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덧 스물 세살이라는 내 최초의 제자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람이라는 것이 정녕 자기 그릇에서 크게는 변하지 않는가보다 했다. 중학교 때도 진지하고 현실적이었던 녀석은 스물 세살이 되어도 그대로이다. 삶을 컨트롤 할 수 있다고 믿어왔던 여전히 한 열일곱쯤에 머물러 있는 나를 아주 살짝 되돌아 보고는, 못내 씁쓸하다.


2.
지난 해 숙원 사업 중 하나였던 방청소를 1월 2일에 마쳤다. 내 방이 아닌 듯 낯설다. 책장정리는 미처 하지 못하고, 읽은 책과 안읽은 책, 읽어야 할 책과 앞으로도 안읽을 것 같은 책들을 분류했다. 이것만으로도 큰 일을 한 것 같다.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필통에 펜들을 채워 넣었다.


3.
사무실 로테이션이 코 앞에 다가왔다. 책상 정리를 하고 인수인계 자료를 만들다 괜히 가슴이 시린다. 마치 죽을 날 받아 놓은 사람처럼 00는 어디 폴더에 들어 있고, 즐겨찾기는 두고 갈테니 참조하시고, 00자료는 책장 몇 째칸에 들어있어요, 라고 쓰다가 사무실을 잠깐 뛰쳐나갔다 돌아왔다. 내가 뭐 하는 짓인가 나도 모르겠다.


4.
며칠 전 늦은 밤 수퍼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잠깐 나이를 생각하다. 이성과 감성은 여전히 속도를 못맞추고 아찔하게 빗겨나간다. 좋은 시절 다 갔군, 이라고 생각하면, 아이고, 그게 네가 할 소리냐, 라는 식으로다가.


5.
어쨌든 새해가 와 버린 것이다. 고맙게도 아직도 가끔 울려주는 복받으라는 메시지. 어떤 이는 내가 이미 복을 많이 받아서 남들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라는 희한한 말을 했지만, 기실, 나는 아직도 받아야 할 복이 많다, 고 생각한다.


6.
올해도 예상되는 엄청난 업무의 포스. 어둠의 그림자를 헤쳐나가 잘 살아보자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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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목요일 오전. 나는 정과 함께 남해로 떠나기로 하였었다.

12월 22일 목요일

그러나 목요일 오전. 

나느 전날 새벽까지 일을 하여 겨우 일을 마친 관계로 조금 늦잠을 잔 데다가,  보고서를 제출하고 우체국을 들리는 등의 잡무가 아직 남아있는 상태였다. 일어나자마나 큰 가방에 아무 옷이나 쑤셔 넣고 택시를 타고 며칠 늦은 보고서를 제출하러 갔다. 그리고 다시 택시를 타고 정을 만나러 갔다. 정을 만나고 우체국에 들르고 경부고속도로를 탄 건 12시가 넘어버린 시간이었다.

서울 톨게이트를 빠져나갈 때까지도 나는, 숨이 찼고, 아침 내내 나를 기다린 정에게 미안했고, 뭔가 아직 일이 덜 끝난 것같은 괴로움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전화기를 꺼서 차 뒷좌석에 던져 버렸다.

대전쯤 도착했을 무렵 정에게 문자메시지가 왔다. 옆에 내가 있느냐, 프로젝트가 뭐 어떻게 됐으니 연락바란다, 뭐 이런 내용이었다. 정과 함께 여행가는 것을 파트너에게 알리지 말았어야 했다. 그 메시지를 보고 나는 너무나 좌절하였다. 지긋지긋하게 충청도까지 일이 따라왔구나, 하며.

대강의 통화를 끝내고 다시는 나를 찾지 말라고 소심하게 일갈하였다. 그리고 경상남도 팻말을 지나칠 때쯤에서야 나는 비로소 여행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고속도로에는 차가 별로 없었고, 창밖의 공기는 차고 깨끗했으며, 산과 들에는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잠깐, 호남의 폭설에 대해 걱정하기도 하였지만,  그건 잠시였다.

어둑어둑해져 삼천포 대교를 건널 때는 환호를 질렀고, 굽이굽이 얼어있는 작은 도로를 지나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희열을 느꼈다. 조용한 바닷가와 조용한 숙소. 모든 게 최고였다. 감기기운이 돌기 시작한 걸 빼면 말이다.

쇼핑도 지겹다고 쌀과 김치만을 가져온 정과 나에게는 대강 저녁을 떄울만한 것이 없었다. 우리는 남해에서 치킨을 시켜먹을 수밖에 없었다. 닭고기 몇 개를 먹고, 맥주를 마시고, 심야전기로 난방을 하는 숙소 바닥에 서 스카이라이프의 최신인기발라드 오디오채널을 틀어놓고 정과 담소를 나누었다. 

2005년 나에게, 정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던가. 처음엔 희미하던 일들이 이야기를 나눌 수록 선명해졌다. 정말 쉬지 않고, 일하고, 놀고, 계획하고 했었구나. 모든 것이 잘 되었든, 그렇지 않든 의미있었다. 이야기가 끝날 때쯤 우리는 준비한 책을 읽기 시작했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12월 23일 금요일

새벽에 잠을 깨어 창밖을 내다 보았다. 전날 밤에 늦게 도착해서 주변 풍광을 잘 살펴보지 못해 안달이 났던 것이었다. 바다는 호수처럼 고요하고, 배 몇 척이 벌써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바다에 접한 비탈에는 옹기종기 작은 마을이 있었고 서울보다 훨씬 따뜻한 남해 마을에는 아직도 초록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는 새벽이었다. 조금 더 잠을 자기로 하고 눈을 뜨니 9시. 숙소에서 제공하는 조식을 간단히 먹고 정과 나는 창을 열어둔 채, 배를 깔고 책을 읽기로 하였다. 열어둔 창을 통해 바람과 햇살이 들어왔다.

점심쯤 정과 나는 동네를 둘러 보기로 하였다. 우선 정이 가고 싶어하던 상주해수욕장을 찾았다. 모래가 곱고 소나무가 이쁘고, 동해나 서해의 여름해수욕장처럼 번잡스럽지 않아서 좋았다. 늦은 점심을 먹고, 식당을 나오다가 강아지 한 마리를 보려고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다 넘어졌다. 손바닥이 좀 까졌고, 무릎에 멍이 들었다.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할아버지가 있는 상주약방에서 후시딘과 밴드를 사서 붙였다. 콧물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괜찮았다.

상주중학교는 바다와 접해있었다. 중학교 운동장에서 바다를 보며, 이 중학교를 다녔다면 나는 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옆에는 작은 우체국이 있었고, 정과 나는 둘 다 우체국을 좋아했기 때문에 들르기로 하였다. 한 장에 320원 하는 새해 엽서를 사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주소는 서로의 것 밖에 없으니, 서로에게 엽서를 쓰자고 했다. 정은 부끄럽다고 했고, 생각해보니 나도 그러했다. 그럼 자기 자신한테  쓰자고 해서 그러자 했다. 막상 엽서를 쓰려니까 다소 민망했다. 엽서를 다 쓰고 나니 정이 나의 주소를 물었다. 배신자라고 욕했지만, 고마웠다. 

조금 더 바다를 거닐다가 우리는 남해군 관광지도에 나와 있는 관광 명소 중에 근처에 있는 곳을 가보기로 했다. 독일인 마을과 해오름 예술촌이 그중 가까웠다. 독일인 마을은 왜 독일인 마을인지 잘 몰랐는데, 가보니 독일식으로 집을 지어놓았더라. 아마 여기 은퇴한 독일 노인들이 와서 사나보다 하고 대강 추측을 하고 돌아나왔다.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장소에 멋진 집들이라니, 하면서 잠깐 부러워했다. 해오름 예술촌은 폐교를 개조하여 꾸민 것인데, 이름은 잊었지만 봉평에서 본 예술촌과 비슷한 것 같았다. 무료와인시음코너가 있다고 해서 구태여 간 것인데, 안내인이 없어 무료시음도 하지 못하였다. 운동장에는 성수기에만 문을 여는 듯한 작은 커피판매소와 자기 등치만한 집에 살고 있는 시베리안허스키가 있었다. 

어둑어둑해진 길을 따라 숙소로 돌아갔다. 신은 오늘 결합하기로 하였는데, 사정이 생겨 못오게 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3인분을 주문했던 바베큐의 1인분을 취소하고, 그냥 둘이서라도 즐기기로 하였다. 밤바람이 찰 줄 알았는데, 별로 차지 않았고, 삼겹살과 갈치와 홍합탕을 화이트라는 소주와 함께 먹고 마셨다.

밤이 늦도록 술을 마시고, 스카이라이프의 오디오채널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그리고 수첩에다가는 그림을 그리고, YTN을 보며 황우석 사태에 대해 뭐라고 떠들다가 잠이 들었다.

12월 24일 토요일

여전히 상쾌한 아침을 맞았다. 완연한 감기환자가 되어버린 나는 애써 그 사실을 무시한 채, 콧물을 흘리고 재채기를 하며 계속 여행을 즐기기로 하였다. 원래는 일요일까지 있을 예정이었지만, 고속도로가 밀릴 것이 걱정되어 그냥 토요일에 돌아가기로 작정하였다.

숙소를 정리하고, 돌아나오며 주변의 작은 해수욕장들을 들러 자유로운 영혼인 척 사진을 좀 찍었다. 금산을 바라보며 이성복의 시를 읊는 만행도 저질렀다. 토요일의 목적지는 가천다랭이마을이었다. 기름 넣는 것을 깜박했던 우리는 기름이 떨어질까봐 엄청 애를 태웠다. 다랭이 마을로 가는 길에 여기쯤 좋은 카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우리는 근사한 카페를 발견했다. 사실 돈 걱정이 좀 되었는데, 메뉴판을 보고 나서는 정말 걱정되었다. 하지만, 돈 때문에 기분을 망칠 수는 없는 일. 가장 싼 메뉴를 시키고 와인을 한 잔 마실 수 있냐고 물었다. 잔으로 파는 와인은 없다는 말에 조금 실망했는데, 싹싹한 웨이터가 그냥 한 잔 드리겠다고 말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창밖엔 배 한 척이 분주히 그물을 돌며 수확을 하고 있었다.

다랭이 마을에 도착해서는 우리는 오래된 골목을 조금 죄송스러워하며 돌아보았다. 조용한 마을에는 가끔 아이들 소리와 관광객 소리만 들렸다. 계단식 논과 밭을 따라 쭉 내려가니 바다와 접해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바다끝까지 갔다. 남해 다랭이 마을의 바닷가에는 뭐가 있는지 사람들이 알까?

정과 나는 바다끝에서 그것을 발견하고는 너무 깜짝 놀랐다. 바위를 타고 내려가야 하는 곳이어서 다른 관광객들은 얼씬도 하지 않는 곳에 그것은 천연덕스럽게 있었다. 정은 이 내용을 스펀지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보내서 빛나라 지식의 별 다섯 개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그것을 고려중이다.

육지의 끝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놀았다. 네 시가 넘어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 동네 할머니 한 분이 어디서 왔냐고 물으신다. 어디에서 왔고, 오늘 갈 예정이라고 하니까 여기서 거기가 어딘데 이렇게 늦게 가냐고 성화셨다. 사투리를 잘 못알아들어 할머니가 혼을 내는 줄 알고 나는 약간 당황하기도 했었다.

남해대교로 돌아 고속도로를 타기로 하고, 남해대교를 갔다. 생각보다 남해대교는 크지 않았지만, 남해대교를 건너 뒤를 돌아봤을 때 해가 살며지 지고 있을 무렵이어서 아주 운치가 있었다.

그리고 다섯 시간 후, 나는 다시 나의 생활공간으로 돌아왔고, 4대 성인 중 한 사람의 탄생을 축하한다는 미명하에 저녁 6시까지 잠만 잤다는 싱글들을 불러 모아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12월 27일 화요일  

사무실에서 일을 하지 않고, 긴 여행기를 쓰고 있다.

실은 여행기라고 할 것도 없다. 있었던 일을 잊지 않으려고 기록하는 차원에 불과하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번에 선택한 여행지가 정말 맘에 들었다는 것이고,  마음에 위로를 얻었다는 것이다. 유적지를 돌아보는 대신, 자연을 만났고, 쫒기던 마음도 누그러뜨렸으니 어찌 좋은 여행이었다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함께 가지 못한 신은 아직도 괴로워하고 있으니, 사람 놀리는 재미까지도 얻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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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1월달부터 노동지수가 엄청 높았다. 아니, 언제 안그런 적이 있었나만은.

어쨌든, 가공할 노동에 심신이 지쳐갈 때 쯤, 정이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야금야금 읽으며 약을 올렸드랬다. 프리랜서인 정은 외근이 잦았던 11월, 가끔 나를 찾아와 함께 돌아다녔던 것인데, 나는 일을 하는 동안에  정이 읽는 <여행의 기술>이 그렇게 읽고 싶을 수가 없었다. 정은 가끔 책을 읽다가 괜찮은 구절을 낭독하기도 했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정이 그 책을 다 읽자마자 뺏어 들어 읽어내렸다.

여행.

혼자 여행을 떠난 것을 여행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내 여행의 역사는 고작 6년에 불과하다. 발신금지의 핸드폰과 보름치의 짐이 들어있던 커다란 가방을 가지고 떠난 2000년의 2박 3일 해남여행이 처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후로 기회만 되면 여기 저리 떠나곤 했다. 혼자 다닌 여행이 5년.

올해 베트남 여행을 끝으로 나는 왜 여행을 하는가에 대한 '심각한(?)' 회의에 빠졌다. 그리고 나서는 주위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보았다. 함께 떠나는 여행은 사람 수만큼 깊어지기도 하였다. 그게 10월의 일. 그 후로 함께 떠나는 여행에 재미가 들려 틈만 나면 여행 번개를 쳤다. 11월까지 그것만 세 번이다. 그리고 이제, 올해의 마지막 여행, 남해여행 계획을 마치고 한참을 설레고 있는 중이다.

숙소를 예약하고, 무엇을 먹을 지, 무엇을 볼 지, 무슨 책을 가져갈 것인지, 무슨 음악을 들을 것인지, 남해의 날씨는 어떤지, 어떤 길로 가야 운치가 있을 지 정보를 수집하고 계획을 세운다. 물론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속상할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떠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그리고 떠나면 즐거울 거니까.

보통은 여행의 기쁨 중 첫번 째로 "기대"를 꼽았다. 천 표고, 만 표고 다 던진다, 그 말에. 떠남에 대한 기대, 떠남을 위한 준비, 여행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점철되는 여행가기 전의 순간들. 그것만큼 기쁜 일이 어디있으랴. 지금 나는 기대의 단계에 있다. 이 단계를 충분히 즐기고 싶다.

보통은 얄미울 정도로 여행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잘 끄집어 내어 기록했다. 여행에의 기대, 여행지에서의 실망, 여행지에로도 여전히 따라오고만 현실의 고민들, 그리고 여행하면서 느끼는 숭고함, 아름다움과 같은 것들. 마지막으로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 내 방안에서의 여행에 이르기까지.

보통의 책을 읽으면서 나만의 기쁨을 뺏긴 것 같은 상실감에 잠깐 빠졌다. 비행기, 기차, 버스와 같은 탈 것과 모텔, 유스호스텔, 민박집, 호텔처럼 잠시 머물 곳과 그 보다 더 잠시 머무르는 휴게소에 대한 나의 애정들을 그가 가져가 버린 것같은 생각이 들어버렸으니까.

하지만, 또 다시 여행을 기대하는 지금. 그런 사소한 얄미움은 잊고, 이 기쁨조차 보통과도 함께 나누고 싶다는 대범한 생각이 든다. 하하, 여행은 이런 것이다.

* 보통은 얄미웁기 때문에 별 한 개 덜 주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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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04-25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남도여행을 가려고 하니 보통의 <여행의 기술> 이 문득 떠오르더군요. 몇개의 리뷰를 뒤적이며 읽다 님의 글이 괜히 정겨워 몇자 남기고 갑니다.^^
 

올려 놓을 수 모든 곳에 종이들을 널어 놓았다. 이런게 된 지 일주일이다. 더럽고 복잡하다는 말 외에 또 다른 설명이 필요할까. 이렇게 정신 없는 와중에도 밥은 꾸역꾸역 먹고, 틈틈이 잠을 자기도 했고, 무언가는 조금씩 완성되어 가고 있기도 하다. 그러는 새에 심란했던 마음도 잦아들었고, 다시 즐거운 날들을 계획해보기도 한다.

점심을 먹고 괜히 왔다갔다하다가 전화기를 보니 부재중 통화가 와 있었다. 집이었다. 터울이 깊은 동생의 수능점수가 나왔나 보다 하고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받으셨다. 외삼촌이 조금 전에 돌아갔다, 라고 말씀하셨다.

엊그제 외삼촌이 위독하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엄마는 오빠 마지막 모습을 놓칠 새라 부랴부랴 진부령을 넘었다고 했다.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힘겨운 숨을 몰아 쉬는 모습을 막 보고 나왔다고, 그날 밤에 전화를 했었다.

그러고 딱 이틀을 더 사시다가 오늘 가신 거다.

이것으로 조실부모한 엄마는 오빠 넷을 모두 잃게 되었다. 

사무실 계단을 어슬렁거리며 외삼촌에 대해서 생각했다. 어릴 때 기억에 외삼촌은 시골에서 대서소같은 걸 하셨던 것 같다. 시골 사람들 사이에서 머리좋기로 소문도 났었다고 했다. 가끔 며칠 방학을 나러 가면, 무슨 말씀이 그렇게 많으신지. 어렸던 나는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외삼촌은 애달프게 생각하는 사람 하나 없는 우리 엄마를 참 아껴줬던 사람이었다.

엄마, 괜찮아? 라고 물어보니, 늙으면 다 돌아가는데, 뭘. 하신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일축하거나, 세상의 이치를 그대로 받아들여 괜찮거나.

어떤 쪽이라도 엄마는 마음이 슬플 것이다.

내 주위를 둘러싼 종이 조각들을 빨리 다 해치우고, 나도 내일은 진부령을 넘어야겠다. 내 유년시절 유이한 외삼촌을 뵈러, 그리고 언제나 볼이 빨간 외숙모를 보러, 형제를 잃고 자식을 부르는 엄마를 보러.

 

-이게 다 며칠 전부터 입방정을 떤 내 탓인 거 같아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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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월요일 M을 "다시" 만났다. 계획대로 M을 보자마자 꼭 안아주었고, 따뜻한 저녁식사를 하고, 잡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오뎅집에 들러 술을 한 잔 하였다. 그러고도 모자라, 나의 집에서 함께 놀다가 잠을 잤다.

애정표현에 인색한 나는 그것이 얼마나 바보같은 짓이었는지 몇 번이고 반성하며, M에게 참아달라고 부탁하며 몇 가지 고백을 했다. 고백을 하는 것도 모자라 집에 돌아가는 길엔 낯간지럽게도 팔짱을 끼고, 잠을 잘 때도 M의 옷깃을 잡거나 하였다.

그런 애틋한 감정은 그로부터 딱 하루 더 갔다. 문자메시지를 보내던가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 나는 그때의 간절함은 잊고 그냥 그냥 살아가고 있다.

아무리 '순간'의 감정에 무게를 두려고 노력해봐도, 내가 얼마나 얄팍하고 냄비같은 감정의 소유자인지 나는 다시 확인하였다. 그런 내가 어이없다고 생각하며 웃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나라도 괜찮다,며 함께 놀고, 먹고, 떠드는 친구들아, 땡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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