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정리한다. 가만히 책들을 바라본다. 몇 년 전에 환호하며 읽었던 책, 탐났던 문장들, 눈물을 닦아주던 문장들이 거기 있었다. 잊고 있었던 책들도 발견한다. 책날개에는 소중한 이의 손글씨와 내가 남긴 메모가 있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사인도 눈에 들어왔다.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에는 단정한 글씨로‘2008. 10.1 김연수’가 적혀 있었다.  

 

 책을 정리하면서 책 속에 숨겨진 욕망을 보았다. 내가 도서 정가제를 핑계로 사들이는(그렇다, 읽기가 목적이 아니라) 분야의 책은 시, 문학, 예술이 많았다. 철학, 인문에 대한 욕심도 있지만 읽지 못할 거라는 걸 잘 알기에 멈춤에 이르렀다. 직접 마주할 수 없는 그림을 예술서를 통해 보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주말을 전후로 구입한 책은 소설가 7인의 옷장이란 부제가 있는 『THE CLOSET NOVEL』, 착한 가격과 함께 호평으로 이어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기도』, 『개더링』,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리고 이 책 『ART 세계 미술의 역사』다. 갖고 싶은 책을 생각하는 일은 행복한 고통을 선물한다. 『백치, 『악령』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고민은 괴롭다. 그럴 때마다 지인의 추천으로 기운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추천을 더 잘 알려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도 함께 담았다. 몇 권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언니를 위한 선물로 『소설가의 일』을 주문했다. 선물을 생각하니 김연수의 『우리가 보낸 순간』이 떠오른다. 연말이 다가오기 전에 미리 누군가에게 이 책을 선물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선물을 받는 이는 김연수의 팬이 아니어야 한다.

 

 

 

 

 

 

 

 

 

 

 

 

 

 

 

 

 

 

 

 

 

 마지막을 위한 마지막 리스트는 끝났다. 목요일 이후에 나는 어떤 책을 마주할 것인가? 어떤 책을 살 것인가? 아니,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어쩌면 여전히 책을 정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젯밤엔 강한 바람이 불었다. 16년 만에 수능 한파가 찾아온 것이다. 진짜 겨울이 시작되었다고 중얼거렸고 아침에는 쌀가루처럼 내리는 눈을 보며 첫눈이구나 생각했다. 내가 사는 소읍엔 수능이라 해도 출근을 늦추거나 등교 시간에 대한 변경이 없었다. 공무원이나 은행원들은 달랐겠지만 말이다. 주변에 고3이나 수능에 관련된 사람이 없다 보니 그저 춥다는 말이 지배한 하루였다.

 

 저마다 11월 13일을 기억하는 방법은 달랐다. 누군가에게 오늘은 첫눈이 내린 날이며, 누군가에는 평범한 목요일이며, 누군가에게는 김장을 담근 날이며, 누군가에게는 11월 13일은 전태일 열사를 떠올리는 날이다. 물론 내가 전태일 열사의 기일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건 아니다. 덕분에(부끄럽지만) 이런 책을 펼쳐보는 날이다.

 

 

 

 ‘머리채를 잘랐던 어머니는 흉한 머리를 감추기 위해여 한여름 내내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일했다. 태일은 이른 새벽에는 여관을 돌아다니며 구두를 닦고,낮이면 평화시장·남대문시장·중부시장 등에서 시다나 미싱보조로 노동을 하고, 밤에는 껌과 휴지를 팔러 다녔다. 이렇게 하여 그해 가을 모자가 돈을 보태어 2,500원으로 헌 천막 하나를 샀다. 그 당시 남산 중턱에는 골격만 세워놓고 공사가 중단된 큰 아파트형의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 건물 뼈대에다가 집 없는 사람들이 합판으로 각각 칸막이를 해놓고 그 안에 들어가 살고 있었다. 빈터라고는 옥상밖에 없었는데, 어머니와 태일은 옥상에다 천막을 쳤다. 밤이 되니 관리인이란 사람이 올라와서 철거하라고 하여 그날 밤만 사정사정하여 새우고, 그 다음날 새벽에 철거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모자는 또다시 헤어져 돈을 조금 더 모아서 판잣집을 세내기로 하였다. 김장철이 되었을 무렵 어머니는 남산동 50번지의 한 판잣집을 사글세로 얻었고 오랜만에 어머니, 태일, 태삼 세 모자가 함께 살게 되었다.’ (87쪽)

 

 

 

 그 시절을 몰랐던 혹은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누군가의 삶은 소설이나 영화처럼 다가온다. 나 역사 다르지 않다. 이런 책을 통해서 그들의 시간을 불러올 뿐이다. 천막에서 살아야 하는 삶은 여전히 비닐하우스로 이어지고, 발끝이 닿지 않는 방 한 칸에서 살림을 사는 삶은 줄어들지 않았다. 진실이 아닌 것들이 진실로 보도되고, 권력과 부가 휘두르는 칼에 서민들은 깊고 큰 상처를 입는다.

 

 우리가 바라는 삶은 어떤 것일까? 부자가 되는 것, 명예를 갖는 것,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은 극소수가 바라는 삶이다. 아니 바란다고 될 수 있는 삶이라면 좋겠다. 그저 내 식구가 배고프지 않고 춥지 않게 겨울을 지낼 수 있는 아주 작은 공간을 꿈꾼다. 아프면 참지 않고 바로 병원에 갈 수 있는 세상, 잘못된 부분을 바로 인정하고 시정할 수 있는 세상을 바란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맨 먼저 달려온 사람들은 늘 차별과 소외가 있는 곳에서 함께해온 헌신적인 사회단체 사람들과 고통받는 노동자들이었다. 이랜드-뉴코아 여성 노동자들, 코스콤 비정규자들, 며칠 전 고공농성을 마친 GM대우 비정규직들, 재능교육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 전국해고노동자투쟁위헌회 회원들, 그리고 시청 앞에서 성람재단 비리 해결을 위해 끈질기게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는 장애우들 우리 사회 가장 밑바닥에서 자신의 권리를 넘어 전체 차별받는 이들의 권익을 위해 싸우고 있는 이들이었다.’ (189쪽)

 

 

 

 

 

 

 수능은 끝났고 출제경향에 대한 이야기가 끝이지 않을 시간이다. 시험을 치른 아이들이나 그렇지 않은 아이들 모두 특별한 하루가 된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멋진 꿈을 꾸며 잠드는 이들도 있을 것이며 눈물을 삼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2014년 11월 13일을 기억하는 수많은 방법 가운데 분노나 절망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저 평범한 하루를 마치며 내일을 준비하는 시간에 작은 감사와 평안의 조각이 있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와 고양이의 은밀한 시간 한림아동문학선
김종렬 지음, 신은숙 그림 / 한림출판사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은은한 달빛이 물든 밤을 떠올리는 표지의 동화 개와 고양이의 은밀한 시간 를 읽으면서 어렸을 적 추억을 떠올린다. 어렸을 적 개는 나의 소중한 친구였다. 학교에 갔다 올 때면 저 멀리서 나를 보고 가장 먼저 달려왔다. 그에 반해 고양이는 곁을 내주지 않았다. 여전히 개를 좋아하지만 개를 키울 계획은 없다. 어렸을 때와 달리 예뻐하는 게 아니라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개와 고양이를 키우는 걸 보면 부럽기도 하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다. 동화는 개와 고양이의 이야기다. 사람들에게 버려진 개와 고양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신문배달을 하는 아이는 우연히 ‘개와 고양이의 은밀한 시간’이란 이름의 레스토랑을 발견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안으로 들어가는 요리사와 뒤를 이은 개와 고양이의 무리를 본다. 바깥에서 살펴보니 요리사를 중심으로 개와 고양이는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오늘은 달 없는 밤~

  은밀한 시간이 시작되지이~.

  싸움과 다툼은 사라지고~

  슬픔과 눈물도 사라지네~.” (32쪽)

 

 아이 눈에 비친 풍경은 마치 축제가 시작된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이는 저도 모르게 문을 열고 들어갔고 개와 고양이의 시선을 받는다. 인간은 들어올 수 없는 곳, 개와 고양이들만이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라 아이를 환대하지 않는다. 아이가 신문배달을 하는 소년이라는 것과 다친 고양이를 보살펴준 이야기가 나오고서야 아이는 그곳에 함께 한다.

 

 옥탑방에서 할머니와 함께 사는 아이는 할머니의 반지를 찾기 위해 고양이를 따라왔다고 말하고 개와 고양이는 반지를 훔친 고양이를 몰아세운다. 그리고 시작된 개와 고양이의 이야기. 인간들에게 버림받은 상처와 잊고 있던 개와 고양이에 대한 추억을 떠올린다. 인적을 피해 골목길을 돌아다녀야 하는 슬픈 생활. 일 년에 단 한 번 달이 없는 밤, 이곳에 모여 만찬의 시간을 갖는다.

 

“인간들에게 버려진 고양이가 갈 곳은 황량한 거리뿐이겠지. 집을 지키던 개가, 애완견으로 살아가던 개가 유기견이 되면 가야 할 곳도 차가운 거리밖에 없어. 인간들에게 잡혀 보호 시절에 들어가면 결국, 죽음과 만날 뿐이니까.” (72쪽)

 

 개와 고양이가 들려주는 인간들의 모습은 참으로 비정하다. 한때는 가족처럼 지냈던 동물을 유기하고 학대하는 인간을 고발하는 듯하다. 낮이 아닌 밤에만 활동할 수 없는 개와 고양이. 옛날 동화처럼 서로가 미워하는 사이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개와 고양이의 시간. 그들 사이에 다정한 인간의 손이 있기를 바라는 동화가 아닐까 싶다.

 

“도시와 마을을 만든 것은 인간이야. 하지만 인간과 가까운 곳에, 그 거리에, 비좁은 골목과 높은 담벼락 너머에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어. 인간들이 그걸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어. 우리에게는 개의 자부심과 고양이의 품위가 있으니까.” (12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길들지 않는다 - 젊음을 죽이는 적들에 대항하는 법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련과 싸움의 연속이다. 아무리 윤택한 환경에 있는 자라도 시련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인간이란 그렇게 살 운명이다. 그 또한 인간 역시 야생동물의 일원이라는 증거다. 야생동물이라면, 자신이 지닌 모든 능력을 발휘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인생의 길을 걸어야 생명은 그 빛을 발하고, 진정한 젊음도 획득되는 것이다.’(50쪽)

 

 아직은 자신 있게 마루야마 겐지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다. 단호함과 당당함에 끌리는 정도가 맞겠다. 자신의 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는 작가인 것 같다. <나는 길들지 않는다>라는 제목처럼 말이다. 길들지 않는다는 말은 자유롭다는 말이라 생각한다. 자유롭다는 건 책임을 질 줄 아는 삶으로 확대된다. 그러니 마루야마 겐지는 자신의 삶에 책임지는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는 말이다.

 

 시류에 휩쓸려 사는 사람이 아닌 자신의 규칙대로 생활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거창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모든 상황에 있어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건 어렵다. 물론 마루야마 겐지가 주장하는 바는 독립적으로 살아가라는 게 아니라 세상의 지배가 아닌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진정한 젊음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가족, 직장, 지배자에게 길들지 말라고 강력하게 직언한다. 태어나면서 필연의 관계가 되는 가족에게 길들지 말라는 이상하게 들리기도 한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언제라도 편안하고 쉽게 기댈 수 있는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다는 건 옳다. 특히 그의 말처럼 어머니라는 존재는 가장 위험하다. 그러니까 어른이 되어서도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이다.

 

 직장에서 대해서도 그는 단호하다. 직장인이라는 삶에 안주하지 말라고 말한다. 직장인이라는 타이틀을 얻기 어려운 시대, 과연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떤 이는 비전을 보라는 말로 해석할지도 모른다. 마루야마 겐지는 하나의 대안으로 농업을 제시한다. 자신의 손으로 가꾼 땅에서 얻은 수확물로 생활하는 삶을 통해 진정한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산 자에게 유일무이한 보물은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아무도 지배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이고 진정한 자립이며 진정한 젊음이다. 하지만 무수한 욕망과 무수한 정념이 그 길을 가로막아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 자는 아주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192쪽)

 

 재산, 명예, 지위라는 욕망에 눈 돌리지 않고 자신의 목표대로 정진할 수 있는 이는 얼마나 될까. 어느 순간 돌아보면 나의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면서도 안주하고 만다. 생애를 치열하게 살아내는 야생동물처럼 살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가슴이 뜨끔거린다. 우리의 삶은 어떤 삶인지, 살아 있는 자인지, 살아 있지 않은 자인지, 질문이 뜨거운 화살처럼 박힌다.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는 자는 진정 살아 있는 자이고, 타인에 기대 살아가려는 자는 가짜 산 자이다. 전자는 ‘살아 있는 자’이며 후자는 ‘살아 있지 않은 자’이다. 요는 살아 있을 것이냐, 살아 있지 않을 것이냐이다.’(207쪽)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이 책은 아주 멋진 젊음 처방전이 될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무기력해지고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세대에게는 새로운 도약을 위한 시발점이 되고 경제적 독립을 시작한 이들에게는 미래를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어떤 상황이든 확고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삶, 그것이야말로 진정 살아 있는 삶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마루야마 겐지라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나코 - 2014 제38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공간 3부작
김기창 지음 / 민음사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우리 삶은 유한하다. 그렇기 때문에 소중하다. 반대로 예측할 수 없는 유한의 것이기에 소중함을 모르고 살기도 한다. 남은 삶을 측량할 수 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마도 많은 이들이 온전히 나만을 위해 살기를 원할 것이다. 주위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마지막을 위한 현명한 이별 방식이다. 그러나 자신의 삶임에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건강상의 이유로 혹은 경제적인 이유로 말이다. 그러니 자유롭게 살아가는 김기창 장편소설 <모나코>속 노인이야말로 누군가에게는 부러운 사람이다.

 

 노인은 거대한 저택에 고양이 두 마리와 출퇴근 도우미 ‘덕’과 살고 있다. 외손녀까지 있는 ‘덕’ 역시 치매에 걸린 노모를 위해 다른 도우미 고용을 위해 돈을 번다. 노년의 삶은 고단하고 외로운 것이다. 노인은 이웃과 교류가 있거나 동네 노인정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아니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이다. 집 안에는 그를 위한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다.  건강을 위해 꾸준하게 운동을 하고 집안 곳곳에 다양한 약은 물론 영화와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공간까지 따로 있다. 노후의 걱정이나 근심을 찾아볼 수 없는 삶이다. 때때로 세 아들의 형식적인 방문이 기다려질 때도 있고 죽은 아내가 그립지만 혼자인 게 좋다.

 

 노인의 즐거움은 동네 산책이며 ‘진’과 대화를 나누는 일이다. ‘진’은 유부남의 아이를 낳고 수녀원에서 생활하는 젊고 어린 여자다. 손녀 뻘인 ‘진’을 보면 설레고 흥분된다. 젊음을 느낄 수 있는 것, 욕망을 상상하는 것, 그것으로 족하다. 누구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다. ‘진’도 다르지 않다. 노인에게 돈을 목적으로 접근한 게 아니다. 말이 통하는 친구, 자신과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 보는 노인이 나쁘지 않을 뿐이다.

 

 ‘노인은 자신과 진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사람들을 어떻게 볼지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결국, 그들은 아무도 아니다, 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가 지금껏 혼자인 것은 다른 사람들 탓이 아니다. 지금의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다. 젊은 사람 중 관계의 시달림보다는 외로움을 택하는 사람이 있듯이 노인도 그럴 수 있다.’ (65쪽)

 

 고백하자면 소설을 읽는 내내 노인과 ‘진’ 사이에 무슨 일인가 일어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진부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진을 초대해 맛있는 밥을 먹이고 따뜻한 물에 아이를 목욕시키는 일이 전부였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모나코로 떠나 둘만의 시간을 갖거나 노인이 자신의 재산을 진에게 남기는 일 따위는 없었다.

 

 고양이와 말을 나룰 정도로 외로웠지만 노인은 죽음을 밀어내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에게 남겨진 삶이 길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음식과 약이 있어도 곧 죽음을 맞이할 거라는 걸 누구보다 먼저 알았던 것이다. 죽음 앞에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 노인도 그랬을 것이다. 다만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다.

 

 “내일 아침에 내가 살아 있으면 그때 가서 고민해도 안 늦어. 그리고 또 하루가 갈 거야. 나는 그다음 날 또 살아 있을지도 모르지. 그다음 날도. 또 그그다음 날도. 그그그다음 날도.” (111쪽)

 

 거칠 것 없는 노인의 당당함 뒤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은 혼자 겪어야 한다. 작가는 아무도 없는 커다란 집에서 혼자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 노인의 모습은 통해 그 사실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서 말이다. 그것은 곧 유한의 삶에 대한 것으로 이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