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론 - 제3판 개역본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강정인.김경희 옮김 / 까치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근대정치사상 숙제> 

문 : ‘마키아벨리는 정치 영역에서 도덕을 배제한 사상가이다’ 라는 진술이 어떤 의미에서 옳고 어떤 의미에서 부정확한지 논술하시오. 

답 :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군주가 정치적인 결단을 내릴 때, 다른 모든 요소를 배제하고 오로지 인민(혹은 자신)의 이익에 따라서만 행동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마키아벨리를 정치영역에서 도덕을 배제한 사상가라고 이야기할 때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은 바로 ‘이익’이다. 이익은 전통적으로 옳고/그름의 문제보다는 좋고/싫음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개념인데, 마키아벨리에게 정치는 이익과 이어져있는 인간의 활동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정치 속에 도덕이 들어갈 자리는 사라져버린다. 인간들은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러우며, 위선자인 데다가 기만에 능하며, 위험을 피하고, 이득에 눈이 어두운”(17장) 존재들이기 때문에 정치 역시 이런 존재들을 대상으로 그에 알맞는 방법을 써야한다. 따라서 “현실 속에 결코 존재한 것으로 알려지거나 목격된 적이 없는 공화국이나 군주국을 상상”(15장) 하는 것은 군주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마키아벨리가 생각하는 최고의 이익은 군주 자신이 이끄는 정치공동체의 유지이다. “군주가 전쟁에서 이기고 국가를 보존하면, 그 수단은 모든 사람에 의해서 항상 명예롭고 찬양받을 만한 것으로 판단될 것이다.”(18장)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강구되는 여러 가지 수단은 그 자체가 지니는 어떤 도덕적 성격과는 상관없이 최종목표에 의해 정당화된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은 외양과 결과에 감명받기 때문이다.”(18장) 이를 위해서 군주는 다른 군주들을 속일 줄도 알아야하며,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 적당히 도덕적으로 보이는 여론조작도 감행해야 한다. 이 모두는 기만이므로, 정직해야 한다는 도덕적 덕목에 어긋나는 행위들이다. 

  그런데, 실제로real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는, 적어도 마키아벨리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정치의 핵심은 실재세계(다시 말하면 도덕적인 세계)의 가치판단들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에게는 ‘그럴듯해 보이는 것’, 즉 외양appearance이 핵심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볼 수는 있지만, 당신을 직접 만져볼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18장)

  도덕적 덕목으로 인정되는 것들이 정치공동체의 유지에 방해가 될 경우, 그것을 실천하지 말라고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즉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지 위해서, 그는 종종 신의 없이, 무자비학, 비도덕적으로 행동하고 종교의 계율을 무시하도록 강요당하기 때문”(18장)에, 자기 행동을 도덕적으로 일관되게 지키기 위해서 권력을 포기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것은 군주를 희망하는 자들이 어쩔 수 없이 직면해야 할 상황이다. 이에 대해 도덕적 갈등을 겪고 행동을 지체하는 것은 군주로서 올바른 처신이 아니다. 

  마키아벨리의 주장이 정당화되는 방식은 역사 그리고 자기가 지켜본 여러 가지 사례들이다.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실천한 사항들에서 보편적 원리로서의 도덕은 당연히 발견하기 어려워진다. 도덕이란 도덕적 원리가 실재한다는 형이상학적인 가정에서부터 출발하는데, 마키아벨리의 연구방식에서는 이런 신념을 정당화해줄 수 있는 사례들이 없었다 - 적어도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런 사례들을 채택하지 않았다. 만약 그 원리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가 예로 드는 비도덕적 실천의 사례들은 구현되기 어렵거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도덕적 원리들이 없다고 하더라도, 도덕적 사례들은 우연하게 구현될 수 있다. 따라서 그런 원리들은 없다는 신념이 더욱 설득력을 얻을 수 있으며, 마키아벨리는 이 신념을 채택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마키아벨리가 정치 영역에서 도덕을 배제한 ‘최초의’ 정치사상가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정치와 도덕은 분리된다는 주장은 꼭 마키아벨리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견해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도덕과 정치를 분리시키거나, 도덕 자체가 허상이라는 견해는 소피스트가 활동했던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등장한다. 트라시마쿠스가 말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 라는 말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여전히 도덕이 중요한 항목이라고 강조하며 그것이 정치공동체를 이끄는 중요한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마키아벨리는 “많은 훌륭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존경받았으며, 그의 재위기간 내내 군인과 인민을 통제할 수 있었고, 항상 미움받거나 경멸받는 일을 피”(19장)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반대로 이런 도덕을 근본적으로 무시해 “잔혹하다는 명성을 얻은”(19장) 막시미누스나, “권력은 얻었지만 영광은 얻을 수 없”(8장)었던 아가토클레스를 예로 들면서, 이들은 “훌륭한 인물로 평가될 수 없”(8장)다고 말한다. 게다가 마키아벨리는 이들의 행적을 가리켜 “덕virtu에 의존하지 않고 성취”(8장)한 행동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마키아벨리가 군주의 덕목이라며 말해주는 여러 가지 ‘비도덕적’ 항목들은 사실은 고대 그리스-로마 전통에 의하면 군주가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행동지침들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로마의 위대한 군주들은 그렇게 행동해왔다. 고대 그리스-로마인들 뿐만 아니라, 마키아벨리 역시 알렉산드로스(4장)나 “테세우스, 로물루스 등과 같은 인물들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한”(6장)다. 

  마키아벨리가 생각하는 도덕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다시 말해, 당시의 도덕의 의미와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도덕의 의미가 다른 것이다. 당시의 도덕은 중세를 거치며 의미가 변화한 ‘하나님 앞에서 착한’ 도덕, 실제로 마키아벨리가 르네상스인으로서 보고 겪은 그 사회의 도덕이다. 반면에 그가 긍정적으로 평가한 도덕, 즉 덕virtu은 고대 그리스-로마 전통에서 바라보는 덕virtu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이상으로 삼았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로마 전통의 도덕은 ‘하나님 앞에서의’ 도덕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고대의 여러 모럴리스트들과 마찬가지로 마키아벨리 역시 고대의 뛰어난 군주를 칭찬하기는 하나, 칭찬의 성격이나 양상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가 정당화하려는 것이 이러한 고대 그리스-로마적 덕목들이었다면, 마키아벨리가 정치에서 도덕의 영역을 배제하려 했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오히려 도덕으로 평가되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덕목들의 내용 또는 의미를 전환시키려 했던 사상가로 평가하는 것이 더욱 사실에 부합할 것이다. 즉 도덕의 배제가 아닌 변화인 것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로 따져보았을 때,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기존의 도덕적 덕목들이 정치의 영역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보이려 했고 이는 성공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로마 전통을 물려받은 도덕적 덕목으로 내용을 바꾸었을 뿐 자신의 주장대로 완전히 “인간은 어떻게 사는가”(15장)하는 문제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15장)는 문제를 날카롭게 나누는 데는 실패했다. 『군주론』이라는 책 자체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도덕적(당위적) 지침을 담고 있는 책이기 때문에, 마키아벨리의 기획은 애초에 달성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