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이랑 방학 때 했던 『論語』강독 소모임에서 간단하게 정리>
제자백가 사상이 남아있는 문헌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여러 국가들이 난립하고 경쟁하여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각 국가들은 자기들이 생각하는 세계(천하)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를 뒷받침해줄 통치 이데올로기를 요청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난립한 국가만큼이나 다양한 사상들이 등장하였고, 이를 한데 묶어 ‘제자백가’라고 말한다.
제자백가에 대해 다룬 저술은 많지만, 춘추전국시대에 가장 가까운 시기에 쓰여진 저술로는 「논육가요지」와 「예문지」가 있다. 「논육가요지」는 『사기』를 집필한 사마천의 아버지인 사마담이 썼는데, 당대에 가장 흥한 여섯가지 학문 - 儒家, 道歌, 墨家, 名家, 法家, 陰陽家의 특징과 그에 대한 사마담의 평가가 담겨있다. 「예문지」는 중국 역사서인 『한서』의 일부분으로서, 이 책이 집필될 당시에 남아있던 여러 가지 사상이나 학파의 특징과 경향이 적혀있다. 이 글에서는 「논육가요지」에 따라 유, 도, 묵, 명, 법가 등 다섯 가지 학파에 대한 내용을 간추려 적을 것이다.
儒家
유가 사상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仁이다. 이것을 가장 처음 정식화한 사람은 孔子다. 공자는 仁을 다양한 맥락에서 서로 다른 뜻으로 쓰고 있지만, 이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가장 포괄적인 정의는 ‘인간이 도덕적인 행동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내면적 근거’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것, 인간의 실체가 바로 仁인 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은 다른 존재들과 차별화되며, 비로소 도덕과 윤리를 말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된다.
仁이라는 논리적인 근거는, 구체적으로는 忠과 恕라는 (도덕적) 감정으로 나타난다. 忠은 盡과 그 뜻이 통하는데, 자신의 마음을 다하여 타자(타인)를 대하는 태도를 뜻한다.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거짓과 숨김이 없이 있는 그대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信이라는 말과 동일하다. 恕는 상대방과 자신의 마음이 같음을 느끼고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태도, 즉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 공감은 단순히 감정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도덕적 자질과 판단능력에 대한 공감이다. 恕에 따라서 인간은 객관적으로 옳은 실천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며, 또한 이것을 타자(타인)에게 공인받을 수 있기도 하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仁이 밖으로 드러날 때, 공자는 이미 확립되어 있는 규범인 禮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禮는 도덕적으로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이 실천한 구체적인 사항들이다. 따라서 禮는 당연히 도덕의 올바른 표현이다. 공자가 禮로 본 것은 주나라의 예법인데, 역사적으로 가장 도덕적으로 완숙한 사람이 바로 주나라의 건국자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禮는 시대에 따라서 변화를 겪을 수 있지만, 禮의 변화는 仁에 비추어보았을 때 예측이 가능하다. 또한 禮가 인간의 도덕적 내면을 드러낸다는 본질적인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면의 仁과 외적으로 확립된 규범인 禮가 일치하는가 그렇지 않는가, 禮는 어떻게 정당하게 근거를 두는가 하는 문제는 공자 대에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공자는 그저 적절한 균형감각을 가지고, 상황에 맞게 실천하는 것을 해답으로 제시할 뿐이다. 이 문제는 이후의 유가 사상가들에게 이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겨진다. 크게 仁의 정의에 따라 내면적인 속성을 중시하는 맹자 학파와 외적인 규제로서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며 禮를 중시하는 순자 학파로 나뉜다.
맹자는 仁을 구체적으로 仁義禮智라는 네 가지 덕목으로 설명한다.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 네 가지 마음의 상태가 있는데 이것을 사단이라고 하며, 각각 불쌍히 여기는 마음(惻隱), 나쁜 것을 미워하는 마음(羞惡), 겸손함 마음(辭讓),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是非)을 가리킨다. 이같은 마음가짐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인간의 기본이자, 가장 원초적인 모습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모든 행동(실천)은 도덕적 기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도덕적이다. 오히려 맹자는 禮 같은 사회적 요구사항들이 인간의 이러한 면을 가리고 억누르기 때문에 비도덕적인 행위들이 생겨난다고 주장한다.
반면 순자는 인간의 내면에 도덕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이 도덕적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실천사항들 즉 禮를 반복-습득하여 도덕적 실천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를 化性起僞라고 한다. 禮를 습득하는 동안 인간은 그 내면이 바뀌게 되며, 비로소 비도덕적이었던 상태를 벗어나 진정한 인간, 자신이 하는 행동이 도덕적 근거를 갖춘 인간이 되는 것이다.
道家
도가는 도덕이나 윤리, 또는 인간의 인식에 따라 주어지는 여러 가지 개념과 그에 따라 구축된 사회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을 깨닫는데서 출발하는 학파이다. 따라서 가치판단에 대한 상대성을 강조하게 되고, 이 상대성을 아예 뛰어넘어버리는 초월적인 기준과 원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노자는 이것을 道라고 이름을 붙였다.
노자에 따르면, 道는 만물을 생성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로서, 무한하다는 속성을 띄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만들어낸(습득한) 어떤 규정도 들어맞지 않으며, 어떤 개념도 이를 포착해낼 수가 없다. 따라서 이것은 無라고 부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하지만 여기서 無라고 쓰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경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에 가깝다.
인간이 인식할 수 있고 개념으로 규정할 수 있는 여러 사물들의 근거가 되기 위해서는, 논리적으로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개념이나 규정으로도 정의될 수 없어야 한다. 만약 그것이 정의 가능하다면, 그것은 그 정의 바깥에 있는 존재들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자가 말하는 無란 이런 의미에서의 無이다. 따라서 無는 모든 有 즉 존재들의 근거가 되며 모든 구체적인 존재들이 생성될 수 있는 원리가 될 자격이 주어진다. 따라서 道의 작용은 無에 기반하며 이루어지는 無爲이다.
장자는 위와 같은 노자의 생각을 더욱 발전시켰다. 有 즉 인간이 감각할 수 있는 구체적인 존재들에 대한 여러 가지 판단은 결국 인간의 기준에서 행해질 수밖에 없다. 이는 다르게 말해서 인간이 아닌 다른 사물들, 즉 만물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는 기준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은 이것을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게 되는데,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 깨닫는 것이 진정한 지식,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에 이르는 길이다.
이런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 성취해야 하는 상태를 장자는 無待의 경지라고 말한다. 無待 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고 세계를 통찰하는 행위를 뜻한다. 아무리 위대한 존재들이라도 그 존재들은 자신의 유한함에 의지하여 여러 가지 판단들을 내리게 되는데, 이런 유한함을 뛰어넘어 자신의 존재조차 망각하는 것이 바로 無待의 경지이다. 이는 정신적인 측면이 강하다. 실제로 자신의 존재 없이 사유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신 속에서의 존재 즉 자아를 흩어버리는 것이 바로 이 경지의 핵심이다. 장자는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心齋), 사유의 도구인 개념을 치우고 큰 하나에 집중하며(專一), 급기야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坐忘) 수양을 그 방법으로서 제시한다.
墨家
묵자는 경험에 기초한 가장 단순한 인간에 대한 관점에서부터 출발한다. 다름 아닌 인간은 이익을 좋아하고 손해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익과 손해는 물질적인 의미를 강하게 띈다. 모든 인간은 이익을 추구하며,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러므로 이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근본적인 힘은 인간의 노력(力)이다. 인간의 힘에 의해서 사회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변화하게 된다. 이익과 손해는 감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묵가 사상에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감각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존재로 바라본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익만 보고 어떤 사람은 손해만 본다면, 그것은 모두가 이익을 보는 사회에 비해서 불행한 사회다. 이익을 보는 사람과 손해가 보는 사람이 따로 나누어져 있는 사회는 차별이 있는 사회, 계급이 있는 사회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회적 불균등을 없애면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이 이익을 볼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묵가 사상에서는 차별과 차등애를 중시하는 유가의 사상과 예법을 비판하며, 모든 이가 신분이 같은 사회(尙同)와 그 모든 사람이 서로를 똑같은 정도로 사랑해야 한다고(兼相愛) 주장한다. 또한 이를 통해서 노력의 산물인 이익을 공평하게 분배하는(交相利) 작업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사회는 이익을 위해서는 자유롭게 뭉칠 수 있는 개인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각자의 능력에 맞는 일을 찾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공동체 전체를 관리하는 일부터 가장 사소한 재화를 만들어내는 일에 이르기까지, 단순히 직분에 차이가 있을 뿐 소득이나 계급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공동체 전체에 관련된 일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고 보다 현명한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尙賢이라고 한다.
위와 같은 공동체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을 똑같이 사랑하라는 등의 덕목들을 도덕적으로 어느 정도 권장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런 도덕적인 심판을 내리는 존재를 묵가에서는 上帝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神靈과 의미가 같다. 인간의 노력을 중시하는 묵가의 전체적인 입장과 모순이 되는 점이 있지만, 상제의 존재를 상제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를 교정하는 가상의 존재로서 묘사하고 있다는 것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名家
正名은 이름을 바로잡는다는 뜻으로서, 구체적인 상황과 그것을 지칭하는 언어를 일치시켜 세계를 좀 더 명확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구동시키는 원리를 밝히려는 노력이다. 다시 말하면 언어(名)와 구체적 존재(實)을 일치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춘추전국시대의 모든 사상가들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名과 實 가운데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방법에서 차이가 생기기 때문이다.
명가는 이 正名의 문제를 사회적인 차원이 아닌 이론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려고 하였다. 즉, 우리가 감각하는 사물과 그것을 지칭하는 언어 사이의 문제를 사회와 결부시키지 않고 순수하게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려 시도한 것이다. 이것이 명가가 다른 제자백가들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명가는 기본적으로 實을 통해서 名을 규정하려는 입장을 띄고 있다. 名은 그 자체로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을 가리킴으로써 ‘무엇’을 의미하게 된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名을 남발하면 그것은 아무런 實이 없는 언어, 즉 언어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무의미한 기호가 되고 만다.
인간이 어떤 名을 일컬어 구체적인 사물을 가리키는 것은 名이 어떤 것을 가리킬 수 있는지 확정하는 것으로서, 이렇게 지시함으로써 만들어진 名을 실제적인 언어(指物)라고 부른다. 이때에 와서야 언어는 자신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언어를 사용할 때에는 절대로 그 언어가 가리키는 사물을 가리킬 수는 없으며, 언제나 그 사물을 지시하는 언어를 매개로 해야만 한다. 따라서 인간의 인식에 있어서는 외부의 사물 자체가 아닌 언어가 중심이 된다.
法家
법가는 유가의 순자 학파에서 파생한 학문적 경향이다. 실제로 법가를 집대성한 한비자는 순자에게서 수학하였다. 따라서 법가의 사상은 순자 학파의 색채가 강하지만, 그보다 더 강력하게 인간의 여러 행동을 규제하고 지도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도덕과 윤리라는 무형적인 차원에서 벗어나, 이익과 손해를 정치적-행정적 권력을 통해 조절함으로써 점차 강력한 정권을 세워야한다는 입장을 편다.
정부가 가장 신경을 쓰고 기민하게 조정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법(法)이다. 법은 그 법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의 행동을 실제로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적인 이익을 생성하고 그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이 법은 국가 전체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 계획되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개혁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을 변법(變法)이라고 하는데, 현명한 변법은 국가의 부와 군사력을 급속도로 꾸준히 증대시킨다.
또한 법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그 법의 지배가 허용되는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은 법의 효력이 빈부와 귀천에 구애받지 않고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 법의 효력은 모든 이에게 공정하게 미쳐야하기 때문에, 계급에 따라 차별적인 통치방식을 주장하는 유가 학파와는 반대되는 입장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법은 법 하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법을 집행하는 최고의 권위자인 군주가 그 법을 집행할 수 있는 권위를 가져야한다. 이 권위는 사람을 다루고 제어할 줄 아는 기술(術)과, 사회가 이미 용인하고 있는 한에서 이미 정치권력을 가지고 있는 지위(勢)를 통해 획득할 수 있다. 법가는 이미 확립되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법만큼이나 術과 勢를 중요시한다.
術은 군주가 자기 뜻대로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여러 방법이다. 마음을 비워서 자기 뜻이 다른 사람에게 읽히지 않게끔 하고(虛靜), 수하의 사람들이 자신의 직분에 맞는 일만 하게끔 지시하며(循名責實), 자기 마음을 어지럽히는 자들을 물리치며(防姦), 상과 벌의 권한을 타인에게 양도하지 않고 스스로 쥐고 있어야(執二柄) 군주는 자신의 뜻대로 사람을 부릴 수 있다. 勢는 권력을 행사할 적절한 사회적 위치를 뜻한다. 勢를 얻지 못한다면 결국 뜻하는 바를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또는 가능성)조차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術에 勢가 합쳐지고 국가 재정과 군사력을 증강하기 위한 제도적 개혁이 이루어질 때, 강력한 군주와 강력한 국가가 탄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