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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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큰 감동을 안겨주는 책이라 해도 어떤 시기에 읽느냐 따라 그 강도는 다르다. 언젠가 한 번은 읽지 않았던가 하는 착각마저 불러온 책,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내게 그랬다. 아마도 내가 학창시절에, 청춘이라 불리는 시절에 읽었더라면 이 책에 대해 그저 노인과 물고기의 사투라고만 말했을지도 모른다. 망망대해에서 이틀 동안 거대한 청새치를 잡는 노인을 통해 헤밍웨이의 진심은 커녕, 지루해하며 대충 대충 몇 장을 빨리 넘겼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어느 정도 우리 생에 무한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에 만났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노인과 바다』는 웬만한 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투 끝에 잡은 물고기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상어의 공격을 받아 결국에 남은 건 대가리와 뼈 뿐이었다는 이야기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건 제목 그대로 노인과 바다뿐이다. 노인을 이해하고 따르는 소년이 잠깐 등장하지만 소설의 중심엔 노인이 있다.

 

 84일 동안 바다에 나갔지만 물고기를 잡지 못한 산티아고, 그는 이제 더 이상 잘 나가는 어부가 아니다. 자신을 응원할 가족도 동료도 남아 있지 않다. 물론 그가 반드시 물고기를 잡아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러나 산티아고는 바다로 나갈 준비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한다. 그에게 바다는 삶의 전부이었고 그 자신이었던 것이다.

 

 소설에서 산티아고는 혼자다. 금방이라도 그를 삼킬 채비를 한 바다에서 그는 물고기를 기다린다. 많은 시간 혼자 보내며 터득한 그만의 방법이었을까. 먹을 것을 찾아 바다를 나는 새에게 말을 건넨다.  적막하고 고요한 시간, 그는 좋아하는 야구와 꿈에 본 아프리카를 떠올리며 아침마다 자신을 찾아주는 소년을 생각한다.

 

 마침내 미끼를 문 물고기, 그 힘이 대단하다. 그와 물고기의 힘겨운 사투가 시작된 것이다. 얼마나 긴 시간이 될지 그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물고기가 반가웠던 건 아닐까. 거대한 힘을 가진 물고기와 대결하는 일을, 알 수 없기에 나는 한 손과 등의 힘으로 낚싯줄을 버티고 있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다만, 그에게 물고기가 갖는 의미를 알고 묻고 그 대답을 듣고 싶을 뿐이다. 

 

 언제나 매번 새로 처음 하는 일이었고, 그 일을 하고 있는 순간에는 과거를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p. 69

 

 언제나 매번 새로 처음 하는 일이라니, 이런 경지에 오르려면 얼마나 많은 날들을 더 살아야 할까. 죽을지도 모르면서 물고기와 대화를 나누며 혼잣말을 하는 밤, 배고픔에 몸을 옴짝달싹 할 수 조차 없는 순간에도 끈을 놓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끈을 끊어버리면 간단하게 끝났을지도 모른다. 줄에 쓸려 상처가 난 손과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상어 떼와 싸우느라 녹초가 된 그에게서 나는 문득, 엄마를 본다. 그리고 생을 생각한다. 나도 곧 노인이 될 것이다. 엄마처럼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다. 나는 죽는 날까지 하루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온 엄마처럼 남은 날들을 채워갈 수 있을까. 산티아고 노인처럼 빛나는 두 눈을 갖고 살아갈 수 있을까.바다가 존재하는 한 그는 아마도 매일매일 바다에 나갈 것이다. 물고기를 잡든 잡지 못하든 말이다.

 

 노인의 모든 것이 늙거나 낡아 있었다. 하지만 두 눈만은 그렇지 않았다. 바다와 똑같은 빛깔의 파란 두 눈은 여전히 생기와 불굴의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p. 10

 

 이 책이 주는 감동은 한평생 고기를 잡아오며 살아온 그의 삶에서 묻어 나오는 감사는 아닐까. 투덜대기만 하는 삶, 뭔가 요행을 바라며 허황된 꿈을 꾸는 이들에게 하루 하루의 충만함을 왜 모르냐고 묻는 듯 하다. 대가의 힘이란 이런 것일까. 아무런 장치 없이 그저 노인의 단순한 행동과 말만으로도 이토록 강한 울림을 주다니.  

 

 ‘매일매일이 새로운 날인걸. 운이 있다면야 물론 더 좋겠지.’ p. 33

 

 똑같은 하루라고 생각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던 때는 얼마나 많았던가. 어제와 같은 오늘처럼 보여도 결코 똑같은 하루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닫게 된 건 불과 몇 년 전이다.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걸 마주할 수 있는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지 새삼 생각한다. 산티아고의 말처럼 운이 있다면야 좋겠지만, 운이 좋지 않다고 낙담하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또다시 새로운 날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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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6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가 남다른 책이에요. 이 책의 존재를 까먹고 있었는데 덕분에 독서 예비목록에 넣었습니다~. 고딩때는 줄거리만 듣고 대체 그런 허무한 소설은 왜 썼나 싶었었지요~ㅎㅎ

자목련 2012-03-07 20:23   좋아요 0 | URL
정말 대가의 포스란 이런 것이구나 했어요. 고교 시절에 읽었다면, 이 감동을 알지 못했겠지요. ㅎㅎ
 
오릭맨스티
최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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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윤의 <하나코는 없다>를 언제 읽었던가. 내용이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강하게 각인된 건 제목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시 최윤의 소설을 읽고자 했던 건 제목인『오릭맨스티』란 낯선 단어에 끌렸을지도 모른다. 이 책에 대한 갈망은 그러했다.

 

 한 여자와 한 남자의 만남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타인으로 존재했던 이들이 서로를 탐구하며 관찰한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도 괜찮을지, 아니면 여기서 이별을 고해야 할지 대부분의 첫 만남에 그렇듯이. 두 번째, 세 번째 만남에 이어 많은(결코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믿는다) 것을 함께 하며 시간을 보내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합의를 보고 관계를 확장시키는 일은 그저 일상적인 삶처럼 보인다.

 

 ‘여자는 정말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남자는 유령 같다. 여자는 그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것이 없다. 나이와 직장 전화번호와 남자가 사는 원룸의 위치와 그가 근무하는 회사의 위치. 모든 게 가변적이다. 여자는 그녀와 함께하지 않는 시간, 즉 남자의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전혀 상상할 수 없다. 남자가 여자에 대해 모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차이가 있다면 남자는 여자의 신상과 여자의 생활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p. 40

 

 이름을 부여하지 않은 여자와 남자. 익명은 때로 다수를 의미한다. 여자는 여자들, 남자는 남자들이 되기도 한다. 자식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온 어머니, 배신한 아들 대신 딸에게 어떤 기대를 품는 부모는 가까이서 찾을 수 있는 존재들이다. 사랑하기에 안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은 정말 진짜일까. 진정 모든 건 가변적이지 않을까.

 

 ‘결혼이, 부부 관계가 그들이 원래 지니고 있었던 자잘하지만 치명적일 수도 있는 악행들을 뿌리 뽑지 못한다. 게다가 왜 그래야만 하지? 남자는 속으로 반문한다. 남자의 생각이 맞다. 뿌리가 뽑히기는커녕 두 배로 늘어가거나 깊어지고 그에 대해 뻔뻔해진다. 점점 말수가 줄어드는 남자에게서 잠시 가려져 있던 단점들이 봄에 잡초 싹이 돋듯 파르스름하게 돋아나는 것을 보고 여자는 고개를 흔들고 두 팔을 늘어뜨린다. 어차피 남자도 여자도 성인이 아니다. 인생은 짧고 할 수 있는 것은 적다.’ p. 103~104

 

 그렇다. 이 소설은 단순한 연애, 결혼의 이야기가 아니다. 소설은 이런 낯익은 풍경을 시작으로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욕망에 대해 말한다. 평이하고 솔직한 심경으로 독자에게 친근하게 다가온 작가의 속내는 조금 천천히 나타난다. 해서 어느 순간 불행을 감지한다. 취미 그 이상을 넘어선 외제 자동차에 대한 남자의 집착, 화려한 일탈을 꿈꾸는 여자의 마음이 같은 지점에서 연소하고 만다. 단 한 번의 멋진 휴가지에서 폭우에 휩쓸려 죽음을 맞이하고 두 살 배기 아들만 살아 남는다.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그렇게 여자와 남자의 생은 끝난다. 무수한 소문을 남기고, 늙은 부모에게 상실과 절망을 안기고 떠난 것이다. 

 

 소설은 결말에 이르러 화자인 ‘나’가 등장한다. 부모를 잃고 벨기에로 입양된 나는 그 죽음의 순간을 온 몸에 새긴 채 살고 있었다. 다만 알 수 없는 고통을 동반한 환영으로 마주할 뿐이다. 청년이 되어 여자와 남자이자, 자신의 부모와 함께 마지막을 보낸 장소를 찾는다. 화자는 기억 속 저편에서 보았을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본다. 아름다운 석양이 영원하지 않듯 삶은 유한하다.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것을 탐하고 꿈꾸는지도 모른다.

 

 한 때, ‘평범’이라는 단어에 매달린 적이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다는 게, 남들처럼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된 시점이었다. 균열이 없는 삶을 지속한다는 게 얼마나 많은 인내와 욕망을 참아내야 하는 일인지도 알게 되었다. 잘사는 것처럼 사는 것, 비슷한 부류와 어울리면서도 그들을 좀 더 앞지르기를 바라며, 그들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바라는 건 모두의 숨겨진 욕망일 것이다.

 

 쓸쓸하면서도 어떤 묵직한 아련함이 남는 소설이다. 인생은 짧고 할 수 있는 것은 적다 문장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내 안에 잠재된 욕망과 탐욕은 무엇일까. 잊지 않고 때때로 찾아오는 울울한 감정은 무엇일까. 명확한 뜻을 알지 못한 채, 어느새 나도 모르게 ‘오릭맨스티’를 중얼거리며 언젠가 마주할 인생의 석양에 대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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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9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소설 줄거리도 흥미롭지만, 인용구 둘도 모두 좋아서, 소설에 호감이 부쩍!
2. 평범이란 '유한한 삶이기에 더 많은 걸 탐하고 꿈꾸는 마음'의 에너지를 간신히 견뎌내고 삶의 표면의 균열을 막은 결과 일까요. 그나저나 평범도 운명인 것 같아요. 혹은 내가 평범하지 못하다는 마음이 착각이거나요.
3. '잊지 않고 때때로 찾아오는 울울한 감정'이 무엇일지, 혹은 이 감정의 존재가 의미하는 게 무엇일지 생각하다 보면 인생의 큰 비밀 하나를 알게 될 것 같아요.^^

자목련 2012-01-20 11:28   좋아요 0 | URL
1. 전 제목 때문에 호감을 가졌던 소설인데, 담담한 문장이 좋았어요.
2. 평범도 운명인 것 같다는 말씀, 정말 깊이 와 닿습니다. 맞아요, 모든 기준은 나에게 있으니까요.
3. 울울한 감정은, 생명력을 안겨주기도 해요. 아, 이렇게 아프고 이렇게 쓸쓸한 날들이 지나감을 느끼니까요..

따뜻함을 안은 덧글로 포근한 아침입니다. 고아워요, 섬님^^
 

 

 2011년이 지났고, 2012년이 되었다. 벌써 넷째날이다. 지난 1년 동안 내가 읽었던 책, 리뷰를 쓴 책에 대한 기록이다. 2011년에 읽고 리뷰를 쓴 책은 125권이란다. 알라딘이 아닌 (알라딘에서도 그런 통계가 있을지도 모르다. 허나 나는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모른다. 구매 목록을 찾는 일도 한참 걸리니 말 다했다) 모 서점에서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한 달에 10권 정도 읽은 셈이다.

 

 한국문학을 주로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목록을 살펴보니 그렇지도 않다. 내 마음에 우선적으로 한국문학이 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신간은 언제나 내 책 읽기보다 앞선다. 해마다 새로운 작가가 나오니 더욱 그렇다. 거기다 인문, 사회, 과학, 예술 분야에 대한 책에도 눈이 가고 혹시나 해서 참여하지만 역시나로 돌아오는 리뷰 대회에 대한 미련도 버리지 못한다.

 

 2011년의 첫 책은 <윈터홀릭 두 번째 이야기>였고,

 

 

 

 

 

 

 

 

 

 

 

 

 

 

 

 

 

 

 

 

 

 

 

 

 

 

 

 

 

 

 

 

 

 

 

 

 

 

 

 

 

 

 

 

 

 

 

 

 

 

 

 

 

 

 

 

 

 

 

 

 

 

 

 

 

 

 

 

 

 

 

 

 

 

 

 

 

 

 

 

 

 

 

 

 

 

 

 

 

 

 

 

 

 

 

 

 

 

 

 

 

 

 

 

 

 

 

 

 

 

 

 

 

 

 

 

 

 

 

 

 

 

 

 

 

 

 

 

 

 

 

 

 

 

 

 

 

 

 

 

 

 

 

 

 

 

 

 

 

 

 

 

 

 

 

 

 

 

 

 

 

 

 

 

 

 

 

 

 

 

 

 

 

 

 

 

 

 

 

 

 

 

 

 

 

 

 

 

 

 

 

 

 

 

 

 

 

 

 

 

 

 

 

 

 

 

 

 

 

 

 

 

 

 

 

 

 

 

 

 

 

 

 

 

 

 

 

 

 

 

 

 

 

 

 

 

 

 

 

 

 

 

 

 

 

 마지막 책은 김미월의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이다.

 

 2012년에는 계획적인 책읽기를 하고 싶은데 어찌될지 모르겠다. 좋아하는 책, 읽고 싶은 책을 읽고 기록하는 한 해가 되면 좋겠다. 충동구매보다는 곁에 둔 책을 먼저 읽기를 바란다. 한국문학과 더불어 세계문학, 그리고 시를 읽는 해가 되기를 희망한다. 책을 읽고 그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더 좋겠다. 그리고,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구든 말이다.

 

 *늦었지만 이 서재를 다녀가시는 모든 분들께 인사드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평온하시길!!

 부족한 이웃이지만 언제나 고마운 나의 이웃님, 올 한해도 마음을 나누고 인연을 이어나가길 바라요. 잘 부탁드립니다.

 

  고. 맙. 습. 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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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별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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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미경의 장편은 『장밋빛 인생』,『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에 이어 세 번째다. 그녀의 소설은 아름답고 간절하다. 그게 슬픔이든, 절망이든, 사랑이든 그랬다. 문장은 왜 이리 유려한지, 책 속으로 빠져드는 건 당연하다.

 

‘정오의 사막은 붉은 분홍이다.

 이 시간엔 부러 그렇지 않아도 눈을 가늘게 뜨게 된다.

 천지는 고요하고도 소란하다.

 와랑와랑.

 햇빛은 빛나는 동시에 속삭이며 부서진다.

 모래가 잔뜩 삼킨 열기운을 붉게 토해내면 대기는 부옇게 산란하며 뒤챈다.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

 끝이 부러져나간 붉은 사암기둥. 무너진 벽과 돌더미 들. 폐허는 장엄해서, 은성했던 시절을 상상하는 게 어렵지 않다. 시간의 지층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원형 경기장의 돌기둥 사리로 검투사든 굶주린 사자든 거친 무언가가 금세라도 달려나올 것 같다.’ p. 7

 

 사막의 정오를 상상한다. 붉고 뜨거운 기운이 감도는 사막, 이처럼 황홀하게 묘사했지만 숨이 막힌다. 소설은 사막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 그곳의 매력에 빠져 몰려드는 사람, 잠시 머무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사막의 풍경과 그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죽음의 광장이라 불리는 모나코의 자마 알프나 광장을 배경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소설은 바바, 보라, 승, 로랑의 네 사람의 이야기를 교차로 들려준다. 생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의 이야기라 해도 좋을까. 승은 아내와 친구에 배신을 당한 뒤, 한국을 떠나 딸 보라와 함께 그들을 찾아 이곳으로 왔다. 승의 삶엔 오직 분노와 복수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흔적을 따라 사막을 헤매는 승은, 때때로 사막의 모래폭풍과 사막의 밤 하늘에 위로 받고 있었다.  그러나 돌아보면 자신을 가득 채운 건 여전하게 증오였다. 그런 아빠를 바라보며 보라는 어떤 질문도, 어떤 투정도 하지 않는다. 낯선 곳에서 그저 살아갈 뿐이다. 열 여섯, 보라에게 삶은 아무런 대답도 들려주지 않았지만 뜨거운 열기와 낯선 이방인들 속에서 스스로 답을 찾아가고 있었다.

 

 바바는 여행객에게 헤나를 그려주는 보라에게 유일한 친구였다. 보라가 좋아하는 건 뭐든지 해주고 싶었다. 새침하고 쌀쌀맞게 대해도 그런 보라가 좋았다. 보라를 웃는 일이라면 그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게 자신을 버리는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바바에게 보라는 사랑이었던 것이다. 승이 사막으로 가이드를 떠나고 혼자 남겨진 보라 역시 바바가 있어 그곳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사막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남자 로랑은 연인이 죽자 더 자주 그곳을 찾았다. 스스로가 아름다움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지만 사막이 주는 황홀함과는 달랐다. 사막에 숨겨진 옛 문화유적, 보물들을 소유하는 것으로 그리움을 달래고 있었다.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결국 네 사람 모두 누군가를 그리워했고 사막을 사랑하고 있었다.

 

 바바와 보라, 승과 로랑은 서로가 모르는 사이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은 아름답고 고귀한 유물에서 시작되었지만 결국 인간의 욕망은 아니었을까. 바바에겐 보라를 향한 사랑의 표현으로, 승에게는 사막을 떠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로랑에겐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위한 해소로 말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사막의 풍경은 때로 지독하게 외로웠고 쓸쓸했으며 때로 혼을 빼놓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려 모여든 다양한 사람들이 만드는 또 다른 풍경은 낯설면서도 낯익었다. 어쩌면 사막은 무언가를 잊기 위해,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기 위해, 혼자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가장 적절한 공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사하라란 ‘아무것도 없는’ 이란 뜻이지.

 움직이는 건 아무것도 없다. 누렇게 뜬 사막풀마저 죽은 듯 모래에 발을 묻고 물이 있는 곳으로 실어다줄 저녁바람을 기다린다. 모래색뱀과 붉은 전갈도 한 조각 그늘을 찾아 필사적으로 몸을 감추었다.

 완전한 고독과 적막.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는 곳.’ p. 102

 

 『아프리카의 별』은 이전에 만난 정미경의 소설과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남는다. 다른 소설에게 그녀가 그려낸 건 우리의 삶의 조각이었다면, 이 소설에서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담은 느낌이랄까. 소설에서 운명을 점치는 바바의 엄마가 들려주는 말처럼 말이다.

 

 “사람의 운명이란 원래 어두운 거란다. 아주 가끔 환한 빛을 발하는 때도 있지만 그건 한순간이야. 애초에 운명의 주관자가 그렇게 만들어놓았으니. 우리 짐작과 달리 신은 질투심으로 가득 차 있거든. 우리가 자족적인 행복에 젖어 있기보다는 끊임없이 자기를 찾고 매달리길 원하지. 한줌의 자비를 달라고, 이 고통만은 비켜가게 해달라고 울며 보채길 바라지.” p.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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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
김미월 지음 / 창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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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행복을 꿈꾼다. 반짝반짝 빛나는 삶을 살기를 원하고, 주목받고 싶어한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집도 사고 부자가 되고, 하기 싫은 일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될 그 언젠가를 꿈꾸며 산다. 때문에 반복되는 일상을 견디는지도 모른다. 잡히지 않는 희망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희망은 쓰디 쓴 현실을 이겨내는 사탕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사탕이 이를 섞게 하고 나중에 큰 고통의 원인이 된다는 걸 알기에 애초부터 사탕을 먹지 않는 이도 많다. 김미월의 소설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의 인물들이 그러하다. 스스로를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이라 명명하는 이들이 있다. 그 속에 무궁무진한 비밀이 담겨있다는 걸 아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 다, 누구나 가는 대학처럼 보이지만 갈 수 없는 이들이 있다. 대학생이 아니라, 거대한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야 하거나, 직장을 구해야 하는 현실과 맞닿은 이들 말이다.시장통에서 지게꾼으로 일하는 할아버지와 단 둘이 사는 나도 같은 고3이지만 그들과의 미래가 다르다. 자신을 알아주는 유일한 영어 선생님 마저 떠나고 나니, 학교에 가야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건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결혼을 한 후에도 마찬가지다. 따지고 보면 삶은 주인공의 말처럼 우중충했다.

 

 우중충한 회색 점퍼 속에서 넥타이를 맨 아저씨들과 우중충한 남색 코트 아래 레깅스를 신은 아가씨들이 출근하는 것도 보였다. 모든 것이 우중충했다. 저 남자애는 곧 학교에 도착할 것이다. 곧 졸업을 할 것이고 저 아저씨들처럼 넥타이를 매고 출근할 것이다. 시간이 더 흐르면 레깅스를 신은 아가씨들 중 한 명과 결혼하겠지. 두 남녀는 아파트 대출금과 자동차 할부금을 갚기 위해 낮밤 없이 일할 것이다. 주말에는 주중에 밀린 잠을 자기 바쁠 것이고, 드디어 아파트를 장만하고 자동차를 소유하게 되면 아마 나이가 쉰쯤 됐으리라. 그때쯤이면 둘 중 하나는 암에 걸려 있을지도 모른다. 당뇨나, 허리디스크, 우울증도 피해갈 수 없겠지. 아아, 정말이지 너무나 우중충한 미래였다. p.45 - <29200분의 1> 중에서

 

 그럼에도 위안을 얻는 건 소수의 어떤 이가 아닌 다수의 나와 같은 누군가이다. 복잡한 출근길에 어깨를 부딪히는 사람들, 고개를 숙이고 바쁜 걸음을 걷는 사람들, 같은 직장에서 점심을 같이 먹는 사람들 말이다. 중국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서울도 아닌 인천으로 출근을 하는 수는 어학원에서 한국어를 가르친다. 외국에서 온 그들은 말만 학생이지 모두 비자를 얻기 위해 어학원에 등록한 이들이다. 그들의 목적은 돈을 벌기 위함이다. 수는 그들과는 다르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결국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3개월마다 재계약을 해야 했고, 인천이 아닌 서울을 꿈꾸기에 인천은 그저 지나가는 과정이라 여긴다.

 

 어쨌거나 모두들 수가 어제도 같은 시간에 보았고, 내일도 같은 시간에 볼 사람들이다. 그들과 수는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객차 안에 앉아 같은 공기를 마신다. 딱히 그들의 안부가 궁금한 건 아니지만 어쩌다 그중 한 명이 며칠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다시 나타나면 수는 저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이 든다. 자신이 며칠간 나타나지 않다가 다시 나타나면 그들도 속으로 반가워해줄지 그녀는 가끔 그런 것이 궁금하기도 하다. 열차가 달린다. 늘 내리던 역에서 낯익은 얼굴이 내린다. 늘 타던 역에서 다시 낯익은 얼굴이 탄다. p. 88 - <중국어 수업> 중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내가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기도 한다. 여자친구의 증조할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에 자신을 둘러싼 죽음을 생각한다. 아무 문제 없이 잘 살고 있던 첫 사랑의 자살 소식부터 갑자기 교통사로고로 죽은 선배까지, 세상에 죽음은 너무도 흔했다. 이렇게 누군가 죽어가는 세상에서 취업을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하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  

 

 백살에 죽든 열살에 죽든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죽음의 세부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마술사의 모자 속에서 하얀 비둘기가 날아오를 때처럼,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 순간을 예상하고 있다. 그것을 보러 왔으니까. 그럼에도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순간 그들은 놀라고 신기해하고 감탄한다. 비둘기가 어떻게 생겼고 어디로 날아갔으며 왜 모자 속으로 돌아가지 않는지 따지는 이는 없다. 마술이 끝나고 사람들은 곧 집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더이상 비둘기에 놀라고 신기해하고 감탄했던 순간을 떠올리지 않는다. 다시 일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p. 136 - <모자 속의 비둘기> 중에서

 

 김미월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소시민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취업 사수생이거나, 하루 아침에 실업자가 되었거나, 일탈을 꿈꿨지만 낯선 곳에서 부유하고 있거나,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시집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할 수 있는 이들이라는 말이다. 과거의 나였거나 현재의 나였거나 우리의 모습인 거다. 별 일 없이 살지만 별 일이 일어나 주기를 바란다. 하루 하루 같은 일상에 살고 있다는 게 다행이라 여긴다.  누구나 죽지만 나는 죽지 않았고 다시 일상을 살아간다. 어제와 같이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며 또다른 내일을 꿈꾸면서 말이다. 누구나 같은 일상을 견딘다는 위안을 주는 소설이다. 해서,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펼쳐서 함께 읽으면 좋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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