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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 읽기 - 전체주의의 탐험가, 삶의 정치학을 말하다 ㅣ 산책자 에쎄 시리즈 8
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지음, 서유경 옮김 / 산책자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정치사상가 아렌트
아렌트는 그의 연구주제인 ‘전체주의’ 때문에 현대에 가장 주목받는 정치사상가 가운데 한 명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 『전체주의의 기원』, 또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으로 알려져 있다. 『아렌트 읽기』의 지은이인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은 그에게 수학한 제자이면서, 동시에 가장 인정받는다는 아렌트 전기의 지은이이기도 하다. 이런 점들은 이 책을 고르는데 아주 중요한 정보이며, 동시에 이 책을 설명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는 사항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 책에는 아렌트의 삶에서 중요한 순간들이 등장하고, 지은이가 아렌트와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도 간혹 등장한다. 또한 공식적으로 출판되지 않고 그와(그리고 그의 동료들이) 현재 체계적으로 정리중인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강의록과 편지에 대한 언급도 빈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읽어보진 않았지만, 그가 쓴 900페이지가 넘는 엄청난 분량의 아렌트 전기의 축약본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볼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단순히 그의 저서들을 요약, 정리한 것 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지를 보여주려고 애쓴 느낌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목차는 크게 네 부분으로 짜여있다. ① 서론을 대신한 그의 삶에 대한 지은이의 간략한 서술, ② 『전체주의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 ③ 『인간의 조건』에 대한 서술, ④ (현재도 진행중인 것으로 보이는) 『정신의 삶』에 대한 자신의 연구 성과. 하지만 이 네 부분이 무 자르듯이 똑 나누어지지 않는다. 아렌트의 문제의식은 분명히 전체주의로부터 출발하였으나, 그것을 실증적으로 다루지 않고 전체주의가 가능하게 된 인간의 삶의 특정한 상황과 연관지어 다룬다. 그 상황에 대한 연구가 바로 『인간의 조건』 의 내용이 된다. 『정신의 삶』 은 말년의 아렌트가 그 조건들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탐구와 자신의 사색의 결과를 정리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정신의 삶』의 결론은, (이 책에 따르면) 다시 ‘전체주의’로 돌아간다. 즉, 특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돌파해 나갈 수 있는 인간의 창조적 능력에 대한 서술인 것이다.
따라서, 글의 처음에서 결론부터 일단 이야기하자면, 이 책은 아렌트에 대한 훌륭한 입문서라고 생각한다. 물론, ‘정치 현실에 대한 교범’ 역할을 하는 『전체주의의 기원』 에 대한 설명이 담긴 초반부에 비해서, 그런 교범의 역할을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사유의 바다로 들어가는 후반부로 갈수록 논의가 깊어지고 넓어지며 어려워지는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아렌트의 사유의 역사의 일부이므로, 그리고 단순히 전체주의의 제도, 혹은 집권세력을 변화시키는 것 보다는 인간의 본질적 측면에서 어떤 능력을 이끌어내는 것이 앞으로 그와 같은 사건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을 줄이는 더욱 근본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리고, 아주 쉬운 말이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운, 그래서 우리에게 더 귀감이 될법한 말들이기에 더욱 그 내용이 인상깊게 남는다. 나 스스로가 아렌트의 저서를 직접 읽어본 적이 한 번도 없기에, 이런 느낌이 더욱 강한 것 같다.
제 4의 책, 『혁명론』
전체적인 인상과 더불어서, 이 책을 읽으면서 아렌트에 대해 생기는 호기심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혁명론』 이라는 책이 어떤 내용일까 하는 궁금증이다. 이 책의 목차는 주요 저서 세 권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있지만, 사실 이 책 또한 그 세 권에 못지않은 빈도로 등장한다. 『전체주의의 기원』을 다루는 부분은 정치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데, 그런 맥락에서 『혁명론』은 스탈린 체제(그리고 아마도 마르크스-레닌 주의의 핵심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전체주의라고 규정했을 때 우리가 혁명의 모델로 삼아야 하는 실제 정치혁명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맥락에서 등장한다. 또한 『인간의 조건』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혁명이 전체주의가 되지 않기 위한 조건으로서 인간의 상황들, 그리고 그런 상황들이 구현되었을 때의 인간들은 어떤 태도를 갖추었는가를 설명하는 맥락에서 『혁명론』에 대한 내용이 부각된다.
이 두 맥락으로 미루어볼 때, 아렌트의 『혁명론』은 어떻게 혁명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다루는 정치적 변혁을 단순히 역사적으로 기술한 책은 분명히 아닌 것 같다. 반대로 혁명의 기초를 이루는 철학적 태도 내지는 정치구조를 바꾸기 위한 행동지침을 다루는 혁명의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도 아닌 것 같다. 이 둘 가운데 어느 한쪽에 치우친 책이었다면, 이 책은 위의 두 맥락에 모두 등장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미루어 짐작하기로는, 그 실체를 도저히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하지만 혁명의 순간에는 매우 중요한 혁명의 요소, 즉 ‘혁명의 정신’에 대한 기술일 것이다. 그 책을 보지 않았으니 이 또한 짐작일 뿐이지만.
『아렌트 읽기』에 등장한 『혁명론』 언급을 바탕으로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아렌트는 정치적 혁명의 형태를 두 가지로 구분했다고 한다. 하나는 프랑스 유형인데, 아렌트는 이 유형의 대표인 프랑스 혁명을 포함한 거의 모든 혁명이 이 유형을 따라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혁명에서는 혁명지도자들이 대중을 의도적으로 조직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미래를 선포하며, 그들의 행동이 어떤 미래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청사진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청사진을 달성하기 위해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윤리적 덕목을 내세워 혁명에 수반되는(혹은 지도자들이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폭력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지배권력의 교체로 혁명이 완수된다.
그런데 아렌트는, 이러한 유형의 혁명에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그것은 아예 혁명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데,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지배-피지배의 구분이라는 정치에 대한 고정적인 관념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명분이 무엇이 되었든 폭력을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정치와 거의 다를 것이 없다. 그가 보기에, 폭력을 동반하는 정치는 전체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다. 그것은 사실상 인간에게서 정치적인 행위를 할 수 없도록 (아렌트가 쓰는 의미에 따른) 정치적 감각을 마비시킨다. 그가 말하는 정치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능력이기에 정치적 감각의 마비는 곧 인간으로서의 자격의 상실을 뜻한다. 그 영향력 아래 있는 모든 인민의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마비시키는 정치, 그것이 바로 전체주의이다. 그러므로 프랑스 유형의 혁명이란, 혁명이 아니라 전체주의에 매우 근접해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또 다른 유형은 미국 유형이다. 아렌트는 이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우선 가장 단순한 이유는, 인민의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폭력이 동반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그것은 의도적 조직이 아닌, 자발적인 결합과 끝없는 토론에 따르는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미국 유형의 혁명의 특징은, 혁명의 지도자들(지도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조차 의문스러운 어떤 ‘주도자’들)이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 즉 자신들이 꾸릴 정치공동체의 미래를 열어놓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 공동체를 구성한 이후의 사람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영향 아래 놓일 (공동체 구성원 자신을 포함한) 미래의 세대들에게 내맡겨진다. 이것은 아렌트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적 감각을 보장해준다. 이 정치적 감각의 상호교차점이 정치적인 것의 장소, 즉 공공의 영역이 된다.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적 감각은, 그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보았던 ‘행위’개념, 즉 창조성 - 자유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있다. 그 어떤 인간도, 어떤 행위를 할 때에는 그 행위에 전제되는 여러 상황들, 행동의 뿌리들이 있다. 그 뿌리란, 특정한 정치공동체가 지금까지 형성해온 행동 양식인 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그래서 인간의 행위는, 근본적으로 정치공동체 구성원 전체와 연관되어있다. 그러나 아렌트는 결코 그것들이 그 행위가 어떤 모습일지 결정한다고 보지는 않았다. 혹은, 그렇게 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가 보기에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서, 공동체 구성원 모두와 연관되어있지만 결코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 어떤 모습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게 되고, 이것은 창조 – 자유 – 행위가 된다. 이 결정성을 승인하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가, 정치공동체가 전체주의적 가능성을 담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칸트주의자 아렌트
이렇게 아렌트의 관심은 전체주의라는 일종의 정치적인 현상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조건, 즉 창조 – 자유 – 행위라는 문제로 넘어오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긴 나머지 한 가지 호기심은, 여기에는 아렌트의 이름 만큼이나 고전적인 철학자들의 이름, 특히 칸트의 이름이 아주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것이다. 특히 자유와 정치의 문제에 있어서, 아렌트는 칸트에게 배우고 또 그를 넘어서는 것이 그의 과제였다고 할만큼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칸트 자체도 인간의 자유라는 문제에 상당히 깊게 천착한 철학자이고, 역사철학이라는 이름을 빌어 세계적인 관점에서 정치적인 전망을 제시한 철학자인 만큼 칸트와 아렌트 사이에는 분명한 접점이 있다.
가장 핵심적인 접점은 바로 ‘세계시민적 관점’일 것이다. 정치와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칸트는 이전의 정치사상가, 또는 철학자들과는 다르게 ‘보편사’의 관점, 즉 이 세계의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어떤 관점에서 사고해보라고 제안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 공통된 관점에서 역사를 통찰했을 때 특별한 공동체의 역사가 아닌 ‘보편사’가 드러날 것이라고 제언한다. 하지만 그 보편사의 순간(또는 역사의 종말)이 언제, 어떻게 도래할 것인지에 대한 말은 아껴둔 채, 그 때에 등장할 정부는 이미 존재하는 여러 공동체들이 각자의 권리, 즉 자유를 보장받지만 동시에 그 권리를 도덕의 이름으로 제한할 수 있는 느슨한 연대체가 될 것이라고만(되어야 한다고만?) 슬쩍 이야기한다.
아렌트의 『혁명론』으로 이야기를 다시 돌리면, 미국의 건국은 칸트가 이야기했던 과정이 실제로 역사에 드러난 사건이 된다. 아렌트는 칸트의 관점을 미국의 건국의 사례를 들며 조금 더 급진적으로 끌고 간다. 즉, 칸트가 제안했던 보편사란, 사실 칸트 스스로도 그것이 정말 존재할까 확신이 없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제안한 세계적 정치공동체의 바람직한 모습, 즉 가장 구체적인 개인에서부터 최고 수준의 연대체에 이르기까지 미래를 창조해갈 능력 – 즉 자유를 지속적으로 보장하는 ‘그’ 정치체제를 만들기 위해 우리의 정치적 감각 – 역시 자유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렌트가 ‘자유’라는 개념은, 칸트가 ‘자율’이라는 말로 설명하려고 했던 것을 포함하며 동시에 자율을 추진하는 동기가 이성이 아닌 다른 영역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하고 있다. 인간의 이성(실천이성)은 자신의 행동의 원칙을 확립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이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법칙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도약 자체까지 이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확립한 원칙이 실천이성이 아닌 또 다른 이성, 즉 순수이성과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우연과 필연, 자유와 자연의 모순이라는 고전적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렌트는 칸트가 이 둘(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을 매개하는 인간의 능력이라고 주장하는 판단력에서, 미학이 아닌 정치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자율을 통해 도덕적 원칙을 확립하면서도, 판단에 의해 그 원칙을 보편적 법칙으로 옮겨놓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사고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곧 다른 이의 관점에 대한 고려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 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다. 지은이는 이것이 『정신의 삶』에서 쓰지 못한 부분, 즉 ‘판단함’에 대한 아렌트의 입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전체주의 현상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한 그의 사유는 이렇게 자유에 대한 사색, 그리고 현대의 민주주의의 위기를 뛰어넘을 정치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사실상 현재 출판된 『정신의 삶』은 ‘사유’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를, 그리고 ‘의지’ 부분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두 학자는 그게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의 모델 – 자유에 기반한 소통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세계시민적 인간상(소크라테스)의 사례, 그리고 이러한 정치가 가능하게 하기 위한 비이성적 능력에 대한 고찰의 좋은 사례를 남긴 선배 철학자(아우구스티누스)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가 진정 맺고 싶었던 결론, 그리고 제시하고 싶었던 것은 쓰여지지 않은 ‘판단함’이었다는 것이 지은이의 주장이다.
그리고 현실과의 접점
이런 생각의 궤적을 따라서, 아렌트는 더 이상 정치사상가나 정치이론가가 아닌 정치철학자 또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자가 된다. 나는 그를 전체주의 현상에 대해 다룬 정치사상가나 이론가로만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이런 구도는 상당히 흥미로웠고, 철학자로서의 아렌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을 던져주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대해 짧게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보겠다. 첫째, 철학하는 사람들이 항상 강조하듯이, 그리고 아렌트가 그랬듯이, 이 책은 단순히 아렌트에 대한 입문서로 끝나지 않는다. 지은이는 분량이 많지 않은 이 책에 아렌트 철학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담아내면서도, 동시에 ‘아렌트가 만약 지금까지 살아있었더라면’ 이라는 말로 운을 떼며 이것이 현재의 정치 현상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과감하게 적어내고 있다. 아렌트의 학문적 태도가 그랬듯이 매우 조심스럽게 제안하면서도, 그 틀이 매우 합리적으로 현상을 분석해낼 수 있는 도구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의 철학이 현실, 특히 현대의 정치와 결코 떨어질 수 없다는 지은이의 입장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폭력에 매우 민감한 아렌트의 이론의 체계에 비추어 볼 때, 현재 미국 내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정치현상인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슬로건에 대한 비판은 매우 매섭다. 제국주의적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며 자기 안에 스스로 전체주의의 요소를 생성시켜나가는 미국에 대한 비판은 물론, 그것에 반대하기 위해 테러라는 똑같은 방법을 사용하며 그것을 자신의 세력을 결집하는 데 이용하는 무국적 테러 세력에 대한 비판 또한 놓치지 않는다. 양자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는 사람들은 모두 양측의 테러로 인해 겁에 질려 정치적 감각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조적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그대로 하게 된다.’ (특히 미국의 경우) 아렌트의 관점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 자체가 그 사회가 완전히 전체주의적 국면으로 접어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언제든지 전체주의 현상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둘째, 미국에 대한 아렌트의 입장은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다. 분명히 현재 무차별적인 전쟁을 치르고 있는 미국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긴 하지만, 또 그것은 철저하게 ‘아렌트 연구자’인 지은이의 관점에 한정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렌트는 (이 책의 내용으로만 비추어보자면)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이며, 그가 이상적인 정치로 제시한 민주주의의 내용은 상당부분 미국의 민주주의를 모델로 하고 있다. 반면, 건국 당시가 아닌 그 이후의 미국, 특히 매카시즘이 횡행하던 아렌트 말년의 미국의 상황에 대해서는 분명 아렌트 스스로도 비판적 입장을 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체주의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거나, 혹은 ‘전체주의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일 뿐 그 자체가 전체주의는 아니라고 했던 점 같은 것을 미루어보면, 혹시 그가 미국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 것은 사실이었다. 나 스스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정리를 해야할지 몰라 그냥 의문부호로만 남겨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