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차별과 억압
최봉영 지음 / 지식산업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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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한국말이 존비어체계로 인해 서로를 어떻게 옭아매는지, 한국말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피곤하게 살아가는 지 보여준다.

한국말은 개인을 개인으로 인식할 수 없는 언어이다. 오로지 상대방 나이나 직위를 기준으로 나와 상대방이 어떤 ‘관계’이냐에 입각해 내가 쓸 언어가 정해진다. 내가 쓰는 언어의 자유를 누리자면 상대방이 쓰는 언어의 자유까지 보장되어야 하는데 한국말은 상대방의 언어에 희생을 요구하며 내 언어의 자유만을 고집한다. 나와 상대방의 언어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범위는 오로지 동갑을 만날 때이다. 나이를 알고나면 내가 사용해야할 언어의 범위가 정해지기 때문에 한국 사람은 사람을 만나면 상대방의 나이에 예민하다.

한국말은 이미 언어 자체가 인간관계를 좌우해 버리는 희한한 언어이다. 나이가 많거나 적으면 나와 대등한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 일찍 태어나고 늦게 태어남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인데, 한국사람들은 이런 태생적 문제에 의미를 부여해 인간을 상하로 구분해 놓고 스스로를 들들볶으며 살아간다. 똑같은 인간이라는 코드로 접근하자면 내가 늦게 태어났다고 해서 상대방에게 나를 낮출 이유가 없다. 나이가 많으면 소중한 존재이고, 나이가 적으면 덜 소중한 존재이기라도 한 건 지 사람들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일단 한 수 먹고 들어가려고 한다. 나이가 많지 않아 존대를 해야하는 사람들은 존비어체계에 이의를 제기하기보다 자신도 언젠가는 나이 어린 사람으로부터 존대를 받을만큼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에 희망을 갖는다. 저자의 말처럼 오히려 존대를 해야만이 예의를 지킬 수 있다고까지 생각한다.

일상에서 “내가 나이 더 많으니까 말 놔도 되지?” 주로 이런 말을 듣다가 언제부터인가 “저보다 나이 많으니까 말 놓으세요.” 이런 말을 더 많이 듣게 되었다. 이런 말은 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아니, 불편한 것보다 서글프다. 나이라는 장벽 앞에서 나와 상대방이 대등한 눈높이의 대화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무리 친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나이가 무기인 언어의 장벽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한 나라의 언어는 그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쓰는 언어이다. 그런 언어가 왜 나이가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을 가르고 나이가 많은 사람만에게만 유리하게 작용할까? 이런 점에 주목할 때마다 난 한국말이 조폭언어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한국 사람들이 ‘친구’를 비롯해 조폭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한국말 자체가 조폭의 발상을 담은 언어라 사람들에게 그런 영화가 호소력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일상이, 한국말이 조폭문화, 조폭언어가 아니라면 그런 영화에 거부감이 들었을 것이다. 또, 유난히 또래 문화가 발달하고, 끼리끼리 패거리주의가 유난히 발달한 이유도 한국말이 가지는 폐쇄성 때문이라고 본다.


“비록 강력한 차별과 억압이 존재할지라도 일상화되면, 그것을 의식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 이런 까닭에 오늘날 한국인은 차별과 억압의 일상화로 갖은 괴로움을 겪고 있지만, 그것의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1장 첫머리에 쓰여있는 말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수도없이 한국말이 가진 모순을 지적했지만 사람들은 나를 이단아 취급했고, 내가 건드리지 말아야할 부분을 건드린 신성구역 침범자로 여겼다. 한 예로, 한국말은 나이를 기준으로 자기가 사용해야할 말의 범위가 결정되는 언어라 너무 답답하다고 누군가에게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의 말이 자신은 회사에서 인정을 받는 자리에 오르고 보니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한테 존대말을 써준다며 존대말이 꼭 나쁜 것도 아니며, 존대말이 꼭 나이 기준으로 쓰인다고만 볼 수도 없다며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식으로 얘기를 했다.

대학 때 영국 친구가 한국말을 배우는데 너무 어렵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래서 한국말을 빨리 배우는 비결 중의 하나가 나이를 기준으로 어투가 어떻게 달라지는 지를 익히면 빨리 배울 수 있다고 가르쳐주었다. 몇 년 후 그 친구가 하는 말이 “한국말은 비인간적이다. 똑같은 인간인데 어떻게 나이를 기준으로 자기가 쓰는 말이 달라질 수 있냐?” 고 했다. 주변 사람들한테 이 얘기를 해주었다. 그 영국친구는 한글이 얼마나 과학적인 글자인 지도 모르냐, 어른을 공경하는 문화랑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구랑 같냐... 별의별 반박이 다 나왔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정말 한국말의 차별 문제이기만 할까?

나이차별이든 성차별이든 결국 차별문제는 파고보면 개인을 개인으로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가정에서부터 개인을 개인으로 인식해 위냐 아래냐를 구분해 ‘관계’에 의한 호칭으로 부르는 일이 없이 서로가 서로를 대등한 주체로 인식한다면 가정을 넘어선 밖에서도 개인을 개인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가정에서부터 형, 누나, 언니, 오빠, 동생... 이렇게 줄을 세우는데 학교에서, 직장에서라고 다를까? 

앞에서 한국말은 개인을 개인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언어라고 했지만, 개인을 개인으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존비어가 발달한 걸까? 존비어가 발달해서 개인을 개인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서로를 ‘관계’에 의한 호칭으로 부르는 걸까?


저자 역시 너무 존비어에만 비중을 두다보니 호칭문제를 간과해 버렸다. 232페이지에 “또한 형이 재혼을 한 경우에, 새로 들어온 형의 처가 시동생이나 시누이보다 나이가 훨씬 적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시동생이나 시누이는 형의 처를 형수님이나 언니로 부르면서 높임말을 써야 한다.” 이런 내용이 보인다.

이 말은 이상하다. 일단, 이말대로라면 남편의 남동생은 ‘시동생’인데, 여동생은 ‘시동생’이 아니라는 얘기다. 동생이라는 말은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쓰는 말인데 남편의 여동생은 시동생이 아니라 ‘시누이’라는 호칭이 따로 있다. 더 웃긴 건 남편의 남동생은 시동생이고, 남편의 형은 시아주버니이고, 남편의 누나는 ‘형님’이고, 남편의 여동생은 ‘시누이’다. 그리고, ‘시동생이나 시누이는 형의 처를 형수님이나 언니로 부르면서 높임말을 써야 한다’는 부분에서 남편의 남동생 입장에서는 형의 처가 되겠지만 남편의 여동생 입장에서는 오빠의 처가 된다. 이런 호칭 문제가 바로 개인을 ‘개인’으로 부르지 못하고 나이에다 성별까지 대입한 ‘관계’를 파악한 호칭으로 부르다 보니 생기는 문제다.

사정이 이런데, 이땅의 여성운동은 서구이론만 열심히 쏟아내고, 제도적 차별 제거에만 급급하다. 언어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한국의 여성운동은 엘리트 여성들만의 잔치라는 게 확연해진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말이 가정에서 어떻게 차별되는 지 주목했어야 했다. 제도적 차별이 제거된다한들 언어적 차별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그게 평등인가?


옛날엔 생활에 필요한 모든 정보가 어른의 경험에서 나왔기에 나이는 곧 생활의 지혜와 정보가 쌓임을 말했다. 오늘날은 정보가 발달함에 따라 굳이 어른들의 경험을 빌지 않더라도 삶에 필요한 생활의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어른이라는 이유만으로 존대를 해야만 하는가?

존대어는 ‘상하존중’이 아닌 ‘상호존중’일 때 의미를 가져야 한다. 상하존중은 조폭집단에서나 가능한 발상이다. 민주사회는 상호존중이 요구되는 체제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나라에서 언어가 민주적이지 않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걸 보면 한국사람들은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면서 민주주의 타령을 하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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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3-31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저도 대체로 동의를 합니다만 한꺼번에 바꿀 수 있다거나 논쟁을 통해서 바꿀 문젠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에요. 논쟁보다는 토의를 통해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사람이 차츰 더 많아지면 그리고 지금 세대가 좀 더 나이가 많아졌을 때 그걸 잊지 않고 실천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는 인생을 한 반은 산 사람에게 사는 방식을 너무 많이 바꾸기를 요구하는 건 새로운 세대의 폭력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고뭉치 2005-04-04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언어에 대한 고민을 하는 개인들이 늘어날수록 공감대가 형성될테고, 그렇게 된다면 바뀌고 안 바뀌고의 문제는 굳이 걱정을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저처럼 언어에 대한 고민으로 내가 쓰는 언어에 대한 한계를 느끼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방법이 있겠습니다. 조율해서 타협을 보던가, 아니면 부딪히던가요.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끼리라면 조율이 가능할테고, 고민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저항하면서 부딪혀야겠죠. 저는 인생을 한 반은 산 사람에게 사는 방식을 너무 많이 바꾸기를 요구하는 건 새로운 세대의 폭력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라고 하셨는데 전 이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일방적 충성을 요구하는 언어를 그대로 두는 건 젊은 세대에게도 역시 폭력이니까요. 바뀌고 안 바뀌고는 개인의 선택 문제이니까 조율해서 타협을 보느냐, 부딪히면서 저항하느냐의 문제가 있을 뿐입니다. 저항하는 개인들이 늘어날 때 어떻게든 변화가 일어나겠죠.

젊은 세대와 나이든 세대 간에 피차 어느 한쪽은 폭력을 감수해야되는데 왜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고민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양보를 해야하는 거죠? 나이를 먹는다는 게 뭘까요? 인생을 한 반은 산 사람이라고 표현을 하셨는데, 인생을 한 반은 살았다면 그만큼 지혜가 늘어나는 게 어른이죠. 그런데, 나이든 사람들의 정체된 삶을 젊은세대가 감수해야된다는 거 전 납득할 수 없군요.

부모 세대때는 그렇게 살았으니까, 나이 먹은 어른들이니까 언제나 이런 이유로 덮어두려고만 했지 문제를 드러내놓고 공론화해서 도마위에 올리는 걸 꺼려 했기에 사태가 지금까지 온 것이라는 생각은 혹시 안 해보셨나요?

전 이 문제를 대학강사, 기자, 출판사 편집자이자 인터넷 논객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얘기를 꺼내보았는데, 단 한 사람도 제 말에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나이 많은 어른들은 오죽할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한국말은 나이를 차별하는 언어이니 어른들에게 바꿔라마라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또, 그런다고 해서 바뀌는 것도 아니고요. 존비어체계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젊은이들이 많아지면 어른들도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젊은 사람들이 존대를 해주기를 바라는 건 잘못된 거구나 이런 생각을 할 수는 있겠죠.

어른들도 알아야 합니다. 어른공경이라는 이름이 젊은세대에게는 억압이요, 폭력이라는 것을요. 어른이기에 배려해야한다는 건 어른이 지혜가 자라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보호받기만을 바라는 어린아이같은 존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 인터넷상에서 젊은 사람들이 맞춤법을 무시하는 한글파괴 현상을 일으킬 게 아니라 이런 존비어 체계를 무너뜨리는 한글파괴 현상을 일으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릴케 현상 2005-04-06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민의 깊이가 담긴 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