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철학의 제문제 발표문 초고. 존 크리스먼, 『사회정치철학』의 5번째 장 '보수주의, 공동체주의, 사회적 자아관' 요약.>  

  어떤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인지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 사회가 어떤 덕목을 추구하고 권장하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이 경우 그 덕목이 객관적으로 바람직하며, 또 그 사회가 그것을 얼마만큼의 강도로 권장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 사회가 얼마나 좋은 사회인지 결정된다. 다른 하나는 어떻게 그 사회에서 추구하는 덕목이 확정되는지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다. 앞의 경우와 반대로 이 때에는 그 덕목의 객관성과는 별개로 그것이 ‘좋은 것’으로 간주되는 과정에서 우연적이고 외부적인 요인이 얼마나 덜 개입했는지에 따라 그 사회의 수준을 판가름할 수 있다. 줄여서 말하면, 사회는 크게 ‘좋음(good)’과 ‘정당성(legitimacy)'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할 수 있다. 

  이전 시간까지 살펴보았던 자유주의적 관점은 이 가운데 후자, 즉 정당성을 우선시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사회가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과정으로 자신을 구성하고 있을 경우 그 사회가 ‘정의롭다’고 말한다. 자유주의적 입장은 적어도 인간과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타당하여 따라서 인간이 수용할 수밖에 없는 덕목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다. 이런 가정은 모든 덕목에 대해 합리적으로 반성할 수 있는 인간을 요청한다. 또한 이런 반성을 거쳐서 수용되어야만 그 덕목은 정당성을 획득한다. 이 같은 정당성을 획득한 덕목들이 모여야만 한 사회를 구성하는 덕목들 전체가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정당성을 획득한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이다. 

  위와 같은 자유주의적 논변에 대해 다양한 반론이 존재하였지만, 특별하게 이 글에서는 공동체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의해 가해진 비판에 집중하고자 한다. 공동체주의자들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 근본적으로 인간은 특정한 덕목에서 분리될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합리적으로 반성하는 인간상은 허구적이다. 둘째, 따라서 덕목에 대해 완전히 중립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는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자유주의적 이념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셋째,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공동체적인 삶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심각하게 파괴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1. 보수주의

  1.1 보수주의의 정의와 특징

  보수주의(conservatism)는 넓은 의미에서 변화나 진보에 대한 믿음보다는 기존의 공동체와 그것이 의존하고 있는 가치체계를 지키는 데 더 큰 비중을 두는 심리적인 경향을 가리킨다. 그러나 정치철학적인 맥락에서의 보수주의는 다음과 같은 더욱 엄밀한 요소를 포함하는 정치철학적 입장을 가리킨다. 

  첫째, 단순한 심리적인 태도가 아닌 논리적인 정당화를 통해서 전통을 강조한다. 특히 이런 논리적인 정당화는 역사를 통해 귀납적으로 이루어진다. 역사를 통해서 지켜졌던 공동체의 요소들은 지켜졌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바람직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는데, 섣부른 믿음은 그런 바람직한 덕목들을 축소시키거나 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사회는 이 덕목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실천하게끔 만드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아야한다. 기존의 가치체계에 대한 회의는 자신이 얼마나 정당한지 충분히 증명할만한 자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반면에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여러 덕목들은 그 자체로 그 사회 내에서는 개별 인간들에게 행복을 안겨줄 수 있는 것들이기에 충분히 권장되어야 사람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따라서 개인의 권리 자체의 타당성 검토나 덕목 자체의 객관적 가치 같은 문제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바뀌며, 이들은 그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몇몇 요소 가운데 하나로서 그 지위가 격하된다. 만약 어떤 개인이 좋은 것을 자기 판단에 따라 거부하려 한다면, 보수주의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는 매우 미련하고 어리석은 짓이 될 것이다. 이 셋은, 개인은 ‘좋은 삶(가치있는 삶)’을 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사회는 이것을 강력하게 권장해야한다는 보수주의자들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1.2. 보수주의 사회모델의 한계와 전환

  하지만 이 같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는 특정한 덕목이 본질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견해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따라서 그 덕목이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런 정당화가 개인이 외부의 간섭 없이 수용하는 데 토대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그 덕목이 옳은지 그른지는 그 덕목이 가치있는 것으로서 간주된 역사적 배경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개인들의 수용이나 승인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보수주의의 사회모델은 심각한 결함을 안고 있다. 특정한 덕목들은 특정한 집단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보수주의자들은 사회와 그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가지 덕목들을 전통에 근거해 조직하려고 하며, 그것은 자연스럽게 기존에 특혜를 받던 집단의 이익을 가장 잘 수호한다. 또한 전통적인 가치관에 의해 가장 특혜를 받는 집단이 실제로 사회의 재조직, 재구성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이는 특혜를 받는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 사이의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전통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그 가치가 보편성이나 일반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항의할 수밖에 없다. 즉 가치는 권력과 결부되어있는 것이다. 엄연히 존재하는 불평등은 사회가 기초하는 가치에 의존하였을 때 생기는 것이고, 이것이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밖에 없다. 또한 사회를 이렇게 조직하려는 전략 자체도 논리적으로 심각한 결함에 노출되어 있다. 한 사회가 고수해오는 가치체계에 대해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반성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런 덕목들이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 의해서 우연적으로 정당화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필연적인, 즉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하려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자들이 제기하는 자유주의적 인간관에 대한 비판 및 사회에 대한 여러가지 다른 시각은 여전히 경험적으로(심리적으로)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점을 부각시키고 합리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공동체주의자라 불리는 사조가 나타나는 배경이다. 테일러Talyor, 샌들Sandel, 매킨타이어MacIntyre, 왈쩌Walzer 등이 자유주의적 입장에 대해 비판을 제기하며 대표적인 공동체주의자로 분류되었다. 공동체주의자 각각의 학문적 토대나 논증의 형태는 다를지라도, 자유주의적 인간관과 가치평가기준, 그리고 그 원리가 실행된 공동체의 형태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2. 공동체주의

  2.1 자유주의적 자아에 대한 비판

  자유주의적 자아관의 기본적인 요소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행위자가 특정한 정치권력, 사회 구조, 가치의 체계 등을 수용할 때에만 그들이 정당화된다는 것이 기본적이다. 이러한 대상들이 가치있는 것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이들을 ‘가치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둘째, 이 과정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모든 개인이 기존의 어떤 가치체계에도 의존하지 않고서 가치에 대해 메타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한다. 셋째, 사회는 이러한 개인들의 능력을 최대한 존중하는 방향으로 조직되어야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이 추구하는 각각의 가치들에 대해서 편중되지 않고 중립적이어야 한다. 이 중립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언론, 결사, 이동, 사생활의 자유 같은 것들이 반드시 필요하며, 이들 요소가 갖춰져야만 정의로운 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인간은 어떤 가치체계에도 의존하지 않는 판단을 할 수 있는가? 공동체주의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각각 근거하고 있는 학설은 다를지라도, 공동체주의자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사회적이라고 주장한다. 인격이 가능한 이유는 어떤 공동체가 그를 인간으로서 대우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공동체는 인간으로서의 대우는 많은 가치들을 함축하고 그것을 수용하도록 성장 과정 전체에서 강요한다. 이들에 따르면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주장하는 반성적 능력은, 사실 가치 자체 또는 가치 체계 전체에 대한 객관적 반성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신념으로 삼은 특정한 가치가 의심스러울 때에만 그에 대해 반성한다. 게다가 이 반성은 가치에 대해 의심하고 거부하는 것보다는, 그 덕목의 진정한 의미나 본질에 대해 숙고하는 쪽에 더욱 가깝다. 진정한 자아의 발견은 의심하는 능력을 자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규정된 가치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 합리적으로 정당화하는 데서 비롯된다. 

  또한 이러한 가치체계들은 단순히 인간이 수용해야 하는 체계라는 것을 넘어서, 모든 판단을 가능하게 해주는 지평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는 점은 자유주의적인 인간관이 가능한지에 대해 더욱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런 점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은 언어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사고한다. 언어는 어떤 인간에 대해 선택적이지 않고, 오히려 지정된 언어 하나가 인간의 사고의 기반이 된다. 언어에 대한 이런 일반적인 시각에 입각해서 본다면, 자유주의적 자아관은 언어가 없이도 반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는 다소 억지스러운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사고는 자유주의의 인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입장을 비판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존재 자체로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규정한 여러가지 가치들이 쌓인 결과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러한 가치를 몸에 담아 실천하면서 인간으로서 거듭난다. 인간을 규정하는 데 사회는 필수적이다. 이는 사회를 벗어난 사유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함축하는 듯 보인다. 

  게다가 이런 인간관은, 그야말로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자유주의적 인간관과는 달리, 실제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훨씬 더 잘 반영하고 있다. 인간들은 실제로 특정한 덕목들을 의식하지 않고 실천하며 살아간다. 매번 가치체계를 반성한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어색하다. 자유주의적 가치관에 입각해 특정한 덕목들에 대해 매번 숙고하는 사람들은 소수이며, 이는 오히려 자유주의적 인간관이 보편적, 일반적이지 않고 특정한 인간관을 보편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비약을 담고 있다는 주장을 하는 근거가 된다.

  2.2 사회적 자아와 가치 신조

  사람들이 실제로 자유주의적 자아관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점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면, 공동체주의가 실제 삶에 더 잘 부합한다고 소극적으로 주장하는 선을 넘어서, 자유주의가 묘사하는 자아와 가치체계 사이의 관계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어떤 가치를 선택하게 되는 동기와 그것이 정말 인간의 이익에 부합하는지에 대해 잘못된 시선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공동체는 특정한 가치관을 기초로 성립된다. 그러나 개인은 태어나기 전에 자신이 살아갈 공동체를 선택할 수 없다. 따라서 특정한 가치관은 개인에게 주어진 형태로 등장한다. 물론 자유주의자들이 이러한 면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며,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관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과 선택은 가능하며 언제나 가능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이 그 가치관을 구성하는 덕목들이 공동체 내에서 가치있는 것으로, 즉 정당한 것이 되는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공동체주의자들에 의하면, 이런 가치들은 그 가치를 받아들인 인간들의 내면에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낼 뿐, 선택당하는 대상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더군다나 역설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 능력에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그들은 모든 덕목은 사람들의 승인을 통해서만 가치있는 것으로 거듭난다고 주장하지만, 선택능력은 승인과 상관없이 지켜야하는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자유는 개인들이 삶을 살게 해주는 형식적인 조건일 뿐이지, 인간이 평가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덕목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설령 인간이 자유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자유롭다고 할지라도, 그 자유롭다는 의미는 어떤 특정한 덕목을 실천함으로써 드러나는 것이지 결코 그 자체가 인간을 규정지을 수는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인간을 규정짓는 제 1원리로 자유를 설정함으로써 생기는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공동체는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에 따라 정의를 확립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적으로는 좋은 공동체가 되기 위해 특정한 덕목에 입각해서 개인을 행복한 삶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하기도 한다. 개인의 기본적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정의를 추구할 경우, 설령 객관적으로 미덕인 덕목이 존재하고 국가가 그것을 장려하려고 할지라도 개인은 그것을 거부할 수 있고 또한 국가는 그 거절을 보장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한다. 개인들이 각각 설정한 가치들을 증진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국가라는 식으로 이 문제를 회피하려고 해도 여전히 근본적으로는 해결되지 못한다. 이와 더불어서, 선택된 가치들이 무엇이냐를 고려하지 않고 그 가치들이 어떻게 정당화되었는가에 대한 고려에 집중하는 것은 언제나 가치와 정당성 사이의 괴리를 낳을 수밖에 없다. 제도적으로 정당화된 덕목 혹은 가치체계라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어긋날 경우 그 정당화된 가치는 관철되는 데 상당한 비용이 필요하다. 

  자유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특정한 덕목이나 가치체계의 증식은 공적 영역이 아니라 사적 영역에서 이뤄져야 하며, 여기에 국가가 특정한 가치를 지지하며 개입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행위라고 지적한다. 이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확실하게 분리된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공동체 내에서 시민의 모든 생활은 공적이며,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도 그 개념만큼 명쾌하지도 않다. 사회는 다양한 물리적, 정신적 기제를 동원해 개인의 사적 영역에 개입한다. 또한 이런 다양한 사적 영역 자체가 국가의 공적 활동을 지지하는 기초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사적 영역들은, 어떤 경우에는 사적 영역의 이해관계에 대해서만 주장하지 않는다. 공적 영역에 적용되는 집단적 가치가 관철되는 것이 자신들의 사적 이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자유주의적인 인간관에 입각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들은 모두 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이 희미하며, 긴장관계에 놓여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논거들에 의해서 자유주의적인 인간관에서 핵심적인 면모인 자율성은 의심스러운 개념이 된다. 자율성에는 모든 가치와 덕목은 개별적이며, 개인은 언제나 그에 대한 반성이 가능해야 하고, 그 능력을 그 어떤 가치보다도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세 가지 면이 그 핵심이다. 하지만 이 세 가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주의가 제기하는 위와 같은 비판에 직면해야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이 자율성 개념을 고수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개념을 조금 약하게, 반성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과 반성이 가능하다고 자각하는 순간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할 수 있다는 정도로 자율성을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인가? 만약 이러한 자율성을 인간이 인식할 수만 있다면, 이것은 다시 공동체주의자들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될 수도 있다. 공동체주의의 인간관은 반성의 가능성 자체를 형이상학적으로 차단해버리고, 반성을 통해 올바른 가치를 추구해나갈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2.3. 자유주의와 공동체의 붕괴

  자유주의적 인간관에 부합하는 인간들이 모여 정치공동체를 구성했을 경우, 그 공동체는 올바르게 유지될 수 있는가?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에 대해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비판하기도 한다. 굳이 인간을 근본적으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규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회의하고 공동체가 좋은 것으로 간주하는 가치와 덕목들에 대해 거부하는 개인은 결국 공동체를 결성하지 못하고 고립되며 불행에 빠지게 될 것이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개인이란 원자화된 개인이며, 부유하고, 언제나 불안에 놓여있고, 항상 다른 삶의 양식을 찾아서 헤매는 개인이라고 추정한다. 자유주의적 인간은 정의로울 순 있을지 몰라도, 행복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가치들이 객관적으로 타당한가 그렇지 않은가, 또는 그것들이 정당화된다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이미 선하다고 인정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세계에는 개인도 공동체도 이미 주어진 것으로서 존재하는 상태이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개인은 기존의 가치와 덕목에 대해 회의하는 순간, 자신의 삶을 여러 측면에서 지탱해주는 사회 체계와 거리를 멀리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그 자체로 물질적, 정신적 불행을 수반한다. 개인의 심리적 안정을 곧장 행복에 연결시킬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안정적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삶이 보장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행복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동체주의자의 이런 주장은 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개인의 삶이 원자화되는 경향은 자유주의보다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의해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 훨씬 타당하다. 롤즈의 최소수혜자 원칙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재산의 권리에 대한 주장은 자유주의에 필수적인 요소도 아니며 꼭 그런 결과를 수반하는 것도 아니다. 정치적 자유주의(민주주의와 절차적 정당성을 강조하는 경향)와 경제적 자유주의(자유로운 재산권의 향유에 기초해 시장의 작동에 의해 재화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을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경향)는 반드시 구분하여 생각해야 하며, 여기서의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를 말한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이 두 가지를 섞어서 사용하고 있거나, 적어도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 사이에 확실한 논리적 연결이 성립된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자유주의적 인간관이 사회적 삶의 파괴를 가져온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개념적으로 정치적 자유주의는 정치적 권리를 통해 경제적 자유주의를 수용할 수도, 거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자유주의의 적극적 대안으로서의 공동체주의

  이제까지 살펴본 자유주의에 대한 공동체주의의 비판은, 단일한 공동체주의적 입장에서 개진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주의자로 분류되는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입장을 열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람직한 사회의 모델은 어느 정도 수렴되는 경향이 있고, 이는 자유주의와는 전혀 다른 과정을 거쳐 공동체를 확립하고 유지하며, 발전시킨다. 

  공동체주의는 단순히 시민 각각에게 민주주의적인 권리를 부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공동체의 의사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그 가치를 구현할 수 있도록 시민들을 동원한다. 개인들은 단순히 그 가치가 옳은 것이라고 승인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공동체가 그러한 가치를 실현하는 활동을 하려할 때 그 가치를 담지하는 역할도 하게 된다. 이런 활동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시민적 자질, 즉 공동체 내에서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수많은 덕목을 교육받아야한다. 개인의 숙고과 그것이 집단적으로 모여 이루어지는 집단적 숙고는 자신이 지니게 된 시민적 덕목들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해내기 위해 필수적이다. 이런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적이라기보다는 공화주의적이다. 루소의 일반의지를 이해하는 것은 공동체주의의 이런 관점에 대한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공동체주의적인 접근은 세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첫째, 어떤 가치를 발견하는 집단적 숙고가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을 집단적 숙고의 주체로 받아들이는가? 이미 공동체에서 규정된 가치들은, 그 가치의 내적인 의미에 의해서 특정한 집단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효과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이 공동체 내에서는 그 어떤 의미에서도 숙고의 주체가 될 수 없으며, 공동체에 귀속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결정된 그 가치관을 받아들이기만을 강요당하는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에 어긋나는 귀결이지만, 공동체주의적 입장에서는 포착해낼 수 없는 존재들이다. 

  둘째, 집단적 숙고를 통해 공동체 내에서 옳은 것으로 판정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객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약 직관적으로 명백하게 그릇된 가치가 집단적 숙고를 통해서 발견되었다면, 공동체주의는 그 가치가 명백하게 그르다는 것을 논증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대체로 회의적이다. 이는 공동체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런 공동체에서는 결국 자유주의적인 인간관의 가장 큰 특징인 객관적, 일반적 반성능력이 반드시 요청되어야만 한다. 만약 이 점을 인정한다면, 이는 공동체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어느 정도 포기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어떤 가치에 지배적인 영향을 받는 것과 여러 가치들에 대해 개별적으로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이 분리될 수 있다. 영향은 우연적이지만, 인간의 능력은 인간이라면 모두 갖추고 있는 본질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동체주의자들에게는 이런 구별이 분명하지 않다. 또한 인간들은 어떤 가치를 학습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실제로 어떤 가치에 대해 반성하고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면서 자신의 신념의 체계를 수정해나가기도 한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율성의 개념을 ‘약한 자율성’으로 이해한다면 위와 같은 비판은 충분히 가능하다. 

  셋째, 그렇다면 공동체주의에서 주장하는 ‘공동체’란 대체 무엇인가? 루소의 공화주의적 이상이 대표적이지만, 공동체주의에서 주장하는 여러 형태의 공동체들은 모든 인간들이 같이 적절하게 협의할 수 있는 소규모의 공동체에 이론적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들은 그 규모가 작은 만큼 동질성을 느끼기도 쉬우며, 그만큼 동질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다루어야 하는 공동체는 그렇지 않다. 현대 정치철학에서 다루어야 할 공동체는 지역적으로도, 인종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대단히 이질적인 존재들의 혼합체이다. 공동체주의자는 이런 이질적 공동체에서도 소규모 공동체의 이상을 실현해야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들은 어떤 공동체가 공동체라고 생각하는가?

4. 자유주의, 자유, 문화

  공동체와 시민사회에 대한 공동체주의자들의 입장은 분명히 귀를 기울여 수용할만한 부분이 있다. 이들은 한 인간이 사회관계망에서 벗어나는 것을 상상하기는 대단히 힘들며, 그것에 의존하는 경향이 상당히 강하다는 통찰을 제공해주고 있다. 이러한 가치들은 대개 문화라는 형태를 띄고 인간에게 부여되며, 이는 세계관과 깊은 연관을 맺는다. 한 공동체 안에서 자유가 의미하는 바는, 이러한 문화가 고양하려고 하는 가치들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도록 그 배경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주의의 입장은 문화정책에 대한 일정한 입장을 대변한다. 자유주의적인 입장에 따르면, 특정한 문화를 육성하는 것은 가치중립성에 어긋나므로 정의롭지 못한 방침이다. 하지만 만약 이러한 육성이 소수문화를 보호하는 방향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면,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답변하기가 쉽지 않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문화의 문제에 대해서, 자유주의적으로 각 문화를 보호하는 정책을 낼 수 있도록 논증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다양한 문화를 보호하여 공동체 내의 사람들이 반성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를 늘리기 위한 방법으로서 문화에 대한 보호를 주장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인간이 특정한 문화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매우 제한적인데, 폭넓은 기회를 제공해주어야 실질적으로 구체적인 개인들의 자율성을 늘릴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문화의 문제로 이행할 경우,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이의 논쟁은 단순히 이론적인 논쟁을 넘어서 지극히 구체적이고 정책적인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 만약 자유주의자가 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위와 같은 주장을 한다면, 특정한 가치가 보편적인 가치가 되어야 하며 그것이 보편성을 띄기 위해 사회가 적극적으로 역할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문화 역시 보호해야 하는가? 그들의 목표는 분명하게 반자유주의적이기 때문에 자유주의적인 정의의 원칙과는 모순된다. 이처럼 자유주의는 선을 추구하는 수많은 하위문화를 어떻게 보호하고 육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언제나 봉착하게 된다. 국가는 정의를 추구하는 것만큼이나, 현실적으로 좋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보장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는 다양한 문화들 사이에서 공정성을 확립하는 일과, 그 각 문화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를 증진시켜 행복한 상태에 이르게 해야한다는 두 가지 과제는 자유주의적 논리 내에서는 지속적으로 긴장을 일으키며, 이는 인간의 다양성과 보편적 특징에 대한 고민을 더욱 깊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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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이 나른해져 책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계절, 봄이 돌아왔습니다. 겨울은 정말 길고 길었습니다. 제가 사는 서울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밤에는 겨울 외투를 입어야 할 만큼 추웠지요. 이제 소개할 책들도, 지난한 겨울을 거쳐 나와 아주아주 따뜻합니다. 봄의 향기, 날씨만큼이나 책에도 느끼면 더 좋지 않을까요? 

 

1.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이 달에 가장 주목해야 할 신간은, 길었던 겨울만큼이나 두툼한 『루소』입니다. '교양인' 출판사에서 기획한 [문제적 인간] 시리즈의 7번째 책인데요. 괴벨스, 로베스피에르 등을 다뤄온 시리즈인데다가 그 내용도 아주 방대하기 때문에 매우 흥미롭습니다. 루소는 프랑스 혁명 이후 자코뱅 당의 급진적 개혁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준, 가장 주목받은 혁명이론가였지요. 현재까지도 민주주의의 가장 이상적 모델을 제시했다는 호평에서부터, 파시즘의 원류라는 혹평까지 아주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는 어떤 생각과 자세로 자신의 시대를 살아왔는지, 이만한 책이라면 그의 본 모습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요? 이미 읽었던 『사회계약론』이나 『인간 불평등 기원론』 에도 다시 눈길이 갑니다. 

 

   

2.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원제는 『Bertland Russell's Best』 입니다. 좋은 글을 모은 편집본이군요. 제 블로그 이름에서도 아실 수 있듯, 저는 개인적으로 러셀의 팬(...)입니다. 철학의 새 장을 열었던 그의 이론뿐만 아니라, 사회운동가로서 실천하는 모습도 매우 인상적이기 때문이죠. 이 책은 주로 사회와 정치, 윤리에 대한 비평을 담은 글이 모여있습니다. 러셀의 글은 철학자답지 않게(!) 아주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읽기가 편하고, 그가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지 쉽게 알 수 있지요. 러셀의 책을 이미 번역한 경험이 있는(『행복의 정복』 ) 번역자의 책이라서 더욱 믿음이 갑니다. 러셀의 책은 빼놓지 않고 집에 하나씩 모아두고 있는데, 이 책이 하나 더해지겠네요. 

 

 

   

3. 서양 고대 중세 정치사상사 

  제목부터 전공서적이라는 걸 매우 티내는 책(...)이지만, 충분히 지금 읽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고대, 중세라는 이름이 붙어있으니 매우 고리타분하고 옛것처럼 보입니다만, 사실 현대 정치철학자(사상가)들의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사상사(철학사)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현대 정치철학자들이 현대에 사용하는 언어로 자기 입장을 펼치고 있더라도, 그 사람들의 밑바탕에는 언제나 옛 정치사상가(철학자)들에 대한 연구가 있으니까요. 마이클 샌델이『정의란 무엇인가』끝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언급하는 것만 보아도, 아주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외국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번역한 것이 아닌, 한국의 연구자들이 엮어낸 책이라는 것도 주목할만하네요.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서양근대정치사상사』와 같이 읽으면 좋겠습니다. 

    

 

4. 그리스인 이야기 

  그리스는 사상적으로, 또 사회-정치적으로 현재 유럽과 미국 사회의 원류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들에 대한 지식은 곧 서양에 대한 지식이 되겠지요. 하지만 지금까지 역사학과에서 교재로 쓰는 책들 이외에 그리스에 대해 사람들이 알 수 있는 통로는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책은 그리스 문화에 대한 갈증을 해결해줄 좋은 길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감수자가 오래 전부터 대학 강단과 철학아카데미에서 고대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에 대해 강의해 온 터라 더욱 믿음이 가네요. 

 

  

5. 대학주식회사 

  며칠 전 대학로에서는 많은 대학생들이 모여 등록금을 내려달라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또한 여러 대학이 기업의 모델을 빌려와 학교를 개혁하겠다고 이야기하고, 이런 발표는 즉각 대학순위에 반영되어 서열을 결정짓지요. 대학의 변화는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얼마나 진행되었을까요. 그리고 앞으로는 어떻게 전개될까요. 대학의 변화는 그 사회를 선도할 인재들의 변화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회적인 의미는 도외시한 채, 현재 대학들은 적립금과 수익을 올리는 데만 열을 올리는 것 같기도 해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이 책을 통해 이런 현상이 먼저 있었던 외국의 사례를 참고하는 것도, 현재 한국의 현실에 매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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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주식회사- 대학의 상업화에 대한 심층 탐사 르포
제니퍼 워시번 지음, 김주연 옮김 / 후마니타스 / 2011년 3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2011년 04월 01일에 저장
절판

본격 시사인 만화- 신세기 시사 전설 굽시니스트의
굽시니스트 지음 / 시사IN북 / 2011년 3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10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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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이야기 세트 - 전3권
앙드레 보나르 지음, 김희균.양영란 옮김, 강대진 감수 / 책과함께 / 2011년 3월
44,000원 → 39,600원(10%할인) / 마일리지 2,2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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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버트런드 러셀의 실천적 삶, 시대의 기록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박병철 해설 / 비아북 / 2011년 3월
13,500원 → 12,150원(10%할인) / 마일리지 67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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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알라딘신간평가단님의 "인문/사회/과학 분야 9기 신간평가단에 지원해 주세요"

1. 박효진이라고 합니다. 중앙대학교 철학과 4학년 학생입니다. 알라딘 서점을 주로 이용하고, 서평이나 학술적인 글을 알라딘 서재에 싣고 있습니다. 인문사회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과학까지 포괄하는 제 전공의 특성을 살려서, 깊이 있게 책을 읽고 쉽게 풀어쓰겠습니다. 아래 리뷰는 중앙대학교의 교지인 『중앙문화』 59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외에도 현재 학교 신문인 중대신문에 2주에 한 번씩 옴부즈만 코너에 글을 기고하고 있습니다. 좋은 글을 쓰는 일에 그 누구보다도 자신있습니다. 알라딘 평가단에 제 글도 꼭 실어보고 싶습니다. 2. http://blog.aladin.co.kr/russell85/4315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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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철학강의 동서문화사 월드북 26
게오르크 W.F. 헤겔 지음, 권기철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역사와 이성 숙제> 

  헤겔의 역사철학

  헤겔(G.W.F. Hegel : 1770~1831)은 역사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물론 헤겔 이전에도 역사를 철학적으로 다루려 시도한 학자들은 존재했다. 칸트나 루소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역사철학, 또는 역사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수행한다고 명확하게 인식하지는 않았고,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기준으로 삼아, 과거와 미래에 대한 조심스러운 견해를 개진하는 수준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헤겔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발전하여, 철학의 한 분과이자 핵심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로서 역사철학을 천명하였다. 또한 역사철학이 다루어야 할 주제들이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규정하였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는 누구인가, 누가 역사를 인식하는가, 그리고 역사의 진행은 어떤 속성을 지니는가 하는 문제들은 거의 모두 헤겔의 역사철학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모두를 종합했을 때,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역사가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역사란 단순히 군중의 집합이 벌이는 여러 가지 행동의 묶음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과 그렇지 않은 사건이 있으며, 그것을 판별하는 기준은 아마도 그 사건의 ‘역사성’일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성을 규정하고, 그 정의에 따라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요청된다. 그리고 그 사건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한 전망도 가능해지게 된다. 이러한 역사성의 기준으로서 헤겔은 ‘이성’이라는 열쇠말을 제시한다. 역사의 과정은 이성적이며, 그리고 그 이성을 능력으로서 지니고 있는 인간은 사건의 역사성을 이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모든 인간들은 역사적 사건을 만드는 데 개별적으로 참여하지만, 자신들이 의도한 바와는 다르게 그 개별적 참여로부터 의도하지 않은 거대한 결과를 이끌어낸다. 이성은 구체적인 개인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으로 존재함과 동시에, 그 구체적 개인들을 거시적 역사에 참여시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냄으로써 실체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과연, 그렇다면 실제 역사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헤겔은 자신의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실제로 역사의 탐구에 나선다. 이같은 내용이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의 각 국가에 대한 견해는 같은 시대를 견주어 비교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사실성이 매우 떨어진다. 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인도 등의 비유럽 국가에 대해 매우 심각한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에 휩싸여있다는 점에서 그 신뢰도가 의심스럽다. 구체적으로 역사를 분석할 때 헤겔은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선택적으로 인용한 면이 없지 않으며, 그가 주장하는 이성에 의한 역사의 발전이라는 말이 선입견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보이는 이와 같은 시도와 노력은 일관된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그것을 반성적으로 고찰하려는 최초의 적극적 태도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크다. 그러므로 헤겔의 역사철학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이후의 역사철학자들의 문제의식, 그리고 그들이 탐구하는 주제에 대해 알아보는 데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의 거의 모든 역사철학은, 헤겔의 역사철학에 매우 큰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헤겔의 역사철학은 그의 책 『역사철학강의』에 잘 드러나있다. 

  헤겔의 역사 구분

  우선 헤겔은 자신이 ‘철학적 세계사’를 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철학적 세계사는 그가 분류한 역사를 탐구하는 태도 가운데 한 가지에 해당한다. 그 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첫째는 사실로서의 역사이다. 이런 태도로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정리하여 문자의 형태로 남겨놓는다. 이는 달리 말하면, 인간들이 벌여놓는 여러 가지 행동들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주관적 정신의 범주에 맞게 옮겨놓는 것, 즉 물질의 운동의 영역에서 주관적 정신의 이해의 영역으로 옮겨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단순히 언어적 표현이어서만은 안되며, 명확하게 ‘역사’를 한다는 자각이 있어야한다. 따라서 문학이나 전승, 신화는 역사에서 제외되며, 보고에 대한 동기가 일차적으로 역사의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사실로서의 역사는 결국 보고하는 사람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모든 사건이 보고하는 사람의 관념에 밀착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에 근본적으로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기록으로만 남게 된다. 가장 특수한 것에 대한 가장 특수한 정신의 기록이 ‘사실로서의 역사’인 셈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런 역사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 역사를 생성하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게 되는데, 이것을 헤겔은 ‘반성적 역사’ 라고 말한다. 

  반성적 역사는 다시 네 종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일반적 역사이다. 일반적 역사는 구체적인 사건들을 종합하여 서술하는 것인데, 그 서술이 구체적 사건에 매몰된 ‘사실로서의 역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반성하고 그 반성의 내용을 말하는 역사가 자신의 종합이다. 따라서 일관된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게 된다. 이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사건에 대한 해석과, 해석자의 개념도구들이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다시 말하면, 일반적 역사를 서술하는 서술자는 자신의 해석에 따라 사건들을 배치하는데, 여기에서 역사를 결정하는 권리를 서술자의 생각에 달려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일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그 사건들에 대한 지식을 통해 개인들이 현재에도 지침으로 삼을 수 있는 내용을 전해주기도 한다. 이러한 교훈적 성격을 가진 역사를 헤겔은 실용적 역사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반성적 역사의 두 번째 종류이다. 실용적 역사는 과거로서의 역사인 동시에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의 행동에 유의미한 변화를 주기 위해 서술자가 의도적으로 기획한 것이다. 하지만 헤겔은 이런 시도에 대해서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과거의 역사적 조건들과 현재의 역사적 조건들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유추하려고 하더라도 절대 그 본래의 내용에 다가설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비판적 역사이다. 이들은 역사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이루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역사가가 스스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아예 역사적 사실 자체는 뒷전으로 물러나며, 역사가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매우 중요한 사안으로 부각된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시각이 될 수 없으며, 역사 자체에 대한 연구가 될 수도 없다는 것이 헤겔의 입장이다. 

  넷째는 전문적 역사이다. 역사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 역사 전체에 대한 지식은 불가능하다는 통찰에 다다른 사람들이 이러한 전문적 역사에 발을 내민다. 이들은 전체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각 부분의 역사에 대해 깊이 탐구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보편성을 획득하는데는 실패한다. 특히 이들은 정신의 측면이 반영되는 분야에 대해 연구하는 경향이 강한데, 역사철학은 이러한 각각의 전문적 역사로부터 정신 자체의 본성과 그 역할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정신 자체를 연구하는 역사를 헤겔은 ‘철학적 역사’라고 이름짓는다.

  철학적 역사

  철학적 역사는, 다른 말로 하면 역사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헤겔의 언급에 따르면 이 말은 모순을 안고 있다. 역사는 가장 구체적인 사실들에 대한 고찰인데 비하여, 철학은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에 대한 탐구를 명확한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를 철학적으로 고찰한다는 말은 역사 속에서 보편적인 원리를 길어올리는 것, 그리고 다시 그 원리에 따라 역사를 재배치하는 두 작업을 동시에 진행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 원리란, ‘철학이 역사를 향할 때, 이성이 세계를 지배하고, 따라서 세계 역사도 이성적으로 진행한다는 사상’이다. 철학적 역사는 이 원리를 역사에서 읽어내고, 그리고 그 원리에 따라 역사가 진행된다는 것을 알아내는 것을 전제이자 목표로 삼는다. 이성은 세계의 모든 존재들을 지배하고 있는 원리이기 때문에, 역사 또한 이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성의 움직임은 반드시 구체적인 역사를 통해서만 드러나야 한다. 이성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와 내용을 갖지 못하는 추상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에서 작동하는 이성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들의 진행을 탐구해야만 한다. 역사 자체의 개념만을 분석하는 추상적 수준에서의 이성에 대한 탐구는 무의미한 동어반복 또는 역사가 아니라 탐구자의 사고의 시적 표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철학은 반드시 그 핵심이 구체적 역사로부터 뒷받침이 되어야한다. 

  헤겔은 자신이 구상하는 철학적 역사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려고 노력했던 사조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첫째는 고대 그리스의 전통인데, 이 세계 전체를 인도하는 이성적 원리가 있다고 간주한 것이다. 아낙사고라스의 용어에 따르면 이를 nous라고 부른다. 이는 자연과 인간 모두를 지배하는 원리로서 작동하는데, 오히려 이러한 개념의 혼동이 자연사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으나 인간사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운동의 법칙 수준에만 머무르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둘째는 기독교적 전통이다. 이 전통에서는 세계를 주재하는 존재를 신이라고 지칭한다. 역사의 모든 구체적인 사건들은 신의 인도에 따라서 벌어진 것이며,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있고 그것은 신의 능력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신이 철학적 신이 아니라 종교적 신이라는 점이다. 종교적 신은 인간에게 이해나 이성이 아니라 신앙을 통해서 주재한다. 따라서 신에 대한 믿음을 잃으면 역사에 대한 신뢰 또한 잃어버릴 수 밖에 없으며, 이것은 역사에 대한 회의주의에 다다르는 지름길이다. 헤겔은 두 전통을 비판하며, 신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인간의 완전한 인식의 가능성을 대체해 종교적 신을 철학적 신으로 대치함으로써 자신의 역사철학을 유비적으로 설명한다. 즉, 인간의 정신이 신을 인식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문제를 이성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으로 전환함으로써 자신의 역사철학이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는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전통적인 악의 존재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바꾸어 헤겔에게도 똑같이 질문할 수 있다. 만약 철학적 신이 있다면, 왜 이 세계에는 그가 어찌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악이 존재하는가? 철학적 신은 이에 대해 어떤 해답을 내려줄 것인가? 헤겔은 이에 대해 주재하는 원리로서의 이성을 통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역사 속 악의 문제를 설명해보려 시도한다. 구체적인 세계에서는 언제나 악인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에 대해서도 설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헤겔의 체계가 갖춘다면, 그가 주장하는 내용들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정신, 자유, 역사의 동력

  헤겔에게 정신은 물질과 반대되는 실체 개념인데, 이 정신은 역사가 펼쳐지는 배경과 같은 역할을 한다. 정신은 실체이기 때문에 스스로 운동하는 고유의 법칙이 있으며, 또한 그 법칙은 역사를 움직이게 하는 법칙이기도 하다. 그 법칙이란 다름 아닌 이성이다. 하지만 이성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언급하는 것은 이성을 정의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며, 내용을 가질 수 없는 정의에 불과하다. 헤겔은 이 단계에서 정신에 대해 추정적, 잠정적으로라도 정의를 내려볼 것을 제안하는데, 그것이 곧 자유이다. 정신의 본성이 자유라는 것은, 자신의 운동의 모든 원인이 자신에게 있으며, 따라서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무엇을 의지하는지 의식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존재는 하나의 완결된 존재이다. 이는 그 반대인 물질 실체와 대비되는 속성인데, 물질실체는 본성으로서 질량(무게)를 지니며, 따라서 관성의 법칙에 의해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원인이 주어져야 한다. 

  헤겔은 이런 개념 정의를 거쳐 역사의 과정은 정신이 자유를 성취하는 과정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에 따르면, 정신의 본질이 자유라는 것은, 정신은 곧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해서 이 본질을 발현하려고 한다는 점을 함축한다. 또한 자유는 곧 자신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에, 정신은 자신을 점점 더 명확하게 정의하고 알아가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만약 역사가 정신 위에서 펼쳐지는 장이라면, 역사 또한 정신의 운동법칙(경향)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역사의 과정은 본질적으로 정신이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단계를 밟아나간다. 

  그렇다면 추상적으로 정의된 정신, 자유를 그 본질로 하는 정신은 어떤 것을 매개로 자신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킬 것인가. 헤겔은 이에 대해 개인들의 활동이라고 답한다. 그 가운데서도 개인들의 정념에 근거한 의지를 통한 활동에 의해 정신은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개인들은 결코 역사 속에서 정신, 이성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그런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더라도 매우 우연적일 뿐이다. 인간들은 자신의 행동의 동기를 정념에 의지한다. 구체적인 역사는 이러한 정념들이 펼쳐지는 장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헤겔이 취하는 관점이다. 그는 이 수준에서만 역사를 바라보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며, ‘역사는 이성에 의해 인도된다.’는 관점을 우선 지닌 뒤에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이는 정념들로만 구성된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들이 어떻게 이성의 인도에 따라 진행되는 합리적 과정으로 바뀔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헤겔의 답변이다. 이는 단순한 귀납이나 체계내적 연역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해석을 바꾸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의 반성적 능력에 의해 필연적으로 이렇게 역사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성 스스로가 자신을 정의하고 그것을 본질로서 소유하며, 그리고 그것은 발현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적 결론을 통해 활동에 나선다는 인식에 이르면, 역사는 단순한 사건의 묶음과는 전혀 다른 유기적인 전체로 보이게 된다. 

  역사에 참여하는 구체적 개인들은, 항상 자신들의 계획에 따라 목적을 설정하고 그에 가장 알맞은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성취한다. 이 과정은 구체적이고, 그 때 그 때에 맞는 특수성에 부합하게끔 기획된다. 하지만 인간은 본성의 측면에 있어서 정신적이고, 자유를 소유한 추상적 존재들이다. 따라서 인간이 구체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은 언제나 정신의 본성, 즉 자유가 발휘되는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활동에는 이 두 가지 영역이 중첩되어있으며, 따라서 인간의 활동의 유기적 전체인 역사에도 이 두 영역이 중첩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 사건의 핵심, 그리고 그 역사적 사건을 해석하는 관점의 핵심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전체 이성의 기획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는, 추상과 구체 사이의 매개자로서 기능한다.

  정신의 실현체로서의 국가

  특수한 개인은, 특수한 정념을 동기로 삼아 특수한 목적을 설정하고 특수한 방법을 동원하여 실천하고 행복을 성취한다. 그렇다면 가장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정신은, 이성을 동기로 삼아 자유를 목적으로 설정해 이를 선취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그렇다면 개인과 달리 이성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기획을 일반적으로 실천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물론 구체적 개인의 실천에서부터 시작하기는 하지만, 이성이 이성으로서 온전히 드러나기 위해서는 개인의 정념에만 실천의 모든 동기를 의지해서는 안된다. 헤겔은, 이런 개인들을 이성에 따르게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국가이며, 이 국가가 이성의 현현으로서 역사의 단위가 된다고 주장한다. 

  헤겔이 설명하는 국가는 매우 포괄적이다. 단순히 국가체계나 법적으로 정의된 영토 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좁게는 이데올로기적 공동체 혹은 인간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지침을 전해주는 문화공동체의 의미로 쓰고 있다. 더욱 추상적인 정의로는, 각 개인들이 정념에 따라 하는 행동들에 자유를 부여해주는 존재이다. 인간은 국가를 통해서만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 구체적 개인에게 공동체가 없는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정신적 존재, 즉 자유로운 존재인데, 이는 다시 말하면 근본적으로 공동체적인 존재라는 뜻이다.  또한 자신의 본질로서의 자유를 추구했을 때 공동체가 등장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것이 인간의 본질 또는 정신의 본질에 더욱 가깝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헤겔은 국가를 원자적 개인의 집합이며 권리를 보장하고 제한해주는 기능을 하기 위해 탄생했다고 바라보는 사회계약론적인 국가관에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계약론적 국가관에 의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를 권리로서 가지고 있고, 사회가 이를 제약한다고 본다. 하지만 날 때부터 자유라는 자연상태는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헤겔이 보았을 때는 오히려 계약론적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사고실험 내지는 가상의 상태일 뿐이다. 그들은 이런 가상과 역사적 사실을 혼동하고 있다. 그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다고 하는 것은 잠재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이며, 공동체에 편입되어야만이 그 자유가 현실태로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러한 견해에 따라 원시적 열정을 자유와 동일시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모두 발휘하며 자신을 완전히 인식한다는 자유의 개념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는 데서 비롯한 착각이라고 헤겔은 말하고 있다. 자유는, 자유를 가능하게 해주는 공동체에 소속되어서 그 공동체의 정신을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또한 국가를 가족에서부터 비롯된 자연발생적인 공동체로 보고, 공동체적 규율만으로 공동체를 이끌어가려는 도덕주의자들 또한 헤겔의 비판의 대상에 오른다. 물론 가족공동체는 공동체에 소속감을 가지게 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능을 하는 장소로서, 공동체의 속성이 단순히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 복합적인 효과를 내는 유기체가 되는 것임을 깨닫게 하는 기능을 하기는 한다. 허나 여전히 자연발생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다시 말하면 동물들이 가족을 생각하는 바와 다를 바가 없다. 결속력의 기초는 만들어줄지 모르나 가족 자체가 이성적인 공동체는 아니며, 이성적인 공동체의 조건으로서 법과 규범은 반드시 포함되어야한다. 

  또한 국가의 통치체제, 혹은 관료의 구조로만 국가에 대해 판단하려 하는 것도 잘못이다. 국가는 오히려 이것보다 더 큰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통치체제는, 그 국가의 정신의 단계를 반영한 것에 불과하지 그것을 국가의 본질로 바라보려 해서는 안된다. 또한 정신의 반영물이기에 시대나 장소에 따라 그 모습이 판이하게 다르고, 여러 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으며 이 사이에 비교가 거의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통치체제, 즉 국가기구는 국가가 자신을 현현하는 데 수단으로서 이용되는 부분일 뿐이다. 따라서 체제뿐만 아니라 그 국가를 둘러싼 정신적 산물들을 총체적으로 바라보아야 국가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획득할 수 있다. 이런 정신적인 면모들은 종교, 예술, 철학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를 관장하는 절대적인 주권자, 즉 국가의 원리를 이해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바로 종교이다. 각 사회는 그 사회에 맞는 종교를 지니고 있는데, 이 종교는 그 사회가 역사 일반을 이해하는 방식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요소이다. 개인적인 정념은 종교를 향한 열정과 신앙 앞에서 무화되고, 자신을 절대자와 일치시키는 의식을 종교행사를 통해 정기적으로 시행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헤겔이 생각하는 이성과 구체적 개인 사이의 통일과 유비된다. 그러므로 종교는 ‘한 민족이 진리로 삼고 있는 것의 정의(definition)을 가리키는 장소’이다. 이러한 통일은 종교적 상징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그 국가의 역사 단계의 수준을 알기 위해서는 그 국가의 종교를 관찰하면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는 헤겔이 사용하는 의미의 국가와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역사상 존재했던 거의 모든 나라들이 국가기구의 권위(제도의 권위)를 종교의 권위에 빌어서 사람들에게 강제하곤 했던 것이 가장 강력하고 구체적인 증거이다. 종교적 권위는 그 국가에게 보편적이고 일반적이고 옳은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따라서 국가와 일체가 되는 것은 신과 일체가 되는 것과 논리적으로 그리 다르지 않으며, 헤겔의 체계 내에서 이런 일치는 역사의 전 과정을 통해서 정신이 자유를 완전히 성취한 상태와 같다. 

  종교는 결국 한 특수한 공동체의 성향만을 반영한다. 다른 종교를 가진 국가들은 다른 정신을 가진 것으로 보이며, 또 그에 따라 서로 다른 국가체제와 제도를 운영하게 된다. 그러나 헤겔이 이야기하는 이성은 특수한 공동체가 아니라 인간 일반, 모든 인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므로 특수한 종교가 자유를 성취할 수 있는 완전한 수단이 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각 국가들을 통해서 세계사 전체를 움직이는 이성은 자신의 원리를 각 종교에 모두 일정 부분 반영하고 있으며, 이들은 각자의 과정을 거쳐서 세계사적 관점에서 이성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역사 발전의 원리

  그렇다면 역사에 존재하는 이런 단위들은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한 답변이 필요하다. 역사는 어떤 방향이든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변화는 두 가지로 분류한다. 자연의 변화는 기존에 있었던 단위 사물들의 운동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기존에 없었던 것이 생기는 변화는 아니다. 반면에 정신의 변화는 기존에 없었던 것이 생성되는 변화, 창조의 변화이며 신적인 변화이다. 

  하지만 역사의 발전은 위의 두 가지와 같은 일차원적인 변화가 아니다. 역사의 발전이 보여주는 변화는, 정신의 수준이나 단계가 총체적으로 바뀌며 진화에 가까운 탈바꿈을 하는 것이 그 원리이다. 역사의 방향은 내재해있으나 드러나지 않고 있다가, 인간과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외화한다. 안에 있던 것이 밖으로 보여지면서, 전혀 다른 존재론적 지위를 점유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발전이 자연의 운동의 법칙처럼 단선적이지 않다. 즉, 관성의 법칙에 의해 자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자기에 대해 성찰하고 반성하는 과정만이 역사의 발전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 발전이란 다름아닌 이성의 본질인 자유의 성취, 즉 물질세계로부터 종속된 위치에서 떨어져나와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의 내적인 힘에 의해서 움직이는 자기원인의 존재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헤겔에게 역사의 발전이란, 자연으로부터 점점 더 멀리 떨어지는 과정, 자연으로부터 정신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과정이다. 

  이런 관점에서의 역사의 시작은 이미 문헌에 남아있지 않고, 종교적 상징과 전승으로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역사철학은 이것에 대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은 옳지 않다. 종교적, 특히 기독교적 입장에서 역사는 발전이 아니라 오히려 타락의 일변도를 걷고 있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자연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연으로부터의 소외는 인간으로서의 진정만 면모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또한 의식적으로 역사를 정리한다는 자각, 그리고 그것을 기록할 명확한 개념적 도구들이 없는 시기의 역사는 객관적인 역사라고 할 수 없으며, 그것은 역사 이전 혹은 역사가 아닌 시대일 따름이다. 

  역사를 정리할 수 있는 개념적 도구들이 발생하고 역사를 정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역사의 개념들은 스스로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 정신 속에서 끊임없이 부정되면서 부적합한 개념은 교정되고 파괴된다. 그리고 새로운 개념으로 대체된다. 역사는 정신 속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개념의 역사이다.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들은 이러한 개념을 통해 해석되고 또 그로써 역사라는 위치를 얻기 때문에, 역사를 철학적으로 고찰하는 작업에서는 구체적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개념들의 변화와 그 법칙을 연구해야 한다. 그것이 곧 역사에 대한 선이해이며, 역사 현상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그 개념들의 핵심은 바로 자유이다. 

  따라서 자유를 중심으로 파악되지 못하고, 역사의 구체적 사건들이 스스로 이러한 점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구체적 사건들의 공통된 점을 예로 들며 그 발전의 정도를 판가름할 수 없으며 모든 민족과 모든 국가에 자유가 주어져있다고 하는 잘못된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며, 그 민족과 국가의 문화는 반드시 발전의 정도가 있다. 그것은 자유가 그만큼 반영된 법과 제도, 종교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정신사적인 발전의 정도가 가장 많이 반영되어있는 종교, 예술, 철학은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모든 민족과 국가에 종교와 철학과 예술이 있지만, 그리고 그들이 형식적으로 매우 완결되고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에 자유가 전혀 포함되어있지 않다면 그 민족과 국가에게 자유가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는 마치 고대와 중세와 근대, 유럽과 비유럽이 모두 똑같은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상대주의적 착상과 같다. 

  정신사의 발전은 이전의 정신사적 절정을 이루었던 민족이나 문화의 개념들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면서 이루어진다. 이는 끊임없이 자기자신을 인식하는 자유, 다시말해 자기 자신을 객관화시키고 그 객관화 자체가 새로운 역사의 동력으로서 작용하는 정신의 원리인 변증법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러한 긴장상태가 끝나고 자족하는 정신상태로 들어갔을 때, 그 민족은 더 이상 발전을 하지 못하고 정체상태에 머무르게 되며, 공동체의 각 구성원들은 더 이상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침묵으로 일관한다. 

  역사에 대한 철학적 탐구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발전의 단계와 과정, 그리고 그것이 끊임없이 반복되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를 면밀히 관찰하는 일이다. 현재의 과정이 되기까지 거친 여러 폐기된 요소들은 어떻게 현재의 발전에 발판이 되었으며, 그리고 그 기억을 잊지 않고 끊임없이 가져가야만 한다. 역사철학은 각 민족의 이러한 정신사적 발전을 하나의 총체적 과정, 즉 이성의 자기 실현의 과정으로서 간주하고 또 파악한다. 역사철학자에게 역사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영원히 자신의 앞에 현전하는, 지금-여기의 사건이다. 그것을 과거로, 정체로, 발전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는 순간 그 철학은 물론이고 그 민족과 국가 전체가 더 이상 세계사에서 무의미한 존재로 추락하게 된다.

  결론과 평가

  헤겔의 역사철학은 이와 같은 계획에도 불구하고, 서론에서도 서술했듯이 구체적인 분석의 내용을 들여다보았을 때에는 현재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상당하다. 자연환경이 인간들의 활동의 구조와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인식이나, 역사의 발전의 방향을 일방적으로 규정한 것, 중국과 인도의 역사에 대한 편견 등은 전형적인 식민적 사고라는 이름으로 헤겔이 자신의 역사철학을 개진한 이래 수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지금 이 시간, 구체적으로는 헤겔이 매우 폄하했던 문화권에서 삶을 영위하는 우리의 시선에서는 그가 자신의 선입견을 철학이라는 이름을 빌어 패권적으로 정당화함으로써, 그것이 마치 절대적인 인식의 기준인 것으로 표명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또한 정신을 주체로 삼은 그의 역사철학의 큰 줄기는, 그 정신이(이성이) 독립적인 존재로서 역사에 영향을 미치고 인간은 그곳에서 결코 주체로서 행위할 수 없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인간은 정신과 물질을 매개하는 존재자일 뿐이다. 또한 그 존재자는 정신을 온전히 이 세계에 전개하는데, 정신이 지니고 있는 자유의 속성은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이다. 하지만 인간이 이러한 자유를 정말로 누릴 수 있는가? 정신에 의해서 누리는 이러한 자유는 이미 인간의 자유가 아니며, 그렇다면 어쩌면 그것은 더 이상 자유가 아닐 수도 있다. 

  또한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는 공동체에 의해서 구속받는다고 하는 견해는 매우 상식에 부합한다. 공동체에 참여함으로써 얻게 되는 자유는, 자유라기보단 법적 권리에 가까우며 또한 인간의 잠재적 자유를 성취했다고 하기보다는 법적으로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의 행동에 대한 허가를 얻는 것에 더 가깝다. 만약 헤겔이 정신의 형이상학적 자유로부터 인간의 정치적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는 정치체제를 만드는 데 그 의도가 있었다면, 그가 이론적으로 쟁취해낸 개인의 정치적 자유를 과연 자유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요컨대, 그의 자유 개념은 매우 모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역사를 연구한다. 헤겔이 정의했듯이, 역사는 단순히 군중들의 행동의 집합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명확한 역사성이 있으며, 그 역사성을 인식하는 것은 그 행동을 취하는 인간들이다. 헤겔의 문제의식은 그 역사성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또한 보편적 가치로서의 인간의 자유의 확장이 역사성이라는 헤겔의 답변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긍정적 전망과 발전에 대한 믿음은 그 자체로 인류를 현재의 상황까지 이끌고 온 큰 동력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헤겔의 역사철학은 이러한 믿음에 대한 정당화로서 매우 효과적이라고 보여진다. 설령 그의 구체적 분석이 서양중심적인 시각, 다시 말해 그가 가장 경계했던 시간과 공간의 특수함에 매몰된 해석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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