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의 빨간 수첩
소피아 룬드베리 지음, 이순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스웨덴에 사는 90넘은 도리스의 이야기입니다. 현재 시점의 도리스는 많이 쇠약해져 있습니다. 죽음을 예감하는 그는 여동생의 손녀인 제인에게 남기는 형식으로 자기 수첩에 기록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90년이 넘는 삷의 기간 동안 만났던 많은 사람들 중에 특히 기억이 남는 사람들이겠지요. 좋았던 관계도 있고, 끔찍했던 관계도 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같이 마음 깊숙히 아픔으로 남은 관계도 있고, 앨런이나 예스타 같이 평생을 두고 기억하는 관계도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매우 중요한 캐릭터임에도 어떤 사람들은 바로 그 다음에 '사망'으로 나옵니다. 처음 그 '사망'이란는 문구를 봤을 때 철렁했습니다. 그 '사망'이라는 문구는 그 이후로 계속 나옵니다. 나올 때 마다 철렁 합니다. 그렇게 익숙해지는 문구는 아니었습니다. 각 캐릭터마다 저마다의 기쁨과 아픔이 있는, 각자의 삶이 있는 구체적인 사람인데, 그렇게 속절없이 죽어갑니다. 때로는 사고로, 때로는 병으로. 

지금 주변의 사람들을 이런 넓은 시각으로 볼 수 있을까요? 결국 이렇게 모두의 이름에 '사망'이란 코멘트가 달릴 건데. 이 책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그렇게 직면하게 합니다. 제레미 리프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공감의 문명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연민으로 서로를 돕고 불완전한 세상에서 번창하기 위해 벌이는 서로의 분투를 계속 축하함으로써 우리가 일시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나 공감을 가장 많이 느끼는 순간임을 잠시라도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까?" [한계 비용 제로 사회 16장]

우리가 일시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나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결국 우리 주변사람들과 보냈던 즐거운 순간들일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서로에게 감사하고, 아끼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을 누리는게 그런 행복이겠지요. 

현실의 도리스는 자신의 삶을 제대로 유지하기도 버거울 정도로 쇠약해져 있습니다. 결국 그는 넘어지게 되고, 뼈가 부러져서 입원하게 됩니다. 

책이 중반을 넘어가면서, 현실의 도리스의 삶을 보면서, 과거의 주변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90이 넘는 삶을 산다는게 어떤 것인가 차차 깨달아 갑니다. 내 몸은 점점 약해지면서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워지는데, 내 주변의 소중했던 사람들은 하나씩 세상을 떠나서 이제 남은 사람도 얼마 없습니다. 도리스의 경우는 이제 제인과 그 가족들만 남았지요.

대략 1930년대부터 최근까지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책을 읽으며, 2차 대전이라는 끔찍한 전쟁과 혼란의 시대와 그 이후의 평화의 시대를 그 스웨덴 여인과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픈 마음으로 돌아보게 합니다.

이 책의 결말부는 '객관적으로 보면' 상당히 억지스러운 '신파'입니다. 뭐 이런 우연의 일치가.. 어떻게 두 사람 모두 90살 때까지 건강 잃지 않고 살아 있을 수 있을 수 있나요. 다른 소설이라면 이런 결말부 설정은 짜증이나 분노를 이끌어 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대목쯤 오면, '뭐 이런 '신파'도 좋다. 어차피 픽션인데, 픽션에라도 이런 결말을 바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평생을 간직해온 사람이 주는 감동이 이런 거구나'라는 그 간접 체험을 위해서라면, 뭐 좋습니다. 오히려 일상의 리얼라이프는 때로는 이보다 더 한 우연의 일치와 신파도 보여주지 않던가요.

지난 12월에 제 친할머님이 돌아겼습니다. 1918년 10월생이시니 102년을 넘게 사셨네요. 할머님의 외로움과 고통이 이러한 것이라고 짐작하던 바가 도리스의 경우와 비슷했습니다. 정신은 말짱한데, 몸이 무너져 가니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미 세상을 떴습니다. 너무 외롭죠. 아들딸이나 손자손녀가 채울 수 없는 삶의 자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 부분이 과거에 다 묻혔습니다. 

1947년, 할머님 나이 만 29세라는 젊은 때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남은 세 남매를 온전히 키워내기까지 1947년 이후의 할머님 삶이 어떠했을지 풍요의 시대에 자라난 저로서는 짐작조차할 수 없습니다. 이 풍요의 시대의 기초를 놓으신 할머니 세대의 삶을 저부터도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뒤늦을 깨달음이 몰려왔습니다. 뼈저린 아픔으로 몰려왔습니다.

도리스의 수첩에 등장하는 첫 인물은 도리스의 아버지였습니다. 왜 저는 할머님의 아버지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았을까요?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할머님의 어머님은 어렸을 때 많이 뵈었었지만, 그 분의 삶의 이야기는 잘 모릅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뭔가 많이 물어보고 기록으로 남겼어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깨달음이 뒤늦은 회한으로 남더군요. 

끌고 가는 힘이 남달랐던 이 책이 그런 의미에서 쉽지 않았습니다만, '삶'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또다른 통찰을 얻은 것 같아서 소중한 책읽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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