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랑의 실험 - 독일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알렉산더 클루게 외 지음, 임홍배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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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소설에 대해 딱딱하고 읽기 힘들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하여, 오랜 시간 손에 잡았던 ‘카프카’의 <성>이 떠올랐다. 물론 내가 알고 있는 작가나 작품은 많지 않다. 독일편의 작가엔 ‘괴테’, ‘카프카’, ‘헤쎄’를 제외하고 익숙한 이름이 없었다. 그럼에도 9개국의 세계 문학 중 영국 다음으로 독일편으로 선택한 이유는 17명 작가의 단편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소설의 분량도 아주 짧은 것부터 중단편까지 다양하여 골라 읽는 재미가 있다. 
 
17편은 하나같이 독특했다. 히틀러의 독재와 유대인 학살, 동독과 서독에서 하나의 독일로 통일된 역사를 배경으로 다룬 단편들이 모여 독일스럽다는 표현이 맞을까 싶다. 기억에 남는 단편들은 표제작인 ‘알렉산더 클루게’의 <어느 사랑의 실험>,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장님 제로니모와 그의 형>, ‘헤르만 브로흐’의 <바르바라>, ‘지크프리트 렌츠’의 <발라톤 호수의 물결>이었다. 젊은 아내가 정부와 짜고 뚱보 남편을 죽게 만드는 ‘토마스 만’의 <루이스 헨>와 원숭이를 화자로 내세운 ‘프란츠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도 색다른 단편이었다. 

  제일 먼저 읽게 된 알렉산더 클루게의 <어느 사랑의 실험>은 강제 수용소에서 방사선으로 불임시술을 한 후, 오래도록 그 상태가 유지하는지 포로들을 상대로 실험하는 내용이다. 과거 히틀러의 시대 ‘아우슈비츠’의 한 장면을 떠올렸으며, 인간의 잔혹성을 고발하는 듯 보였다. 짧은 소설이었지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장님 제로니모와 그의 형>은 형 카를로가 자신의 실수로 눈이 먼 동생을 옆에서 보살피며 생활하는 이야기다. 눈 먼 동생에게 동전을 건네며 손님이 형을 조심하라고 장난스런 말을 건넨다. 이 한 마디 말은 동생과 형의 사이를 위태롭게 만든다. 20년의 신뢰는 한 순간 무너지고, 동생은 형의 어떤 말도 믿지 않는다. 급기야 형은 동생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도둑질을 하고, 경찰에 잡힐 위기에 처한다. 20동안 지속된 관계가 하루의 오해로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은 신뢰는 어디서 오나 묻게 한다. 

 헤르만 브로흐의 <바르바라>는 중년의 의사가 자신이 사랑한 젊은 의사 바르바라를 추억하며 시작한다. 생화학을 연구하던 의사는 소아과 여의사 바르바라에게 첫 눈에 반한다.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한 소녀가 입원하고 모두가 뇌진탕을 진단한다. 그러나 바르바라는 뇌일혈을 앓고 있다며 괴로워한다. 의사는 그녀를 위로하다 둘은 가까워져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결국 소녀는 뇌일혈로 죽고 만다. 아이를 가진 바르바라에게 의사는 청혼을 하지만, 바르바라는 휴가를 떠나고 결국 자살한다.  읽는 내내 결말에 대해 궁금했는데, 바르바라는 공상당행동대원으로 사랑이 아닌 사상을 선택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독일, 바르바라와 같은 삶이 얼마나 많았을까. 

 지크프리트 렌츠의 <발라톤 호수의 물결>은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한 오빠와 동독에 남은 여동생이 13년에 만난 가족 상봉기다. 서로를 그리워했지만 남매는 이념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다. 이 단편은 분단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특별하게 다가왔다.

 독일편은 단편 17편을 차례대로 모두 해설해주고 있다. 독일 문학에 대해 문외한인 내게 자세한 작품 설명은 많은 도움을 준다.이 책을 계기로 언젠가 읽을 욕심으로 사둔 카프카 단편집을 책장에서 꺼내야겠다. 그리하여 조금씩 독일 문학과 가까워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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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그러니까 그저께 3월 15일에 잠깐 울었다. 울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잠깐 내 나이를 생각했고, 3월의 절반이 지났다는 생각을 했다. 순간, 불안이 몰려왔다. 2010년은 어떤 리스트로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계획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 74일이 지났다. 74라는 숫자가 크게 다가왔다. 정신을 차려야지 않냐는 질책의 소리를 들었다. 

 저녁에 고모와 통화를 했다. 사촌들의 근황과 다른 고모들의 소식을 들었고 여전하게 걱정의 잔소리를 들었다. 알았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성의없는 대답을 했다. 고모가 아니면, 누가 이렇게 살뜰하게 나를 챙길까 알면서도 그랬다. 드라마를 하나 보고 읽다 만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나는 왜 울었을까, 생각했다. 

 봄이라는데, 여전하게 춥다. 바람 탓인지, 아직 창을 열고 베란다에서 햇살을 맞지 못했다. 그래도 곧 여기 저기 꽃이 필 것이다. 곧 연두를 지나 초록이 가득할 것이다. 그렇게 하루, 하루 여물 것이다. 봄은 곧 지나갈 게 분명하다. 나는 얼른 정신을 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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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와 빨강
편혜영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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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편혜영의 소설을 기다렸다. <아오이 가든>, <사육장 쪽으로 >에서 일상이라는 잔혹한 현실을 섬뜩하게 그려낸 편혜영. 이번엔 과연 얼마나 끔찍한, 혹은 잔인한 일상을  보여줄까. 눈, 코, 입, 귀, 정상적인 한 남자의 얼굴이 분명한데, 뭔가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표지는 소설에 대한 암시처럼 느껴진다. 
 
 소설은 한 남자의 이야기다. 제약회사 약품개발원으로 일하는 남자는 쥐를 잘 잡는 이유로 C국의 본사로 발령을 받는다. 전처와 이혼하고 무기력한 일상에서 탈피하고 싶었던 남자에게 파견근무는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C국의 상황이 어떻든 상관없이 새로운 곳에서의 생활이면 족했다. 막상 도착하니 C국은 전염병이 돌았고, 남자의 숙소가 있는 제 4구역은 쓰레기로 가득하다.  본사 직원 몰은 출근이 늦어진다는 말을 끝으로 연락을 끊는다.

 남자는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실에 외로움을 느끼며 전처와의 일상을 회상한다. 바쁘다는 이유로 함께 한 시간이 줄었다. 해서,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없었다. 전염병으로 인해 제 4구역은 정기적인 소독과 식사가 제공된다. 몰과의 연락을 위해 본사와 회사에 전화를 걸지만, 아무 소식도 전해듣지 못한다.  외부와 어떤 접촉도 없이 지내던 남자는 모국에 남겨둔 개가 생각나 동창 유진에게 개를 부탁한다.

 유진은 남자의 출국 전날 잔인하게 죽은 개와 전처의 소식과 자신이 용의자란 사실을 전한다. 남자는 술에 취한 출국 전날을 떠올리지만, 전처와 개를 죽인 기억은 없었다. 그러던 중, 갑작스런 방문자에 불안해진 남자는 숙소에서 뛰어 내린다. 노숙자가 된 남자는 공원을 거쳐 하수도에서 생활하며 시궁창의 쥐를 잡는다. 방역팀장에 의해 임시방역원으로 선발된 그는 쥐를 잡으며 살아간다.

 남자는 여전하게 몰을 찾는다. 힘겹게 본사에 방문했으나 전영병에 걸려 퇴출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몰은 과연 존재하는 인물일까. 쥐를 죽이는 일은 평범한 일상이 되었다. 전염병이 사라진 C국에서 남자는 쥐를 잡아 돈을 벌며 살아간다. 안정적으로 보이는 삶은 고독함과 외로움이 함께였다. 모국에 전화를 걸어 유진을 찾거나, 전처와 같은 이름을 찾지만 언제나 실패했다. 

 누가 전처를 살해했을까. 소설은 강한 의문을 제시할 뿐 답은 알려주지 않는다.  제약회사 약품개발원인 주인공이 전염병이 도는 나라에게 결국 쥐를 잡으며 살게 되는 이야기. 살아있는 쥐를 죽이는 끔찍함이나 전염병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사회의 묘사는 전작과 다름없이 그로테스크하나 훨씬 더 꼼꼼하다. 그 기막힌 전개과정을 보면 편혜영이 무척 공들여 썼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의 인물들은 유진을 제외하고 이름이 없다. 주인공 ‘남자’를 시작으로 ‘전처, C국, 제 4구역, 모든 외국인으로 대표되는 , 심지어 이름없는 까지. 익명성으로 부여된 인물은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누구라도 예외없이 전염될 수 있는 전염병도 그러하다. 특정한 인물이 아니라, 모두에게 닥칠 수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는다.

 좁은 사각형의 유리상자 안에서 그는 공연히 떠오르는 이름들을, 전처의 이름이나 유진의 이름 혹은 자신의 이름을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동전을 넣지 않으면 어떠한 신호음도 떨어지지 않는 수화기는 묵묵히 그가 부르는 이름을 들어주었다.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유리상자 안에서 가볍게 공명했다. 그 이름들은 닿을 수 없는 먼 과거와 유일하게 이어진 것이었다. p 234  

 남자의 삶은 기구한 운명이라 해야 할까. 전처나 직장 동료와 대화를 회피하고 살아온 시간과 명확한 의사 전달을 뒤로 하고 결과를 예측해 결국 고립되고 만다. 따지고 보면, 모두 소통의 부재에서 기인한 것이다. 공중전화를 볼 때마다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누군가와 말을 나누고 싶은 남자의 간절함은 고독을 감당하지 못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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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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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에 겐자부로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보다는 지적 장애인 아들을 둔 아버지로 방송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 감동을 소설로 만나지는 못했다.  실은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이 처음인데, 거기다 50주년 기념 소설이라니 어려운 소설을 만났구나 싶었다.  

 소설은 작가 오에의 삶이 아닌 인간 오에의 평범한 일상으로 시작한다. 작가 스스로가 화자가 되어 소설을 전개한다. 노년의 아버지와 중년의 몸이 불편한 아들이 함께 걸으며 나누는 대화는 일상적이다. 

 “아직 백 살까지는 시간이 있지. 소설도 주제보다는 새로운 형식을 발견하면 쓸 생각이야.”
 “끝까지 못 찾을 수도, 있습니까?”
 “그럴수도 있겠지.”
 “그래도 소설가로 살겠다는……”
 “그렇게 생의 마지막을 맞이할 거다”  p 11

  소설가로 살아온 50년, 그리고 남은 생도 소설가로 살겠다는 화자의 담담하고 결연한 의지가 전해진다. 순간, 숙연해진 나는 생의 마지막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소설을 들여다보면, 일흔이 넘은 작가에게 찾아온 대학 친구 고모리, 그로 인해 과거를 회상하며 이야기가 펼쳐진다. 30년 전으로, '나'는 스승의 죽음으로 글을 쓰지 못하고 어떤 일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그 시절, 영화 제작자 고모리와 한 때 유명했던 아역 스타 사쿠라가 찾아와 시나리오를 부탁한다. '나'와 사쿠라의 인연과 시나리오의 내용은 소설에서 하나의 커다란 축이 된다.  

 그들이 만들고 싶었던 영화는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의 일본판이었다. 일본 막부 말 동란기의 이야기로 바꾸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 중심에 사쿠라가 있었다. 제작자 고모리는 반대하고 나섰지만, 사쿠라는 '나'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중심이 된 공연 <메이스케 어머니 출진>에 관심을 갖고 추진한다. 사쿠라에게 영화는 남은 인생이 걸려 있었다. 그런 사쿠라를 보면서 '나'는  소년 시절 만났던 영화 <애너벨 리>속 한 소녀, 사쿠라를 떠올린다. 

 소년의 기억 속에 사쿠라는 포우의 시 속, ‘애너벨리’ 였다. 소년과 소녀를 이어주는 영화 <애너벨 리>. 그 깊은 유대감은 '나'에 대한 믿음이었다. 해서, 사쿠라는 자신이 살아온 삶은 모두 이야기 한다. 그러나 서로가 기억하는 영화의 마지막은 달랐다. 전쟁이 끝난 혼란의 시기, 부모를 잃은 소녀를 후원해준 미국인은 소녀를 농락하고 진실을 감추고 있었다.  상처는 사쿠라의 잠재의식 속에서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소설엔 꽤 많은 이야기가 엉켜 있었다.  시나리오 작업 과정에서 알게 된 '나'의 할머니와 어머니 세대의 항쟁이 있었고 사쿠라에겐 진실과의 대면이 있었다. 결국 사쿠라는 어린 시절의 일이 꿈이 아닌 진실이었음을 알게 되고, 충격으로 정신 병원에 입원한다. 영화는 무산되었고, 그후로 30년이 지난 현재, 고모리는 그 영화를 위해 시나리오를 써달라고 '나'를 찾아 온 것이다. 

 30년의 시간을 돌아 다시 만난 세 사람은 거친 파도를 만났고, 사막을 건너 인생의 마지막을 향해 있었다. 아들과 생활하며 새로운 형식을 발견하며 소설을 쓰고자 작가, 암투병중인 고모리, 세상을 향해 ‘메이스케 어머니’의 외침을 전하려는 사쿠라. 영화같은 인생은 여전하게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오에 겐자부로의 첫 만남, 소설가에게 소설은 이제 허구가 아닌 진실의 기록은 아닐런지. 이런 생각도 했다. ‘아름다운 에너벨 리’는 누구일까. 사랑 이상의 사랑이 있었던 그 아름다운 왕국, 그 ‘애너벨 리’는 상처와 치유를 반복하며 오늘을 사는 우리는 아닐까. 언젠가는 싸늘하게 죽는 생의 마지막을 맞이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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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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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이라는 제목에서 단호함이 느껴진다. 김숨은 짧은 단편으로만 만났고 장편은 처음이다. 단편에서 좋은 느낌을 받았기에 기대가 컸다. 사실, 단편집 <투견>, <침대>에 대해 쉬이 읽혀지지 않는다는 평을 접했기에 살짝 긴장을 했지만, 소설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라고 할까. 

 소설은 시골 마을에 조선소가 들어서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조용하고 면밀하게 관찰하여 기록한다. 거대한 조선소는 작은 마을을 변화시킨다. 누군가는 발전이라고 할 것이다. 일자리가 생겼고, 경제적으로 안정을 주었다. 조선소에 다니는 아들, 남편을 둔 사람들은 모두에게 부러운 존재였다.  아이들이 자라 조선소에서 일하는 것을 꿈꿨다. 하여, 너도 나도 철선을 만드는 조선소에 취직을 하고 싶어했다. 다른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몰려왔고, 그 중에 ‘꼽추’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소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마을을 조선소에 다니는 푸른 작업복을 입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구분되었다. 

 조선소의 주인과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철선에 대해서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매일 같이 출근을 하는 사람들 조차 알지 못했다. 출근하여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생겼지만, 자신의 일이 아니었기에 무시했다.  마을엔 철로 가득했다. 철문, 무쇠 식칼, 무쇠 솥, 무쇠 가위, 쇠로 만든 관, 틀니까지 무쇠로 만들었고, 심지어 철을 약처럼 복용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모두가 조선소를 신봉했으나, 단 한 사람꼽추’는 예외였다. 그는 자신을 무시한 조선소와 마을 사람들을 증오했고, 틀니를 팔아 돈을 모았다. 

 시간이 지나고, 철옹성과 같았던 조선소는 어느 순간 사람들을 쫓아냈고, 마을에서 쇠를 빼앗아간다. 조선소에서 폐병으로 병원에 감금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조선소는 더이상 꿈이 아니었다.마을은 농사를 지을 수도 동물을 키울 수도 없게 되었다.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파괴되는 지난날 우리 사회의 모습이었다. 

 김숨은 조선소라는 거대한 자본에 지배되는 삶을 자세하게 묘사했다. 노동에서 소외된 인물 ‘꼽추’가 그들을 상대로 돈을 모으고 집착하는, 조선소에 속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삶을 대조적으로 그렸다. 조선소에서 쫓겨난 아버지들을 통해 신성하다고 여겨졌던 노동이 한낱 소모품에 불과했음을 보여준다. 절대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조선소와 철선에 의해 마모되어 철저하게 버려지고 소외되는 삶. 

 아침부터 까끌까끌하고 불그스름한 먼지가 북쪽에서 불어와 마을을 휩쓸었다. 그 먼지는 공기 중으로 번져나갔다. 대낮에도 마을은 급작스럽게 불어 닥치니 먼지로 인해 초저녁처럼 어두웠다. 시큼하고 비릿한 쇠 냄새가 진동을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가 녹(綠)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아침저녁으로 녹을 한 숟가락씩 복용하는 늙은이들도 숨을 들이쉴 때마다 콧구멍으로 들어오는 것이 녹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p 49

 김숨의 소설은 우리 이웃의 모습이자 나의 모습이었다. 우리의 삶은 여전하게 자본의 지배 속에 있다. 소설속 조선조는 또 다른 이름의 수많은 조선소로 여전하게 존재한다. 삶이 지속되는 한 노동도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철선을 보는 이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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