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역 - 제5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김혜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끝은 시작이다’란 말은 모두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까? 어쩌면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인 사람들에게 국한된 말인지도 모른다. 어떤 이에게 끝은, 끝일뿐이다. 잔인하게도 그렇다. 시작을 위한 시도만 존재할 뿐이다. 울부짖음으로, 몸부림으로 말이다. 무수한 몸부림의 끝에 시도는 시작을 잉태할 수 있다. 김혜진의 『중앙역』은 그런 비루하고 치사한 인간의 몸짓을 통해 시작을 말한다. 그러니까 감히 말하자면 시작은 희망의 다른 말이며 반드시 시도라는 절망을 견뎌야 한다.  

 

 이야기는 불편하다. 친절하지 않다. 깊고 단단한 절망의 구덩이에서 시작한다. 다른 삶을 위해 떠나는 사람들, 웃음과 기대를 안고 움직이는 사람들, 잠시 이별을 위해 머무는 곳, 중앙역에서 그들과는 다른 생존을 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점묘화 속 점처럼 인물을 묘사하여 그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전달한다. 때문에 화자인 ‘나’는 도드라지지 않는다. 그저 중앙역에 모여든 노숙자 중 하나로만 인식된다. 그래서 더욱 궁금하다. 과연, ‘나’는 왜 이곳에 왔으며 이전엔 어떤 삶을 살았는지 말이다.

 

 ‘내 시간은 어딘가에 단단히 묶여 있다. 누군가 내 시간을 단단히 매어둔 게 틀림없다. 도저히 풀 수 없는 매듭이다. 한꺼번에 모두 잘라내지 않는 한 방법이 없다. 어떻게 해야 이 지겨운 하루를 빨리 소진해버릴 수 있을까. 나는 계단이나 벤치에 정물처럼 앉은 사람들의 구부정한 뒷모습을 흘끔거린다.’ 31쪽

 

 소설은 단순하다. 중앙역 안에서의 시선과 그들을 바라보는 바깥의 시선으로 나눠진다. 화자인 ‘나’ 는 안에 있고 독자인 ‘나’ 는 밖에 있다. 뉴스를 통해, 언론을 통해 보도된 사람들의 모습을 픽션으로 만나는 일은 여전히 힘들다. 하지만 김혜진은 『중앙역』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던, 아니 잊고 싶어 하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삶에 대해 말한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삶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의 시선에 대해서 말이다. 그들의 사랑, 그들의 희망, 그들의 고통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의 오만함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화자인 ‘나’는 화가 난다. 가방을 훔친 여자를 사랑하는 일에 대해, 함께 꿈을 꾸는 일에 대해 질타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참을 수 없다. 젊음이라는 이유를 들어 광장을 벗어나 쪽방을 얻어 새롭게 시작하라는 조언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남편과 자식이 있는 알콜중독자로 복수가 차오르는 나이 많은 여자와 살고 싶다. 어쩌면 그들의 말대로  ‘나’는 아직 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다.  ‘나’에게 여자마저 없었더라면 삶은 지속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욕망과 본능 그 아래에 놓인 태초의 인간에게 부여된 평화였으니까.

 

 벼랑 끝에 놓인 사람들,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경찰서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사회적 제도와 울타리는 너무 빈약하다. 강자에게 유린당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범법자가 되어 살아야 한다. 그래서 폭력에 앞장서고, 자포자기의 삶을 산다. 우리는 알면서 외면한다. 누군가는 그들의 잘못이라고 말한다. 내 일이 아니니까. 시작을 위해 시도를 반복하면서도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난 그들이 느낄 거대한 공포를 알지 못한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감옥을 나와 결국 자살을 선택했던 사람과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나는 세계가 남김없이 무너지는 장면을 상상한다. 모든 게 공평하게 황폐해지면 좋을 것이다. 그러면 이 절망감과 무력감을 떨쳐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는 걸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소리 지르고, 고통을 느끼고, 죽어가면서, 우리도 이렇게 살아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그러나 무슨 상관인가. 여자와 나는 이미 다 무너졌는데. 이토록 또렷하게 망가진 서로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데. 우리는 자신을 숨기고 가장할 얇은 거짓 하나조차 걸칠 수 없다. 발가벗은 진실은 언제나 서로를 향해 각을 세우고 할퀴고 흉터를 남긴다.’ 167쪽

 

 소설 속 중앙역은 가상 공간이 아니다. 작가는 어디서나 마주할 수 있는 주변이 풍경을 단문을 이용한 최대한의 절제로 시작을 위한 시도의 세찬 몸부림을 그려낸다. 그래서 더 아프고 고통스럽다. 언제나 ‘안’이 아닌 ‘밖’에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삶은 얼마나 될까?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을 때 삶은 끝이다. 그러니 죽어가는 여자를 끝까지 곁에 두지 못하고 응급실에 밀어 놓고 도망치듯 돌아서는 화자를 비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절망 끝에 매달린 사람들에게 ‘끝은 시작이다’라는 말을 조심스레 건네는 젊은 작가의 손을 덥석 잡을 용기가 없다.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을 주문할 때마다 시집을 한 권씩 주문한다. 최근 내 곁에 온 시집은 한결같이 좋다. 

요동치는 마음을 위해, 편협한 마음을 위해, 시를 읽어야 한다.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다.

때로 눈물 대신, 때로 분노 대신, 때로 슬픔 대신 시를 먹는다.

그리하여 시가 되는 꿈을 꾼다.

다시, 시를 읽어야 할 시간이다.

 

 

 

 

 

 

 

 

 

 

 

 

 

 

 

 

물방울들은 얼마나 멀리 가는가

새들은 어떻게 점호도 없이 날아오르는가

 

그러나 그녀의 발은 알고 있다

삶은 도약이 아니라 회전이라는 것을

구멍을 만들며 도는 팽이처럼

결국 돌아오고 또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러나 그녀의 손은 알고 있다

삶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에 가깝다는 것을

가슴에 손을 얹고 몇 시간째 서 있으면

어떤 움직임이 문득 손끝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동작은 그렇게 발견된다는 것을

 

동작은 동작을 낳고 동작은 절망을 낳고 절망은 춤을 낳고 춤은 허공을 낳고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길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녀는 아는가

돌면서 쓰러지는 팽이의 낙법을

동작의 발견은 그때야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나희덕의 <동작의 발견>, 전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런 이야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이세욱 옮김 / 비채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순간을 기억한다. 찰나였지만 내 몸의 모든 세포가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 앞에서, 어떤 그림 앞에서, 어떤 문장 앞에서. 감히 운명이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 그런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룬다.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고, 불어오는 모래 폭풍을 함께 헤쳐나가는 것. 죽음과 삶이라는 경계를 떠올리면 우리네 인생이란 참 단순하다. 그 단순함을 인정하는 과정이 복잡할 뿐이다. 교차하는 곡선과 엉클어진 실을 풀면 결국 하나의 선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 생의 마지막은 어떤 선이 될까, 궁금해진다.

 

 소설은 요란한 자동차 경주로 시작한다. 자동차가 낯선 존재였던 시절, 그것은 기이한 풍경이다. 때문에 누군가에게 어떤 순간이 되고 삶의 목표가 된다. 소를 팔아 정비소를 만든 울티모의 아버지 리베로 파르리가 그랬다. 그리고 그것은 아들에게 전해진다. 아버지는 자동차를, 울티모는 자동차가 달리는 길이라는 운명과 마주한 것이다. 어린 시절 잠깐의 꿈이 아니라 생의 목적이다. 아름다운 서킷을 만들겠다는 울티모의 꿈은 한 번도 변모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곧게 뻗은 길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다워. 이 직선에서 온각 곡선과 위험한 굽이들이 갈려나가지. 그러면서 관대하고도 올바른 질서가 만들어지는 거야. 길들은 그런 것을 할 수 있지만, 인생에는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아. 사람들의 마음은 곧게 나아가지 않아. 마음의 행로에는 질서가 없어. 115쪽

 

 꿈이 존재하므로 울티모는 삶을 견딜 수 있었다. 자동차 사고로 불구가 된 아버지, 자동차 경주를 함께 관람했던 백작의 아이를 낳은 어머니를 피해 참전한 전쟁에서도 그는 길을 믿고 의지한다. 이제 그의 길은 확장된다. 단순한 서킷이 아니라 그 길에 함께 달리 사람들, 그 길에서 바라볼 풍경들로 채워진다. 전쟁이 끝났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버지와 함께 만났던 길을 가슴에 품었지만 미국을 택한다.

 

 청년이라 불리기에도 어린 울티모가 전장에서 어떤 생을 살았는지 우리는 다른 목소리를 통해 듣는다. 그에게 드린 금빛 그늘이 얼마나 눈부셨는지, 우정을 배신한 전우를 어떻게 그의 길에서 제외했는지 말이다. 그렇다. 소설은 주인공 울티모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미국에서는 사랑을 만난다. 발랄하고 도도한 러시아 아가씨 엘리자베타와 함께 피아노를 판매한다. 엘리자베타가 피아노 레슨을 하면 울티모는 피아노를 조립한다. 둘은 함께 지냈지만 엘리자베타는 거짓 일기로 울티모에게 사랑을 고백할 뿐이다. 그럼에도 둘은 서로의 내밀한 부분을 공유할 수 있었다. 전쟁, 가난, 그리고 둘 사이에 피아노와 길이 더해진다. 단 한 장의 편지도 남기지 않고 울티모는 떠나고 엘리자베타는 약혼자였던 부유한 남자와 결혼한다.

 

‘오래전, 안개가 자욱하던 어느 날 밤에 내 아버지 옆에서 이런 것을 배웠어요. 인생살이의 핵심과 시간의 숨결로 우리를 이끄는 길,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길이라는 것을요.’ 229쪽

 

 중년이 된 엘리자베타가 그의 고향을 찾아 아버지를 만났지만 둘은 그저 자동차, 자동차 경주, 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뿐이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 이탈리어로 ‘마지막 사람’이라는 뜻이 온전했던 울티모가 오토바이를 타고 달렸던 길에서 엘리자베타는 그를 그리워한다. 그녀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울티모를 그곳에서 느낀다. 울티모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여전히 서킷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까.

 

‘모든 길은 순환적이고 어딘가로 통하기보다는 자신의 내부에 이르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를 휘감고 있는 공포의 안개가 너무나 짙어서, 길들이 어딘가 다른 곳으로 통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닐까?’ 265쪽

 

 어쩌면 울티모와 엘리자베타의 길이 만나는 교차점은 단 한 번뿐이었는지 모른다. 다시 만나기 위해 누군가 그 길을 되돌아가거나 찾아야만 했다. 엘리자베타의 사랑이 더 컸던 걸까. 그녀가 그 길을 찾아 나선다. 울티모의 서킷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엘리자베타는 그녀가 지나온 길이 결국엔 내부에 이르는 길이라는 걸 발견한 것이다. 신열과 방황으로 가득 차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삶의 파편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아름다운 존재인가를.

 

‘모든 삶은 무한한 혼돈이며 그것을 단 하나의 완전한 형상으로 표현해낸다는 것은 더없이 정교한 예술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녀는 깨달았다. 책들을 읽으면서, 아이들의 눈매나 들판에 홀로 선 나무들을 보면서 우리가 무엇에 감동하는지. 450쪽

 

 고백하자면, 나는 이 아름답고 슬픈 소설이 무척 마음에 든다. 예측할 수 없는 스토리의 전개, 숨바꼭질하듯 곳곳에 숨겨둔 감정의 문장들, 눈을 감고 소설 속 서킷을 그려본다. 아름답고 황홀한 서킷과 하나가 되어 달리는 그들을 말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 나의 길, 그 위에서 만날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갈 선이 얼마나 유려할지. 상상만으로도 찬란한 기쁨을 안겨준다. 그러니 설사 그것이 완벽한 서킷이 아닐지라도 나는 이미 충만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이재형 옮김 / 책세상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걷는 사람은 자기가 무슨 길을 걸어왔는지, 어느 산책길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지, 어떤 곶(岬)에서 내려다본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얘기한다.’ (10쪽)

 

 돈을 주고 걷는 세상이다. 걷는다는 것 자체의 즐거움이 아닌 건강을 위해 걷는다. 그러므로 걷는 즐거움은 잊은지 오래다. 바쁜 현대인은 자동차, 기차, 전철 등을 이동 수단으로 사용한다. 오로지 두 발을 이용해 걷는 사람은 많지 않다. 때문에 걷는 행위로 암을 극복했거나 다이어트에 성공한 사례를 접할 때 걷기의 중요성을 느낀다. 그러니 유명한 사상가와 철학자들의 걷기에 대해 소개하는 프레데리크 그로의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은 좀 어렵고 지루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 정말 산뜻하고 매력적이다.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걸을 때 누릴 수 있는 자유다. 걸어가는 몸은 역사를 가진 것이 아니라 그냥 태곳적에 시작된 생명의 흐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두 다리를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는 짐승, 키 큰 나무들 사이의 순수한 힘, 한 번의 외침에 불과한 것이다.’ (17쪽)

 

 책은 오직 걷기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삶에 대한 통찰과 철학자와 작가들에게 걷기가 어떤 의미였는지 들려준다. 걷기와 철학의 조합을 생각하면 칸트와 간디가 떠오른다. 그러나 그들이 왜 걷기를 고집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저자는 그 외에 니체, 랭보, 루소, 소로, 프루스트, 벤야민 등의 삶과 걷기의 관계를 설명한다.

 

 건강이 악화할 때까지 걷기를 고집하며 그 안에서 글의 주제를 찾은 니체, 새로운 무언가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으로 걷고 또 걷었던 랭보,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해 자신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 걸었던 칸트, 투쟁을 위해 걸었던 간디를 통해 걷기에 담긴 힘과 정신을 생각한다. 누군가는 나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는 진실된 삶을 위해, 누군가는 내면의 소리를 듣기 위해 걷는다.

 

 함께 걷는 게 아니라 혼자만의 걷기다. 이곳이 아닌 그곳을 향해 나가면서 마주하는 풍경들은 예전의 그것과는 다르게 보일 것이다. 멈췄을 때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걷기는 최초의 여행 인지도 모른다. 이 책이 매혹적인 이유는 바깥, 느림, 고독, 침묵, 영원, 순례, 공원, 산책 같은 키워드로 만나는 부분이다.

 

 ‘산책을 한다는 것이 갑작스럽고 단순한 휴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치 걸음을 멈추는 것만이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산책은 오히려 리듬이 달라지게 만든다. 즉, 억압받던 팔다리와 영혼의 능력을 해방시킨다. 산책을 한다는 것, 그것은 우선 억압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즉, 나는 나의 여정과 나의 리듬, 나의 표상을 선택할 수 있다.’ (236쪽)

 

 걷는 것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혹은 단순하게라도 생각해본 적이 없기에 이 책은 특별하고 귀하다. 문장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숲의 냄새와 바람의 온기를 느끼는 듯하다. 일상을 뒤로 한 낯선 곳으로의 걷기든 반복된 걷기는 이전과는 다르게 다가올 것 같다. 걸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진 모든 이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선물하는 책이다. 그러니 이제 랭보처럼 만나기 위해, 떠나기 위해, 나아가기 위해 걷는 건 어떨까?

 

 ‘자, 길을 떠나자! 난 그저 걸어다니는 사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8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꿈에서도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보았다. 과거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그를 아는 지인과 떨림을 공유하고 말았다. 혼자만 간직하기엔 버거운 비밀이라서, 가시처럼 아픈 사람이기에. 아니, 잠시라도 그에게 닿았다는 충만함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죽음이, 누군가에게는 이별이 그러하다. 저마다 다른 이름의 가시를 품고 살아간다. 뽑아내야 할 가시라는 걸 알면서도 가시와 함께 살아간다. 가시를 숨긴 채 말이다.

 

 ‘가시는 살아 있는 선인장의 데드마스크라 할 수 있다.’ 31쪽

 

 그러니까 이 소설은 가시를 품은 생의 풍경들이다. 공사현장에서 발견된 데스마스크를 통해 시작된 세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세 사람의 사랑 이야기. 비밀이라는 이름 아래 숨기기엔 너무도 벅찬 사랑이라 메아리로 돌아올지라도 토해내야 할 골짜기가 필요했다. 소설의 화자인 ㄱ에게 그것은 대학 시절 만났던 선생님이다. 편지처럼, 일기처럼 고백하는...

 

 ‘비밀이 없는 삶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지루하기 이를 데 없이 느껴져요. 사람들이 제일 숨기기 어려운 비밀은 기침과 사랑의 불꽃일 거라고 봐요. 누구든 기침을 하고 누구든 사랑의 불꽃을 갖고 있어요. 그러나 아침에 옷을 입고 세상으로 나가면서 사람들은 터져 나오는 생의 기침과 찰나적이면서도 영속적인 사랑의 불꽃을 행여 누구에게 들킬세라 횡경막 아래 은밀하게 숨겨요. 효율성 중심으로 짜인 세상의 법칙과 그것은 도무지 맞지 않으니까요.’ 196~197쪽

 

 이혼 후 고향인 ‘소소’로 돌아온 ㄱ은 혼자 생활한다. 자유롭게 혹은 고독하게 생을 즐긴다. ㄱ 앞에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남자 ㄴ이 등장한다. ㄴ을 통해 죽음을 본 건 ㄱ의 내밀한 곳에 죽음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ㄴ에게 방을 내주면서 ㄱ의 삶은 생동감이 넘친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게 더플백 하나만 소유한 ㄴ은 ㄱ의 집에서 우물을 판다. 마치 자신의 관을 향해 나아가듯. 그럼에도 ㄱ과 ㄴ은 죽음을 언급하지 않는다.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말이다.

 

 둘 사이를 더욱 활기차게 만든 촉매제 같은 ㄷ이 온다. 갓 소녀에서 벗어난 어린 여자. ㄱ이란 언니와 ㄴ이란 아저씨가 생겨 마냥 기쁜 ㄷ. 둘 사이를 끊고자 하는 게 아니라 둘 사이를 이어 더 긴 끈을 만들기를 소망한다. 한 남자 ㄴ과 두 여자 ㄱ, ㄷ 사이에 흐르는 감정은 사랑이었고 생에 대한 욕망이다. 설명할 수 없는 관계, 설사 설명한다고 해도 이해받을 수 없는 관계다. 스스로 꼭지점이 되어 삼각형을 만들고자 했던 몸부림이라고 하면 맞을까.

 

 ㄱ, ㄴ, ㄷ의 이야기를 차례로 저마다 어떤 가시를 키우며 살아왔는지 들려준다. 가족을 잃고 온전한 사랑이라 믿었던 남자와 결혼했지만 언제나 목마른 사막처럼 살았던 ㄱ, 불행을 몰고 다니는 듯 자신의 존재를 경멸하며 부랑자로 살며 노래를 품었던 ㄴ, 죽음을 동경하지만 죽음이 아닌 생을 선택한 ㄷ은 자신의 가시를 통해 서로의 가시를 상쇄시킬 수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셋으로 삼각형을 이룬 게 아니었어요. 셋으로부터 확장되어 우리가 마침내 하나의 원을 이루었다고 나는 생각해요. 역동적이고 다정한 강강술래 같은 거요. 둘이선 절대로 원형을 만들 수 없잖아요. 셋이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원형이지요.’ 209쪽

 

 기묘한 이야기다. 소설 속 표현대로 셋은 ‘덩어리’가 되어 사랑을 나눈다. 덩어리는 셋이 아닌 하나가 되었을 때 가장 행복하다. 하나가 된 셋의 풍경은 곧 사라진다. 우물이 완성되고 그 우물에 ㄴ이 빠져 죽었기 때문이다. ㄷ이 곁에 있었지만 ㄴ스스로 우물 속으로 향했는지 알 수 없다. 자신만의 세계에서 부르지 못 했던 노래를 부르기 위해 말이다. 우물은 메워졌고 ㄷ은 사라졌다. ㄱ도 집을 떠난다. ㄴ의 데스마스크가 발견되고 ㄱ은 경찰의 조사를 받으며 ㄴ에게 대해 알게 된다. 그가 지닌 슬픔의 크기를, 가시가 박힌 깊이를, 그가 꿈꿨던 노래를...

 

 셋은 분명 서로를 사랑했다. 누구도 납득할 수 없다. 그러나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게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이고 우리네 생이다. 박범신은 소설을 통해 그것을 보여준다. 모두가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이런 생이 존재하며 우리가 마주하는 풍경의 일부라는 걸 말할 뿐이다. 어쩌면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가시를 품은 나와 당신의 풍경일지도 모른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