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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맨스티
최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2월
평점 :
최윤의 <하나코는 없다>를 언제 읽었던가. 내용이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강하게 각인된 건 제목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시 최윤의 소설을 읽고자 했던 건 제목인『오릭맨스티』란 낯선 단어에 끌렸을지도 모른다. 이 책에 대한 갈망은 그러했다.
한 여자와 한 남자의 만남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타인으로 존재했던 이들이 서로를 탐구하며 관찰한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도 괜찮을지, 아니면 여기서 이별을 고해야 할지 대부분의 첫 만남에 그렇듯이. 두 번째, 세 번째 만남에 이어 많은(결코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믿는다) 것을 함께 하며 시간을 보내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합의를 보고 관계를 확장시키는 일은 그저 일상적인 삶처럼 보인다.
‘여자는 정말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남자는 유령 같다. 여자는 그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것이 없다. 나이와 직장 전화번호와 남자가 사는 원룸의 위치와 그가 근무하는 회사의 위치. 모든 게 가변적이다. 여자는 그녀와 함께하지 않는 시간, 즉 남자의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전혀 상상할 수 없다. 남자가 여자에 대해 모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차이가 있다면 남자는 여자의 신상과 여자의 생활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p. 40
이름을 부여하지 않은 여자와 남자. 익명은 때로 다수를 의미한다. 여자는 여자들, 남자는 남자들이 되기도 한다. 자식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온 어머니, 배신한 아들 대신 딸에게 어떤 기대를 품는 부모는 가까이서 찾을 수 있는 존재들이다. 사랑하기에 안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은 정말 진짜일까. 진정 모든 건 가변적이지 않을까.
‘결혼이, 부부 관계가 그들이 원래 지니고 있었던 자잘하지만 치명적일 수도 있는 악행들을 뿌리 뽑지 못한다. 게다가 왜 그래야만 하지? 남자는 속으로 반문한다. 남자의 생각이 맞다. 뿌리가 뽑히기는커녕 두 배로 늘어가거나 깊어지고 그에 대해 뻔뻔해진다. 점점 말수가 줄어드는 남자에게서 잠시 가려져 있던 단점들이 봄에 잡초 싹이 돋듯 파르스름하게 돋아나는 것을 보고 여자는 고개를 흔들고 두 팔을 늘어뜨린다. 어차피 남자도 여자도 성인이 아니다. 인생은 짧고 할 수 있는 것은 적다.’ p. 103~104
그렇다. 이 소설은 단순한 연애, 결혼의 이야기가 아니다. 소설은 이런 낯익은 풍경을 시작으로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욕망에 대해 말한다. 평이하고 솔직한 심경으로 독자에게 친근하게 다가온 작가의 속내는 조금 천천히 나타난다. 해서 어느 순간 불행을 감지한다. 취미 그 이상을 넘어선 외제 자동차에 대한 남자의 집착, 화려한 일탈을 꿈꾸는 여자의 마음이 같은 지점에서 연소하고 만다. 단 한 번의 멋진 휴가지에서 폭우에 휩쓸려 죽음을 맞이하고 두 살 배기 아들만 살아 남는다.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그렇게 여자와 남자의 생은 끝난다. 무수한 소문을 남기고, 늙은 부모에게 상실과 절망을 안기고 떠난 것이다.
소설은 결말에 이르러 화자인 ‘나’가 등장한다. 부모를 잃고 벨기에로 입양된 나는 그 죽음의 순간을 온 몸에 새긴 채 살고 있었다. 다만 알 수 없는 고통을 동반한 환영으로 마주할 뿐이다. 청년이 되어 여자와 남자이자, 자신의 부모와 함께 마지막을 보낸 장소를 찾는다. 화자는 기억 속 저편에서 보았을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본다. 아름다운 석양이 영원하지 않듯 삶은 유한하다.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것을 탐하고 꿈꾸는지도 모른다.
한 때, ‘평범’이라는 단어에 매달린 적이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다는 게, 남들처럼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된 시점이었다. 균열이 없는 삶을 지속한다는 게 얼마나 많은 인내와 욕망을 참아내야 하는 일인지도 알게 되었다. 잘사는 것처럼 사는 것, 비슷한 부류와 어울리면서도 그들을 좀 더 앞지르기를 바라며, 그들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바라는 건 모두의 숨겨진 욕망일 것이다.
쓸쓸하면서도 어떤 묵직한 아련함이 남는 소설이다. ‘인생은 짧고 할 수 있는 것은 적다’란 문장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내 안에 잠재된 욕망과 탐욕은 무엇일까. 잊지 않고 때때로 찾아오는 울울한 감정은 무엇일까. 명확한 뜻을 알지 못한 채, 어느새 나도 모르게 ‘오릭맨스티’를 중얼거리며 언젠가 마주할 인생의 석양에 대해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