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 번지점프를 하다
우애령 외 지음 / 글빛(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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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이든, 어떤 책이든 작가의 약력을 보게 된다. 일부러 주의 깊게 살펴보지는 않지만, 독자라면 작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기 마련이 아닐까 싶다. 세대가 비슷한 작가의 작품에서는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유행했던 노래나 패션을 소설 속에서 만나기라도 하면 얼마나 반가운가. 혈연 지연 문화가 강한 우리 사회, 작가들에게도 같은 이유가 있었나 보다. 그런 이유로,  이화여대 출신의 12작가가 이화와 청춘을 테마로 소설집을 냈다. 이화와는 관련이 없지만, 청춘은 누구에게나 설레는 단어가 아니던가. 

 12명 중 정미경, 권지예, 김다은, 함정임, 배수아, 오현종 작가를 뺀 나머지 작가는 내게는 생경한 작가다. 소설은 자연스럽거나 의도적으로 이화여대를 배경으로 했다.  각기 다른 세대로 묘사되는 소설 속 이화여대의 모습을 만나는 점이 흥미롭다.  

 좋아하는 작가인 정미경의 소설부터 먼저 읽었다. 소설집의 제목과 같은 <번지점프를 하다>는 청춘을 그렸다. 주인공 하은의 주변에는 두 남자가 있다. 남자친구 강은 가난한 대학생이며, 아르바이트 사업체의 사장인 박은 재력가이다. 강은 하은을 사랑하지만 초라한 자신을 온전히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언제나 멋지게 인생 상담을 해주지만, 외로운 사람임을 하은은 안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곁에서 돌보기 위해 더나는 강과 함께 번지점프를 한다.  ‘강과 나, 두개의 심장만이 남는다. 발목을 묶은 끈이 중력에 저항하여 온몸을 잡아채기 전, 나는 강의 등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p 161  식상한 소재처럼 보이지만, 청춘이기에 젊음이기에 아름답다. 

 초등학교 6학년 딸이 화자로 소설을 이끌어 가는 고은주의 <그곳에 가면>에서 그곳은 이화여대를 지칭한다.  모교 근처로 이사를 온 엄마는 종종 모교를 산책하며 그 시절을 추억한다. 열정적인 그때와 달리 전업주부를 선택한 자신의 선택이 옳은 선택이었는지 자문한다. 이런 엄마의 모습과 초경을 시작한 딸의 모습이 대조적이면서도 같은 여자라는 동질감을 잘 표현한 소설이다.

 “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나처럼 이 학교를 다니기를 원하는 게 모순처럼 느껴지겠지. 하지만, 네가 나처럼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자의식이야말로 이 학교가 내게 준 선물이야. 끝없이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채찍질하게 만드는 힘을 나는 여기서 얻었거든. 그러니까 너도 나처럼 여기서 많은 걸 얻었으면 좋겠어. 나처럼 후회하는 길을 선택하지만 않으면 돼. 아니, 어떤 길을 가든 자의식을 잃지 않고 당당하지만 하면 돼.”p 315

 이 말은 세상 모든 엄마가 모든 딸들에게 하는 말이다. 결혼과 동시에 느껴지는 육아에 대한 부담, 일과 가사에 대한 책임감이 왜 여성에게만 더 무거운 것일까? 

 바다로 뛰어들어 죽음을 맞이하는 소설가의 이야기인 권지예의 <딥 블루 블랙>과 소설을 쓰고 싶어했던 헤어진 남자친구 K대신 소설가가 되어 지난 시절을 회상하는 소설 오현종의 <k의 어머니와 면회를 갔다>는 소설가인 작가의모습도 엿볼 수 있다. 화려함으로 치장하고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 여대생들 속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하는 학생을 보여준 권리의 <정박>은 대학 사회를 현실적으로 묘사한 씁쓸한 소설이었다.

 소설은 청춘을 기억하게 한다. 분명 불안했던 시절이었고 모든 것에 서툴러 상처가 있었음에도 뜨거운 열정의 한 컷으로 각인된다. ‘우리들이 어서 빨리 스무 살이 되고 싶어하듯 엄마는 다시 뒷걸음질 쳐서 스무 살이 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청춘은 아마도 스무 살 언저리에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p 297  나도 그랬다. 스무 살이 되기 전 스무 살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듯 했다. 스무 살, 프르스름한 불투명한 느낌.  다른 빛으로 변화할 수 있고, 다른 무엇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여전하게 가슴 속 한 자리에 생생한 그 느낌이 삶을 지탱하는 한 부분이 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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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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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 일곱이 되던 해, 엄마와 처음 단 둘이서 여관에 누웠다. 아주 작은 방이었고, 온돌이었다. 4시간을 서서 시외버스를 타고 도착한 생경한 곳에서 엄마도 나도 긴장하고 있었다.  추웠던 기억은 없고, 엄마의 깊은 한 숨 소리만 기억에 남는다. 열 일곱의 나는 좀 더 넓은 세상을 꿈꿨고, 엄마는 내 고집에 못이기는 척 져주었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내게 해장국 비슷한 것을 하나만 시켜 놓고 엄마는 말했다. 자취방을 얻지 못하면 그냥 내려가는 거라고. 맛 없는 밥을 젓가락으로 헤져으며 고개만 끄덕였던가. 아니, 엄마는 말뿐이며, 꼭 자취방을 구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나이의 곱절의 시간이 훨씬 지났고, 엄마는 이제 내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 집을 떠나야 했던 이유는 달랐지만, 외딴방 열 여섯 소녀를 만나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 아니다, 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자전적 소설인 외딴방에 등장하던 엄마는 여전하게 살아 있는데,  나에게는 엄마라 부를 수 있는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열 여섯, 작가가 되고 싶었던 소녀는 작가가 되었고, 그 무언가가 되고 싶었던 나는 여전하게 그 무언가를 동경한다. 내게 주어진 방은 주인집 거실을 돌아 계단을 터고 옥상으로 열린 문을 열면 만나는 작은 옥탑방이었다. 우연하게 집을 구하다 처음 만난 S와 고등학교 졸업까지 3년을 살았고, 대학에 입학을 하고도 몇 달을 혼자 더 살았다. 물론 내가 살았던 시대는 소설 속 열 여섯의 소녀와는 다르다. 그 시절에도 산업체라 해서 야간 학교가 있었지만 가난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컸다.  

 그러나 소설을 통해 나를 보는 것은 감성적인 것이다. 표정이 많지 않았던 시절, 밥 물을 맞추지 못했던 나, 한꺼번에 너무 많이 밥을 해서 노랗게 색이 변할 때까지의 밥으로 도시락을 쌓고, 야간 자율학습이 끝난 밤 조심조심 설거지를 했던 시간이었다. 외사촌과 번갈아 밥을 했던 것 처럼 S와 밥을 나누어서 했다. 공부에 대한 열정도 조금씩 사그라들었고, 내 지식의 크키는 곧 바닥을 드러냈다. 꼭 학교를 가야 했던, 그래서 작가 되어야 했던 열 여섯의 소녀의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웠고, 부스스한 퍼머 머리에 낡은 외출복 뿐이었던 엄마에게 참 못된 딸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아마도 외딴방은  지금 쪽방촌이라 불리는 곳이었을 것이다. 열 여섯에서 시작해 열아홉 까지 살았던 그 공간을 잊고 싶었던 것은 그 시절을 함께했던 사람들에 대한 아픔 이었을 것이다. 1980년대의 산업 현장을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노조에 가입하면 가고 싶었던 학교를 가지 못했던 그 시절, 어린 소녀가 회사를 얼마나 두려워했고, 직장 동료인 노조원에게 얼마나 미안한 마음을 가졌을지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필사하며 소녀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도 짐작 할 수 없다. 유명한 소설가가 되어 그 시절의 지인들은 그저 반가운 마음에 연락을 취하고 쏟아지는 관심이 부담스러워 또 하나의 외땅반으로 숨어버린 그 마음을 알지 못한다. 다만, 혼자이고 싶은 순간이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오로지 나 혼자만 숨쉬고 싶은 순간을 경험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녀에게 소설은 무엇 이었을까? 살아갈 수 있는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소설에서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아파하고,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며 나 아닌 다른 이로 살고 싶었는지 모른다. 신경숙은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글쓰기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이 갖는 의미, 소설을 통해 딱지가 내려 앉지 않은 상처에 딱딱한 딱지가 들어앉아 나아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파업이 일어나고, 임금이 체불되고, 동료가 떠나고, 데모에 참여했던 오빠가 다치고, 학교를 떠날 수 밖에 없던 사람들 속에 대학이 가고 싶어 학원으로 학교로 바쁜던 자신이 때론 밉고 싫었을 것이다. 무엇이 되고 싶었던 시절, 그 무엇을 위해 자신을 다독였고, 꿈을 향한 걸음이라 여기며 참아왔던 시간들. 그러나  소설 속 소녀가 사랑했던 희재 언니의 죽음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 될 수 없고, 자신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설령, 그것이 희재 언니의 운명이고 선택이었다 해도 소녀는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그림자와 평생 함께 살아갈지도 모른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순간을 끄집어 내어 글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태어나게 하는 과정이 그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소설이니까 하며 살을 붙였다가 다시 떼어내기를 반복하며 그 시간 내내 열 여섯의 소녀로 살았을 그녀를 만나는게 아프다. 고단한 삶을 살았을 그녀가, 편안 자세로 잠들지 못하는 그녀가, 희재 언니의 목소리를 듣는 그녀가 아프다.

 그 시절, 권력이란 이름으로 약자의 삶을 농락한 그들에게 화가 난다. 그저 웃고 싶었고, 그저 공부하고 싶었고, 그저 합당한 권리를 누리고 싶었을 뿐인데. 2009년, 지금은 어떤가? 여전하게 공권력은 시민앞에 겁을 주고, 여전하게 외딴방이 존재한다. 외딴방이 아니더라도, 열 여섯의 소녀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슬프다. 

 신경숙의 소설은 슬퍼서 때로 주저하게 된다. 눈물을 삼키케 하고 가슴에 바람의 길을 만든다. <외딴방>은 <엄마를 부탁해>와 나란하게 고백의 글이다. 해서 더 슬프다.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지만, 그녀의 삶이라서 더 슬프고, 우리들의 삶이라 더 아프다. 열 일곱, 그 겨울을 생각한다. 점점 더 희미해지는 엄마의 슬픈 표정을, 마흔을 바라보는 내가 닮아가고 있다. 내가 동경하는 그 무언가를 다시 꿈꿀 수 있는 나만의 외딴방을 향한 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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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비 독살사건 - 여왕을 꿈꾸었던 비범한 여성들의 비극적인 이야기
윤정란 지음 / 다산초당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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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실록’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만난 왕비들은 대부분 후궁을 질투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아무리 왕비라 해도 여색을 밝히는 남편을 이해할 여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왕비가 행했던 업적도 분명 있을텐데 역사속 왕비에 대한 평가는 아주 미비했다. 최근 들어 왕비나 왕세자에 대한 새로운 평가들이 나오고 있지만, 남존여비 사상이 강했던 조선 시대를 생각하면 역사가 기록한 사실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왕비 역시 권력의 중심이었으니 반대 세력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후궁이라는 제도가 있었던 조선 시대 왕비의 자리는 영원한 것이 아니었다. 남편인 왕이 죽고 난 후, 아들을 낳지 못한 왕비의 권위는 이름뿐이었다. 그나마 아들이 있었다 해도 그 아들을 지켜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왕비들이 외척의 힘을 키우고자 했을 것이다. 

 책은 역대 왕비중 정치적으로 이용당했던 7명 왕비의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엄격한 자녀 교육으로 폭빈(暴嬪)이라 불렸던 소혜왕후 한씨, 연산군의 생모 윤씨, 선조왕의 왕비가 되고 영창대군까지 낳았지만, 기구한 삶을 산 인목왕후 김씨, 폭군이었던 남편 광해군과 같은 운명을 지녔던 유씨,  인조의 며느리인 소현세자빈 강씨, 뛰어난 미색을 자랑한 숙종의 후궁이었던 희빈 장씨, 시아버지 흥선 대원군과 첨예하게 대립했고 일본군에서 암살당한 민씨.  이들은 과연 책의 제목처럼 독살당했을까? 

 왕비나 세자빈으로 간택된 그들은 분명 명민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운을 타고 나지 못한 여성들이었는지 모른다. 남존여비 사상이 있던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며 살았을 것이다.  점술을 빌어 인현왕후를 죽이려 했던 희대의 요부라 불리는 희빈 장씨. 그러나 사대부 출신이 아니었던 그녀가 자신의 집안 사람들인 중인에게 벼슬을 주었던 것은 조선 시대 신분 제도의 불합리성을 말한다 할 수 있다.  

 청나라에 볼모로 있다가 조선으로 돌아와 원인 모를 죽음을 당한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도 조선이 학문인 성리학이 아닌 새로운 학문을 도입하려 했다. 그러나 부모인 인조는 조선이 아닌 자신의 안위만 걱정하여 결국 아들과 며느리와 손자까지 죽게 하고 말았다. 만약,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청에서 사무역에 직접 뛰어들었던 세자빈 강씨로 인해 다른 나라와의 무역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일본에게 암살당한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민씨는 최근에 가장 많이 회자되며 그 평가도 다양하다. 흥선 대원군의 쇄국 정책에 반하여 여러 나라의 문물을 수용했기에 외국 사절들은 뛰어난 정치력을 극찬하고 있다.  그러나 개항 후 백성들을 돌보지 않았던 국모라는 평도 있다. 거론된 왕비들은 아내도, 어머니도 아닌 왕비였기에 정치적으로 이용당했고, 죽음을 맞아야 했다.

 조선 시대 여성으로써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왕비들. 화려한 의복 속에
감춰진 그들의 생활은 화려함이 전부가 아니었다. 우아한 백조처럼 그들도 겉으로는 위엄을 지켜야 했지만, 속으로는 왕의 사랑과 자신의 아들을 위해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도 없었다. 암투가 끊이지 않았던 왕비라는 자리에 그들은  평범한 촌부(村婦)보다 얼마나 행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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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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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껏 이렇게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소설을 시작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이 글을 소설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단지 마땅히 붙일 다른 이름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줄거리다운 줄거리도 별로 없고 결말이 죽음이나 결혼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p 9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 독자는 혼란스럽다. 이것이 계획된 도입인지, 그저 소설의 시작일 뿐인지.  소설을 이끌어가는 화자의 직업은 작가이다.  저자인 동시에 소설 속 인물인 것을 소설 속에서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소설의 첫 문장은 ‘서머싯 몸’의 솔직한 표현이며, 소설을 설명하는 게 맞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은 1919년을 시작으로 1929년 미국 경제 공황 시기를 배경으로 미국 젊은이들의 삶을 쓰고 있다. 1차 세계 대전에 조종사로 전쟁에 참가하고 돌아온 래리, 래리의 약혼자 이사벨, 사업가의 아들 그레이, 이사벨의 친구 소피와 그들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쟁에서 죽음을 목도한 래리는 자신의 삶의 전환점을 맞는다. 평범하게 직업을 갖고 결혼을 하는 삶이 아닌 새로운 무언가를 찾으려 애쓴다.  파리에서 2년 정도 공부를 하겠다는 래리. 이사벨은 래리를 기다리기로 한다. 그러나 파리에서 다시 만난 래리와 이사벨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약혼자가 아닌 친구로 남기로 한다.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확실히 알고 싶어.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지도 또 내게 불멸의 영혼이 있는지, 아니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인지 알고 싶어.” “하지만 래리, 그런 질문들은 수천 년 전부터 사람들이 물어 온 것들이잖아. 만일 해답이 있다면 벌써 밝혀졌을 거야.”p 117

 이사벨은 파티를 즐기며 여유롭게 살아온 삶 대신 래리가 선택한 삶을 따라 갈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을 사랑하는 그레이와의 결혼을 선택한다. 현실적인 삶을 포기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방황하는 청춘들 곁엔 조언자가 있기 마련, 소설에서는 몸과 이사벨의 외삼촌이자 화자의 오랜 지인으로 등장하는 엘리엇이 있다. 엘리엇은 미국인이지만 유럽의 파리나 영국인과 어울리며 살아간다. 엘리엇은 파티를 열어 귀속과 부유 층을 초대해  그들과의 유대 관계를 지속한다. 물론 그는 대단한 경제력을 지녔다. 엘리엇은 조카인 이사벨이 래리보다는 그레이를 선택한 것을 지지한다. 그에게 래리는 그저 철 없는 이기적인 청년 일뿐이다. 이사벨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려 몸에게 객관적인 평가를 들고 싶어한다. 그럴 때마다 몸은 날카롭게 아사벨의 속마음을 확인시키며 당황케 한다. 

 래리는 여행을 시작한다. 책을 통사 것들이 아닌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얻기를 원한다. 탄광에서 일을 하고, 여행을 하고 인도에서 오랜 시간 머문다. 그는 삶의 본질적 의미, 선과 악에 대한 답을 찾아다닌다.  세계의 경제 공황으로 인해 그레이의 사업은 부도를 맞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엘리엇은 파리로 그들 가족들 불러들인다.  

 다시 파리에서 만난 래리와 이사벨. 래리를 보며 이사벨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래리는 구도자의 모습이다. 살아온 날들을 이야기 하며 자주 어울린다.그러다 우연하게 어린 시절 친구인 소피를 만나게 되고 마약과 술에 찌든 소피와 래리의 결혼 소식을 접한다. 이사벨은 자신과의 결혼을 선택하지 않은 래리가 보잘 것 없고 엉망이 된 소피를 선택함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이사벨은 용의주도하게 계획을 짜 소피가 래리를 떠나게 만든다.엘리엇의 유산으로 다시 재계한 이사벨의 가족은 미국으로 돌아가고, 방탕한 삶을 끝내지 못한 소피는 죽음에 이른다. 젊은 구도자 래리는 여전하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다.

 화자인 몸은 그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대신 한 발 정도 떨어진 곳에서 관찰한다. 소설은 1920년대 파리나 영국 사회의 화려한 예술과 문화를 보여준다.  가면 무도회와 멋스러운 별장, 고가의 의류와 보석으로 지창한 이사벨과 엘리엇, 왁자지걸 시끄러운 식당과 허름한 숙소의  소피와 래리의 대조된 삶은 시대을 반영한다. 소설엔 분명 놀라운 사건이 없다. 이사벨이나 래리의 삶이 특별하다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선택일뿐이다. 이사벨의 선택과 래리의 선택이 다를 뿐이다. 500쪽이 넘는 책은 예상외로 재미있게 읽힌다. 이것이 작가의 힘일까?  

 대부분의 고전이 그러하듯 <면도날>도 출판에 이어 1946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면도날은  ‘피츠제럴드’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떠올렸다. 전쟁과 세계 공황, 그 안에서 방황하는 젊은이들. 같은 시대가 이렇게 다른 느낌으로 묘사될 수 있구나 싶었다. 살아가면서 선택해야 할 많은 것들,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할까? 그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일 것이다. 면도날, 제목에서 느껴지는 그 날카로움은 날카롭게 사고하고 선택하라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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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지음 / 열림원(도서출판)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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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호승 시인은 슬픔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시인이다. 그에게 슬픔은 기쁨과 동시에 사랑이며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나는 오직 글쓰고 책읽는 동안만 행복했다>을 읽으면서 정호승 시인이 환갑의 나이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 왠지 시인은  내가 시를 처음 만났던 그대로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시도 그랬다.  아니, 어떤 글이든 시간이 지나서 다시 만나면 느낌이 달라진다. <슬픔이 기쁨에게>란 시가 내게 다른 말을 한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를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위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아가겠다 <슬픔이 기쁨에게, 전문 p 16~17>

 20대엔 그저 슬프기만 했던 시인데, 지금 내게 이 시는 함께 사는 세상이니, 주위를 둘러보라고 조용하지만 강한 어조의 외침으로 들린다. 소외된 이웃들을 외면하는 우리에게 훈계하는 시인의 목소리. 그리하여 슬픔과 절망을 이겨낸 진정한 기쁨을, 더불어 사는 기쁨을 맛보라고 말한다. 특히 이 구절은(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언제나 나만을 위해 눈물 흘리던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사람들은 때대로/ 수평선이 될 때가 있다// 사람들은 때때로/ 수평선 밖으로 뛰어내릴 때가 있다// 밤이 지나지 않고 새벽이 올 때/ 어머니를 땅에 묻고 산을 내려올 때// 스스로 사랑이라고 부르던 것들이/ 모든 증오일 때// 사람들은 때때로/ 수평선 밖으로 뛰어내린다 <삶, 전문p 66>

 삶은 그랬다. 어떤 날은 잔뜩 흐렸고, 어떤 날은 화창한 것. 산다는 것은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일,  천당만 있기를 바라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부질 없는 욕심인 것을. 수평선 밖으로 뛰어내려도 그곳엔 또 다른 삶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알아버렸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엇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이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운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 전문 p 102>

 점점 살기 힘든 세상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습관처럼 입에서 쏟아지는 불평, 불만들. 감사를 잊고 산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절망에 가득찬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이가 있는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고 감사한가. 정호승 시인의 시는 먼지 가득한 유리창 같은 우리네 마음을 씻겨주는 빗줄기와 같다. 너무 더러워 제 구실을 하지 못할 때, 시인의 강한 빗줄기가 우리의 창을 두드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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