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성적인 사람이 성공한다
마티 올슨 래니 지음, 박윤정 옮김 / 서돌 / 200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무래도 이 책은 제목을 잘못 정한 것 같다. 제목에서 ‘내성적인’이란 말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면 그렇고 그런 책쯤으로 여기고 사지 않았을 거다. 이 책을 읽기 전, 평소에도, 존재의 무게를 고민하는 사람이 성공에 의미를 둘까, 도대체 성공이란 게 뭘까,라는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거기다, 책을 읽고 난 지금은 제목과 내용이 따로 국밥이란 점에서도 제목이 거슬린다. 일단, ‘성공’이란 개념부터 손을 보고 가야겠다. 난 모든 사람의 눈높이를 만족시키는 객관적 성공이란 없다고 본다. 성공이란 ‘결핍에의 충족 동기’, ‘열등감’, ‘속물근성’의 다른 이름이라고 본다. 성공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은 타인을 의식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성공으로 이끌고 가는 힘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이기 때문이다(그런 면에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이런 말은 분명 외향적인 사람에게서 나온 말일 거다. 내성적인 사람은 남의 칭찬이나 비난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데 비해 외향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으면 내 눈에 포착되지 않았을 거다.). 이렇게 타인의 칭찬이나 비난, 응원에 힘을 입거나 힘을 잃는 사람은 외향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는 책 내용으로 보자면 제목이 많이 빗나갔다. 어떻게 보면, ‘성공’이란 말은 우열을 가르는 말이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을 성공하지 못한 사람과 비교해 차별성을 두려고 한다. 그런 차별성은 성공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에게 성공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성공하고 싶은 열등감을 갖게 한다. 이런 점을 놓고 볼 때 번역 과정에서 내향성과 외향성의 다름, 차이를 부각시키는 제목을 선택하지 못하고 우열을 가리는, 이래저래 번지수 못 맞춘 제목이 아쉬워서 별표를 한 개 깎았다.

지난 달 무료 심리 검사를 실시하는 곳을 알게 되어 이게 웬떡인가 싶어 상담을 받게 되었다. 상담에 들어가기 전 여러 가지 심리 검사를 받았는데 그 중에 MBTI라는 심리검사도 끼어 있었다. 심리에 관심이 많다 보니 이미 이 책 저 책에 나온 MBTI 검사 방법으로 내 성격이나 기질을 대충은 파악하고 있었는데, 그 검사에서 나온 결과도 내가 검사해 본 결과와 같게 나와 있었다. 한 가지 그곳에선 결과 유형도 유형이지만 결과 수치가 의미하는 바도 짚어봐야 한다며 내게 특히 높은 수치로 나온 내향형과 사고형을 지적해 주었다. 상담을 맡은 분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려면 이 두 수치를 좀 줄여야 한다고 해서 그때는 정말 그런가보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평소 내 지론대로 ‘차이’, ‘다름’의 문제인데 왜 내가 나를 죽여야 하나, 나를 죽이며 이루어나가는 인간관계가 의미가 있긴 한가 이런 회의가 많이 들었다. 그러던 중 서점에서 이 책을 접하고, 바로 알라딘에 주문을 해버렸다.

저자는 두뇌를 가리켜 경이 그 자체라고 했지만, 내겐 이 책이 경이 그 자체다. 이 책을 읽기전까지 난 내향성이냐 외향성이냐 이런 기질이 자라온 환경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평생을 그렇게 생각하면서 힘들게 살았을 지도 모른다. 내향성이냐 외향성이냐는 타고난 생리적 문제라고 이책은 말한다. 그건 내향성과 외향성의 두뇌경로가 다르기 때문이란다. 내향성은 두뇌경로가 길고, 외향성은 두뇌경로가 비교적 짧다고 한다. 저자는 내향성과 외향성을 가르는 기준은 에너지를 창조, 즉 충전하는 방식이 어떻게 다른가에 있다고 한다. 이책은 이를 내향성은 충전용 배터리와 같고, 외향성은 태양열판과 같다고 비유한다. 내향성은 재충전을 위해 사용을 멈추고 쉬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외향적인 사람들은 태양열판을 재충전하려면 햇빛이 필요하듯이, 재충전을 위해 밖으로 나가 어울려야 한다.

사람 심리에 관한 이런 책을 읽으며 내게 굳어진, 아니 확신을 가져다 준 철학이 있다. 타인을 이해하는 저울의 눈금은 나를 이해하는 수준과 비례한다는 것. 우리는 웬만한 사람이라면 내향성이든 외향성이든 서로를 자기 기준에서 보고 있지 않을까? 타인을 이해하는 코드가 이렇게 상대적이라면,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내 상식을 의심하는 작업에서 출발한다는 답이 나온다. 흔히, 우리는 외향성을 정상 내지는 지향해야 할 성격으로, 내향적인 사람을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내향성인 사람 자신도 내향적 기질을 외향적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문제가 있는 성격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내향성과 외향성은 ‘다름’의 문제이지 우열, 옳고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다름은 ‘공존’을 모색해야지 우월을 의식한 차별의 눈으로 볼 게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를 억누르던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워짐을 느끼며 나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 정말 행복했다. 나를 이해하면 그만큼 타인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마련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까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서 아 이 사람은 이래서 이렇게 행동하는 거구나, 저 사람은 저래서 저렇게 행동하는 거구나 이런 게 눈에 보인다고나 할까... 외로움, 심심함을 토로하는 사람, 이혼을 했거나 배우자가 죽었을 때 재혼을 빨리 하는 사람일수록 외향성이 아닐까?


자생 이론이 아닌 수입 이론이었다는 점에서 별표를 또 한 개 깎았다. 왜 이런 책은 꼭 번역본으로 등장할까? 그건, 이땅의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패턴을 발견해 이론을 도출하기보다 기존의 이론을 사람에게 맞추면서 자신들의 공부에 대한 확신을 얻기 때문이 아닐까, 지식을 '창출'하기보다 '습득'하는 데 더 관심을 두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내멋대로 생각해 본다. 호기심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학문을 하는 풍토가 수입이론을 키우는 것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