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명 이야기 - 반양장
황우석.최재천.김병종 지음 / 효형출판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황우석 교수의 소식으로 언론이 떠들썩할 때 난 그저 무덤덤했었다. 철학이 전제되지 않은 과학기술은 대안이 아니라는 생각을 평소에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헝그리 정신에 힘입어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겠다는 일념으로 세상을 등지고(?) 오로지 신념(똥고집?)과 집착으로 밀어붙이는 사람에게서 철학이 나오고, 판을 전체적으로 읽을 수 있는 종합적 비판력이 나올까?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소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글을 보며 책을 읽는 초반부터 어쩐지 불안했다. 과학기술은 뛰어날지 모르나 인문학적 사유가 부족한 사람일 거라는 걸 초반부터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황우석 교수는 인터넷 서핑할 시간도 없고, 책 읽을 시간도 없단다.

나는 인간의 생명이 과학기술적인 면에서 DNA라는 물질적 전제로만 설명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또한, 모든 걸 인간의 눈높이에서만 보며 자연을 도구화하면서 자연을 논하는 것도 불편하다. 핵치환으로 만들어낸 배아를 사람의 자궁에 인공적으로 착상시키지 않게 인공배양기가 탄생한다면?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이 무성생식을 한다? 성생활이 없이도 생명체가 탄생할 수 있다면 이미 그것만으로도 자연의 질서가 파괴되는 일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은 편하게 살지 몰라도 자연이라는 개체군 전체로 볼 때는 과학의 발전이 자연을 파괴하는 일일 수도 있다. 자연에 대한 도전으로 인간이 얻는 건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착각이 인간의 이기주의였다는 교훈으로 돌아올 미래다. 인간이 수많은 동물을 희생시켜 자신의 편리한 삶을 추구하고,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키려는 건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인간의 자존심이기보다 인간의 이기주의일 뿐이다.

“평생 과학도로서 한길만 가자고 다짐해 온 나는 과학도야말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자연을 이해하고 경외하는 것이야말로 그 무한한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생각한다(28p).”

책을 다 읽었지만 여전히 이 구절이 와닿지 않는다. 황우석 교수가 말하는 자연과 더불어 살고, 자연을 이해하고 경외하는 일이란 어떤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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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상을 해본다. 지구에 인구가 넘쳐나는 지금이야 ‘배아’를 파괴하건, ‘난자’를 파괴하건 ‘치료’를 위한 연구라는 명분으로 합리화가 되지만, 만약 지구에 재앙이 닥쳐 인구가 갑자기 줄어들어 인간의 생명체가 희귀해지는 이변이 찾아온다면 그때도 난자 파괴, 배아 파괴를 지금처럼 한가하게 넘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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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적으로 장애를 갖고 태어난 생명을 출생 후 손을 보아 ‘정상(장애인들 입장에서 보면 불편할 수도 있는 단어지만 지금 떠오르는 단어가 이것밖에 없다.)’으로 만드는 데 쓰이는 기술이 아니라 애초에 그런 장애를 갖고 태어나지 않도록 하는 과학기술이라면 어땠을까?

생명기술 발전 뒤에는 죽음과 장애를 인정하고 차분히 맞이할 줄 모르는 인간의 두려움과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하고 보는 천박한 상업주의가 자리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내겐 상업주의를 의식한 응원에 힙입고, 거액의 연구비를 독식한 독주보다는 철학을 가미해 자연이라는 거대 덩어리를 볼 줄 알고, 먼미래를 보고 기초과학을 걱정하는 최재천 교수의 글이 훨씬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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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5-09-21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재천 교수님이 좋아요. @.@

비로그인 2005-12-23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우석의 사기극이 명백하게 증명된 지금, 황우석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건 단지 열정이 지나쳤기 때문일까? 아님 애당초 과학자(심지어 인간)로서의 품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일까?
만일 후자의 경우라면,
그럼에도 우리는 이 책을 읽고 감동을 받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