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그리고 나의 선택
신세용 지음 / 인디북(인디아이)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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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여느 유학기와는 달리 저자의 인간적인 고민이 돋보인다. 성장의 고통이라고 해야하나... 내가 유학을 가려는 처지에 있지 않아서 그런지 공부에 관한 얘기보다 그런 개인적 고민내용이 더 와닿았다.

중학교 1학년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갔으면서도 존재의 중심을 잃지 않고 미국이라는 나라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을 지켜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대학을 포기하고 방황할 시기에 그를 잡아주려고 멀리 영국에서 유학하면서 힘을 주었던 형도 보통이 아니지만 저자가 쏟아낸 인간적 고민들이 인상적이다.

3권은 언제 나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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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
권혁범 지음 / 또하나의문화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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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제자들, 웬만한 여성운동가들 저리가라 할 만큼 여성주의자인 저자의 글을 여기저기서 많이 접했었기에, 이 책은 사놓기만 하고 몇몇 글만 읽고 잘 모셔놓고 있다가 최근에 꺼내들어 제대로 읽었다.


여성이 왜 좀 더 전투적이지 않냐는 지적에 많이 공감했고, 계급 문제로 다루어야 할 문제를 남성 자신들조차도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약자인 여성에게 화살을 돌린다는 점, 창조적인 결혼식이 아니면 제자들의 결혼식 주례부탁을 거절하겠다는 내용이 와닿았다. 아쉬운 점도 보인다. 난 한국 현실에서는 주5일제보다 정시출퇴근제가 더 어울린다고 본다. 소위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혹은 6시 퇴근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은 육체노동자들이나 상업쪽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장시간 노동에 둔하다. 주5일제라고 해봤자 육체노동자들은 ‘특근’으로 처리해 버리고 그대로 일을 시킨다. 특근이 해당되지 않는 회사에서도 주5일제이면서도 이 핑계 저 핑계 대어서 주말에도 회사에 나오게 해서 사무실에서 빈둥거리게 만드는 회사도 많이 봤다. 난 주5일제가 반갑지 않다. 여성계에서, 6시 땡하면 퇴근하게 해서 남편/아빠를 가정에 돌려주라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게 그저 신기할 뿐이다.


난 여성이 여성문제를 얘기할 때 여성문제에 '여성'을 얘기하지 않고 오히려 언제나 남성만 비판하고, 질타하는 판도가 이해가 안 된다. 여성을 여성 자신도 타자화하면서 이야기하는 건 어차피 해결책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같은 시대를 살아오면서 여성이 가부장제에 길들여졌듯 남성도 남성 우월주의에 물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는 여성 자신이 가부장제에 적응하고 인내해면서 길들여져 온 세월이 가부장제를 더 공고히 굳혀놓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을 자각, 반성하지 않고 남성만을 비판한다. 여성 마초는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비판에서 면제되는 현실을 여성은 애써 무시한다. 이런 사실들을 의식하고 이 책을 읽는다면 권혁범 교수가 남성을 향해 비판을 던졌듯 여성 역시 화살을 남성한테 돌릴 게 아니라 여성 자신에게 돌려야 한다. 난 여성이 없는 여성운동이 이상하다.


여성문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문제가 아니라 강자와 약자의 문제라는 저자의 지적에 공감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었다. 분명, 여자라고 다 여성주의자도 아니요, 남자라고 다 마초도 아니다. 그렇다면, 여성문제는 의식이 깨인 남자와 여자(즉 페미니스트인 남자와 여자), 깨이지 않은 남자와 여자(마초인 남자와 여자)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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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이기주의자
웨인 W. 다이어 지음, 오현정 옮김 / 21세기북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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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 제목이 대학 때 동생 걸 넘겨받아서 읽었던 '내 인생 내가 선택하며 산다'랑 똑같아서 개정판일 줄은 알았었다. 하도 오래전 책이라 새로 구입해서 아주 오래간만에 다시 읽어보기도 할 겸 새걸로 바꿔서 소장해 놓기도 할 겸 주문을 했는데... 아뿔사! 이게 웬일? 대학 때 읽었던 책을 꺼내 내용을 비교해 보고 처음엔 '내 인생 내가 선택하며 산다' 후편쯤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읽다보니 내용이 그 책에서 본 거랑 겹치는 게 있었다. 이번엔 두 권을 대비해 가면서 좀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그게 번역의 문제였다. 인상적이었던 책이라 줄을 쳐가면서 몇 번을 읽었던 책인데, 같은 책이 번역을 누가 하느냐,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렇게 달라지는 거구나를 실감하고 나니까 책 읽을 맛이 달아나 버렸다. 원서를 구해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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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류사회 - 새로운 계층집단의 출현
미우라 아츠시 지음, 이화성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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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짧은 상류의 불안함이 상류의 천박한 속물근성을 하류의 게으름으로 치부해버리는 책이다. 하류에게 모범을 보일 수 있는 상류의 삶이 아니고 헝그리 정신에서 출발해서 결핍을 채워가는 상류라면 상류라는 가치를 제대로 굳히기까지 거쳐야 할 시행착오의 역사가 길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의 저자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저자의 할아버지가 땅을 팔아 자신을 비롯한 손자들에게 교육을 시켰다고 했다.


누가, 어떤 삶을 두고 ‘하류’라 정의하느냐에 따라 ‘하류’의 모습은 가지각색이다. 이 책은 하류로 ‘규정하는’ 자와 하류로 ‘규정되는’ 자 중 ‘규정하는’ 자의 언어만 반영되었다. 상류가 보는 상류와 하류의 기준은 제시되어 있지만 하류가 보는 상류와 하류의 기준은 제시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이 책은 물질적 기준으로만 상류와 하류를 말한다.


출세라는 야망의 찌꺼기를 던져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의 눈에는 자기다움을 추구하고, 자아실현을 가치로 삼는 삶이 하류로 보이나 보다. 저자가 하류인생이라고 딱지를 붙인 사람들이 보기엔 돈 밖에 모르는, 오로지 위로 위로 상승만을 꿈꾸는 경제동물들이 하류로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못하나 보다. 사생활까지 포기해가며, 자기 욕구를 죽이며 상류로 올라간 사람일수록 자아실현에 의미를 두고 사는 사람들을 비하하고 끌어내려 하류로 딱지를 붙여야 자기들 삶이 빛나 보일 것 아닌가! 물질적 안락을 위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꾹꾹 참아가며 하는 미련한 사람들이야말로 수단이 되어야 할 게 목표가 되고, 목적이 된 삶은 아닌가? 내 생각엔 인간의 본질, 존재에 대한 고민을 해본 사람은 상류, 하류 이런 딱지 붙이기에 별 관심을 두지 않을 것 같다. 내 눈엔 돈과 일만 아는 경제동물들이 하류로 보이는구만.


저자는 하류란 가난이 문제가 아니라 의식의 문제라고 말한다. 노력과 의지가 없는 삶이 하류인생이란다. 그런데, 이 책은 상류와 하류에게 ‘왜?’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동기가 부여되어 있다면 하류로 찍힌 사람들이 왜 일을 안 할까? 상류는 무엇을 위해 죽어라 일을 하는가? 그 답이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옷... 이런 물질적 안락에 있다면 그런 삶이야말로 하류일 수도 있다. 상류 하류를 떠나 그런 물질적 풍족을 누리기 위해 일을 하느라 자기 인생에 포기해야 할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비행기 타고 바다 건너간 사람이 배 타고 건너가는 사람 보고 왜 그렇게 천천히 오냐고 꾸짖는 꼴이라니! 뉘라서 남의 인생을 두고 하류라 딱지를 붙이는가!


동생이 그런다. 사람들은 도대체 뭘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일만 하는지 모르겠다고. 이 책은 노동의 ‘의미’를 찾는 사람에게 ‘열심히’를 주문한다.


역사란 어차피 강자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강자의 논리로 무장한 하류 타령이 천박해 보일 뿐이다. 도와주지 못할 거면 그들을 좀 가만히나 두지.


이 빌어먹을 땅덩이만 하더라도 뭐 좀 해보겠다고 의욕을 보이는 사람들을 ‘나이’라는 희한한 잣대로 기회를 차단해 버린다. 일본이라면 모를까 한국이라는 나라는 하류 인생들이 의지가 없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비난할 자격이 없다. 거기다, 사생활과 직장생활을 구분할 줄 모르는 모호한 경계개념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땅에서 의지 부족, 노력 부족 타령을 한들 그게 설득력을 가지나! 물질적 안락을 위해 정신적 삶은 치워두고 상류만 노래하는 불쌍한 개미의 자기 위안으로 들리지. 꾸물거려 일을 한 댓가가 먹고 살 비용, 자기 계발 비용은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죽어라 일해봤자 기본적인 삶을 돌리기 바쁜 돈에, 집에 가서 책 한 줄 볼 시간도 주지 않고 사람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만이 요청되나? 사생활을 포기해야 누릴 수 있는 상류의 삶은 진정 추구할 가치가 있긴 있나? 누굴 위해서?


설문 조사 결과 하류 층에서 개성 추구, 자아실현이라는 의견이 많이 나왔다고 이런 게 의미없는 가치가 되나? 오로지 상류가 보는 시각만이 진리다? 정말 단순 무식한 발상에 입이 다 벌어진다.


참 이상하다. 페미니즘은 남자탓, 사회탓이고 상류 하류 이런 계급은 개인의 의지와 노력 부족이 문제인가? 아, 춤추는 일관성, 짜증난다.


오래전 ‘심리학 이야기’라는 책에서 본 문구가 생각 난다.


“하류층의 사람일수록 사람을 높은 등급으로 올리는 것은 돈이라 하고,

중류급의 사람들은 그것을 교육과 직종이라 하며,

상류층의 부류는 그 사람의 개성과 취미와 생각과 언행이라 한다.”


오로지 경제적 풍족만이 최상의 가치인 사회에서 정신적 삶을 갈구하는 사람은 설 자리가 없다. 위로 위로 올라가지 않으면 내가 살고 싶은 삶을 누릴 수 없다는 것, 이게 이 시대 정신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불행이겠다.


이 책은 ‘하류라고 딱지를 붙이는 사람은 누구인가?’, ‘약자의 삶을 왜 강자가 정의하는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 철저히 강자의 논리로 무장한 책이다. 삶에 상류, 하류라고 딱지를 붙일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다. 자신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타인의 삶을 함부로 정의내린다.


남들이 보기에 무난해 보이는 삶이 최선은 아니다. 상류이든 하류이든 이런 가치 기준은 ‘결혼 적령기’, ‘눈이 높다’ 이런 말처럼 당사자가 아닌 개인이 살아가는 스타일, 개성을 놓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눈높이에서 “보는” 시각을 말해 줄 뿐이다. 물질적 삶에 의미를 두어 죽어라 일을 해서 물질적 풍족을 누리고 살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살면 되고, 물질적 삶보다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정신적 삶에 무게를 두고 싶으면 그렇게 살면 되는 거다. 타인도 자기 방식대로 살아야 한다고 우기는 정신병자는 병원에 보내야 한다.


이 책은 ‘일하지 않는 사람들 일할 수 없는 사람들’, ‘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미친 돈 바람을 멈추어라’ 나아가 ‘절대로 일하지 마라’ 이런 책이랑 같이 읽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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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적인 사람이 성공한다
마티 올슨 래니 지음, 박윤정 옮김 / 서돌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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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이 책은 제목을 잘못 정한 것 같다. 제목에서 ‘내성적인’이란 말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면 그렇고 그런 책쯤으로 여기고 사지 않았을 거다. 이 책을 읽기 전, 평소에도, 존재의 무게를 고민하는 사람이 성공에 의미를 둘까, 도대체 성공이란 게 뭘까,라는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거기다, 책을 읽고 난 지금은 제목과 내용이 따로 국밥이란 점에서도 제목이 거슬린다. 일단, ‘성공’이란 개념부터 손을 보고 가야겠다. 난 모든 사람의 눈높이를 만족시키는 객관적 성공이란 없다고 본다. 성공이란 ‘결핍에의 충족 동기’, ‘열등감’, ‘속물근성’의 다른 이름이라고 본다. 성공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은 타인을 의식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성공으로 이끌고 가는 힘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이기 때문이다(그런 면에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이런 말은 분명 외향적인 사람에게서 나온 말일 거다. 내성적인 사람은 남의 칭찬이나 비난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데 비해 외향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으면 내 눈에 포착되지 않았을 거다.). 이렇게 타인의 칭찬이나 비난, 응원에 힘을 입거나 힘을 잃는 사람은 외향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는 책 내용으로 보자면 제목이 많이 빗나갔다. 어떻게 보면, ‘성공’이란 말은 우열을 가르는 말이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을 성공하지 못한 사람과 비교해 차별성을 두려고 한다. 그런 차별성은 성공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에게 성공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성공하고 싶은 열등감을 갖게 한다. 이런 점을 놓고 볼 때 번역 과정에서 내향성과 외향성의 다름, 차이를 부각시키는 제목을 선택하지 못하고 우열을 가리는, 이래저래 번지수 못 맞춘 제목이 아쉬워서 별표를 한 개 깎았다.

지난 달 무료 심리 검사를 실시하는 곳을 알게 되어 이게 웬떡인가 싶어 상담을 받게 되었다. 상담에 들어가기 전 여러 가지 심리 검사를 받았는데 그 중에 MBTI라는 심리검사도 끼어 있었다. 심리에 관심이 많다 보니 이미 이 책 저 책에 나온 MBTI 검사 방법으로 내 성격이나 기질을 대충은 파악하고 있었는데, 그 검사에서 나온 결과도 내가 검사해 본 결과와 같게 나와 있었다. 한 가지 그곳에선 결과 유형도 유형이지만 결과 수치가 의미하는 바도 짚어봐야 한다며 내게 특히 높은 수치로 나온 내향형과 사고형을 지적해 주었다. 상담을 맡은 분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려면 이 두 수치를 좀 줄여야 한다고 해서 그때는 정말 그런가보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평소 내 지론대로 ‘차이’, ‘다름’의 문제인데 왜 내가 나를 죽여야 하나, 나를 죽이며 이루어나가는 인간관계가 의미가 있긴 한가 이런 회의가 많이 들었다. 그러던 중 서점에서 이 책을 접하고, 바로 알라딘에 주문을 해버렸다.

저자는 두뇌를 가리켜 경이 그 자체라고 했지만, 내겐 이 책이 경이 그 자체다. 이 책을 읽기전까지 난 내향성이냐 외향성이냐 이런 기질이 자라온 환경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평생을 그렇게 생각하면서 힘들게 살았을 지도 모른다. 내향성이냐 외향성이냐는 타고난 생리적 문제라고 이책은 말한다. 그건 내향성과 외향성의 두뇌경로가 다르기 때문이란다. 내향성은 두뇌경로가 길고, 외향성은 두뇌경로가 비교적 짧다고 한다. 저자는 내향성과 외향성을 가르는 기준은 에너지를 창조, 즉 충전하는 방식이 어떻게 다른가에 있다고 한다. 이책은 이를 내향성은 충전용 배터리와 같고, 외향성은 태양열판과 같다고 비유한다. 내향성은 재충전을 위해 사용을 멈추고 쉬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외향적인 사람들은 태양열판을 재충전하려면 햇빛이 필요하듯이, 재충전을 위해 밖으로 나가 어울려야 한다.

사람 심리에 관한 이런 책을 읽으며 내게 굳어진, 아니 확신을 가져다 준 철학이 있다. 타인을 이해하는 저울의 눈금은 나를 이해하는 수준과 비례한다는 것. 우리는 웬만한 사람이라면 내향성이든 외향성이든 서로를 자기 기준에서 보고 있지 않을까? 타인을 이해하는 코드가 이렇게 상대적이라면,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내 상식을 의심하는 작업에서 출발한다는 답이 나온다. 흔히, 우리는 외향성을 정상 내지는 지향해야 할 성격으로, 내향적인 사람을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내향성인 사람 자신도 내향적 기질을 외향적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문제가 있는 성격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내향성과 외향성은 ‘다름’의 문제이지 우열, 옳고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다름은 ‘공존’을 모색해야지 우월을 의식한 차별의 눈으로 볼 게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를 억누르던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워짐을 느끼며 나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 정말 행복했다. 나를 이해하면 그만큼 타인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마련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까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서 아 이 사람은 이래서 이렇게 행동하는 거구나, 저 사람은 저래서 저렇게 행동하는 거구나 이런 게 눈에 보인다고나 할까... 외로움, 심심함을 토로하는 사람, 이혼을 했거나 배우자가 죽었을 때 재혼을 빨리 하는 사람일수록 외향성이 아닐까?


자생 이론이 아닌 수입 이론이었다는 점에서 별표를 또 한 개 깎았다. 왜 이런 책은 꼭 번역본으로 등장할까? 그건, 이땅의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패턴을 발견해 이론을 도출하기보다 기존의 이론을 사람에게 맞추면서 자신들의 공부에 대한 확신을 얻기 때문이 아닐까, 지식을 '창출'하기보다 '습득'하는 데 더 관심을 두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내멋대로 생각해 본다. 호기심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학문을 하는 풍토가 수입이론을 키우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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