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
파트리크 쥐스킨트 & 헬무트 디틀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영화를 보지 못한 것을 책을 읽는 내내 아쉬워했다. 하긴, 내가 알기로는 국내에서 개봉한 적도 없으니.

하여간, 로시니를 읽는 것은 시나리오를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문제, 혹은 시나리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음. 조금 더 오버하면 영화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문제의 해결에 좀 더 가까워졌다는 것을 뜻한다.

올 초, 시나리오작법 강의를 들은 친구 하나 때문에 급작스레 우리는 단편영화를 만드는 팀을 만들게 되었다. 영화에 대한 경험이 전무하니, 모인 사람들의 꼴은 그야말로 오합지졸. 그래도 입은 하나씩 갖고 있는지라, 7,8분짜리 영화 시나리오가지고 이랬다 저랬다 하길 한 달이 걸렸다. 그러다 보니 애초에 시나리오를 쓴 사람의 입이 시간이 갈 수록 툭 튀어나오는 것은 당연지사. 7개였던 신은 딱 2개로 줄어버렸드랬다. 

그래서 쥐스킨트가 쓴 "친구여 영화는 전쟁이다"가 더욱 맛나게 읽혔는지도 모르겠다. 책 뒤편에 붙은 시나리오와 영화스틸 사진들은 쥐스킨트의 글을 증명하는 존재로서 빛났다.

결론: 1. 시나리오에서 모든 걸 상상하는 것은 어렵다. 왜냐면 세상엔 일어나지 못할 일이란 없으니까. 2. 시나리오를 쓰려고 하거나 쓴 사람들은 자신의 작업과정을 쥐스킨트처럼 정리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엄청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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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목일인데 양양에는 불이 나서 낙산사가 다 타버렸다고 한다. 왜 해마다 봄에 영동엔 불이 나는 걸까.

늦잠을 자고 일어나 대대적으로 정원을 손보았다. 정원이라고 하니까 좀 우습기도 하다.

어쨌든, 바싹 말라버린 나팔꽃을 치우고, 씨앗을 좀 더 받고, 죽어버린 식물들을 모아 거름을 만들겠다고 흙에다 묻어두었다. 그리고 꼬박 1년이 넘게 자기가 가진 에너지만으로 싹을 틔워내던 고구마를 흙에 심어주었다. 이제 많은 부분이 썩어버려서 얼마나 더 싹을 틔울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씨앗 열 몇 개를 일렬로 심어주고,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던 화분 속의 흙을 뒤섞어 놓았다. 겨울나기를 위해서 방으로 옮겨 두었던 화분을 베란다로 다시 옯겨 놓고 사정없이 물을 뿌려 베란다 청소를 했다.

뭔가 새로 시작되는 기분.

그리고는 지난 달에 신청해 두었던 댄스강습을 받기 위해 스포츠센터로 갔다. 법정 공휴일이라 휴강이란다. 전에는 몇 번이나 물어도 수업한다고 박박 우기더니. 그래, 팔자에 무슨 댄스냐, 하며 사무실로 왔다. 내일을 위해 무언가를 써놔야만 하는 것이다.

루시드폴 2집이 나왔다. 말랑말랑한 음악을 들으니, 딱딱하고 거창한 글을 쓸 엄두가 안난다.

잠만 자도 하루가 가고, 뭔가 해보려고 시작만 해도 하루가 가고, 아무것도 안해도 하루가 가고. 이렇게 하루 하루가 가고 벌써 4월이 시작되었다.

자기 내면을 제대로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정신이 피폐해지고, 인생을 망치게 된다고 융이 그랬다. 인생을 망치지 않으려면 재미없더라도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돌보아야 한다.

며칠 전에 사무실 화분에 심어두었던 씨앗에서 싹이 났다. 예쁘고, 대견스럽다.

* 사람들은 즐겁다, 루시드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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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에서 사무실로 오는 200여미터 남짓한 거리에 수퍼가 4개 있다. 하나는 이름도 유명한 바이더웨이. 그 다음에는 순서대로 게으른 아저씨수퍼, 친절한 아저씨 수퍼, 무뚝뚝한 아줌마수퍼.  

1. 바이더웨이는 비싸서 안간다.

2. 게으른 아저씨 수퍼는 말 그대로 엄청 게으른 아저씨가 주인인 수퍼이다. 그 아저씨는 날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카운터에 앉아서 인터넷 고스톱을 친다. 수퍼 앞에는 과일매대가 있는데, 그는 손님이 와도 나와보지 않는다. 왠지 그 아저씨는 청결한 이미지도 아니다. 그래서 그 수퍼에는 웬만한 일이 아니면 가지 않기로 하였다.

3. 그 다음 무뚝뚝한 아줌마 수퍼. 그집 카운터는 작은 마루와 연결되어 있는데, 겨울이 들어서면서부터 아줌마는 항상 무릎덮개를 하고 거기에 앉아 있다. 이 아줌마 역시 손님이 와도 웬만하면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출근할 시간에 그 자리에 앉아서 전기기구로 무언가를 가열하여 식사를 하곤 한다.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해도 아무 말이 없고, "안녕히 계세요."라고 인사를 해도 역시 아무말이 없다. 다행히 이 집 화분은 실외에 있어 말라 죽지는 않고 있다. 이 집도 웬만한 일이 없으면 가지 않기로 한다.

4. 마지막으로 친절한 아저씨 수퍼. 이 아저씨는 친절하다. 손님이 들어오면 카운터에서 발딱 일어난다. 그리고 무엇을 찾는지 손님 눈치로 맞출 수 있다. 손님이 없을 때면 작은 매장을 돌아다니며 먼지를 닦거나 상품을 새로 진열하고 있다. 같은 물건이라도 이 집 물건이 더 깨끗하고 좋은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에 나는 마음 속으로 이 집을 단골로 삼았다. 이 집 아저씨와는 인사도 잘 된다.  


어제는 세계인의 고유명절 화이트 데이.
퇴근하는데 이 아저씨가 막대 사탕을 입에 넣고 지그재그로 달려온다. 나이 든 아저씨가 사탕을 물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지그재그로 달려오는 폼이 무척 귀엽게 보였다. 나를 스쳐 지나 이 아저씨는 어떤 아줌마를 만났다. 귀에 이어폰을 꼽고 있어 잘 들리지 않았지만, 아저씨는 "와" 이렇게 소리를 내어 아줌마를 놀래킨 다음에 입에서 막대 사탕을 꺼내어 아줌마 입에 집어 넣으려고 하였다. 아줌마는 손사래를 치며 달아난다.

게으른 아저씨나 무뚝뚝한 아줌마가 그랬으면 별일이래,혹은, 아이고, 했겠지만, 친절한 아저씨가 그렇게 하니까 참 사랑스러워보였다. 모두 모두 평소에 잘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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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 키보드 선반이 왔다. 그리고 어렵게 모여인이 전동드릴을 빌려왔다.

그래, 그런 것이다. 애초에 우리는 설치를 해주는 고급서비스 같은 것은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침부터 모두들 돌아가며 책상 밑에 드러눕기를 여러차례 한 결과 드디어 열 몇 개의 키보드 트레이 설치가 완료되었다.

책상이 넓어지자, 할 일이 많아졌다. 그 텅빈 공간에 온갖 문서와 쓰레기를 얹어 놓을 수는 없을 것 아닌가. 닦치는 대로 모든 자료와 문서를 책장안에 집어 넣고 매직클리너로 매우 오래된 책상떼를 벗겨 내었다.

이렇게 책상이 넓었던가. 이렇게 책상이 깨끗한 것이었던가. 카메라를 가져왔다면 기념으로 찍어 놓는 건데 참 아쉽니다.

다만, 자료를 쑤셔 넣은 책장열기가 두려울 뿐이다.

아싸,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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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쯤 부업으로 하는 일로 인연을 맺은 S와는 작년 봄 즈음부터 엉켜지내기 시작했다. 함께 발레를 배우기도 하고, 삼박사일동안 합숙을 하며 술을 마시기도 하고, 가끔은 미술이나 사진 전시회에 가기도 하다가 급기야는 언젠가 페루로 떠나겠다는 계획만 가지고 스페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부할 곳이 마땅치 않아, 홀로 사는 S네 집은 'S아카데미'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가진 공부방이 되었고, 나는 주말 오후마다 가방에 초급자를 위한 스페인어 교본과 사전을 넣어가지고 덜렁덜렁 놀러가게 된 것이다. 교재에 달린 테잎을 듣다가 갑자기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OST를 들으며 언젠가 이 노래를 멋지게 음미하며 부를 날을 꿈꾸기도 하고,  요기나 하자고 차린 저녁상이 곧장 술상이 되기도 하지만, 술잔을 탕탕 내리치며 '뽀르 빠보르'라는 낯선 발음을 해댈 때면 나도 모르게 너무나 기분이 좋아지곤 하는 것이다.

번 전철이 끊길 시간이 되면, 나는 가야겠다며 가방을 챙기는 척 하지만, S의 귀여운 제지에 저지당할 준비는 이미 다 되어 있는 채이다. 따라서 몇 번 사양을 하다가 결국 S와 무거운 몸을 일으켜 다 떨어져 버린 맥주를 사러 나가는 것은 의례 당연한 순서이고, 이어 밤새 나른하고 평온한 주말은 계속된다.

께 음악을 듣고, 함께 책을 읽고, 함께 영화를 보다가, 자려고 누운 것이 아니라, 저절로 몸을 눕히게 되면 갑자기 고마운 감정이 든다. 이런 황송한 주말이 있나. 갑자기 이 행복이 끝날 것을 염려하면서 조바심을 내기도 하지만, 이내 차분해지려 애쓴다.


난 주말에는 S가 뿌려두었던 씨앗이 싹을 틔웠다. 아주 작고 귀엽다. 곧 꽃도 피고, 열매도 맺겠지. 날이 따뜻해지면 한강에라도 나가 바람을 좀 쐬야지. 한 여름에는 마당에 자리를 깔고 쌈도 싸먹고 놀 수 있겠다.

젠가 이 나른하고 평온한 주말이 끝나버리더라도 아쉬워하지 않을 S와 나를 위해 주중을 열심히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는 화요일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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