉치 2005-04-04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언어에 대한 고민을 하는 개인들이 늘어날수록 공감대가 형성될테고, 그렇게 된다면 바뀌고 안 바뀌고의 문제는 굳이 걱정을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저처럼 언어에 대한 고민으로 내가 쓰는 언어에 대한 한계를 느끼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방법이 있겠습니다. 조율해서 타협을 보던가, 아니면 부딪히던가요.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끼리라면 조율이 가능할테고, 고민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저항하면서 부딪혀야겠죠. 저는 인생을 한 반은 산 사람에게 사는 방식을 너무 많이 바꾸기를 요구하는 건 새로운 세대의 폭력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라고 하셨는데 전 이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일방적 충성을 요구하는 언어를 그대로 두는 건 젊은 세대에게도 역시 폭력이니까요. 바뀌고 안 바뀌고는 개인의 선택 문제이니까 조율해서 타협을 보느냐, 부딪히면서 저항하느냐의 문제가 있을 뿐입니다. 저항하는 개인들이 늘어날 때 어떻게든 변화가 일어나겠죠.

젊은 세대와 나이든 세대 간에 피차 어느 한쪽은 폭력을 감수해야되는데 왜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고민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양보를 해야하는 거죠? 나이를 먹는다는 게 뭘까요? 인생을 한 반은 산 사람이라고 표현을 하셨는데, 인생을 한 반은 살았다면 그만큼 지혜가 늘어나는 게 어른이죠. 그런데, 나이든 사람들의 정체된 삶을 젊은세대가 감수해야된다는 거 전 납득할 수 없군요.

부모 세대때는 그렇게 살았으니까, 나이 먹은 어른들이니까 언제나 이런 이유로 덮어두려고만 했지 문제를 드러내놓고 공론화해서 도마위에 올리는 걸 꺼려 했기에 사태가 지금까지 온 것이라는 생각은 혹시 안 해보셨나요?

전 이 문제를 대학강사, 기자, 출판사 편집자이자 인터넷 논객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얘기를 꺼내보았는데, 단 한 사람도 제 말에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나이 많은 어른들은 오죽할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한국말은 나이를 차별하는 언어이니 어른들에게 바꿔라마라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또, 그런다고 해서 바뀌는 것도 아니고요. 존비어체계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젊은이들이 많아지면 어른들도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젊은 사람들이 존대를 해주기를 바라는 건 잘못된 거구나 이런 생각을 할 수는 있겠죠.

어른들도 알아야 합니다. 어른공경이라는 이름이 젊은세대에게는 억압이요, 폭력이라는 것을요. 어른이기에 배려해야한다는 건 어른이 지혜가 자라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보호받기만을 바라는 어린아이같은 존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 인터넷상에서 젊은 사람들이 맞춤법을 무시하는 한글파괴 현상을 일으킬 게 아니라 이런 존비어 체계를 무너뜨리는 한글파괴 현상을 일으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릴케 현상 2005-04-06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민의 깊이가 담긴 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