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철학의 제문제 발표문 초고. 존 크리스먼, 『사회정치철학』의 5번째 장 '보수주의, 공동체주의, 사회적 자아관' 요약.>  

  어떤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인지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 사회가 어떤 덕목을 추구하고 권장하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이 경우 그 덕목이 객관적으로 바람직하며, 또 그 사회가 그것을 얼마만큼의 강도로 권장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 사회가 얼마나 좋은 사회인지 결정된다. 다른 하나는 어떻게 그 사회에서 추구하는 덕목이 확정되는지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다. 앞의 경우와 반대로 이 때에는 그 덕목의 객관성과는 별개로 그것이 ‘좋은 것’으로 간주되는 과정에서 우연적이고 외부적인 요인이 얼마나 덜 개입했는지에 따라 그 사회의 수준을 판가름할 수 있다. 줄여서 말하면, 사회는 크게 ‘좋음(good)’과 ‘정당성(legitimacy)'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할 수 있다. 

  이전 시간까지 살펴보았던 자유주의적 관점은 이 가운데 후자, 즉 정당성을 우선시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사회가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과정으로 자신을 구성하고 있을 경우 그 사회가 ‘정의롭다’고 말한다. 자유주의적 입장은 적어도 인간과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타당하여 따라서 인간이 수용할 수밖에 없는 덕목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다. 이런 가정은 모든 덕목에 대해 합리적으로 반성할 수 있는 인간을 요청한다. 또한 이런 반성을 거쳐서 수용되어야만 그 덕목은 정당성을 획득한다. 이 같은 정당성을 획득한 덕목들이 모여야만 한 사회를 구성하는 덕목들 전체가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정당성을 획득한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이다. 

  위와 같은 자유주의적 논변에 대해 다양한 반론이 존재하였지만, 특별하게 이 글에서는 공동체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의해 가해진 비판에 집중하고자 한다. 공동체주의자들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 근본적으로 인간은 특정한 덕목에서 분리될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합리적으로 반성하는 인간상은 허구적이다. 둘째, 따라서 덕목에 대해 완전히 중립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는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자유주의적 이념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셋째,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공동체적인 삶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심각하게 파괴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1. 보수주의

  1.1 보수주의의 정의와 특징

  보수주의(conservatism)는 넓은 의미에서 변화나 진보에 대한 믿음보다는 기존의 공동체와 그것이 의존하고 있는 가치체계를 지키는 데 더 큰 비중을 두는 심리적인 경향을 가리킨다. 그러나 정치철학적인 맥락에서의 보수주의는 다음과 같은 더욱 엄밀한 요소를 포함하는 정치철학적 입장을 가리킨다. 

  첫째, 단순한 심리적인 태도가 아닌 논리적인 정당화를 통해서 전통을 강조한다. 특히 이런 논리적인 정당화는 역사를 통해 귀납적으로 이루어진다. 역사를 통해서 지켜졌던 공동체의 요소들은 지켜졌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바람직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는데, 섣부른 믿음은 그런 바람직한 덕목들을 축소시키거나 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사회는 이 덕목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실천하게끔 만드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아야한다. 기존의 가치체계에 대한 회의는 자신이 얼마나 정당한지 충분히 증명할만한 자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반면에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여러 덕목들은 그 자체로 그 사회 내에서는 개별 인간들에게 행복을 안겨줄 수 있는 것들이기에 충분히 권장되어야 사람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따라서 개인의 권리 자체의 타당성 검토나 덕목 자체의 객관적 가치 같은 문제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바뀌며, 이들은 그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몇몇 요소 가운데 하나로서 그 지위가 격하된다. 만약 어떤 개인이 좋은 것을 자기 판단에 따라 거부하려 한다면, 보수주의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는 매우 미련하고 어리석은 짓이 될 것이다. 이 셋은, 개인은 ‘좋은 삶(가치있는 삶)’을 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사회는 이것을 강력하게 권장해야한다는 보수주의자들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1.2. 보수주의 사회모델의 한계와 전환

  하지만 이 같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는 특정한 덕목이 본질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견해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따라서 그 덕목이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런 정당화가 개인이 외부의 간섭 없이 수용하는 데 토대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그 덕목이 옳은지 그른지는 그 덕목이 가치있는 것으로서 간주된 역사적 배경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개인들의 수용이나 승인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보수주의의 사회모델은 심각한 결함을 안고 있다. 특정한 덕목들은 특정한 집단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보수주의자들은 사회와 그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가지 덕목들을 전통에 근거해 조직하려고 하며, 그것은 자연스럽게 기존에 특혜를 받던 집단의 이익을 가장 잘 수호한다. 또한 전통적인 가치관에 의해 가장 특혜를 받는 집단이 실제로 사회의 재조직, 재구성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이는 특혜를 받는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 사이의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전통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그 가치가 보편성이나 일반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항의할 수밖에 없다. 즉 가치는 권력과 결부되어있는 것이다. 엄연히 존재하는 불평등은 사회가 기초하는 가치에 의존하였을 때 생기는 것이고, 이것이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밖에 없다. 또한 사회를 이렇게 조직하려는 전략 자체도 논리적으로 심각한 결함에 노출되어 있다. 한 사회가 고수해오는 가치체계에 대해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반성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런 덕목들이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 의해서 우연적으로 정당화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필연적인, 즉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하려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자들이 제기하는 자유주의적 인간관에 대한 비판 및 사회에 대한 여러가지 다른 시각은 여전히 경험적으로(심리적으로)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점을 부각시키고 합리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공동체주의자라 불리는 사조가 나타나는 배경이다. 테일러Talyor, 샌들Sandel, 매킨타이어MacIntyre, 왈쩌Walzer 등이 자유주의적 입장에 대해 비판을 제기하며 대표적인 공동체주의자로 분류되었다. 공동체주의자 각각의 학문적 토대나 논증의 형태는 다를지라도, 자유주의적 인간관과 가치평가기준, 그리고 그 원리가 실행된 공동체의 형태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2. 공동체주의

  2.1 자유주의적 자아에 대한 비판

  자유주의적 자아관의 기본적인 요소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행위자가 특정한 정치권력, 사회 구조, 가치의 체계 등을 수용할 때에만 그들이 정당화된다는 것이 기본적이다. 이러한 대상들이 가치있는 것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이들을 ‘가치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둘째, 이 과정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모든 개인이 기존의 어떤 가치체계에도 의존하지 않고서 가치에 대해 메타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한다. 셋째, 사회는 이러한 개인들의 능력을 최대한 존중하는 방향으로 조직되어야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이 추구하는 각각의 가치들에 대해서 편중되지 않고 중립적이어야 한다. 이 중립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언론, 결사, 이동, 사생활의 자유 같은 것들이 반드시 필요하며, 이들 요소가 갖춰져야만 정의로운 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인간은 어떤 가치체계에도 의존하지 않는 판단을 할 수 있는가? 공동체주의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각각 근거하고 있는 학설은 다를지라도, 공동체주의자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사회적이라고 주장한다. 인격이 가능한 이유는 어떤 공동체가 그를 인간으로서 대우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공동체는 인간으로서의 대우는 많은 가치들을 함축하고 그것을 수용하도록 성장 과정 전체에서 강요한다. 이들에 따르면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주장하는 반성적 능력은, 사실 가치 자체 또는 가치 체계 전체에 대한 객관적 반성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신념으로 삼은 특정한 가치가 의심스러울 때에만 그에 대해 반성한다. 게다가 이 반성은 가치에 대해 의심하고 거부하는 것보다는, 그 덕목의 진정한 의미나 본질에 대해 숙고하는 쪽에 더욱 가깝다. 진정한 자아의 발견은 의심하는 능력을 자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규정된 가치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 합리적으로 정당화하는 데서 비롯된다. 

  또한 이러한 가치체계들은 단순히 인간이 수용해야 하는 체계라는 것을 넘어서, 모든 판단을 가능하게 해주는 지평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는 점은 자유주의적인 인간관이 가능한지에 대해 더욱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런 점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은 언어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사고한다. 언어는 어떤 인간에 대해 선택적이지 않고, 오히려 지정된 언어 하나가 인간의 사고의 기반이 된다. 언어에 대한 이런 일반적인 시각에 입각해서 본다면, 자유주의적 자아관은 언어가 없이도 반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는 다소 억지스러운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사고는 자유주의의 인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입장을 비판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존재 자체로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규정한 여러가지 가치들이 쌓인 결과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러한 가치를 몸에 담아 실천하면서 인간으로서 거듭난다. 인간을 규정하는 데 사회는 필수적이다. 이는 사회를 벗어난 사유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함축하는 듯 보인다. 

  게다가 이런 인간관은, 그야말로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자유주의적 인간관과는 달리, 실제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훨씬 더 잘 반영하고 있다. 인간들은 실제로 특정한 덕목들을 의식하지 않고 실천하며 살아간다. 매번 가치체계를 반성한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어색하다. 자유주의적 가치관에 입각해 특정한 덕목들에 대해 매번 숙고하는 사람들은 소수이며, 이는 오히려 자유주의적 인간관이 보편적, 일반적이지 않고 특정한 인간관을 보편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비약을 담고 있다는 주장을 하는 근거가 된다.

  2.2 사회적 자아와 가치 신조

  사람들이 실제로 자유주의적 자아관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점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면, 공동체주의가 실제 삶에 더 잘 부합한다고 소극적으로 주장하는 선을 넘어서, 자유주의가 묘사하는 자아와 가치체계 사이의 관계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어떤 가치를 선택하게 되는 동기와 그것이 정말 인간의 이익에 부합하는지에 대해 잘못된 시선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공동체는 특정한 가치관을 기초로 성립된다. 그러나 개인은 태어나기 전에 자신이 살아갈 공동체를 선택할 수 없다. 따라서 특정한 가치관은 개인에게 주어진 형태로 등장한다. 물론 자유주의자들이 이러한 면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며,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관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과 선택은 가능하며 언제나 가능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이 그 가치관을 구성하는 덕목들이 공동체 내에서 가치있는 것으로, 즉 정당한 것이 되는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공동체주의자들에 의하면, 이런 가치들은 그 가치를 받아들인 인간들의 내면에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낼 뿐, 선택당하는 대상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더군다나 역설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 능력에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그들은 모든 덕목은 사람들의 승인을 통해서만 가치있는 것으로 거듭난다고 주장하지만, 선택능력은 승인과 상관없이 지켜야하는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자유는 개인들이 삶을 살게 해주는 형식적인 조건일 뿐이지, 인간이 평가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덕목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설령 인간이 자유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자유롭다고 할지라도, 그 자유롭다는 의미는 어떤 특정한 덕목을 실천함으로써 드러나는 것이지 결코 그 자체가 인간을 규정지을 수는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인간을 규정짓는 제 1원리로 자유를 설정함으로써 생기는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공동체는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에 따라 정의를 확립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적으로는 좋은 공동체가 되기 위해 특정한 덕목에 입각해서 개인을 행복한 삶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하기도 한다. 개인의 기본적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정의를 추구할 경우, 설령 객관적으로 미덕인 덕목이 존재하고 국가가 그것을 장려하려고 할지라도 개인은 그것을 거부할 수 있고 또한 국가는 그 거절을 보장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한다. 개인들이 각각 설정한 가치들을 증진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국가라는 식으로 이 문제를 회피하려고 해도 여전히 근본적으로는 해결되지 못한다. 이와 더불어서, 선택된 가치들이 무엇이냐를 고려하지 않고 그 가치들이 어떻게 정당화되었는가에 대한 고려에 집중하는 것은 언제나 가치와 정당성 사이의 괴리를 낳을 수밖에 없다. 제도적으로 정당화된 덕목 혹은 가치체계라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어긋날 경우 그 정당화된 가치는 관철되는 데 상당한 비용이 필요하다. 

  자유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특정한 덕목이나 가치체계의 증식은 공적 영역이 아니라 사적 영역에서 이뤄져야 하며, 여기에 국가가 특정한 가치를 지지하며 개입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행위라고 지적한다. 이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확실하게 분리된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공동체 내에서 시민의 모든 생활은 공적이며,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도 그 개념만큼 명쾌하지도 않다. 사회는 다양한 물리적, 정신적 기제를 동원해 개인의 사적 영역에 개입한다. 또한 이런 다양한 사적 영역 자체가 국가의 공적 활동을 지지하는 기초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사적 영역들은, 어떤 경우에는 사적 영역의 이해관계에 대해서만 주장하지 않는다. 공적 영역에 적용되는 집단적 가치가 관철되는 것이 자신들의 사적 이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자유주의적인 인간관에 입각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들은 모두 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이 희미하며, 긴장관계에 놓여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논거들에 의해서 자유주의적인 인간관에서 핵심적인 면모인 자율성은 의심스러운 개념이 된다. 자율성에는 모든 가치와 덕목은 개별적이며, 개인은 언제나 그에 대한 반성이 가능해야 하고, 그 능력을 그 어떤 가치보다도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세 가지 면이 그 핵심이다. 하지만 이 세 가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주의가 제기하는 위와 같은 비판에 직면해야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이 자율성 개념을 고수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개념을 조금 약하게, 반성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과 반성이 가능하다고 자각하는 순간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할 수 있다는 정도로 자율성을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인가? 만약 이러한 자율성을 인간이 인식할 수만 있다면, 이것은 다시 공동체주의자들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될 수도 있다. 공동체주의의 인간관은 반성의 가능성 자체를 형이상학적으로 차단해버리고, 반성을 통해 올바른 가치를 추구해나갈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2.3. 자유주의와 공동체의 붕괴

  자유주의적 인간관에 부합하는 인간들이 모여 정치공동체를 구성했을 경우, 그 공동체는 올바르게 유지될 수 있는가?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에 대해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비판하기도 한다. 굳이 인간을 근본적으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규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회의하고 공동체가 좋은 것으로 간주하는 가치와 덕목들에 대해 거부하는 개인은 결국 공동체를 결성하지 못하고 고립되며 불행에 빠지게 될 것이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개인이란 원자화된 개인이며, 부유하고, 언제나 불안에 놓여있고, 항상 다른 삶의 양식을 찾아서 헤매는 개인이라고 추정한다. 자유주의적 인간은 정의로울 순 있을지 몰라도, 행복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가치들이 객관적으로 타당한가 그렇지 않은가, 또는 그것들이 정당화된다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이미 선하다고 인정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세계에는 개인도 공동체도 이미 주어진 것으로서 존재하는 상태이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개인은 기존의 가치와 덕목에 대해 회의하는 순간, 자신의 삶을 여러 측면에서 지탱해주는 사회 체계와 거리를 멀리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그 자체로 물질적, 정신적 불행을 수반한다. 개인의 심리적 안정을 곧장 행복에 연결시킬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안정적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삶이 보장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행복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동체주의자의 이런 주장은 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개인의 삶이 원자화되는 경향은 자유주의보다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의해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 훨씬 타당하다. 롤즈의 최소수혜자 원칙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재산의 권리에 대한 주장은 자유주의에 필수적인 요소도 아니며 꼭 그런 결과를 수반하는 것도 아니다. 정치적 자유주의(민주주의와 절차적 정당성을 강조하는 경향)와 경제적 자유주의(자유로운 재산권의 향유에 기초해 시장의 작동에 의해 재화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을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경향)는 반드시 구분하여 생각해야 하며, 여기서의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를 말한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이 두 가지를 섞어서 사용하고 있거나, 적어도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 사이에 확실한 논리적 연결이 성립된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자유주의적 인간관이 사회적 삶의 파괴를 가져온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개념적으로 정치적 자유주의는 정치적 권리를 통해 경제적 자유주의를 수용할 수도, 거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자유주의의 적극적 대안으로서의 공동체주의

  이제까지 살펴본 자유주의에 대한 공동체주의의 비판은, 단일한 공동체주의적 입장에서 개진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주의자로 분류되는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입장을 열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람직한 사회의 모델은 어느 정도 수렴되는 경향이 있고, 이는 자유주의와는 전혀 다른 과정을 거쳐 공동체를 확립하고 유지하며, 발전시킨다. 

  공동체주의는 단순히 시민 각각에게 민주주의적인 권리를 부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공동체의 의사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그 가치를 구현할 수 있도록 시민들을 동원한다. 개인들은 단순히 그 가치가 옳은 것이라고 승인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공동체가 그러한 가치를 실현하는 활동을 하려할 때 그 가치를 담지하는 역할도 하게 된다. 이런 활동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시민적 자질, 즉 공동체 내에서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수많은 덕목을 교육받아야한다. 개인의 숙고과 그것이 집단적으로 모여 이루어지는 집단적 숙고는 자신이 지니게 된 시민적 덕목들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해내기 위해 필수적이다. 이런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적이라기보다는 공화주의적이다. 루소의 일반의지를 이해하는 것은 공동체주의의 이런 관점에 대한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공동체주의적인 접근은 세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첫째, 어떤 가치를 발견하는 집단적 숙고가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을 집단적 숙고의 주체로 받아들이는가? 이미 공동체에서 규정된 가치들은, 그 가치의 내적인 의미에 의해서 특정한 집단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효과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이 공동체 내에서는 그 어떤 의미에서도 숙고의 주체가 될 수 없으며, 공동체에 귀속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결정된 그 가치관을 받아들이기만을 강요당하는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에 어긋나는 귀결이지만, 공동체주의적 입장에서는 포착해낼 수 없는 존재들이다. 

  둘째, 집단적 숙고를 통해 공동체 내에서 옳은 것으로 판정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객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약 직관적으로 명백하게 그릇된 가치가 집단적 숙고를 통해서 발견되었다면, 공동체주의는 그 가치가 명백하게 그르다는 것을 논증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대체로 회의적이다. 이는 공동체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런 공동체에서는 결국 자유주의적인 인간관의 가장 큰 특징인 객관적, 일반적 반성능력이 반드시 요청되어야만 한다. 만약 이 점을 인정한다면, 이는 공동체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어느 정도 포기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어떤 가치에 지배적인 영향을 받는 것과 여러 가치들에 대해 개별적으로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이 분리될 수 있다. 영향은 우연적이지만, 인간의 능력은 인간이라면 모두 갖추고 있는 본질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동체주의자들에게는 이런 구별이 분명하지 않다. 또한 인간들은 어떤 가치를 학습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실제로 어떤 가치에 대해 반성하고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면서 자신의 신념의 체계를 수정해나가기도 한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율성의 개념을 ‘약한 자율성’으로 이해한다면 위와 같은 비판은 충분히 가능하다. 

  셋째, 그렇다면 공동체주의에서 주장하는 ‘공동체’란 대체 무엇인가? 루소의 공화주의적 이상이 대표적이지만, 공동체주의에서 주장하는 여러 형태의 공동체들은 모든 인간들이 같이 적절하게 협의할 수 있는 소규모의 공동체에 이론적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들은 그 규모가 작은 만큼 동질성을 느끼기도 쉬우며, 그만큼 동질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다루어야 하는 공동체는 그렇지 않다. 현대 정치철학에서 다루어야 할 공동체는 지역적으로도, 인종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대단히 이질적인 존재들의 혼합체이다. 공동체주의자는 이런 이질적 공동체에서도 소규모 공동체의 이상을 실현해야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들은 어떤 공동체가 공동체라고 생각하는가?

4. 자유주의, 자유, 문화

  공동체와 시민사회에 대한 공동체주의자들의 입장은 분명히 귀를 기울여 수용할만한 부분이 있다. 이들은 한 인간이 사회관계망에서 벗어나는 것을 상상하기는 대단히 힘들며, 그것에 의존하는 경향이 상당히 강하다는 통찰을 제공해주고 있다. 이러한 가치들은 대개 문화라는 형태를 띄고 인간에게 부여되며, 이는 세계관과 깊은 연관을 맺는다. 한 공동체 안에서 자유가 의미하는 바는, 이러한 문화가 고양하려고 하는 가치들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도록 그 배경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주의의 입장은 문화정책에 대한 일정한 입장을 대변한다. 자유주의적인 입장에 따르면, 특정한 문화를 육성하는 것은 가치중립성에 어긋나므로 정의롭지 못한 방침이다. 하지만 만약 이러한 육성이 소수문화를 보호하는 방향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면,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답변하기가 쉽지 않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문화의 문제에 대해서, 자유주의적으로 각 문화를 보호하는 정책을 낼 수 있도록 논증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다양한 문화를 보호하여 공동체 내의 사람들이 반성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를 늘리기 위한 방법으로서 문화에 대한 보호를 주장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인간이 특정한 문화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매우 제한적인데, 폭넓은 기회를 제공해주어야 실질적으로 구체적인 개인들의 자율성을 늘릴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문화의 문제로 이행할 경우,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이의 논쟁은 단순히 이론적인 논쟁을 넘어서 지극히 구체적이고 정책적인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 만약 자유주의자가 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위와 같은 주장을 한다면, 특정한 가치가 보편적인 가치가 되어야 하며 그것이 보편성을 띄기 위해 사회가 적극적으로 역할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문화 역시 보호해야 하는가? 그들의 목표는 분명하게 반자유주의적이기 때문에 자유주의적인 정의의 원칙과는 모순된다. 이처럼 자유주의는 선을 추구하는 수많은 하위문화를 어떻게 보호하고 육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언제나 봉착하게 된다. 국가는 정의를 추구하는 것만큼이나, 현실적으로 좋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보장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는 다양한 문화들 사이에서 공정성을 확립하는 일과, 그 각 문화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를 증진시켜 행복한 상태에 이르게 해야한다는 두 가지 과제는 자유주의적 논리 내에서는 지속적으로 긴장을 일으키며, 이는 인간의 다양성과 보편적 특징에 대한 고민을 더욱 깊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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