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학기 중국현대철학연습 발표문>
아편전쟁(1,2차 중영전쟁)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근대의 기점이 되는 중요한 사건이다.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전쟁을 전후해서 중국과 동아시아 세계는 본격적으로 전세계적 시장경제체제의 한 부분이 되었다. 반대로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이 사건은 중국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중화주의적 이념, 사회, 정치적 체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정치적 질서가 자리잡는 계기였다. 특히 사상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이념적 기반이었던 유학의 지위를 흔든 사건이었다. 서양의 사상에 비해 현실적인 힘이 없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정치, 사회적인 개혁 못지않게 사상적 대응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중국의 경우 전반적으로 기존의 이념을 고수하려는 성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당시의 권력자들 또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소수의 지식인들은 서양의 사상을 학습하거나 수용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이런 움직임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사건으로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과 양무운동(洋務運動), 그리고 변법운동(變法運動)을 꼽을 수 있다. 태평천국의 지도자 홍수전(洪秀全)은 기독교에 기반해 종교활동 및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양무운동은 기본적으로는 서양식 무기를 생산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됐지만, 그 무기를 다루게 될 인재를 양성하는 과정에서 서양의 사상이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소개되었다. 특히 국비 유학생 출신이며 사관학교 교사였던 엄복(嚴復)이 서양의 학술서적들을 많이 번역했다. 그 가운데 『천연론(天演論)』과 이를 통해 소개된 사회진화론은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변법운동을 대표하는 정치인인 강유위(康有爲)는 유학의 경전을 다른 시각에서 해석하고 그 안에 서양식 정치체제를 예비하는 내용이 담겨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따라서 이 세 사람의 생애와 사상은 서양의 사상에 대해 긍정적이었거나 수용하려는 태도를 취했던 당시 중국 지식인의 모습을 대표할만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홍수전과 엄복의 『천연론』, 강유위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당시 중국 지식인들의 문제의식과 그에 대해 제시한 해법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해보고자 한다.
1. 홍수전과 태평천국운동
(1) 홍수전과 배상제교(拜上帝敎)
홍수전은 객가(客家) 출신의 지식인으로, 14세 때 과거에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방황하던 와중에 중국인 선교용 개신교 책자인 『권세양언(權世良言)』을 접했다. 이 책자에는 예수보다는 유일신 여호와의 위엄과 능력, 죄악과 우상숭배에 대한 비난, 구원과 파멸의 극단적 대비를 강조하는 성경 구절이 많이 편집되어 있었다. 또한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과거에 응시하였다. 그러나 4번째 낙방 이후에는 더 이상 치지 않았다. 이 즈음 자신이 꿈에서 상제 즉 하느님을 보았고 ‘나의 둘째 아들, 예수의 동생이 되어 이 세상에 천국이 임하게 하라’는 메시지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교주가 되어 본격적으로 전도에 나섰다. 이 종교가 바로 배상제교이다. 태평천국운동의 태평천국이라는 말은 이 꿈에서 비롯된 것이다.
『권세양언』이라는 책자가 모태가 되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홍수전이 스스로 그리스도라고 선포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배상제교의 구체적인 실천적 조목은 개신교와 거의 일치했다. 이 시기에 주목할만한 것을 두 가지다. 하나는 효와 정직에 대한 강조, 살인·간음·사기 등에 대한 비난, 물질적인 것에 대한 금욕 등 전통적인 유학의 가르침에 합치하는 여러 덕목을 실천함으로써 천국에 이를 수 있다고 강조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개신교의 우상숭배 금지의 원칙 또한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중국의 민간신앙은 부정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홍수전은 전도에 나선 뒤에 공자의 위패를 부수는 행위를 저질렀는데, 이것이 반란을 모의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그는 초기 개종자들과 함께 처벌을 받았다.
홍수전이 처벌을 받는 기간 동안 배상제교의 조직은 정치적 성격이 강화됐다. 이는 배상제교의 교리에 현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이념인 유학을 우상숭배로 치부하고 부정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들의 종교적 실천은 곧 정치적 실천이었던 것이다. 이런 본격적인 변화를 주도한 사람은 양수청이다. 그는 광서성 출신의 숯가마 노동자였는데, 배상제교에 입회한 이후 주요 인물이 되었다. 홍수전은 출소한 이후 그를 비롯한 몇몇을 자신의 명령 즉 하느님의 명령을 집행하는 대리자로 인정했고, 따라서 그의 입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2) 태평천국운동의 전개와 결말
이런 충돌이 격화되자 청나라 조정은 이들을 탄압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1850년 홍수전은 양수청을 통해 광서성 지역 배상제교 교인들의 소집을 명하고, 이듬해 태평천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교인들을 구성하는 주요 계층은 광서성의 객가 집단, 광산과 불가마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었다. 이 과정에서 소집에 응한 모든 교인들의 재산을 배상제교 앞으로 귀속시키고 평등하게 나누었으며, 남녀가 모두 군사작전에 참여하는 등 개혁적인 모습을 보였다. 반면 군대의 편제는 전통적인 예법(주례)을 따랐다.
봉기 초기에는 제대로 된 무기조차 갖추지 못해, 태평천국군의 실제 전투력은 아주 열악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팔기와 녹영은 봉기 초반에 이들도 제대로 진압할 수도 없을 만큼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임칙서는 본격적인 임무수행도 하기 전에 사망하였고, 그 이후엔 제대로 된 군사지도자도 등장하지 않았다. 반면 태평천국군은 자신의 세력권 안에서 술·담배·아편·남녀의 교류를 금지하는 엄격한 금욕주의를 표방했고, 전족의 금지, 여성에 대한 관직의 허가, 변발폐지와 장발령 등을 선포했다. 특히 배상제교의 목표인 천국의 실현을 위해서는 경제적 평등이 매우 중요했는데, 이를 위해 귀족들의 재산을 배상제교 앞으로 귀속시키고 교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나눠주었다. 이 때문에 가난한 자작농과 소작농, 노동자들에게 환영받았다. 봉기군은 1853년 남경을 점령하고, 이 곳을 수도로 삼은 태평천국의 수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한다.
이들이 구상한 경제, 사회 정책의 구체적인 모습은 『천조전무제도』라는 책자를 통해서 확인해볼 수 있다. 태평천국운동은 기본적으로는 전통적인 예법에 기반해 전제군주적 정치체제의 모습은 유지하고자 했으며, 신분제도 고수하려 했다. 그러나 사유재산은 인정되지 않으며, 모든 생산물은 국가에 귀속된다. 이들은 각 개인의 필요에 따라 지출되며, 그 이상의 지출은 인정되지 않는다. 토지 또한 기본적으로 국가에 귀속된다. 단 자신이 실제로 농사를 짓는 사람이라면 국가는 그에게 토지를 할당하며, 다시 환수하지는 않는다.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천조전무제도』에서 볼 수 있는 태평천국운동의 지향점은 중앙집권적 전제군주를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정부가 모든 재화를 독점하고 균등하게 분배하는 제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이런 급진적인 정책과 유학의 부정 그리고 자신들에게서 재산을 빼앗아가는 행태들 때문에 청 조정를 비롯한 지배계층에게는 태평천국군이 아주 위험한 집단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이들을 막아야 할 조정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세태를 비판하고 현재의 질서를 수호하고자 하는 지배계층의 사람들은 반봉기집단을 조직하여 태평천국 세력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지켜내야 했다. 이들 가운데는 본격적으로 태평천국군에 대립하는 이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증국번(曾國藩)의 상군(湘軍)과 이홍장(李鴻章)의 회군(淮軍)이었다. 상군은 호남성의 사대부(紳士)들을 중심으로, 회군은 강소성의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집단이다. 이들은 조정을 대신해서 태평천국의 세력 확장을 막았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그 지역의 군사통제권을 공식적으로 획득했다.
또한 태평천국의 위기는 내부에서부터도 찾아왔다. 양수청은 홍수전을 넘어서 태평천국의 지도자 자리에 올라서려 했고, 그를 제외한 다른 초기 지도자들이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이는 유혈사태로 번져서, 1856년 양수청은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군사들과 함께 남경에서 숙청당했다. 또한 몇몇 초기 지도자들은 대오에서 이탈해 독자적인 군사행동에 들어갔지만 청의 군대에 괴멸당하는 등의 사건이 잇따라 일어났다. 결국 남경에 남은 지도자는 홍수전 한 사람 뿐이었고, 그는 이런 참혹한 사태를 목도한 뒤 광신적으로 바뀌어 정치적 업무에 거의 등을 돌리다시피 했다.
이 와중에도 홍수전의 조카인 홍인간(洪仁玕)을 중심으로 태평천국운동을 다시 일으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1858년 태평천국군은 상군을 상대로 한 전면전에서 크게 이겼다. 이 과정에서 홍인간은 서유럽과 미국의 외교관, 선교사들을 접촉하며 자신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줄 것을 여러 번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번엔 열강들이 태평천국운동을 외면했다. 태평천국운동 초기에 열강들은 개신교 선교세력이 중국을 장악해가고 있다는 것을 환영했다. 그러나 그들은 태평천국운동의 경제개혁정책과 금욕주의적 성향 등이 상공업활동에 이로울 것이 없다고 판단했고, 태평천국군의 진압을 빌미로 상당한 이권을 넘겨받을 수 있다는 계산이 가능한 청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겉으로는 ‘내전에 개입하는 것은 안된다’는 식으로 중립적인 자세를 취했다.
결국 1860년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청의 요청을 받아들여 태평천국운동의 진압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이 제공한 신식 무기와 영·프 연합군, 그리고 이들로부터 훈련받은 청의 군대에는 상승군(常勝軍)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상군 휘하에 편입되었다. 진퇴를 거듭한 끝에 1864년 남경이 상군에 의해 함락되면서 태평천국운동은 사실상 끝을 맺었다. 홍수전은 함락되기 전에 병에 걸려 죽었으며, 홍인간을 비롯한 후기 태평천국 지도자들은 모두 전사하거나 처형당했다.
(3) 태평천국운동의 사상사적 의의
태평천국운동의 과정에서 나타난 홍수전의 종교적 신념은 서양 사상의 대표격인 개신교를 대폭 수용한 것에서 그 주요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그는 청의 몰락 속에서 위기의식을 느꼈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배상제교라는 사상을 제시했다. 그것은 종교적 색채가 다소 강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접한 말세를 강조하고 유일신을 찬양하는 개신교의 일면에서 정치적 메시지를 찾아냄으로써 강력한 종교적·정치적 운동을 일으킨 사상이 되었다. 또한 그렇게 구상한 제도가 경제적 파탄을 마주한 민중들의 감정에 호응해, 조정을 뒤흔드는 운동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상적 전형은, 증국번과 이홍장과 같은 사람들이 취하는 보수적 태도다. 이들은 분명히 전통적인 사회의 이념을 수호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경제적인 타격과는 별개로, 그들에게 태평천국운동의 이념은 사회를 무너뜨리고 사람들의 정신을 어지럽히는 사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청 조정은 이를 막아내지 못할 만큼 무능했고, 외국의 힘을 빌어야만 겨우 진압할 수 있을 정도로 속수무책이었다.
따라서 청 정부는 이제 더 이상 그 모습을 그대로 지켜야 할 대상이 될 수 없었고, 일정 정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그리고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지식인들은 서양의 무기가 어떤 성능을 가지고 있는지를 똑똑히 지켜보았다. 이는 진압을 주도한 증국번과 이홍장 같은 이들이 양무운동을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양무운동의 정신은 우리의 정신과 제도는 지키되 기술은 배우자고 말하는, 중체서용(中體西用) 내지는 동도서기(東道西器)론으로 표현되었다.
2. 엄복과 『천연론』
(1) 유학파 지식인 엄복과 『천연론』
1861년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는 와중에 양무운동이 시작되었다. 양무운동의 핵심은 서양의 군사기술을 배우고 신식 무기를 만드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었다. 각지에는 탄광, 철광, 제철소, 무기공장이 세워졌다. 특히 열강들의 침입에 맞서기 위해서는 해군을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군함을 사들이고 조선소를 건립하는 것도 양무운동의 중요한 과제였다. 더불어 이런 기술을 가져다주고 외교 업무를 관장하는 외국인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다양한 전문가들을 양성해야만 했는데, 이를 위한 기관들이 이러한 공장에 덧붙여서 세워졌다. 1862년 북경에 세워진 동문관(同文館), 1863년 상해에 세워진 광방언관(廣方言館), 1864년 광주에 세워진 광주동문관(廣州同文館), 1867년에 세워진 복주선정국(福州船政局) 부설 선정학당과 강남제조국(江南製造局) 부설 번역관 등이 그 예다.
1872년 증국번과 이홍장은 조정에 국비유학생 파견을 건의했다. 서양의 문물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직접 가서 체험해보고 와야 한다는 취지였을 것이다. 이 계획은 곧 추진되었고, 첫 유학생 30명은 미국으로 떠났다. 국비유학이었으므로 대개는 중산층 내지는 하급 사대부의 자제들로 이뤄져 있었는데, 이들은 완전히 서양의 학문에 물들어 귀국했다. 따라서 추가 유학 계획은 반대에 부딪혔다. 양무운동을 추진하던 이들은 이런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장소를 유럽 지역으로 바꿀 것을 제안했고, 1876년에 출국한 국비유학생 30명은 유럽을 향해 가게 되었다.
이 30명 가운데 한 사람이 엄복이다. 그는 유학생 시절을 영국의 왕립 해군학교에서 보내고, 귀국 이후에는 북양해군의 북양수사학당에 교수로 부임했다. 이후 부교장을 거쳐 교장이 되었고, 해군을 가르치는 일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 이후 북양해군이 전멸하면서 직장을 잃었고, 한동안 방황하다가 언론인 겸 번역자로 다시 세상에 등장한다. 이 기간동안 그는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적 사회과학에 매료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서양의 학문 자체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파악한 듯 하다. 『천연론』은 그런 생각에서 나온 번역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그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과 『논리학의 체계』,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학 연구』,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등도 번역·출판했다.
『천연론』은 토마스 헉슬리의 강연록 『진화와 윤리』를 번역한 것이다. 이 강연록의 대체적인 내용은, 생물학에서 이야기하는 진화를 무턱대고 인간을 지배하는 원리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이런 자연적인 진화를 인간의 힘이 닿는 한 이겨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진정으로 인간다운 모습이며, 그것이 우리의 인간다움 즉 윤리적 측면을 나타낸다고 역설한다. 이는 사회진화론적 사회과학, 생물학적 진화와 인간 사회의 원리 사이의 연속성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엄복은 반대로 헉슬리의 입장에 반대하고 스펜서의 입장을 옹호하며 주석을 달아놓는다. 헉슬리는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원리에 대해 잘못 파악하고 있으며, 스펜서의 주장처럼 자연의 순리에 맡겨놓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는 것이다. 헉슬리의 주장처럼 인위적인 것을 강조하다보면, 실제로 더 좋고 적합한 것이 인위적인 것에 의해 배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천연론』의 특징과 의의
『천연론』의 번역에서 보이는 특징은 엄복이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를 격의(格義)했다는 것이다. 격의는 불교가 처음 중국에 들어올 때 불교의 개념과 용어들을 도가의 개념과 용어를 사용해 번역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천연론』의 경우에는, 서양의 개념과 용어들을 중국의 전통사상인 유·불·도가에서 쓰는 개념과 용어들로 번역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격의했다는 말을 쓸 수 있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궁극적인 이치는 시대와 장소에 상관없이 동일하고 따라서 그것을 표현하는 말은 다르더라도 깊이 이해하면 그것은 동일한 이치에 대한 다른 표현이며, 그렇기 때문에 서양 학문의 깊은 뜻을 이해하려면 우리의 학문의 깊은 뜻과 서로 맞춰보아야 하고 그래야 그 깊은 이치가 밝혀질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서양의 논리학에서 쓰이는 방법인 연역과 귀납을 각각 주역의 체계와 춘추의 체계에 비추어 설명·이해하고 있다.
또한 그는 번역의 원칙으로 원문에 충실해야 하고(信), 의미를 전달해야 하고(達), 문장이 규범에 맞아야 한다(雅)는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가운데 엄복이 가장 많이 고려하는 것은 두 번째 원칙인 의미의 전달인 것으로 보인다. 그 스스로도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라고 하더라도 읽는 사람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면 번역을 하지 않은 것과 같기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또한 원문에 없는 절 나누기라든가 상당한 분량의 번역자의 주석 등이 이를 증명한다. 또한 헉슬리가 드는 여러 사례들도 중국의 고사나 경우에 맞게 고치는 것도 이런 경향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인 내용상의 번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세상의 모든 생물들을 지배하는 원리는 진화(天演)이다. 자연이 소화할 수 있는 생물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는데, 그 소화할 수 있는 양은 크게 증가하지 않지만 생물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따라서 자연 속의 생물이 포화상태가 되면 그 환경에 잘 들어맞는 개체만이 성장할 기회를 제공받고, 그렇지 않은 개체들은 아예 사라지게 된다. 이것은 진화론에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의 개념인데, 엄복은 이것을 천택(天擇)으로 번역했다. 이런 기회를 제공받기 위해서 생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생존경쟁(struggle for existence)은 물경(物競)으로 번역되었다. 이렇게 경쟁하면서 그 환경에서 더 잘 살아남기 위해 생물들은 스스로 변화(variation)를 꾀하는데, 이것은 추이(趨異)로 번역되었다. 이 세 가지가 자연에서 변화를 이끄는 동력이다.
이 원리가 인간사회에도 적용된다는 것이 스펜서와 엄복의 입장이다.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지만 인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따라서 인간이 부족한 자원을 놓고 경쟁해야하는 일이 생기고, 그 경쟁 속에서는 자연과 사회 등 환경에 딱 들어맞는 인간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에 딱 들어맞아야 한다. 현재 인류의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의 선택을 받은 종족은 서양인들이다. 만약 서양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맞닥뜨렸을 때 그들이 자연선택을 받지 않았다면 그만큼 세력을 확장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물계에서도 이런 일은 종종 벌어지는데, 이미 조성된 어떤 생태계에 더 잘 맞는 생물이 들어갔을 경우 다른 생물이 살아남지 못하는 경우가 바로 그렇다. 따라서 우리의 변화의 방향 또한 서양인으로부터 배우는 것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핵심은 그들의 정치 제도가 백성들의 지식(民知)과 덕성(民德) 그리고 체력(民力)을 기르는 데 초점이 맞춰져있다는 것이다. 이들을 기른다면 우리 또한 국제사회라는 생태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이 계속 진행되다 보면 결국 가장 좋은 재원들이 인류사회에 남게 될 것이고, 더욱 더 발전하고 진보된 사회가 출현할 것이다.
엄복은 이런 입장에서 헉슬리를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스펜서의 입장이 하늘의 원리를 따르고(任天) 인간들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진화의 원리에 충실하고 행복한 사회를 지향한다. 반면에 헉슬리는 이런 원리를 거슬러(勝天) 인간의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인위적인 것을 적극적으로 고려한다. 따라서 헉슬리의 주장은 진화를 통해 성취될 미래의 행복을 지연시키고, 자연선택에 의하면 진작에 사라졌어야 할 개체들을 보호하는 논리를 제공한다. 반면 헉슬리는 이런 스펜서식의 주장에 대해 이들이 우생학과 연결되며, 아직 인간에게는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인간의 사회에서 자연이 하는 것처럼 사람을 감별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인간이 직접 자연선택을 실천하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는 헉슬리의 견해가 옳아보인다. 사회진화론적 사회과학이 제국주의와 어떻게 결탁했는지, 사회진화론이 생물학적 진화론을 얼마나 오해했는지, 생물학적 진화론 안에서도 얼마나 다양한 변형이 있으며 또 그들 각각이 진화를 이해하는 방식이 얼마나 판이하게 다른지를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엄복의 시선에서 헉슬리의 견해는 오히려 고담준론에 가까워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살아온 시기가 대내적으로 그리고 대외적으로 청나라가 상당한 풍파에 시달렸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스펜서의 사회 이해 방식은 당시의 현실과 잘 맞아들어갔고, 그리고 변이라는 방식으로 내가 속한 공동체가 자연선택에 의해 생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 또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식은 단지 엄복 뿐만 아니라 당대의 많은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과 일맥상통했다. 그래서 엄복의 『천연론』은 본인 뿐만이 아닌, 중국 나아가서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외세의 압박에 시달리는 모든 공동체의 지식인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3. 강유위의 철학사상과 변법운동
(1) 변법운동과 강유위의 정치적 활동
강유위는 1858년 광동성 남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과거에 응시했으나 떨어졌고, 뒤이어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도가와 불교사상에 더욱 심취했다. 그리고 그 즈음 서양의 학문을 접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분야를 가리지 않고 서양의 학문 저술을 읽었다. 이후 1888년 과거에 다시 응시하는데, 이 과정에서 황제에게 직접 올려야한다는 상소를 써서 중앙정부에 파장을 일으킨다. 여기에는 의회와 비슷한 합의제 심의기관을 공식적으로 설치할 것을 주장하는 내용, 즉 변법(變法)을 추진하자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의도와는 다르게 황제에게 전해지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양무운동을 반대하던 여론과 반이홍장 성향 조정 대신들의 주목을 받았다. 물론 이런 파장을 일으킨 댓가로 그 대신들로부터 당분간 정계를 떠나있으라는 요구를 받았고, 그렇게 자숙하는 시간 동안에 『신학위경고』를 간행해 또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선다.
1895년 또 다시 과거에 응시한 강유위는, 이번에는 응시자 600여 명의 연서명을 받은 상서를 조정에 제출한다. 공거상서(公車上書)라고 불리는 이 운동은 양무운동을 추진한 세력에게 청일전쟁 패배의 책임을 묻고, 반이홍장 성향의 대신들을 중용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이 때 치른 과거에 급제했고, 이후 영국이나 일본의 메이지유신 등을 모델로 삼은 입헌군주정으로의 변법(變法)을 기획한다. 이런 뜻을 전파하기 위해 강학회(强學會)를 세우고 잡지를 발간했는데, 북경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다. 여전히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양무운동파 대신들에게 탄압을 받아 규모가 다소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연과 학술활동을 이어나갔다.
1898년에는 사대부들의 모임인 보국회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변법운동에 나섰다. 그리고 황제에게 직접 상소를 올려 자신을 비롯한 변법파 인사들을 관리로 등용하고, 평범한 백성들의 직접 상소 허용, 상업 진흥, 신식학교 설립 등을 건의했다. 반면 종래에 주장하던 의회와 비슷한 합의제 심의기관에 대한 내용은 없었으며, 대신 군주의 권한을 강화하고 여기에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내용이 들어간 것으로 보아 개혁의 방법론을 바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자신의 개혁에 동참하지 않는 대신들을 파면할 것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그러나 이것을 황제와 조정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서태후가 광서제를 연금하고 변법파에 대한 체포령을 내림으로써 변법운동은 막을 내렸다. 강유위는 일본으로 망명했고, 강유위가 추천한 변법파 가운데 양계초를 제외한 모두가 체포당하거나 처형당했다. 그리고 변법으로 추진하려고 했던 모든 것들이 서태후의 명에 따라 원상복구되었다.
(2) 강유위 철학의 특징과 의의
강유위의 변법운동은 그의 정치사상·철학에 토대를 둔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인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 『대동서(大同書)』를 살펴보았을 때, 전통적인 철학에 기반해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변법을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 저서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그의 정치적 지향점을 그려볼 수 있고 나아가서 서양의 사상에 대응하는 중국 지식인의 한 전형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가장 먼저 완성된 『대동서』를 살펴보자. 대동(大同)은 소강(小康)과 함께 『예기(禮記)』의 「예운(禮運)」편에 등장하는 개념으로, 이상적인 사회를 뜻하는 말이다. 강유위는 이 개념을 서양의 유토피아 개념에 대응시키고, 서양과 동양에서 논의돼왔던 이상적인 사회에 관한 논의들을 여기저기에 끼워넣는다. 또한 공자가 인류의 진화에 일정한 단계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우리는 지금의 혼란한 사회상을 거쳐서 이상적인 사회로 나아간다는 것을 예언했다고 해석한다. 『논어(論語)』의 「위정(爲政)」편 23장이 그러한 예다. 그러나 공자는 혼란한 세상에 살았기 때문에 대동에 대한 설명을 거의 하지 않고 단지 혼란한 사회나 소강에 대한 설명만 할 뿐이다. 따라서 앞으로 올 대동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며, 그것이 자기가 『대동서』를 쓴 이유라는 것이다.
유토피아가 반드시 오는 이유는, 이 세계가 세 가지 변화의 국면을 겪으면서 점점 더 나은 사회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거란세(據亂世)에서 승평세(升平世)로, 승평세에서 태평세(太平世)로 바뀐다. 승평세는 소강사회, 태평세는 대동사회에 해당한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지향해야 할 세상은 태평세다. 여기에는 어떤 사람도 고통받지 않고 모두가 행복하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다다르지 못하고 여러 원인에 의해 고통받고 있는데, 이 원인을 강유위는 영토(國界), 계급(級界), 인종(種界), 남녀(形界), 친소관계(家界), 산업의 분화(業界), 법 집행의 부당함(亂界), 사람과 동물 사이의 종적 구별(類界), 생명의 탄생에 따른 이런 고통스런 사회의 연속성(古界) 등 9가지 경계(九界)라고 진단한다. 만약 이 진단이 맞다면, 이들을 없애는 정책을 시행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이 없어지고 태평세가 찾아올 것이다.
공자를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그가 경전을 해석하는 방법론으로 금문경학(今文經學)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고문경학(古文經學)에 대비되는 것인데, 이를 택하는 이유가 『신학위경고』에 밝혀져 있다. 고문경학은 『춘추좌씨전』의 정신을 이어받은 해석 방법론으로, 문자 그대로 읽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춘추공양전』의 정신을 이어받은 금문경학은, 간략하게 써진 문장 속에 심오한 뜻이 있다고 생각하는(微言大義) 해석 방법론을 가리킨다. 신학(新學)은 전한과 후한 사이에 왕망이 세운 신나라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유학을 가리키는 강유위의 용어인데, 안타깝게도 이것이 유학의 정통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학의 진정한 정신을 되살리려면 전한과 그 이전의 본래 유학의 정신, 즉 금문경학과 『춘추공양전』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를 이렇게 예언자에 준하는 사람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은, 강유위를 비롯해 당대의 많은 유학자들이 추진했던 입교(入敎)운동과 관련이 있다. 이들은 서양의 기독교의 유입에 맞서서 유학적인 종교 사상, 즉 공교(孔敎)를 수립해서 사람들의 신념을 결집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춘추공양전』과 금문경학은 이런 활동에 좋은 근거가 되었는데, 공자가 단순한 도덕적 인간이 아니라 그 이상의 초자연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비쳐졌기 때문이다.
강유위는 이런 철학적 해석을 바탕으로 자신이 살고 있던 시기를 승평세라고 진단하였다. 그리고 그 승평세에 맞는 군주제는 입헌군주제다. 완전한 민주정 또는 혁명적인 민주주의는 승평세가 아닌 태평세의 정치체제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완전한 민주정을 이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변법운동을 통해 뼈아프게 느꼈기 때문에 내린 결론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진단은 변법운동 당시에는 올바른 결정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이후 사상계의 상황이 급격히 변했는데도 불구하고 입헌군주제를 고수하며 복벽운동에 가담하는 등 시대착오적인 정치행위를 하도록 만들었다. 한 시대의 끝에 서있던 개혁자가 새로운 시대의 보수주의자로 돌아선 것이다.
강유위의 철학과 사상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 의의가 깊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사실상 유학에 기반을 두고 자신의 철학을 전개하고, 이를 통해서 서양의 논의를 수용하려고 노력한 마지막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의 정치적 동지면서 동시에 학문적 동반자이기도 한 양계초(梁啓超)는 일본으로 망명한 이후 일본을 통해 수입된 서양사상에 강유위보다 더 많이 경도되었으며, 이후의 학문 세대들은 서양의 학문에 훨씬 더 개방적이고 유학을 배척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그의 사상은 『대동서』를 통해 동아시아와 서양의 유토피아 사상을 결집한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동아시아의 전통적 지식의 세대의 마지막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예비한 인물의 전형으로서 그 의의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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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좌중국사Ⅵ』, 지식산업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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