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가 있어 기다렸던 책은 조금 늦게 도착했다. 책을 사는 일은 일상이 되었지만 사고 싶은 책을 바로 사는 일은 일상의 큰 즐거움이다. 사고 싶은 책을 바로 사는 게 무슨 대단한 즐거움이나 싶겠지만 사고 싶을 때 사지 못하고 나중에 사게 되면 당시의 기쁨이 조금 사그라든 기분이다. 사고 싶을 때 사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책이 도착했을 때 책을 바로 받아보지 못할 사정도 있고 예약판매일 때도 그렇다. 예약판매는 바로 책을 받아볼 수 없다. 그러니 사고 싶을 때 바로 책을 받아볼 수 없다. 좀 엉뚱한 말인가. 아무튼 그렇다.


기다리던 책은 김연수의 소설집 『눈 내리는 삼일포』였다. 사고 싶을 때 바로 샀지만 바로 도착하지 않은 책이다. 그리고 이서수의 『우리 착한 나진』은 제목에서 뭔가 알 것 같은 내용이다. 아직 읽기 전이다. 윤단과 최미래의 단편이 더 읽고 싶어서 『소설보다 가을 2026』와 10월엔 시의적절 시리즈도 구매했다. 신용목 시인의 『포도』다. 책을 감싸는 보랏빛이 좋다.





포도를 생각하면 여름이 자동으로 따라오는데 10월의 포도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좋아서 더 좋을 것 같은 김연수의 소설집, 이번에 읽으면 더 좋아할 것 같은 이서수와 윤단, 최미래. 그리고 신용목 시인은 가지고 있는 시집이 있지만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번에 산문집을 읽으면 무언가 겹쳐지는 게 있을 것 같다.


책이 있지만 자꾸 책을 산다. 아침에 읽을 책, 점심에 읽을 책, 저녁에 읽을 책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넉넉해진다. 읽는 날보다 읽지 않는 날이 많지만 책을 생각한다. 쓰는 날보다 쓰지 않는 날이 많지만 쓰고 싶은 마음을 꽉 잡고 있다. 사실 그건 읽기에 대한 마음이 더 그렇다. 그렇게 읽지는 않지만. 꽉 잡은 손, 꽉 잡은 마음, 꽉 잡은 가을. 손이 아플 정도로 꽉 잡고 있어도 좋을 그런 것들. 꽉 잡은 마음을 생각하고 필요한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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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6-10-07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혹시 김연수 작가 메이킹북 부록도 주문하셨나요? 인터뷰 내용이 참 좋더라고요. <포도> 책 너무 이뻐요. 저 시리즈 참 좋아하는데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눈부신 가을날입니다.

자목련 2026-10-08 11:37   좋아요 0 | URL
이 소설집은 제가 주문한 것과 선물로 받기도 했어요. 선물로 받은 책에 부록이 있었어요. 말씀처럼 정말 좋더라고요. 다음에는 메이킹북이 있으면 잊지 말고 함께 주문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포도> 표지 정말 예쁘죠? 블랑카 님도 즐겁게 만나시길 바라요. 짧아서 더 특별하고 아름다운 가을이에요!

다락방 2026-10-07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자목련님 덕에 이서수 작가 책 어제 처음 잀었는데 좋더라고요. 더 읽어봐야지 싶은데 언급하신 책 제목 보니, 말씀하신 것처럼 어쩐지 짐작이 되면서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자목련 2026-10-08 11:40   좋아요 0 | URL
제 덕분이라니 기분이 매우 좋습니다 ㅎㅎ
이서수의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았는데 단편, 장편 다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요.『헬프 미 시스터』도 좋았고요!
 
의미들 - 마음의 고통과 읽기의 날들
수잰 스캔런 지음, 정지인 옮김 / 엘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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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책이었다. 저자와 비슷하게 가까운 이의 입원과 퇴원의 반복을 지켜봤던 기억이 떠올라 읽기가 힘들기도 했다. 저자의 마음과 고통에 대해서는 전부 알 수 없지만 읽기의 위로와 의미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 있었다.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고 나를 위로한 책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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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이 언니에게 남긴 것 ㅣ 위픽
이서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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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때문에 막연하게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일 거라 기대했는데(그렇기도 하다) 아니었다. 꽤나 복잡한 생각을 생각을 건네는 소설이었다. 이서수가 건네는 여성 연대와 다양성. 그리고 이서수 식 유머랄까. 사랑은 무엇일까, 저마다의 사랑은 다른 것, 함부로 사랑을 정의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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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는 건 가만히 나를 관찰하는 일이다. 때로는 보이는 대로 외부를 기록하다 점점 그것은 내부로 파고든다. 결국 글쓰기는 말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나 해야만 했던 말들에 대한 다른 방식의 대화다. 말로는 차마 하지 못했던 일들에 대한 용기거나 뒤늦은 후회, 다짐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처음부터 쉽지는 않다. 누구에게 보일 목적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나만이 읽고 쓰는 글이라 해도 조금은 주저하거나 조금은 글 뒤로 숨고 만다. 그러나 결국엔 감정이 담긴 글을 쓰고야 만다. 그것이야말로 글을 쓰는 기쁨이고 글을 쓰는 위안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마주의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말할 때』를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특성상 말을 크게 해야 하고 큰 목소리로 정확하게 아이에게 말을 건네야 할 치료사(언어, 놀이, 상담 등)를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다른 글이었다. 어쩌면 외부인인 내가 알지 못하는 내부인의 진짜 이야기가 그러하다는 걸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특수한 상황에 놓인(보편적인 이용자) 이들과 반복적인 내용을 전달하거나 학습시키는 일, 그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외부로 드러나는 장면이나 드라마나 영화처럼 포장된 이미지가 실재는 아니라는 정도다.


그러니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치료사라는 직업과 일을 떠나 치료사란 개인에게 맡겨진 막중한 책임을 처음 느끼고 생각했다.복지관이나 사설 센터에서 선생님이란 호칭으로 불리지만 4대 보험이나 정직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 작은 공간에 아이들 치료를 위한 놀잇감이나 도구를 사비로 구입하고 대소변 실수를 하는 아이를 감당하는 일까지 하루하루 나아지기를 바라는 부모(조력자, 모든 보호자)에게 상태를 전달하고 앞으로 방향까지 계획해야 한다. 감사를 위한 서류 업무는 물론이고 센터의 청소까지.


아이를 관찰하고 의연하게 바라봤던 그 수많은 의식과 기록들을 굽이굽이 기억에서 끌어올리는 것을 끊임없이 마주해야 하는 일은 그래서 가늘고 길다. (본문 중에서)


업무나 행정에서 한계를 느껴도 그것에 대한 개선이나 요구사항을 정확히 전달할 창구가 없다는 걸 낄 때 그 마음은 어떨까. 동료이면서 각자의 치료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서로의 시간에 들고나는 것 정도만 인식하는 일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할까. 누군가는 그저 직업이라고 직장일 뿐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이직을 할 때마다 치료사가 아닌 많은 아이를 받아 수입을 더 늘이는 게 목적인 원장 앞에서 수긍의 미소를 건네는 일은 아프고 힘겹다.


그러나 아이들을 만나고 개개인이 좋아하는 것들을 시작으로 발화하거나 의미를 알지 못하더라도 대화를 이어가는 일은 치료사에게 가장 소중하고 숭고하다. 때로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수업이 흐르고 반복적이 놀이에 지치더라도 아이가 놀이실에 왔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다. 불편한 신체를 도와주기 위한 보장구에 대해 목발이나 휠체어 같은 게 전부인 줄 알았지만 더 세부적인 도움을 위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 책으로 알게 되었다.


치료사의 일상에 대해, 그 일을 하고자 하는 이에게 이 책은 선배이자 동료가 건네는 손길이 될 것이다. 한눈에 바로 뛰어나게 발화하거나 움직임이 좋아지거나 놀이를 원활하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치료사와의 시간에 즐겁고 행복하다면 그로 인해 그들은 충만해질 것이다. 치료사도 아이도. 물론 이 모든 게 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고단한 현실은 끝이 보이지 않고 어려움은 산적해 있는 게 삶이니까. 그래도 우리는 제목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말할 때’ 반짝인다. 그것을 들어주고 공감해 줄 이가 있다는 사실에 더욱 그러하다. 이 책도 담긴 마음도 그렇다.


아이들이 남기고 간 장난감은 언제나 내게 어떤 이야기였다. 단순히 질문을 하기 위한 핑계가 아닌, 상상하고 느끼는 그대로의 이야기 말이다. 아이들과 노는 동안, 나는 되도록 어려운 질문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것대로 두고, 원래 그랬던 것처럼 바라보는 일을 오래오래 하고 싶다. 장난감이 가득한 곳에서 부끄럽거나, 슬프거나, 어딘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일 없이 놀 수 있다면 초대한 내가 더없이 기쁘겠다. (본문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말할 때』를 읽으면서 여러 저자가 자신의 계절에 대해 쓴 『계절 쓰기』와 백수린의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를 만났을 때처럼 좋았다. 담담하면서도 차분한 톤, 쓰고 읽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나를 쓰고 나를 읽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길고 길었던, 끝날까 싶었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열린 지금, 가을에 대한 부분은 처음과 다르게 가을에만 존재할 것 같은 감각으로 읽힌다. 이 가을은 눈 깜짝할 것 없이 지나할 것이고 우리는 또 겨울에 취해 가을을 잊게 될지도 모른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왔다는 걸 느끼는 순간은 아침에 집에서 나와 숨을 들이마셨을 때 찬 기운이 가슴 속으로 훅 들어와 명치를 아리게 할 때다. 그럴 때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팠고 어떤 감정이 나를 한바탕 뒤흔들고 지나가려는 조짐이라고 생각했다. (「홍한별의 가을 : 오래된 이야기」 중에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겠지만 슬픔이 너무 커서 세상에 대해 원망만 가득했던 마음이 찬란한 가을 햇살 속에서 맞닥뜨리는 어떤 풍경들에 황홀함으로 물드는 걸 느낄 때마다 나는 아름다움은 어쩌면 삶을 닮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중에서)


순간을 채집하고 소중하게 간직하는 방법으로 기록은 훌륭하다. 정작 쓰고 있을 때는 모르지만 나중에 가만히 읽어 보면 그때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느끼고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어떤 말들은 여전히 깊은 곳에서 쌓이고 어떤 말들은 목까지 달려 나오다 멈추고 만다. 그런 말들이 글이 되어 나왔을 때 우리는 가만히 그 말을 듣고 그 말에 위로받고 회복된다. 그래서 글을 쓰고 글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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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나무
윤고은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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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누군가 건넨 말로, 틀어놓은 TV의 뉴스 한 꼭지로, 얼결에 클릭한 기사나 광고로 그런 것들을 알게 된다. 몰라도 될 것들이다. 살아가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라며 이런 것도 모르냐며 나를 향해 돌진한다. 차단하고 거부해도 막무가내로 쏟아지는 것들. 세상이 너무 좋아져서 그렇다. 무언가를 검색했을 때 가장 먼저 AI가 답하는 시스템. 나는 이런 빠른 속도가 달갑지 않은 사람이다. 윤고은의 소설 『테니스나무』를 읽으면서도 그런 마음이 들었다. 세상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하나의 일이 순식간에 모두가 알게 되는 세상이라서 씁쓸하고 서글퍼졌다. 어쩌면 이 소설이 사랑 이야기라서, 소설 속 두 사람의 사랑이 그들의 의지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게 안타까워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

소설은 생존배낭을 만드는 일을 하는 ‘미아’와 지하철 K선 역사에서 일하는 역무원 ‘태오’는 업무적으로 만나면서 연인이 된다. 지하철 역사를 달리는 하프코스 러닝 대회의 기념품이 미아 회사의 생존배낭이었고 그 일로 태오를 처음 만났다. 모든 게 AI로 통하는 세상에 지하철 역사에 인간 역무원이 거의 없었기에 태오는 K의 얼굴로 통했다. 미아가 지하철에서 양말을 잃어버렸을 때 유실물 담당자가 태오였고 그래서 둘은 구면이었다. 러닝 대회가 다가올수록 둘은 자주 만났고 그렇게 가까워진다. 서로의 마음을 알아가면서 둘 사이의 풍경은 그들만의 언어와 의미로 새겨진다. 산책하면서 지나는 테니스코트의 풍경이 그러했다. 이용자가 없는 테니스코트의 밤, 바닥에 떨어진 라임색 테니스 공들은 가로수 불빛을 받아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태오와 미아에게 그것은 싱그러운 열매처럼 느껴졌고 테니스코트의 옆 나무에서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테니스코트 옆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테니스나무로 지정했다. 공들은 나무줄기에 매달렸던 기억이 없겠지만, 그 밤의 나무는 분명히 테니스 공의 출처처럼 보였다. 아침이 되면 공은 다시 코트 안을 오가다가 밤이 오면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조금 더 라임빛으로 물들 테고. (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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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한 순간인가. 아무도 모르는 둘만이 아는 공간, 둘만이 느낄 수 있는 공기, 둘만의 감정으로 가득 채워진 시간. 사랑은 그런 것이니까. 무리 없이 러닝 대회만 끝나면 둘 사이는 더욱 공고해지고 사랑은 커질게 분명했다. 러닝 대회는 무사히 끝났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가 발생하고 그 중심에 태오가 있었다. 지하철 승강장에서 노숙인으로 보이는 노인이 사망한 사건으로 대회 기념품 생존배낭을 메고 있었다. 같은 자리에 하루 전에도 누워 있는 노인을 발견한 승객이 민원을 넣은 것이다. 그 전화를 받은 게 태오였다. 태오는 매뉴얼대로 처리했다. 노인이 있었던 곳은 B선을 타고 오다가 K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내린 승강장이었고 정확하게는 B선 관할이라 B선에 연락을 취했고 교대했다. 얼마 후 노인은 사망했다.

​

사람들은 하나의 건수를 잡은 듯 사건에 집중했다. 책임을 추궁했고 태오와 미아 사이의 글로 등장했다. 10살이라는 나이 차이, 인턴의 정규직 전환 인사권에 영향을 주는 미아의 위치까지. 말도 안 되는 소문과 악의적인 기사가 쏟아졌다. 미아의 회사에서는 노인이 메고 있던 생존배낭이 문제였다. 미아는 태오를 향한 어쩔 수 없는 마음과 함께 사건이 잠잠해지기를 바라면서 잘못된 정보를 흘린 이들(댓글 작성자, 기자, 유튜버)을 차곡차곡 모았다. 고소를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래도 뭔가를 해야 할 것만 같았고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그런 말이 들리는 세계란 정말 어마어마한 거구나. 보통 우리 삶은 그렇지 않으니까. 어디를 향해 갈지 알 수 없는 일들이, 어떤 신호도 주지 않고 닥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행선지를 확인하고 올라타도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니까. (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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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이름 붙인 테니스나무와 열매처럼 환하고 밝게 빛날 것만 같은 둘의 사랑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러나 태오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미아는 그런 태오를 지켜주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재난을 대비해 생존배낭을 기획하고 준비한 미아였지만 사랑의 재난 앞에서 무력했다. 태오는 AI가 아닌 사람이 있다고 당신의 말을 듣고 있다고 안심을 주는 업무를 맡은 역무원의 얼굴이 되었지만 자신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안심하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태오와 미오 사이를 오가던 홍해파리의 존재도 힘이 되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외부 환경이 좋지 않다고 느끼면 유년기로 숨어버리는, 필요할 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홍해파리. 시간을 거슬러 서로의 꿈에 초대하며 라임 빛 열매를 함께 볼 수 있는 순간은 돌아오지 않았다.

​

테니스나무는 꿈의 틈새에 책갈피처럼 놓여 있다. 그 나무 아래 라임빛 열매들과, 태오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향기도 맡을 수 있지만 그곳에 가닿을 수는 없는 사람. (202쪽)

​

수없이 많은 말들을 파생시키고 주장했던 사람들의 기억에서 그 사건은 희미해지고 사라지지만 태오와 미오의 일상은 망가지고 부서졌다.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서로가 힘들 때 가장 힘이 되어준 사람이지만 함께 할 앞날을 꿈꿀 수 없었다. 그저 한 시절의 기억으로 아픈 사랑으로 남아야 했다.


AI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감정을 공유하는 세상에서 사랑은 더 귀해졌다.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것은 사랑이 아닐까. 어쩌면 윤고은은 재난이 일상이 된 세계에서 생존배낭 목록에 반드시 필요한 건 사랑이라고, 사랑의 기억이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테니스 공을 볼 때마다 홍해파리란 말을 들을 때마다 이 소설이 생각날 것이다. 쏟아지는 햇빛처럼 환하고 눈부시게 빛나던 그들의 가슴 아린 사랑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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