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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윤리- 정의, 자유의 기초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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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자유를 찾아서 : 자유지선주의 선언
머리 로스바드 지음, 권기붕 외 옮김 / 한국문화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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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성과 그 문제들
존 듀이 지음, 정창호.이유선 옮김 / 한국문화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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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 원천들- 현대적 정체성의 형성
찰스 테일러 지음, 권기돈.하주영 옮김 / 새물결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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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학기 중국현대철학연습 발표문>

 

   아편전쟁(1,2차 중영전쟁)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근대의 기점이 되는 중요한 사건이다.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전쟁을 전후해서 중국과 동아시아 세계는 본격적으로 전세계적 시장경제체제의 한 부분이 되었다. 반대로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이 사건은 중국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중화주의적 이념, 사회, 정치적 체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정치적 질서가 자리잡는 계기였다. 특히 사상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이념적 기반이었던 유학의 지위를 흔든 사건이었다. 서양의 사상에 비해 현실적인 힘이 없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정치, 사회적인 개혁 못지않게 사상적 대응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중국의 경우 전반적으로 기존의 이념을 고수하려는 성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당시의 권력자들 또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소수의 지식인들은 서양의 사상을 학습하거나 수용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이런 움직임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사건으로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과 양무운동(洋務運動), 그리고 변법운동(變法運動)을 꼽을 수 있다. 태평천국의 지도자 홍수전(洪秀全)은 기독교에 기반해 종교활동 및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양무운동은 기본적으로는 서양식 무기를 생산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됐지만, 그 무기를 다루게 될 인재를 양성하는 과정에서 서양의 사상이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소개되었다. 특히 국비 유학생 출신이며 사관학교 교사였던 엄복(嚴復)이 서양의 학술서적들을 많이 번역했다. 그 가운데 천연론(天演論)과 이를 통해 소개된 사회진화론은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변법운동을 대표하는 정치인인 강유위(康有爲)는 유학의 경전을 다른 시각에서 해석하고 그 안에 서양식 정치체제를 예비하는 내용이 담겨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따라서 이 세 사람의 생애와 사상은 서양의 사상에 대해 긍정적이었거나 수용하려는 태도를 취했던 당시 중국 지식인의 모습을 대표할만한 것이다
. 이 글에서는 홍수전과 엄복의 천연론, 강유위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당시 중국 지식인들의 문제의식과 그에 대해 제시한 해법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해보고자 한다.

 

 

1. 홍수전과 태평천국운동

 

(1) 홍수전과 배상제교(拜上帝敎)

 

   홍수전은 객가(客家) 출신의 지식인으로, 14세 때 과거에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방황하던 와중에 중국인 선교용 개신교 책자인 권세양언(權世良言)을 접했다. 이 책자에는 예수보다는 유일신 여호와의 위엄과 능력, 죄악과 우상숭배에 대한 비난, 구원과 파멸의 극단적 대비를 강조하는 성경 구절이 많이 편집되어 있었다. 또한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과거에 응시하였다. 그러나 4번째 낙방 이후에는 더 이상 치지 않았다. 이 즈음 자신이 꿈에서 상제 즉 하느님을 보았고 나의 둘째 아들, 예수의 동생이 되어 이 세상에 천국이 임하게 하라는 메시지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교주가 되어 본격적으로 전도에 나섰다. 이 종교가 바로 배상제교이다. 태평천국운동의 태평천국이라는 말은 이 꿈에서 비롯된 것이다.


   『
권세양언이라는 책자가 모태가 되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홍수전이 스스로 그리스도라고 선포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배상제교의 구체적인 실천적 조목은 개신교와 거의 일치했다. 이 시기에 주목할만한 것을 두 가지다. 하나는 효와 정직에 대한 강조, 살인·간음·사기 등에 대한 비난, 물질적인 것에 대한 금욕 등 전통적인 유학의 가르침에 합치하는 여러 덕목을 실천함으로써 천국에 이를 수 있다고 강조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개신교의 우상숭배 금지의 원칙 또한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중국의 민간신앙은 부정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홍수전은 전도에 나선 뒤에 공자의 위패를 부수는 행위를 저질렀는데, 이것이 반란을 모의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그는 초기 개종자들과 함께 처벌을 받았다.


   홍수전이 처벌을 받는 기간 동안 배상제교의 조직은 정치적 성격이 강화됐다
. 이는 배상제교의 교리에 현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이념인 유학을 우상숭배로 치부하고 부정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들의 종교적 실천은 곧 정치적 실천이었던 것이다. 이런 본격적인 변화를 주도한 사람은 양수청이다. 그는 광서성 출신의 숯가마 노동자였는데, 배상제교에 입회한 이후 주요 인물이 되었다. 홍수전은 출소한 이후 그를 비롯한 몇몇을 자신의 명령 즉 하느님의 명령을 집행하는 대리자로 인정했고, 따라서 그의 입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2) 태평천국운동의 전개와 결말

 

   이런 충돌이 격화되자 청나라 조정은 이들을 탄압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1850년 홍수전은 양수청을 통해 광서성 지역 배상제교 교인들의 소집을 명하고, 이듬해 태평천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교인들을 구성하는 주요 계층은 광서성의 객가 집단, 광산과 불가마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었다. 이 과정에서 소집에 응한 모든 교인들의 재산을 배상제교 앞으로 귀속시키고 평등하게 나누었으며, 남녀가 모두 군사작전에 참여하는 등 개혁적인 모습을 보였다. 반면 군대의 편제는 전통적인 예법(주례)을 따랐다.


   봉기 초기에는 제대로 된 무기조차 갖추지 못해
, 태평천국군의 실제 전투력은 아주 열악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팔기와 녹영은 봉기 초반에 이들도 제대로 진압할 수도 없을 만큼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임칙서는 본격적인 임무수행도 하기 전에 사망하였고, 그 이후엔 제대로 된 군사지도자도 등장하지 않았다. 반면 태평천국군은 자신의 세력권 안에서 술·담배·아편·남녀의 교류를 금지하는 엄격한 금욕주의를 표방했고, 전족의 금지, 여성에 대한 관직의 허가, 변발폐지와 장발령 등을 선포했다. 특히 배상제교의 목표인 천국의 실현을 위해서는 경제적 평등이 매우 중요했는데, 이를 위해 귀족들의 재산을 배상제교 앞으로 귀속시키고 교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나눠주었다. 이 때문에 가난한 자작농과 소작농, 노동자들에게 환영받았다. 봉기군은 1853년 남경을 점령하고, 이 곳을 수도로 삼은 태평천국의 수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한다.


   이들이 구상한 경제
, 사회 정책의 구체적인 모습은 천조전무제도라는 책자를 통해서 확인해볼 수 있다. 태평천국운동은 기본적으로는 전통적인 예법에 기반해 전제군주적 정치체제의 모습은 유지하고자 했으며, 신분제도 고수하려 했다. 그러나 사유재산은 인정되지 않으며, 모든 생산물은 국가에 귀속된다. 이들은 각 개인의 필요에 따라 지출되며, 그 이상의 지출은 인정되지 않는다. 토지 또한 기본적으로 국가에 귀속된다. 단 자신이 실제로 농사를 짓는 사람이라면 국가는 그에게 토지를 할당하며, 다시 환수하지는 않는다.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천조전무제도에서 볼 수 있는 태평천국운동의 지향점은 중앙집권적 전제군주를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정부가 모든 재화를 독점하고 균등하게 분배하는 제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이런 급진적인 정책과 유학의 부정 그리고 자신들에게서 재산을 빼앗아가는 행태들 때문에 청 조정를 비롯한 지배계층에게는 태평천국군이 아주 위험한 집단으로 간주되었다
. 그런데 이들을 막아야 할 조정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세태를 비판하고 현재의 질서를 수호하고자 하는 지배계층의 사람들은 반봉기집단을 조직하여 태평천국 세력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지켜내야 했다. 이들 가운데는 본격적으로 태평천국군에 대립하는 이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증국번(曾國藩)의 상군(湘軍)과 이홍장(李鴻章)의 회군(淮軍)이었다. 상군은 호남성의 사대부(紳士)들을 중심으로, 회군은 강소성의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집단이다. 이들은 조정을 대신해서 태평천국의 세력 확장을 막았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그 지역의 군사통제권을 공식적으로 획득했다.


   또한 태평천국의 위기는 내부에서부터도 찾아왔다
. 양수청은 홍수전을 넘어서 태평천국의 지도자 자리에 올라서려 했고, 그를 제외한 다른 초기 지도자들이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이는 유혈사태로 번져서, 1856년 양수청은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군사들과 함께 남경에서 숙청당했다. 또한 몇몇 초기 지도자들은 대오에서 이탈해 독자적인 군사행동에 들어갔지만 청의 군대에 괴멸당하는 등의 사건이 잇따라 일어났다. 결국 남경에 남은 지도자는 홍수전 한 사람 뿐이었고, 그는 이런 참혹한 사태를 목도한 뒤 광신적으로 바뀌어 정치적 업무에 거의 등을 돌리다시피 했다.


   이 와중에도 홍수전의 조카인 홍인간
(洪仁玕)을 중심으로 태평천국운동을 다시 일으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1858년 태평천국군은 상군을 상대로 한 전면전에서 크게 이겼다. 이 과정에서 홍인간은 서유럽과 미국의 외교관, 선교사들을 접촉하며 자신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줄 것을 여러 번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번엔 열강들이 태평천국운동을 외면했다. 태평천국운동 초기에 열강들은 개신교 선교세력이 중국을 장악해가고 있다는 것을 환영했다. 그러나 그들은 태평천국운동의 경제개혁정책과 금욕주의적 성향 등이 상공업활동에 이로울 것이 없다고 판단했고, 태평천국군의 진압을 빌미로 상당한 이권을 넘겨받을 수 있다는 계산이 가능한 청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겉으로는 내전에 개입하는 것은 안된다는 식으로 중립적인 자세를 취했다.


   결국
1860년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청의 요청을 받아들여 태평천국운동의 진압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이 제공한 신식 무기와 영·프 연합군, 그리고 이들로부터 훈련받은 청의 군대에는 상승군(常勝軍)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상군 휘하에 편입되었다. 진퇴를 거듭한 끝에 1864년 남경이 상군에 의해 함락되면서 태평천국운동은 사실상 끝을 맺었다. 홍수전은 함락되기 전에 병에 걸려 죽었으며, 홍인간을 비롯한 후기 태평천국 지도자들은 모두 전사하거나 처형당했다.

 

(3) 태평천국운동의 사상사적 의의

 

   태평천국운동의 과정에서 나타난 홍수전의 종교적 신념은 서양 사상의 대표격인 개신교를 대폭 수용한 것에서 그 주요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그는 청의 몰락 속에서 위기의식을 느꼈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배상제교라는 사상을 제시했다. 그것은 종교적 색채가 다소 강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접한 말세를 강조하고 유일신을 찬양하는 개신교의 일면에서 정치적 메시지를 찾아냄으로써 강력한 종교적·정치적 운동을 일으킨 사상이 되었다. 또한 그렇게 구상한 제도가 경제적 파탄을 마주한 민중들의 감정에 호응해, 조정을 뒤흔드는 운동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상적 전형은
, 증국번과 이홍장과 같은 사람들이 취하는 보수적 태도다. 이들은 분명히 전통적인 사회의 이념을 수호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경제적인 타격과는 별개로, 그들에게 태평천국운동의 이념은 사회를 무너뜨리고 사람들의 정신을 어지럽히는 사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청 조정은 이를 막아내지 못할 만큼 무능했고, 외국의 힘을 빌어야만 겨우 진압할 수 있을 정도로 속수무책이었다.


   따라서 청 정부는 이제 더 이상 그 모습을 그대로 지켜야 할 대상이 될 수 없었고
, 일정 정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그리고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지식인들은 서양의 무기가 어떤 성능을 가지고 있는지를 똑똑히 지켜보았다. 이는 진압을 주도한 증국번과 이홍장 같은 이들이 양무운동을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양무운동의 정신은 우리의 정신과 제도는 지키되 기술은 배우자고 말하는, 중체서용(中體西用) 내지는 동도서기(東道西器)론으로 표현되었다.

 

 

2. 엄복과 천연론

 

(1) 유학파 지식인 엄복과 천연론

 

   1861년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는 와중에 양무운동이 시작되었다. 양무운동의 핵심은 서양의 군사기술을 배우고 신식 무기를 만드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었다. 각지에는 탄광, 철광, 제철소, 무기공장이 세워졌다. 특히 열강들의 침입에 맞서기 위해서는 해군을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군함을 사들이고 조선소를 건립하는 것도 양무운동의 중요한 과제였다. 더불어 이런 기술을 가져다주고 외교 업무를 관장하는 외국인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다양한 전문가들을 양성해야만 했는데, 이를 위한 기관들이 이러한 공장에 덧붙여서 세워졌다. 1862년 북경에 세워진 동문관(同文館), 1863년 상해에 세워진 광방언관(廣方言館), 1864년 광주에 세워진 광주동문관(廣州同文館), 1867년에 세워진 복주선정국(福州船政局) 부설 선정학당과 강남제조국(江南製造局) 부설 번역관 등이 그 예다.


   1872
년 증국번과 이홍장은 조정에 국비유학생 파견을 건의했다. 서양의 문물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직접 가서 체험해보고 와야 한다는 취지였을 것이다. 이 계획은 곧 추진되었고, 첫 유학생 30명은 미국으로 떠났다. 국비유학이었으므로 대개는 중산층 내지는 하급 사대부의 자제들로 이뤄져 있었는데, 이들은 완전히 서양의 학문에 물들어 귀국했다. 따라서 추가 유학 계획은 반대에 부딪혔다. 양무운동을 추진하던 이들은 이런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장소를 유럽 지역으로 바꿀 것을 제안했고, 1876년에 출국한 국비유학생 30명은 유럽을 향해 가게 되었다.


   이
30명 가운데 한 사람이 엄복이다. 그는 유학생 시절을 영국의 왕립 해군학교에서 보내고, 귀국 이후에는 북양해군의 북양수사학당에 교수로 부임했다. 이후 부교장을 거쳐 교장이 되었고, 해군을 가르치는 일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 이후 북양해군이 전멸하면서 직장을 잃었고, 한동안 방황하다가 언론인 겸 번역자로 다시 세상에 등장한다. 이 기간동안 그는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적 사회과학에 매료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서양의 학문 자체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파악한 듯 하다. 천연론은 그런 생각에서 나온 번역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그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논리학의 체계,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학 연구,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등도 번역·출판했다.


   『
천연론은 토마스 헉슬리의 강연록 진화와 윤리를 번역한 것이다. 이 강연록의 대체적인 내용은, 생물학에서 이야기하는 진화를 무턱대고 인간을 지배하는 원리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이런 자연적인 진화를 인간의 힘이 닿는 한 이겨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진정으로 인간다운 모습이며, 그것이 우리의 인간다움 즉 윤리적 측면을 나타낸다고 역설한다. 이는 사회진화론적 사회과학, 생물학적 진화와 인간 사회의 원리 사이의 연속성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엄복은 반대로 헉슬리의 입장에 반대하고 스펜서의 입장을 옹호하며 주석을 달아놓는다. 헉슬리는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원리에 대해 잘못 파악하고 있으며, 스펜서의 주장처럼 자연의 순리에 맡겨놓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는 것이다. 헉슬리의 주장처럼 인위적인 것을 강조하다보면, 실제로 더 좋고 적합한 것이 인위적인 것에 의해 배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천연론의 특징과 의의

 

   『천연론의 번역에서 보이는 특징은 엄복이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를 격의(格義)했다는 것이다. 격의는 불교가 처음 중국에 들어올 때 불교의 개념과 용어들을 도가의 개념과 용어를 사용해 번역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천연론의 경우에는, 서양의 개념과 용어들을 중국의 전통사상인 유··도가에서 쓰는 개념과 용어들로 번역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격의했다는 말을 쓸 수 있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궁극적인 이치는 시대와 장소에 상관없이 동일하고 따라서 그것을 표현하는 말은 다르더라도 깊이 이해하면 그것은 동일한 이치에 대한 다른 표현이며, 그렇기 때문에 서양 학문의 깊은 뜻을 이해하려면 우리의 학문의 깊은 뜻과 서로 맞춰보아야 하고 그래야 그 깊은 이치가 밝혀질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서양의 논리학에서 쓰이는 방법인 연역과 귀납을 각각 주역의 체계와 춘추의 체계에 비추어 설명·이해하고 있다.


   또한 그는 번역의 원칙으로 원문에 충실해야 하고
(), 의미를 전달해야 하고(), 문장이 규범에 맞아야 한다()는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가운데 엄복이 가장 많이 고려하는 것은 두 번째 원칙인 의미의 전달인 것으로 보인다. 그 스스로도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라고 하더라도 읽는 사람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면 번역을 하지 않은 것과 같기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또한 원문에 없는 절 나누기라든가 상당한 분량의 번역자의 주석 등이 이를 증명한다. 또한 헉슬리가 드는 여러 사례들도 중국의 고사나 경우에 맞게 고치는 것도 이런 경향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인 내용상의 번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세상의 모든 생물들을 지배하는 원리는 진화(天演)이다. 자연이 소화할 수 있는 생물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는데, 그 소화할 수 있는 양은 크게 증가하지 않지만 생물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따라서 자연 속의 생물이 포화상태가 되면 그 환경에 잘 들어맞는 개체만이 성장할 기회를 제공받고, 그렇지 않은 개체들은 아예 사라지게 된다. 이것은 진화론에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의 개념인데, 엄복은 이것을 천택(天擇)으로 번역했다. 이런 기회를 제공받기 위해서 생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생존경쟁(struggle for existence)은 물경(物競)으로 번역되었다. 이렇게 경쟁하면서 그 환경에서 더 잘 살아남기 위해 생물들은 스스로 변화(variation)를 꾀하는데, 이것은 추이(趨異)로 번역되었다. 이 세 가지가 자연에서 변화를 이끄는 동력이다.


   이 원리가 인간사회에도 적용된다는 것이 스펜서와 엄복의 입장이다
.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지만 인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따라서 인간이 부족한 자원을 놓고 경쟁해야하는 일이 생기고, 그 경쟁 속에서는 자연과 사회 등 환경에 딱 들어맞는 인간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에 딱 들어맞아야 한다. 현재 인류의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의 선택을 받은 종족은 서양인들이다. 만약 서양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맞닥뜨렸을 때 그들이 자연선택을 받지 않았다면 그만큼 세력을 확장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물계에서도 이런 일은 종종 벌어지는데, 이미 조성된 어떤 생태계에 더 잘 맞는 생물이 들어갔을 경우 다른 생물이 살아남지 못하는 경우가 바로 그렇다. 따라서 우리의 변화의 방향 또한 서양인으로부터 배우는 것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핵심은 그들의 정치 제도가 백성들의 지식(民知)과 덕성(民德) 그리고 체력(民力)을 기르는 데 초점이 맞춰져있다는 것이다. 이들을 기른다면 우리 또한 국제사회라는 생태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이 계속 진행되다 보면 결국 가장 좋은 재원들이 인류사회에 남게 될 것이고, 더욱 더 발전하고 진보된 사회가 출현할 것이다.


   엄복은 이런 입장에서 헉슬리를 비판한다
. 그에 따르면 스펜서의 입장이 하늘의 원리를 따르고(任天) 인간들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진화의 원리에 충실하고 행복한 사회를 지향한다. 반면에 헉슬리는 이런 원리를 거슬러(勝天) 인간의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인위적인 것을 적극적으로 고려한다. 따라서 헉슬리의 주장은 진화를 통해 성취될 미래의 행복을 지연시키고, 자연선택에 의하면 진작에 사라졌어야 할 개체들을 보호하는 논리를 제공한다. 반면 헉슬리는 이런 스펜서식의 주장에 대해 이들이 우생학과 연결되며, 아직 인간에게는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인간의 사회에서 자연이 하는 것처럼 사람을 감별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인간이 직접 자연선택을 실천하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는 헉슬리의 견해가 옳아보인다
. 사회진화론적 사회과학이 제국주의와 어떻게 결탁했는지, 사회진화론이 생물학적 진화론을 얼마나 오해했는지, 생물학적 진화론 안에서도 얼마나 다양한 변형이 있으며 또 그들 각각이 진화를 이해하는 방식이 얼마나 판이하게 다른지를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엄복의 시선에서 헉슬리의 견해는 오히려 고담준론에 가까워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살아온 시기가 대내적으로 그리고 대외적으로 청나라가 상당한 풍파에 시달렸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스펜서의 사회 이해 방식은 당시의 현실과 잘 맞아들어갔고, 그리고 변이라는 방식으로 내가 속한 공동체가 자연선택에 의해 생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 또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식은 단지 엄복 뿐만 아니라 당대의 많은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과 일맥상통했다. 그래서 엄복의 천연론은 본인 뿐만이 아닌, 중국 나아가서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외세의 압박에 시달리는 모든 공동체의 지식인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3. 강유위의 철학사상과 변법운동

 

(1) 변법운동과 강유위의 정치적 활동

 

   강유위는 1858년 광동성 남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과거에 응시했으나 떨어졌고, 뒤이어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도가와 불교사상에 더욱 심취했다. 그리고 그 즈음 서양의 학문을 접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분야를 가리지 않고 서양의 학문 저술을 읽었다. 이후 1888년 과거에 다시 응시하는데, 이 과정에서 황제에게 직접 올려야한다는 상소를 써서 중앙정부에 파장을 일으킨다. 여기에는 의회와 비슷한 합의제 심의기관을 공식적으로 설치할 것을 주장하는 내용, 즉 변법(變法)을 추진하자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의도와는 다르게 황제에게 전해지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양무운동을 반대하던 여론과 반이홍장 성향 조정 대신들의 주목을 받았다. 물론 이런 파장을 일으킨 댓가로 그 대신들로부터 당분간 정계를 떠나있으라는 요구를 받았고, 그렇게 자숙하는 시간 동안에 신학위경고를 간행해 또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선다.


   1895
년 또 다시 과거에 응시한 강유위는, 이번에는 응시자 600여 명의 연서명을 받은 상서를 조정에 제출한다. 공거상서(公車上書)라고 불리는 이 운동은 양무운동을 추진한 세력에게 청일전쟁 패배의 책임을 묻고, 반이홍장 성향의 대신들을 중용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이 때 치른 과거에 급제했고, 이후 영국이나 일본의 메이지유신 등을 모델로 삼은 입헌군주정으로의 변법(變法)을 기획한다. 이런 뜻을 전파하기 위해 강학회(强學會)를 세우고 잡지를 발간했는데, 북경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다. 여전히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양무운동파 대신들에게 탄압을 받아 규모가 다소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연과 학술활동을 이어나갔다.


   1898
년에는 사대부들의 모임인 보국회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변법운동에 나섰다. 그리고 황제에게 직접 상소를 올려 자신을 비롯한 변법파 인사들을 관리로 등용하고, 평범한 백성들의 직접 상소 허용, 상업 진흥, 신식학교 설립 등을 건의했다. 반면 종래에 주장하던 의회와 비슷한 합의제 심의기관에 대한 내용은 없었으며, 대신 군주의 권한을 강화하고 여기에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내용이 들어간 것으로 보아 개혁의 방법론을 바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자신의 개혁에 동참하지 않는 대신들을 파면할 것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그러나 이것을 황제와 조정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서태후가 광서제를 연금하고 변법파에 대한 체포령을 내림으로써 변법운동은 막을 내렸다. 강유위는 일본으로 망명했고, 강유위가 추천한 변법파 가운데 양계초를 제외한 모두가 체포당하거나 처형당했다. 그리고 변법으로 추진하려고 했던 모든 것들이 서태후의 명에 따라 원상복구되었다.

 

(2) 강유위 철학의 특징과 의의

 

   강유위의 변법운동은 그의 정치사상·철학에 토대를 둔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인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 대동서(大同書)를 살펴보았을 때, 전통적인 철학에 기반해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변법을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 저서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그의 정치적 지향점을 그려볼 수 있고 나아가서 서양의 사상에 대응하는 중국 지식인의 한 전형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가장 먼저 완성된
대동서를 살펴보자. 대동(大同)은 소강(小康)과 함께 예기(禮記)예운(禮運)편에 등장하는 개념으로, 이상적인 사회를 뜻하는 말이다. 강유위는 이 개념을 서양의 유토피아 개념에 대응시키고, 서양과 동양에서 논의돼왔던 이상적인 사회에 관한 논의들을 여기저기에 끼워넣는다. 또한 공자가 인류의 진화에 일정한 단계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우리는 지금의 혼란한 사회상을 거쳐서 이상적인 사회로 나아간다는 것을 예언했다고 해석한다. 논어(論語)위정(爲政)23이 그러한 예다. 그러나 공자는 혼란한 세상에 살았기 때문에 대동에 대한 설명을 거의 하지 않고 단지 혼란한 사회나 소강에 대한 설명만 할 뿐이다. 따라서 앞으로 올 대동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며, 그것이 자기가 대동서를 쓴 이유라는 것이다.


   유토피아가 반드시 오는 이유는
, 이 세계가 세 가지 변화의 국면을 겪으면서 점점 더 나은 사회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거란세(據亂世)에서 승평세(升平世), 승평세에서 태평세(太平世)로 바뀐다. 승평세는 소강사회, 태평세는 대동사회에 해당한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지향해야 할 세상은 태평세다. 여기에는 어떤 사람도 고통받지 않고 모두가 행복하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다다르지 못하고 여러 원인에 의해 고통받고 있는데, 이 원인을 강유위는 영토(國界), 계급(級界), 인종(種界), 남녀(形界), 친소관계(家界), 산업의 분화(業界), 법 집행의 부당함(亂界), 사람과 동물 사이의 종적 구별(類界), 생명의 탄생에 따른 이런 고통스런 사회의 연속성(古界) 9가지 경계(九界)라고 진단한다. 만약 이 진단이 맞다면, 이들을 없애는 정책을 시행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이 없어지고 태평세가 찾아올 것이다.


   공자를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 그가 경전을 해석하는 방법론으로 금문경학(今文經學)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고문경학(古文經學)에 대비되는 것인데, 이를 택하는 이유가 신학위경고에 밝혀져 있다. 고문경학은 춘추좌씨전의 정신을 이어받은 해석 방법론으로, 문자 그대로 읽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춘추공양전의 정신을 이어받은 금문경학은, 간략하게 써진 문장 속에 심오한 뜻이 있다고 생각하는(微言大義) 해석 방법론을 가리킨다. 신학(新學)은 전한과 후한 사이에 왕망이 세운 신나라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유학을 가리키는 강유위의 용어인데, 안타깝게도 이것이 유학의 정통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학의 진정한 정신을 되살리려면 전한과 그 이전의 본래 유학의 정신, 즉 금문경학과 춘추공양전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를 이렇게 예언자에 준하는 사람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은
, 강유위를 비롯해 당대의 많은 유학자들이 추진했던 입교(入敎)운동과 관련이 있다. 이들은 서양의 기독교의 유입에 맞서서 유학적인 종교 사상, 즉 공교(孔敎)를 수립해서 사람들의 신념을 결집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춘추공양전과 금문경학은 이런 활동에 좋은 근거가 되었는데, 공자가 단순한 도덕적 인간이 아니라 그 이상의 초자연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비쳐졌기 때문이다.


   강유위는 이런 철학적 해석을 바탕으로 자신이 살고 있던 시기를 승평세라고 진단하였다
. 그리고 그 승평세에 맞는 군주제는 입헌군주제다. 완전한 민주정 또는 혁명적인 민주주의는 승평세가 아닌 태평세의 정치체제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완전한 민주정을 이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변법운동을 통해 뼈아프게 느꼈기 때문에 내린 결론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진단은 변법운동 당시에는 올바른 결정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이후 사상계의 상황이 급격히 변했는데도 불구하고 입헌군주제를 고수하며 복벽운동에 가담하는 등 시대착오적인 정치행위를 하도록 만들었다. 한 시대의 끝에 서있던 개혁자가 새로운 시대의 보수주의자로 돌아선 것이다.


   강유위의 철학과 사상은
,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 의의가 깊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사실상 유학에 기반을 두고 자신의 철학을 전개하고, 이를 통해서 서양의 논의를 수용하려고 노력한 마지막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의 정치적 동지면서 동시에 학문적 동반자이기도 한 양계초(梁啓超)는 일본으로 망명한 이후 일본을 통해 수입된 서양사상에 강유위보다 더 많이 경도되었으며, 이후의 학문 세대들은 서양의 학문에 훨씬 더 개방적이고 유학을 배척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그의 사상은 대동서를 통해 동아시아와 서양의 유토피아 사상을 결집한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동아시아의 전통적 지식의 세대의 마지막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예비한 인물의 전형으로서 그 의의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강좌중국사Ⅴ』, 지식산업사, 1989

-------------------, 강좌중국사Ⅵ』, 지식산업사, 1989

엄복, 천연론(양일모 등 옮김), 소명출판, 2008

조경란, 중국 근현대 사상의 모색, 삼인, 2003

코지마 신지(小島晋治마루야마 마츠유키(丸山松幸), 중국근현대사(박원호 옮김), 지식산업사, 1998

풍우란, 중국철학사 하(박성규 옮김), 까치,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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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마음의 철학 숙제>

 

   철학에서는 인간의 존재론적 위치가 언제나 문제가 된다. 인간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그 각각의 속성은 무엇이며 인간 내부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 인간과 다른 동물들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리고 그 차이는 위계를 결정할 정도로 우월한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이런 문제에 대한 답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일원론이며, 다른 하나는 이원론이다. 인간은 오직 정신적인 존재라고 하거나 또는 물질적인 존재라고만 말할 때는 일원론적인 입장에 서게 되며, 정신과 물질이 결합되어 있는 존재라고 말할 때 이원론이 된다. 철학사를 살펴보았을 때 이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긴 했지만, 그 입장들 모두를 이 두 입장이 여러 가지로 변형된 형태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자연과학이 발달한 이후, 인간의 존재론적 위치와 그 속성에 대한 논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포착되지 않는 존재들은 미신과 독단으로 간주되어 존재에 대해 논하는 철학의 영역에서 더 이상 자리를 잡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기존에 영혼의 기능이라고 생각했던 여러 기능들이 물리적 기능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특별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위치에는 의문부호가 찍힐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우연히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존재에 불과하며, 단순히 다른 종들과 수많은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세기말의 과학기술은 여기에 논쟁적인 의문을 하나 더 덧붙인다. 과연 인간의 존재가 그 정도라면, 그와 비슷한 혹은 똑같은 존재를 인간의 손으로 창조할 수 있지는 않을까? 물리적 배열만 동일하게 갖춘다면, 우리가 충분히 인간으로서 인정할만한 존재들이 탄생하지는 않을까? 또한 물리적으로 동일하지 않더라도(즉 세포로 이루어져있지 않더라도 또는 유기체가 아니라 하더라도), 적절한 기능과 프로그램을 통해서 인간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기계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마치 영화 터미네이터에 나오는 것과 같은 존재들. 그리고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인간은 어떤 것들을 더 개발해야하며 또 해명해야 하는가? 이런 기계를 실제로 구현해내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적어도 이런 의문에 대한 이론적인 해답은 이미 나온 듯하다. 단정적으로 말해서 이런 기계는 가능하며, 또한 그들을 인간과 다른 - 열등한 존재라고 보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현재까지는) 없다.

이러한 발상의 기본적인 전제는 형이상학적 유물론이다. 만약 이 세계에 물질 이외에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고, 인간의 능력 가운데 어떤 것들이 그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의 부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면, 기계는 영원히 인간과 비슷한 능력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인간이 그 다른 차원의 세계에 속하는 존재를 창조할 수 없으며, 기계란 물질적인 부분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가정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생각은 너무나 일반적이기 때문에 의문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또한 두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있어야 하는데, 차원 사이를 이동하거나 간섭할 수 있는 존재는 또한 어떤 존재인지 설명하는데에도 매우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이원론은 더 이상 설득력을 지니지 않는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적 유물론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으며, 이에 따르면 인간은 여러 물질로 구성된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 과정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결국 다양한 물질의 운동으로 환원될 수 있다.

전통적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간의 능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이성을 지목하였다. 이성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또 그 기능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이 합리적-논리적 추론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은 이 모든 의견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성을 추론 기능을 담당하는 영역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추론이란 다름아닌 계산이다. 그 계산의 대상이 숫자가 아닌 언어라는 점에서 복잡함이 가중될 뿐, 그 과정은 거의 동일하다. 이미 기계는 인간의 계산의 능력을 뛰어넘은 상태이다. 매체의 발달, 프로그래밍 기술의 발달로 이러한 계산은 그 영역을 더욱 다양하게 확대해 나가고 있다.

감정이나 의지 등 인간이 지니고 있다고 간주되는 다른 능력들도, 인간이 지니고 있는 신경체계를 분석함으로써 얼마든지 밝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외부로부터 아무런 자극이 없는 세계에 살고있는 사람에게, 과연 이성이나 감정 또는 의지가 생겨날 수 있을까? 인간의 모든 능력이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본유관념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질문에 .’ 라고 답해야 하겠지만, 이는 상식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특별한 자극이 없이는 별다른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일상적 의미에서든 엄밀한 의미에서든) 수많은 사람들을 관찰했을 때에도 사실에 부합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원인이 외부의 자극이며, 행동은 그 원인의 결과이다.

모든 인간들이 같은 자극에 다르게 반응한다고 말하며 그 원인이 사회나 제도 등 비자연과학적 요인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요인들은 특정한 자극에 특정한 자극을 보이게끔 하는 프로그램과 절차로 환원될 수 있다. 물론 이런 프로그램이 처음부터 주어져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교육 - 일종의 자기-프로그래밍 알고리즘을 통해 충분히 인간에 준하는 행동 또는 똑같은 행동을 보일 수 있다. 이는 마치 자동청소기가 처음에는 아무런 정보도 주어져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작동을 시키면 자신이 가진 감각기관을 이용하여 알아서 돌아다니며 청소를 하면서 특정한 집 구조에 알맞은 청소를 하는 과정과도 비슷하다. 이것과 인간이 공간을 지각하는 과정에 어떤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위와 같은 프로그래밍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의 감각체계를 분석해야 한다. 감각이란 모든 행동의 원인이다. 인간은 언제나 감각하고, 이를 통해 끊임없이 들어오는 정보를 쉬지 않고 분석하며 이에 대해 판단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이 일을 담당하는 가장 중요한 기관은 뇌와 신경체계이다. 인간의 행동은 신경체계에서 분비한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며, 그에서 벗어나는 움직임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탐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뇌를 분석하여 그 기능과 작동의 체계를 알아내는 일이다. 만약 이것을 모방할 수 있다면, 인간은 인간과 동일한 존재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유기체인가 혹은 금속과 전기선으로 이루어진 존재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이런 존재가 있는 세계는 얼마든지 상상이 가능하며, 또한 실제로 존재할 수도 있다는 논증이 아무런 모순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기계와 다르다는 여러 논증들은, 사실 인간이 기계와 다르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동어반복적인 성격을 다분하게 띈다. 이런 논증들은 필연적으로 기계는 인간과 같아질 수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또한 그 중요한 근거로 이성, 감정, 의지 등의 심리적, 내적 요소들이 동원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론적으로 자극과 반응, 그리고 특정한 자극과 특정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프로그램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환원이 가능하며, 실제로도 아주 초보적인 수준에서 인간의 흉내를 내는 것이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따라서 인간에게 남은 과제는, 더 이상 이들이 인간과 다르다(는 말로 위계를 낮추)는 억지를 부리지 않고 이들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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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황제들 - 모택동과 등소평 시대의 중국
해리슨 E. 솔즈베리 지음, 박월라.박병덕 옮김 / 다섯수레 / 199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2009년 중국연구 과제>

 

중국의 역사는 끝없는 교향시다. 무대 위에 나타났다 사라져간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소리를 역사에 새기고, 그것들이 어우러져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 모든 흔적이 악보 위에 글자로 남아서 뒷사람들에게 전해진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다시 사람과 만나 독특한 흐름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특히 그 가운데도 몸을 격정적으로 울려 큰 파장을 만들어내는 인물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평범한 사람들에 비하여 사람들이 더 많이 말하고, 바라보며, 연구의 대상이 된다. 그들은 후대에 자신을 남길 뿐만 아니라, 동시대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여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게 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온전히 중국 안의 모든 사람에게 공히 인정받는 인물을, 황제라고 칭한다.

해리슨 E. 솔즈베리가 이 책에 새로운 황제들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바로 이런 까닭일 것이다. 그 울림이 어떤 성격이냐에 상관없이, 모택동과 등소평은 당대의 중국 모든 사람의 삶에 자신의 영향을 미쳤던 사람이라는 점에서 황제이다. 단순히 이 책에 나오는 것처럼 이전에 전근대 사회의 왕족들이 살았던 궁에 들어가서 살았기 때문에 황제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니다. 황제는 그보다 조금 더 깊고 짙은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이다.

새로운 황제들은 모택동과 등소평을 중심으로, 그들에게 벌어진 사건을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여러 사건을 기술하여 보여주는 작업을 통해, 당시에 중국이 어떤 모습이었는가, 그리고 모택동과 등소평의 황제다운 모습이 어떤 식으로 중국의 역사, 자신들의 주변 인물, 그리고 그들과 같은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표현되었는가를 면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두 사람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기는 하지만, 서술된 양은 모택동에 대한 부분이 훨씬 많다. 이것은 그가 기존의 황제라는 상징에 더 걸맞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모습이란, 다름아닌 상시적인 대중동원을 통한 변혁의 추구이다. 이것은 그가 역사에 등장한 이후부터, 죽는 그 당시까지 모택동이 선호하고 정치하는 방법으로써 그의 행보에 항상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모택동은 결코 이런 동원방식을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에서 찾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가 선택하는 대중동원 방식은 중국의 혼란기, 혹은 왕조교체기에 보이는 전통적인 모습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보다 중국 역사에 훨씬 밝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의 사례를 훨씬 많이 접했고, 그것은 곧 중국에 맞는 방식으로 응용할 수 있는 수준을 명확히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은 마르크스-레닌처럼 혁명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들과 전혀 다른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수호지의 양산박을 닮은 기지를 만들고, 노동자가 아닌 농민을 자신과 동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주며 아주 중국적인 방식으로 포섭하였다. 마치 직접 농사를 지으며 풍년을 기원하는 왕같이. 집권 후에는 대중 앞에 단순히 대표자가 아닌 지도자, 영도자로서 자신을 나타냈다.

모택동과 그 시대, 그 지역을 같이 사는 사람들은 모두 중국인이었다. 바로 이것이, 그가 여러 부정적인 모습을 비추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요인이다. 전형적으로 중국의 민중들이 좋아했던 여러 왕조의 개창자들과 닮아있다. 그는 가난에서 벗어날 새로운 세계를 약속하였고, 자신은 그것을 추진할 수 있는 인물임을 강력하게 피력하였다.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정책을 제시하였고, 실천을 유도함으로써 새로운 세계가 실현될 수 있으리라는 꿈을 심어주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그것은 당대의 중국인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어차피 지금 살고 있는 세계가 아무런 희망도 제시해줄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가 상징하는 것과 그의 실제 모습이 많이 떨어진 장면을 자주 보여준다. 특히나 인민공화국의 내전 승리 이후 최고 권력자로 우뚝 서는 과정은 그 괴리를 더욱 증폭시킨다. 하지만 이것은 모택동의 결점이 아닌 황제의 이면으로서 묘사될 수 있다. 황제는 자신의 비전을 표방하는 것 못지 않게, 그것에 어긋나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권력을 놓고 게임을 벌여야 했다.

이 과정에서 보여지는 황제의 모습은, 역사에서 보이는 권력암투의 술수다. 그는 자신의 후계자라고 지정했던 사람을 정적으로 몰아 축출하고, 때로는 죽였다. 팽덕회, 유소기, 임표가 그렇게 황제의 권위를 강변하는 도구로서 전락했다. 문화대혁명은 근대적인 동원체제를 적극적으로 이용함으로써, 대중을 권력암투의 술수로서 끌어들이는 요소로서 이용하였다. 이는 매우 성공적이었고, 그는 엄청난 실패를 겪고도 다시 등장할 수 있었다.

이 경계가 바로 모택동의 능력이자 한계이다. 모택동의 황제와 같은 모습, 특히 대중동원을 가장 강력한 무기로 삼는 면모는 마치 모든 왕조의 창업자들이 그러하듯이, 어떤 국가를 새로 여는데 매우 탁월한 능력으로 중요시된다. 하지만 만들어진 정치체제를 유지하는데는 가장 나쁜 능력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미 혼란기에 빠져있을 때는 혼란 속의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진보를 약속하는 것이 유능한 지도자로서의 모습이지만, 혼란기가 아닐 때는 의도적으로 혼란을 만드는 것으로써 발전을 보여줄 수 밖에 없다면 그것은 발전이 아니라 제자리걸음일 것이다.

그리하여, 건국의 방식으로 그 이후를 도모하던 모택동은 점점 더 부정적인 면모를 드러낼 수 밖에 없었고, 결국에는 그의 방식은 중국 현대사에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이라는 큰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황제이기에 가능한 상처였고, 황제가 드러낸 상처이기에 더욱 더 깊게 사람들의 머리 속에 흔적이 남았다. 경제정책은 대약진운동으로써 실패가 드러났고, 대중동원 노선의 총체적인 문제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반성으로 부각되었다. 이는 모택동의 총체적인 실패를 의미하기도 한다.

안정과 발전의 책임은 등소평에게로 넘어간다. 모택동의 이념을 보수적으로 지키려는 사람들과, 안정과 발전의 원리에 대해 등소평 이상의 혁신을 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하는 중국을 유지해야 했고, 그것은 온전히 그의 재능이었다. 건국의 이념을 보수적으로 지키는 것이든, 거기에 총체적 혁신을 요구하는 것이든 안정과 발전이라는 말과는 근본적으로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쪽이든 사회의 여러 면에 혼란을 가져올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택동의 뒤를 사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등소평은 황제의 그늘에서 자신이 적통이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으며, 사람들은 그것을 인증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는 황제가 아닌 다른 사람과 동일한 위치에 있는 사람일 뿐이다. 그래서 대중으로부터 지도자로서 인정받을 수 없는 한 개인에 불과한 존재로 떨어지고 만다. 그것은 또 다른 혼란을 의미한다.

이 균형을 맞추는 것이 등소평의 고민이다. 또한 등소평 이후에 중국을 담당하는 모든 사람들의 문제이다. 이 화두가 모택동이 죽은 뒤의 중국을 만들어온 가장 큰 힘이며 동시에 가장 큰 짐이기도 하다. 이 갈등의 폭발이 이 책의 대미를 장식한 천안문 사건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이 사건은 모택동의 그늘이었으며, 아직 그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준 사건이었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중국은 이 모든 사건이 쌓여 만들어졌다. 그리고 마치 모택동이 역사서의 중국적 사례들을 선례로 삼았던 것처럼, 전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사건을 사례로 삼아 앞으로의 새로운 중국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이것은 중국 앞에 놓여진 필연적인 과제이면서, 동시에 중국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예측을 할 수는 없더라도 가능성으로서의 중국을 바라보게 만드는 이유이다.

최근 중국에는 다시 모택동 열풍이 불고 있다. 등소평의 집권 이후 문화대혁명에 대한 반성과 뼈저린 참회가 이어지면서 한동안 모택동은 쉽게 입에 올릴 수 없는 대상이었다. 중국인 전체의 트라우마로서 아주 깊게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등소평과 그 이후 등소평이 내세웠던 미래에 대한 비판과 회의가 심각해지면서, 그 반대급부로서 모택동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이런 흐름은 최근에 개봉한 건국 60주년 기념 영화 建國大業을 보면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모택동으로, 대장정부터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까지 다루고 있다. 정확하게 모택동이 건국의 주인공으로서 긍정적인 대중동원정치를 시행한 시기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중국을 이해하는 데 모택동과 초기 공산당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임을 시사하고 있다. 왜 현재와 같은 중국의 상황이 중국인들로 하여금 모택동을 떠올리게 만드는지, 모택동을 떠올리며 여기에 이입하는 사람들의 욕망과 비전은 무엇인지, 그것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그 상황은 모택동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단순히 모택동의 정치, 사회사상이나 철학의 체계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이런 경향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이 모택동의 전부를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인 각자는, 사실 모택동을 통해서 다른 어떤 것을 떠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보다 행복했다고 느꼈던 때, 그 구체적인 장면과 순간을 추억으로서 떠올리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미 사망한 지도자에 대한 범국민적인 지지는 좀처럼 생기기 힘들 것이다. 사람들의 기억은 구체적인 수준에서 재현되는 것이지, 사상과 철학을 논하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황제들에 나오는 모택동에 대한 기억, 그리고 모택동의 시대에 대한 기억이 아마도 중국인들이 떠올리는 구체적인 장면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 책은 인터뷰와 대담을 구성하여 이루어진 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러 계층의 중국인들이 기억하는 모택동의 원형적인 모습에 접근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준다. 모택동에 대한 기억은, 모택동이 세워놓은 추상적인 체계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이 책에 나온 여러 장면들처럼 단편적이지만 핵심을 반영한 사건에 대한 각인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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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일본연구 과제>

 

 

1. 서론 : 메이지 유신 전후 시기의 사상사적 중요성

 

동아시아 세계, 즉 한국과 일본, 중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근대란 언제나 뜨거운 화두이다. 이것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느냐에 따라서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루기도 하고, 이것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논쟁한다. 이것은 아직도 끝나지 않는 논쟁이다.

더구나, 다른 식민지화된 세계가 그렇듯이, 동아시아 3국도 마찬가지로 그냥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국가적인 규모의 전쟁을 치르기도 하였고, 때로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개항을 요구당하기도 하였다. 이런 근대의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구시대적인 가치관에 매달린 사람도 있었고,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을 창출해내기 위해 노력한 사람도 있었다. 또한 민중적인 지지에 기반해 전국가적인 저항을 불러오기도 했다. 이처럼 근대가 동아시아 세계에 가져다준 충격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그것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규정하는 중요한 축이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메이지 유신은 주목할만하다. 이 사건은 일본이 중세적인 봉건 국가에서 근대적인 국가로 나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정치적인 변화, 새로운 기술의 도입, 생산을 시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구체적인 것들보다도 메이지 유신이 중요한 더 큰 이유는,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양의 근대적인 사상을 성공적으로 수용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유일하게, 더 나아가서는 유럽 이외의 세계에서는 유일하게 열강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었다. 또한 세계대전의 주역으로서 세계사에 등장할 만큼 성장하였고, 이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처음부터 새롭게 대면한 사상에 빠르게 적응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지식인들도 한국이나 중국의 경우처럼, 자신들의 문화가 우월하다는 생각에 빠져있었다. 쇄국정책을 펼친 시기도 있었고, 결국엔 그 결과로서 무력하게 개항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 개항에 대한 반성을 통해 그들은 주체적으로 유신에 성공하게 되며, 근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에 이르기까지의 사상적인 여정은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서양의 근대 사상에 대한 일본 지식인들의 반응은 그만큼 다양하고, 또 그것을 교류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사상적으로 때로는 정치적으로 많은 충돌을 겪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충돌을 겪었다는 것만으로는 메이지 유신만의 독특한 특징, 즉 근대를 받아들인과정이 설명되지 않는다. 이것은 당대의 지식인들이 실제로 서양의 문물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면밀히 살펴보고, 이런 시각들이 당시에 어떤 사상적인 지형도를 그려냈는지, 그리고 이들이 각각 당대의 정치세력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일본 지식인들의 이러한 반응을 쇄국/개국, 경막/토막, 국권/민권이라는 대립주제들로 나누어 볼 것이다. 이런 주제들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이 세 가지 대립항들이 사상적·정치적 충돌을 일으켰던 주요 주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주제들에 대한 의견을 여러 가지로 조합해 볼 때, 당시의 담론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쇄국형 존황양이론’, ‘친막부형 존황양이론’, ‘반막부형 존황양이론’, ‘전면적 수용이 바로 그것이다.

 

2. 문화적 보수주의의 등장 : 쇄국형 존황양이론

 

우선 문화적 보수주의의 등장에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는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정책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쇄국형 존황양이론이란, 결국 당시의 쇄국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서양 문물의 유입을 원천적으로 막거나 극히 일부만 받아들이자는 정치적 견해로 흐르기 때문이다.

도쿠가와 막부는 기본적으로 문호를 개방하지 않는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대신에 큐슈 지방에서 중국과 네덜란드, 조선을 상대로 교역하는 것만을 허가했다. 도쿠가와 막부를 포함하여 일본 전체가 외국과 교통할 수 있는 통로는 이 곳 한 곳 뿐이었다. 그나마도 네덜란드를 통해서 유입되는 여러 서양사상 서적들의 경우에는 출판을 금지당하거나 실용서적에 한해서만 번역이 허용되었다. 따라서 도쿠가와 시기에는 서양의 문물이 일본 전체로 흘러들어갈 가능성이 매우 적었다.

하지만 1700년대 후반 이후 동아시아 세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서유럽-미국의 국가들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제일 처음 일본에 다가온 것은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북해도 지역에 관심을 가지면서 1778년에 처음으로 통상을 요구하였는데, 일본은 이를 거절하였다. 하지만 1792년과 1804년 재차 교역을 요구하였고, 다시 거절당하자 돌아가는 길에 일본의 에조지蝦夷地 지역을 공격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1810년대에 들어서는 영국의 함선이 교역을 요구하고 사쓰마 번 등에 상륙하였다.

이에 따라 외국 세력의 출현에 대한 위기의식이 확산되었다. 서유럽-미국 세력의 이런 위협적인 모습에 대해, 여기에 대항하고 방비를 갖추며 문호를 열어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가장 즉각적이고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2.1. 미토학파水戶學派

 

미토학파는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인 미토번水戶藩을 중심으로 활동한 한 무리의 학자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들은 단지 개항기에만 활동했던 것은 아니다.

미토학파가 중국의 史記를 본딴 일본의 역사인 大日本史를 편찬하기 위해 학자들을 모아 조직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를 시도한 사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손자이면서 미토번의 2대 번주였던 도쿠가와 미쓰쿠니德川光國. 그는 자신의 영지에 정통 주자학을 보급하려고 애썼다. 일본의 역사를 편찬하려고 시도한 것도 이러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또한 명나라의 학자에게 편찬의 감수를 맡기기도 하였다.

이런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일본만의 독특한 역사관, 즉 일본식 화이론이 발생했다는 점을 주목해야한다. 주자학의 체계에서 내세우는 세계의 중심을 중국에서 일본으로 대체함으로써, 자신들의 천황을 천자로서 간주하고, 일본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문명국으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이 탄생한 것이다. 이런 작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일본의 문물에 대해 연구하는 움직임, 즉 국학國學운동을 주도한 것도 미토학파의 업적이다.

이것은 미토학파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미토학파는 태생에서부터 주자학을 연구하는 집단이었고, 당시 일본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의 정초를 놓은 학파인 것이다. 미토학파의 이러한 성격은 개항을 전후한 시기로 내려올 때까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자연스럽게 (일본화된) 주자학을 고수하는 보수적인 세계관을 주장할 수 밖에 없었다.

 

2.2. 아이자와 세시사이會澤正志齋의 국체론國體論

 

막부 말기의 미토학파를 특히 후기後期 미토학파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아이자와 세시사이會澤正志齋(=아이자와 야스지會澤安)는 후기 미토학파를 이끌던 인물이다. 그는 미토학파에서 大日本史를 편찬하던 유학자에게 사사를 받았으며, 일본화된 주자학에 매우 정통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新論에서 국체론國體論이라는 독특한 견해를 전개한다. 그의 국체론은 이후 등장하는 서양에 대한 다양한 견해의 원천이 되었으며,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되어 이후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동시에 미토학파를 포함하여 현재 일본을 지탱하는 세계관을 고수하는 이들에게 철학적인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아이자와 세시사이가 이야기하는 국체란, 지금의 일본을 만든 천황과 그를 충성과 효도로서 섬기는 관계의 총체를 뜻한다. 또한, 라는 말은 그 이전부터 불교와 주자학에서 본질, 근본, 원리, 원인 등을 뜻하는 말로써 널리 쓰여온 말이다. 다시 말해, 그는 현재 일본의 정치체제와 자신들이 물려받은 문화적유산을 일본을 규정할 수 있게끔 해주는 본질로서 받아들이고, 그것을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 것이다.

이 실천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지는 것은, 주자학에서 이야기하는 정명正名, 즉 자신의 직분에 알맞은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국체론에서는 각 직분에 대해서 명확하게 그 임무가 주어지고, 그것을 실천할 것을 역설한다. 그가 말하는 직분은 당시의 신분제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그 뜻을 묻는 천자, 천자의 뜻을 대리해서 정치를 담당하는 막부, 막부가 시행하는 정책의 행정적인 실무를 담당하는 지방의 다이묘, 그리고 물자의 생산과 노동을 담당하는 농민 계급이 그것이다.

그런데 아이자와의 이런 견해는 묘한 이중성을 띄고 있다. 그 이유는, 이것이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시 막번체제의 신분제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그의 사상을 접한다면, 이것은 당연히 당시의 정치 및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해주는 사상적 근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반면에 막번체제에 비판적인 시선으로 이 글을 읽는다면, 현재 막부에 대해 정치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사상적인 기반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의 국체론은 실제로 당대 지식인 사이에서 이런 두 가지 방향으로 모두 읽히는데, 이것은 이 이후의 지식인들에게 다양한 형식으로 영향을 끼치게 된다.

 

3. 첫 번째 분기점, 아편전쟁

 

3.1. 아편전쟁과 일본

 

아편전쟁은 1840년 청나라와 영국이 벌인 전쟁이다. 동아시아 세계의 맹주를 자처해오던 중국은 이 전쟁에서 영국에게 무참하게 패배하였고, 막대한 전쟁배상금과 강제개항이라는 굴욕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2차 아편전쟁에서는 수도가 공격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이 사건은 전쟁당사자인 청나라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세계 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현실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또 그렇게 간주되던 나라가 서양세력의 일개 군대에게 패배한 것은, 일본과 한국 각각에게 엄청난 위기의식을 심어주었다. , 우리도 저들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 승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런 전쟁이 실제로 벌어질 수 있는 일임을 여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쇄국과 제한적 개방을 고수하던 일본 정부와 지식인들은 네덜란드의 상인을 통해 아편전쟁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무조건 쇄국을 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서유럽-미국 세력에 대해 조금 더 현실적인 안목을 가지려고 시도했다. 이런 변화의 일환으로서 신수급여령薪水給與令이 시행되었다. 이것은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외국의 함대를 공격하는 대신 물과 연료를 내어주는 것을 허가한 정책이었다.

하지만 이것 또한 개항은 아니었고, 막부는 오히려 에도 주변 해역은 방비를 강화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다른 한편으로 막부 주변의 방비만 강화하는 것에 대한 불만세력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현재의 위기상황을 막부의 위기에서 일본 전체의 위기로 인식하는 관점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두 가지를 암시한다. 하나는, 아이자와 세시사이의 국체론의 연장선상에서, 일본 전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는 사고관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쇄국을 유지하던 청나라의 패배를 보면서, 더 이상 쇄국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일본을 지킬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것을 뜻한다.

 

3.2. 양이를 위한 개방 : 친막부형 존황양이론과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

 

이런 전환을 잘 보여주는 인물은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이다. 그는 주자학자였고, 그 때문에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쇄국과 체제유지를 주장했다. 하지만 주자학을 공부하는 동안에도 분야를 가리지 않는 다양한 학문분야에 관심을 보였으며, 그 가운데는 서양의 학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개항 직전에 자신의 눈으로 서양의 군함을 직접 목격한 뒤, ‘서양의 것을 배워 서양을 공격하자.’는 견해를 갖게 된다.

그가 내세우는 목표는 간단하게 말해 동양도덕, 서양예술의 공존이다. 여전히 천하의 보편적인 원리로서는 주자학의 견해를 취했지만, 그것을 현실 속에서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서는 철저하게 힘과 세력에 의탁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가 주장하는 힘이란 곧 군사력이었다. 이러한 군사력이 앞선다는 것은 현재 일본에서 벌어지는 서유럽-미국 열강들의 국지적인 도발과 분쟁, 그리고 더 크게는 아편전쟁에서 너무도 여실히 증명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배워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입장을 토대로, 그는 군사기술의 도입과 학습을 적극적으로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을 수입하는 이유는 우리의 정신적인 가치관과 체계를 지켜내기 위한 것이다. 그는 실제로 막부로부터 해양 방어의 임무를 부여받은 마츠다이松代번의 번주 밑에서 일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해양방어를 위한 여덟 가지 대책(海防八策)을 제시했는데, 여기에는 서양으로의 자원유출을 막고, 서양의 해양군사기술을 배워 우리도 그와 비슷한 수준의 전력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일본은 결코 청나라와 같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되었다.

또한 이런 기술 학습에 필요한 여러 제반 조건들도 같이 체득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특히 서양 국가의 언어를 학습하는 것과, 기술과 관련된 책을 번역해 출판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도 실제로 여러 나라의 말을 할 줄 알았으며, 실제로 출판 사업에 뛰어들어 이런 기술이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될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양이, 즉 오랑캐를 쫓아내고 일본의 전통을 수호한다는 인식 아래에서 이루어진 발언일 뿐, 서양사상에 대한 전면적인 수용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특히나 사쿠마 쇼잔의 경우, 군사 기술에 대한 이런 열렬한 관심에 비해서, 정치나 사회사상 등에는 문외한이거나 관심이 없었음을 고려할 때는 더욱 그 목적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4. 두 번째 분기점, 개항과 반응의 분화

 

하지만 이런 구상은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개항을 요구하고, 1854년 막부가 굴복함에 따라 그 방향을 달리 전개하게 된다. 앞에서 사쿠마 쇼잔이 제시했던 바와는 달리, 막부는 개항이라는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강제로 개항을 당하게 된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받아들여야 할 것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을 고르는 선택권이 일본에게 더 이상 주어지지 않음을 뜻한다. 자의든 타의든 일본은 세계를 향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개방해야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개항은 이전까지 제한적으로 수용되거나 몇몇 지식인층에서만 받아들여지던 근대적인 문물이 본격적으로 일본 안으로 침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불평등조약을 통해서 세계적인 규모의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편입되었고, 강대국들의 시장으로 변해갔다. 이것은 단순히 지식인들의 지적인 생활 뿐만 아니라, 일본 전체의 경제 전반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다 주었고, 일본인들의 삶 전체를 커다랗게 바꿔놓았다. 따라서 개항은 매우 신선한 사건이며, 동시에 충격이었다. 많은 지식인들이 이 이후의 추이를 면밀히 지켜보았고,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였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문제가 된 것이 있었는데, 바로 막부의 지위와 권한, 역할에 대한 문제였다.

 

4.1. 개항과 막부의 위치

 

개항 직전에 막부의 권위를 결정적으로 떨어뜨린 사건이 있었다. 당시 막부의 실세였던 로주老中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는 개항을 전후한 대외정책을 어떻게 전개해야할지 각 지역 다이묘大名들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그리고 조정에도 이것을 보고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막부가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막부가 해야할 책임을 전가하고 소임을 다 하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막부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켰다. 또한 여러 다이묘들이 막부측에서 정책자문을 구해온 것을 계기로 막부와 동등한 정치적 위상을 차지하려고 시도하였으며, 또한 천황이라는 새로운 정치주체가 사회에 전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따라서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막부의 기능과 역할에 대하여 회의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개항 전후에 보여진 막부의 무능력에 대해 비판하며, 조정을 보필한다는 막부의 소임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되물었다. 또한 막부가 자신들의 보위에만 급급할 뿐 지방의 번들에게는 아무런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해주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했다. 이런 지방의 번들은 열강들의 도발에 수시로 노출되어 있었고, 크고 작은 분쟁으로 인해 엄청난 인명피해를 보고 있는 상태였다.

특히 바닷가에 있어 열강 군대와 자주 접촉하는 사쓰마薩摩, 조슈長州, 도사土佐, 히젠肥前번의 불만이 높았다. 또한 이들은 공통적으로 막부의 중앙관직에 참여할 수 없는 지역인 도자마번外樣藩들이었다. 도자마번들의 불만은 막부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축적이 되어 왔으며, 따라서 이 지역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운동은 곧바로 반막부 운동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이 바로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이 이 곳에서 등장한다.

 

4.2. 메이지 유신의 사상 : 반막부형 존황양이론과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완연한 모습은 아니지만, 메이지 유신을 정당화해주는 사상적인 기반을 제공해준 이는 요시다 쇼인이다. 그는 사쿠마 쇼잔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또한 그와 정치적인 행보를 거의 같이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그도 막번체제 자체는 옹호하면서, 군사기술 등의 실용적인 서양의 학문분야를 받아들이는 데 주력하였다. 또한 현재 존재하는 정치주체 가운데 일본의 인민들을 가장 잘 결합시킬 수 있는 상징으로서 천황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천황제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국민통합을 위한 사상적인 기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입장은 막부가 천황의 칙허 없이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은 1854년을 기점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 사건을 조정의 허락이 있어야 될 사항을 막부가 마음대로 결정한 월권행위라고 간주하였다. , 다시 말해 천황을 제쳐놓고 막부가 일본의 군주 역할을 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세계관에서 통용되는 상식에 어긋나는 행위였으며, 따라서 천황으로부터 부여받은 정이대장군이라는 호칭에 어울리는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 막부가 막부일 수 있는 이유는 그 뒤에 배경으로서 조정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부는 더 이상 이런 역할을 자임하지 않으려 하고, 따라서 이런 식으로는 정치에 관여할 자격조차 사라지는 것이다.

더군다나 막부는 조정을 받들어 가장 열렬히 서양세력에 대해 저항하고 일본을 지켜야 될 위치에 서있는 정치주체임에도 불구하고, 굴욕적인 화친조약을 맺었다는 것은 그들과 더 이상 싸울 의지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이 바로 요시다 쇼인, 그리고 그를 포함한 많은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막부가 실망감을 안겨줄 수 밖에 없었던 지점이다.

또한, 막부의 존폐를 거론한다는 것이 서양세력을 쫓아낸다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이전에는 성리학 체계를 수호하는 한에서 서양세력에 대해 생각하고 바라보았다. 따라서 천황과 막부와 다이묘, 그리고 사농공상의 계급이 확실하게 나누어져 있는 봉건적인 신분질서 또한 수호해야 할 요소였다. 하지만 요시다 쇼인에 와서는 진정한 존황尊皇, 즉 천황 중심의 정치체제를 꿈꾸는 것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쇼인이 직접 그 체계를 제공해주는 것은 아니더라도, 쇼인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서 충분히 도출될 수 있는 사고관이다.

 

5. 세 번째 분기점, 메이지 유신과 사상의 전환

 

위에서 언급한 도자마번을 중심으로 전개된 토막운동은 막부의 잇따른 실책과 서양세력의 침략 앞에서 보여주는 무력함 때문에 큰 지지를 얻었다. 결국 이들 번은 사카모토 료마를 매개로 동맹을 맺고 막부를 압박, 막부를 실각시키는 데 성공한다. 유신세력은 천황에게 접근하여 측근 자리를 장악하고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대정봉환大政奉還을 통해 막부의 영지와 정이대장군 관직을 몰수하고 천황이 직접 정치에 관여할 것을 선언하는데, 이것이 바로 메이지 유신이다.

이렇게 막부를 해체시키고 난 뒤, 천황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기 위한 정치적이고 제도적인 작업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시행된 개혁들은 근대적인 성격을 띈다. 판적봉환版籍奉還을 통해 각 번주들의 토지를 모두 천황에게 귀속시켰고, 폐번치현廢藩置縣을 통해 일본 전체의 행정을 장악하였다. 이 두 개혁은 각 지역의 봉건적인 토지소유를 없애고, 근대적인 토지소유제로 나아갔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또한 징병제 실시, 사족士族의 특권 폐지, 신분에 따른 혼인관계 제안 폐지 등을 추진하였고, 모든 평민에게 성을 사용하도록 허용하였다. 이런 것들은 봉건적인 신분질서를 깨는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부의 형태가 고대 율령제에서 모티브를 얻은 중앙집권적 체계였을 뿐만 아니라, 천황의 절대성을 부각시키고 그것을 신성화시키려했다는 점에서 완전히 근대로 이행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메이지 정부를 장악한 사람들 대부분이 하급 무사계급으로, 여전히 의식적으로는 봉건적 태도를 벗어버리지 못하였다. 또한 언론과 출판을 통제하고 집회와 강연을 금지하는 등의 통제정책은 메이지 정부의 전제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5.1. 새로운 견해의 등장 :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새롭게 등장한 메이지 정부가 근대적인 모습과 전근대적인 모습이 혼재된 채 개혁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정 정도는 그들이 뿌리를 두고 있던 사상, 즉 변형된 국체론을 모태로 삼은 존황양이적인 사고관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논의를 넘어서서 서양을 대하는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이 당시 지식인 사회의 과제로 떠올랐다. 바로 서양사상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자는 논의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런 조류를 대표하는 사람이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이다. 그는 서양이 지금같이 강력해진 이유는 그들의 사상과 철학 때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정치적인 자유주의, 민족국가의 성립, 신분제 철폐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이런 변혁을 위해서는 현재 국체國體로서 떠받들고 있는 주자학적인 세계관을 버리고, 서양의 사상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생존하려면,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메이지 정부의 실세들과 회동하여 구체적인 미래 일본의 모습에 대해서 논하기도 하였다.

 

5.1.1. 후쿠자와 유키치와 계몽주의자들 : 메이로쿠샤明六社

 

이런 사상과 철학을 소개하기 위해, 그는 그의 경험을 직접 저술한 저서들을 지속적으로 출판하였다. 특히 그가 쓴 책인 西洋事情의 경우, 당대 지식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또한 초기 저서에서는 서유럽-미국의 정치이론에서 보이는 이상적인 모델을 신뢰하였고, 그것이 구현되어야 온전히 근대적인 국가로 탈바꿈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의 저서 學問のすすめ은 시작 부분에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 라고 천명함으로써 공개적으로 신분제를 비판하면서 거부하고 있다.

또한 이런 서양사상을 전문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모임인 메이로쿠샤明六社를 조직하고, 여기에서 월간 明六雜誌를 간행하여 메이로쿠샤의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를 꾸준히 발표하였다. 이 잡지는 매호 3000권이 넘게 발행되어, 당시 지식인층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메이로쿠샤의 회원들이 번역하고 출판하는 책은 일본의 계몽사상을 대표하는 책으로서 자리매김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신학문을 교육할 수 있는 상설 학교도 설립하였는데, 바로 게이오의숙慶應義塾이다. 이 곳은 일본의 청년들 뿐만 아니라, 김옥균이나 유길준 등의 조선인 유학생들도 있었다. 이들과의 인연으로 인해 후쿠자와 유키치는 한국의 개화파를 사상적·물질적으로 지원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실제로도 일정 정도 이상 관여하였다.

그가 주로 의지하고 있는 사상은 프랑스의 계몽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영국의 민주주의 사상이었다. 민주주의 혁명으로서 가장 극적이고 또한 가능성 있는 혁명의 모델로서 제시된 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J.S.Mill자유론,대의정부론,공리주의등이 번역되어 출판되었고 이것은 민주주의와 계몽주의에 대한 인식의 기초가 되었다.

 

5.1.2. 군국주의자 후쿠자와 유키치

 

하지만 후쿠자와 유키치 본인은 강력한 국가에 대한 열망이 강한 나머지, 근대적인 국가의 필수 조건인 대중에 의한 정부구성에는 유보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대중들에게 정치적인 권리를 쥐어주었을 경우, 국가가 정치적으로 분열하여 혼란만 초래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직은 인민 전체에게 그런 권리를 쥐어줄 단계는 아니라는 입장을 보여줌으로써, 일본에서 실시될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서유럽-미국 열강들이 아시아에서 부리는 횡포를 직접 목격하고, 그들이 세웠던 정치체제의 이상적 모델에 대한 희망을 버리게 된다. 대신 결국 국제정치는 힘이 지배의 원천이라는 입장을 내세우며, 이상을 좌절시키고 현실을 앞세우는 정치관을 보여준다. 평등하게 적용되는 줄 알았던 국제법이 결국에는 힘의 크기에 의해 좌우되는 것을 너무나도 많이 목격한 것이다. 또한 자신이 지원했던 조선의 혁명이 실패한 뒤에는, 동아시아 세계는 현재 국제정세에 주체적으로 적응할 수 없으므로 일본은 동아시아 세계를 탈피해 유럽의 반열에 들어야 한다는 주장, 즉 탈아론脫亞論를 전개하였다. 이것은 후에 일본 군국주의의 사상적 토대가 되기도 한다.

 

5.2. 진정한 근대란 무엇인가? : 자유민권운동과 나카에 초민中江兆民

 

결국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서서히 군국주의적인 길을 걷게 된다. 그것은 당시의 국제정세가 미친 영향, 그리고 이 광경을 바라보던 많은 지식인들의 반응 등 여러 가지가 얽혀있다. 하지만 진정한 근대사상의 정점은, 바로 민주주의적인 정치체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메이지 유신은 근대에 미처 다다르지 못한 근대화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미 하층민중계층을 중심으로 서서히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이것은 계몽사상의 확산에 힘입은 바가 크다. 또한, 유신 이전과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개혁의 한 부분이기도 했다. 보통선거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진정한 근대국가라는 신념을 가진 지식인들은 당시 극심한 경제혼란 속에서 다른 세계를 열망하는 광범위한 하층민과 결합하였고, 변혁을 향한 또 다른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것은 공식적인 요구사항으로서 등장하였고, 이 운동을 자유민권운동이라고 한다.

 

5.2.1. 자유민권운동의 시작

 

서양 사상을 전폭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은, 메이지 유신 이후 자유민권운동에서도 이어졌다. 자유민권운동이란, 다름아닌 서양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정착이면서 동시에 민주주의 사상의 정착이기도 하다. 또한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전제적인 성격을 점점 강하게 띄어가고 있던 메이지 정부에 대한 민중적인 대항이기도 했다.

자유민권운동은 메이지 7년 민선의원설립건백을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 보통선거를 실시해 뽑은 인민의 대표로 의원을 구성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초기 자유민권운동은 당대에 실각한 정치인들과 결합했다는 점, 봉건적인 사고관을 다 버리지 못한 사족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민권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것은, 그만큼 근대적인 사고관이 민중계층 및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반증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통해 진정한 혁명적 민주주의의 발상이 등장하고, 이것은 메이지 유신 전후 시기의 중대한 사상적 의의를 띈다고 할 수 있다.

 

5.2.2. 나카에 초민의 사상

 

나카에 초민中江兆民은 이 운동을 대표하는 사상가이다. 그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번역한 민약론民約論을 출판해 자유민권사상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이후 민권운동과 관련된 활발한 언론활동을 통해 자유민권사상을 알리는 데 주력했으며, 자유·인민주권·사회계약설 등을 일본 내에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루소의 사회구성이론을 따라서, 모든 인간은 천부인권을 가지고 태어나며, 그것을 옹호하기 위해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라는 서양의 사회계약론적 주장을 일본에 전파하였다. 그리고 서양의 사회계약론에서 주장하는 저항권 역시 일본의 인민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또한 천황제를 위협하는 공화정을 지향한 것도 큰 특징이다. 따라서 그는 전제적인 메이지 정부에 크게 반대하였다.

이와 더불어서 민주주의적인 방법을 통해 이룰 세계의 평화에 대해서도 골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三醉人經綸問答은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확고한 견해 못지 않게 세계평화에 대한 고민 또한 등장한다. 그것은 이 책에 등장하는 세 인물의 성격 배치(평화주의자, 중간, 호전적인 정복주의자)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칸트와 루소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론과 세계평화에 대한 구상을 타인의 입을 빌려 설명하고, 그것에 대해 저서 내의 다른 두 청자에게 동의와 협조를 구한다. 그가 보여주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민주제를 실시하여 전쟁으로부터 벗어나고, 두 번째 군비를 축소하는 것이다. 또한 이 뒤에 국경 자체를 소멸시키고 평화상태로 발전하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최고의 목적이다.

 

6. 결론을 대신하며 : 서양의 근대를 수용하는 일본의 독특함

 

일본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살펴볼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일본은 서양사상 수용에 매우 유연했다는 사실이다. 주자학적인 세계관에 대한 자신감에 넘쳐나서 쇄국을 단행했던 조선이나 한족이 아니면서도 중화주의에 물들어있어서 개혁에 실패한 청나라와는 달리, 근대적으로 변화하는 세계에 발빠르게 대처하여 근본적인 개혁을 이룩한 것이다. 이런 움직임을 거치면서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주체적으로 서양식 근대화에 성공한 국가가 되었고, 당당히 세계적인 열강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일본과 비교해보았을 때, 중국은 어땠던가? 자문화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해 쇄국을 한 출발은 일본과 동일했다. 하지만 그들은 2번에 걸친 아편전쟁에서 수도를 공격당하는 수모를 겪고 나서야 그 태도를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뀐 태도에 의해 진행한 개혁도 그저 군사기술을 받아들이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그나마도 자본의 부족과 낙후된 산업 등으로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지지부진했고, 관료들의 비개혁성과 부정부패는 여전히 심했다. 결국 개혁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고, 급기야 변방 중에도 변방이라고 생각했던 일본에게 1894년 패하는 결과로 돌아오고 말았다.

중국의 정부는 이때서야 단순히 군사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상과 철학에 대한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강유위, 양계초 등을 중심으로 입헌군주제를 골자로 하는 대대적인 개혁법안을 입법하려 했지만, 이것은 결국 왕실의 사사로운 이득에 의해 좌절된다. 이들은 일본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렇다면 한국은 어땠던가? 서양 세력이 처음 밀려들어올 당시, 지식인들에게서 가장 많은 호응을 얻었던 것은 가장 극렬한 문화적 보수주의, 위정척사세력이었다. 그들은 대원군의 집권에 환호하였고 쇄국정책에 지지를 보냈다. 동시대의 동아시아 3국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자생적인 민중운동을 진압하였고, 그것을 옳은 것이라고 간주하고 살았다. 대원군의 실각 이후에는, 한국보다 한발 앞서 준비한 일본에게 땅을 전쟁터로 두 번이나 내어주었고, 결국에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동아시아 3국에게 근대로 이행하는 이 시기는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타자를 어떻게 수용하고 그것에 대응할 것인가가 당대의 화두로 떠오른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은 그 시기에, 그것이 정치적인 이유가 되었건 우연한 이유가 되었건 근대를 한국이나 중국에 비해 다소 유연하게 수용하였고 그것을 짧은 시간 안에 소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것은 한국과 중국이 하지 못한 일을 해낸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일본의 근대화만이 가지고 있는 특질이다.

지금은 세계질서가 미국 중심의 일원적인 체제에서 다각적인 체제로 변화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때에, 우리는 이 시기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 전후의 일본의 변화양상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모범이 될 만한 것이다.

 

 

*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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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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