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앞에서 - 한 사학자의 6.25 일기
김성칠 지음 / 창비 / 199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를 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역사를 거대한 물줄기로 보는 거시사이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나 독일의 사회구조사, 프랑스의 아날학파 등은 ‘역사의 연속적 진보’라는 믿음 위에 익명의 거대집단을 역사의 집합적 주체로 삼아 큰 흐름과 줄기를 세워보려 했다. 미시사는 거시사에 대한 일종의 반항으로 성립된 역사학 분과다.

개인의 일기나 편지들도 역사적 사료로서 중요한 것들인데 이런 개인의 기록들을 통해 역사를 보는 것도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는 역사라 할 수 있다.

한 사학자의 6.25 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역사 앞에서’는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학문과 가정생활, 교우에 관계되는 것을 주로 실은 45년-46년 그리고 50년 1월의 일기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50년 6월 25일부터 51년 4월 8일까지의 일기, 그리고 맨 마지막에 실린 동료학자, 조카, 제자, 아내의 추모의 글 이렇게 세부분으로 말이다.

지은이의 아내도 말했듯이 지은이는 학자로서의 소명을 갖고 하루하루를 기록했다. 단순한 신변잡기나 일상의 기록들이 아니라 극심한 혼란기 함께 살아갔던 사람들과 그들의 생각, 처지가지도 그리고 당시의 사회분위기까지 목적의식적으로 꼼꼼히 기록했던 것이다.

우리 현대사를 보면 온갖 모순이 복합적으로 합해져 모순의 결정판으로 볼 수 있다. 이는 후에 다양한 문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그 당시는 가슴 아픔과 울분이다.

지은이 김성칠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스스로가 “역사의 필연성을 믿었으나 성격이 다우지지 못해서 온건한 학우로 지냈음” 이라고 정의했듯이 그는 민족을 우선시하는 우파에 가까운 보수적인 사학자였던 것 같다.

그가 쓴 조선역사도 그렇고 열하일기 번역본도 그렇고 그는 항상 우리 민족을 우선시하는 그런 학문을 하였다. 전쟁이 치열해지고 서울신문에서는 미군이 원폭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그에 반발해 쓴 일기를 보면 더욱더 그렇다. 현재 스스로 보수주의자라 하는 사람들이 민족도 내팽개치고 미국을 위한 집회, 기도회를 갖는 것을 보면 이 땅의 보수주의의 전통이 언제부터 왜곡되었는지 가슴을 칠 일이다. 그래서 언젠가 김용옥은 어떻게 김정일을 처단하고 같은 민족을 몰살하자는 사람들이 스스로 보수주의자라 하는지 도대체 알 수 없다는 말을 했나 보다.

그는 보수적인 우파의 사상경향을 갖고 있었지만 좌익친구들에 대한 표현들에서 그가 그들에게 갖고 있었던 애정을 읽을 수 있다.

엉터리 선거에 대한 부분과 의용군 지원에 대한 그의 시각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후 이뤄진 이산가족들의 만남(의용군에 입대해서 자진 월북한 분들, 또는 월북한 학자, 예술인들이 많았음)을 생각나게 했고 그의 일기가 역사적인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지만 이 기록들만이 사실이고 진실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쨌든 해방 이후 북은 토지개혁으로 수많은 소작농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그 벅차오름의 역사는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도 통탄했듯이 문화인들과 기술자들의 월북은 당시 남한이 이들에 대한 인권과 생활보장을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월북한 이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많은 부분이 달랐는지 모르겠고 이후 벌어진 정치적인 숙청으로 많은 인재들이 안타깝게 사라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이 토대가 되어서 전쟁이후 완전 파괴된 그들의 조국을 일으켜 세우고 남한보다 부강한 나라를 60년대까지 유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전쟁의 혼란한 가운데서도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방송이나 신문이 열악했던 그 상황에서도 그 당시 정세를 정확하게 읽어내기도 했다.

그의 일기 곳곳에서는 부모, 가족, 형제에 대한 애틋함을 볼 수 있다. 가족에 대한 다정다감함뿐만이 아니라 집에서 키우는 동물, 식물에 대한 각별한 마음은 그가 얼마나 온순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나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 당시 남한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 노동자들과 그가 느끼는 전쟁은 틀림없이 다른 부분들이 많았을 것이다. 서로가 위협받는 생명에 대한 느낌도 달랐을 것이고 비슷했다고 할지 모르나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방법 또한 달랐을 것이다.

북의 한글전용에 대한 그의 호의와 다른 인텔리들의 반발을 보면 요즘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식인, 학자가 학문을 하고 글을 쓰는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무지한 백성들이 최대한 알지 못하게...

난폭운전을 하는 흑인을 보고 그들의 피는 이러한 문명의 이기를 누리기에는 아직 이른 것이 아닌가라는 표현에서는 흑인에 대한 편견도 느낄 수  있다. 그의 이런 편견과 그 당시

전쟁에 참전했던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느꼈을 수많은 편견들이 겹쳐지면서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학자답게 파괴되고 훼손되는 문화유산과 귀중한 사료들을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그가 안타까워하고 가슴 아파했던 것은 그것보다는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이 전쟁을 어떻게 보십니까?”  “첫째는 동족상잔함이 슬프고 둘째는 미군과 조선 사람이 겨루어 방금 피를 흘리고 있는데, 우리는 오히려 미군에 마음을 붙이고 있는 사람이 많게끔 되었으니 이 사실이 더욱 슬프다”

일제 식민기간, 해방 이후, 또 전쟁을 거치며 우리는 많은 인재들을 잃었다. 김성칠 또한 잠깐 다니러간 고향에서 왜 좌익에게 살해되었는지 그 이유를 충분하게 추측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죽음은 아쉽기 그지없다. 그는 틀림없이 전쟁 중의 양민학살에 대해서도 꼼꼼히 기록했을 것이고 우리민족의 주인의식을 고취시키는 역사연구를 했을 것이다.


항상 새해에는 수많은 다짐을 한다. 그 중 하나는 일기쓰기(사실은 메모라도)인데 그의 일기를 보면서 단순한 나의 일상뿐만이 아니라 진지한 내면의 성찰(?)을 글로 남길 수 있다면 하는 지키지 못할 바램을 가져본다.

한 사람의 기억과 회상에는 한계가 있다. 어떤 사건에 대해 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기록을 남긴다면, 그 기록들이 서로를 비판하고 교정해 진실의 성채에 한발 더 다가설 수 있도록 이끌 것이다.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마르쿠제의 말처럼 “지나간 고난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그 고난을 야기했던 힘들을 무찌르지 않고 잊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2005년 우리 모두 기억하고, 기록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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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6-22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리뷰를 너무 늦게 읽었네요.
저도 오래 전 참 재밌게 읽었던 책인데......
로자님 말씀처럼 흑인에 대한 약간의 편견 등은 엿보였지만
균형감각이 참 미더운 글들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