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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
김미월 지음 / 창비 / 2011년 12월
평점 :
누구나 행복을 꿈꾼다. 반짝반짝 빛나는 삶을 살기를 원하고, 주목받고 싶어한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집도 사고 부자가 되고, 하기 싫은 일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될 그 언젠가를 꿈꾸며 산다. 때문에 반복되는 일상을 견디는지도 모른다. 잡히지 않는 희망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희망은 쓰디 쓴 현실을 이겨내는 사탕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사탕이 이를 섞게 하고 나중에 큰 고통의 원인이 된다는 걸 알기에 애초부터 사탕을 먹지 않는 이도 많다. 김미월의 소설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의 인물들이 그러하다. 스스로를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이라 명명하는 이들이 있다. 그 속에 무궁무진한 비밀이 담겨있다는 걸 아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 다, 누구나 가는 대학처럼 보이지만 갈 수 없는 이들이 있다. 대학생이 아니라, 거대한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야 하거나, 직장을 구해야 하는 현실과 맞닿은 이들 말이다.시장통에서 지게꾼으로 일하는 할아버지와 단 둘이 사는 나도 같은 고3이지만 그들과의 미래가 다르다. 자신을 알아주는 유일한 영어 선생님 마저 떠나고 나니, 학교에 가야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건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결혼을 한 후에도 마찬가지다. 따지고 보면 삶은 주인공의 말처럼 우중충했다.
우중충한 회색 점퍼 속에서 넥타이를 맨 아저씨들과 우중충한 남색 코트 아래 레깅스를 신은 아가씨들이 출근하는 것도 보였다. 모든 것이 우중충했다. 저 남자애는 곧 학교에 도착할 것이다. 곧 졸업을 할 것이고 저 아저씨들처럼 넥타이를 매고 출근할 것이다. 시간이 더 흐르면 레깅스를 신은 아가씨들 중 한 명과 결혼하겠지. 두 남녀는 아파트 대출금과 자동차 할부금을 갚기 위해 낮밤 없이 일할 것이다. 주말에는 주중에 밀린 잠을 자기 바쁠 것이고, 드디어 아파트를 장만하고 자동차를 소유하게 되면 아마 나이가 쉰쯤 됐으리라. 그때쯤이면 둘 중 하나는 암에 걸려 있을지도 모른다. 당뇨나, 허리디스크, 우울증도 피해갈 수 없겠지. 아아, 정말이지 너무나 우중충한 미래였다. p.45 - <29200분의 1> 중에서
그럼에도 위안을 얻는 건 소수의 어떤 이가 아닌 다수의 나와 같은 누군가이다. 복잡한 출근길에 어깨를 부딪히는 사람들, 고개를 숙이고 바쁜 걸음을 걷는 사람들, 같은 직장에서 점심을 같이 먹는 사람들 말이다. 중국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서울도 아닌 인천으로 출근을 하는 수는 어학원에서 한국어를 가르친다. 외국에서 온 그들은 말만 학생이지 모두 비자를 얻기 위해 어학원에 등록한 이들이다. 그들의 목적은 돈을 벌기 위함이다. 수는 그들과는 다르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결국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3개월마다 재계약을 해야 했고, 인천이 아닌 서울을 꿈꾸기에 인천은 그저 지나가는 과정이라 여긴다.
어쨌거나 모두들 수가 어제도 같은 시간에 보았고, 내일도 같은 시간에 볼 사람들이다. 그들과 수는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객차 안에 앉아 같은 공기를 마신다. 딱히 그들의 안부가 궁금한 건 아니지만 어쩌다 그중 한 명이 며칠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다시 나타나면 수는 저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이 든다. 자신이 며칠간 나타나지 않다가 다시 나타나면 그들도 속으로 반가워해줄지 그녀는 가끔 그런 것이 궁금하기도 하다. 열차가 달린다. 늘 내리던 역에서 낯익은 얼굴이 내린다. 늘 타던 역에서 다시 낯익은 얼굴이 탄다. p. 88 - <중국어 수업> 중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내가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기도 한다. 여자친구의 증조할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에 자신을 둘러싼 죽음을 생각한다. 아무 문제 없이 잘 살고 있던 첫 사랑의 자살 소식부터 갑자기 교통사로고로 죽은 선배까지, 세상에 죽음은 너무도 흔했다. 이렇게 누군가 죽어가는 세상에서 취업을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하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
백살에 죽든 열살에 죽든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죽음의 세부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마술사의 모자 속에서 하얀 비둘기가 날아오를 때처럼,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 순간을 예상하고 있다. 그것을 보러 왔으니까. 그럼에도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순간 그들은 놀라고 신기해하고 감탄한다. 비둘기가 어떻게 생겼고 어디로 날아갔으며 왜 모자 속으로 돌아가지 않는지 따지는 이는 없다. 마술이 끝나고 사람들은 곧 집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더이상 비둘기에 놀라고 신기해하고 감탄했던 순간을 떠올리지 않는다. 다시 일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p. 136 - <모자 속의 비둘기> 중에서
김미월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소시민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취업 사수생이거나, 하루 아침에 실업자가 되었거나, 일탈을 꿈꿨지만 낯선 곳에서 부유하고 있거나,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시집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할 수 있는 이들이라는 말이다. 과거의 나였거나 현재의 나였거나 우리의 모습인 거다. 별 일 없이 살지만 별 일이 일어나 주기를 바란다. 하루 하루 같은 일상에 살고 있다는 게 다행이라 여긴다. 누구나 죽지만 나는 죽지 않았고 다시 일상을 살아간다. 어제와 같이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며 또다른 내일을 꿈꾸면서 말이다. 누구나 같은 일상을 견딘다는 위안을 주는 소설이다. 해서,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펼쳐서 함께 읽으면 좋을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