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숨 장편소설
김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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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에 이어 이번엔, 이다. 두 번째 만나는 김숨의 장편소설이다. 머리카락을 연상시키는 물줄기가 집에서 흘러나오는 표지, 기묘한 이야기를 짐작할 수 있다. 물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어머니(물), 아버지(불), 쌍둥이 자매(소금, 금), 막내딸(공기)로 구성된 가족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소설은 화자인 소금이 이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며 시작한다. 동시에 수족관이 들어오고 있다. 불인 아버지가 수족관을 깨부수고 집을 나가고 처음이다. 수족관은 딸들이 태어난 곳으로, 물에겐 소중한 공간이다. 소금을 시작으로, 기도원에 간 금과 공기, 소식이 없던 아버지 불까지 집으로 돌아온다. 

 물과 불은 그 물질이 상징하듯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쌍둥이인 소금과 금의 관계도 수평이 아닌 수직적이다. 언제나 금이 우선이다. 공기만이 그들과 잘 지낼 수 있는 물질이다. 물, 불, 소금, 금, 공기는 상징적 이미지가 아닌, 물질이 갖는 고유한 특성이 곧 인물이다. 불과 소금을 소멸시키는 물, 소금을 만들고, 금을 변형시키는 불의 성질이 가족 간의 갈등, 욕망, 대립으로 드러난다. 

 소금인 나는 질량과 맛과 성분으로, 금은 빛과 질량과 순도로, 물인 어머니는 부피와 움직임과  상태로, 불인 아버지는 온도와 빛과 열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증명해 보인다. 무색무취할 뿐 아니라 아무런 맛도 지니지 못한 공기는, 움직임으로 스스로를 증명해 보인다. p  61

 물인 어머니 물은 얼음과 수증기의 상태를 오간다. 발작하듯 얼음이 되었다가, 저절로 다시 물로 돌아온다. 물로 존재할 때, 완벽한 어머니가 된다. 어려서부터 금을 질투한 소금은 멀리해야 할 물에 집착한다. 언제나 모두에게 사랑받은 금이 금을 낳기를 바라는 불은 금의 곁을 맴돈다. 공기는 종교에 집착한 생활을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몇 방울의 물만 남긴 채 집 안의 물이 사라진다.  삼백만 톤의 물을 몰아내고 자신이 직접 지은 불은 막힌 수도배관을 찾기 시작하고, 집은 악취로 가득하다. 난쟁이인 수도 검침원은 엄청나게 밀린 수도세를 내라고 재촉하며, 물에 대한 경고를 한다. 은행은 불이 집을 지으며 진 빚으로 집을 경매하겠다고 통보한다. 배관공을 불렀지만, 막힌 수도배관을 찾을 수 없었다. 금은 배관공의 아이를 갖는다. 기이하게도 수도세는 점점 더 늘어난다. 얼음의 상태가 잦았던 물은 끝내 수족관에서 죽는다. 금은 금이 아닌 납을 낳고, 소금이 납을 키운다. 거대한 저택은 사막처럼 건조해지고, 사라졌던 물이 돌아온다.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물’이었다

 한 방울의 물과 한 방울의 물은 서로를 끌어당긴다. 경계를 허물고 서로를 끌어당겨 한 방물의 오롯한 물이 된다.’ p 205

 <물>에서 보여준 관계는 분명 극적이나, 나를 잃지 않고 상대를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부질없고 허망한 일인지 보여준다. <물>은 <철>과 비슷한 구조를 지녔으나, 더 확장되었다 볼 수 있다. 수도 검침원인 난쟁이는 <철>에 등장하는 곱추를 떠올린다. 난쟁이과 곱추는 유일하게 문제의 심각성을 찾아내는 인물이다. 그리하여 소설은 더 몽환적이고 잔혹하다. <철>에선 철이 가진 특성 하나만으로 소설을 전개하나, <물>에선 물을 시작으로 불, 소금, 물, 공기, 납까지 다양하고 복잡한 인물의 욕구를 담았다. 

 김숨의 반복적이고 짧은 문장은 여지없이 차갑고 건조하다. 거침없이 섬뜩한 묘사도 여전하다. <철>,<물>에 이어 김숨이 선택할 광물이 궁금하다. 얼마나 더 치밀하게, 기묘하게 그려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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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짜다 - 작가가 그린 자화상
헤럴드경제 편집국 지음 / 헤럴드미디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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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화상이란 모름지기 이미 존재하는 육체적 외관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내면의 윤관 사시에 아슬아슬하게 맺히는,  하나의 긴장에 찬 이미지다. 모든 예술이 그럴 것이다. 외관과 내면 사이, 우연과 필연 사이, 자유와 부자유 사이, 필멸과 불멸 사이를 오락가락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p 163 권여선  

 어떤 식으로든 나를 그려본 적이 없다. 작가들이 그린 자화상을 보고 읽으면서 거울을 자주 들여다 봤다. 자화상(自畵像), 내가 나 자신을 그린다는 일은 나를 관찰하며 나에 대해 사유하는 시간이다 . 해서, 작가들에게 자화상이란 보이는 외면뿐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 내면을 세상에 내놓은 일이 아닐까 싶다. 

 헤럴드경제에 연재되었던 <작가가 그린 자화상>을 통해 몇 몇 작가의 글을 만났던 터라 반가움이 크다. 김주영, 안정효, 박범신, 한승원과 같은 한국 문학의 거장을 시작으로 주목받는 작가라 할 수 있는 김경주, 김이설, 김도언, 배명훈과 신세대인 전아리까지 모두  42인의 자화상을 만날 수 있다. 자화상은 작가의 개성에 따라 형식이 달랐다. 자화상이라는 말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감각있게 담아낸 작가도 있었고, 독특한 자화상을 선보인 작가도 있었다. 작가들의 글을 통해 유년시절의 기억, 상처, 작가로의 힘겨운 일상을 공개하고 작가 자신을 고백한다. 

 작가가 그린 자화상은 모두 인상적이었다. 뛰어난 그림 솜씨를 가진 작가와 독특하게 표현한 작가도 있었다. 보여지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자신이 그린 그림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작품이 아닌 일상적인 글이 주는 매력은 남다르다. 마광수의 자화상은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야한 여자를 떠올리며, 코와 입 대신 물고기를 그려 넣은 전아리의 자화상, 한 때 자신의 머리카락을 삼손의 머리칼이라 불렀다는 천운영의
자화상은 매력적이다.  



마광수의 자화상 


전아리의 자화상  


천운영의 자화상 
 

  42인 작가 중 가장 강한 느낌의 글은 ‘내 얼굴은 한마디로 졸리게 생겼다. 그리하여 별명은 ‘졸음이’.’ p 47 백가흠이다. 자화상 역시 독특했다. 흩어져 있는 눈, 코, 입의 조각난 사진들은 분열된 자아처럼 느껴졌다.  

 ‘얼굴 표정은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 표정을 읽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다. 아침마다 거울을 보는 시선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들어와 있는 타자의 눈이다.’ p 35  이문재의 글은 나는 과연 누구인가, 나는 나인가,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한다.   

 백가흠의 자화상을 떠올리는 김도언의 자화상이다. 얼굴에서 떨어진 안구 하나,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쓰는 소설은 이와 같은 극심한 분열가 대립과 충돌의 과정에서 시나브로 떨어져 내리는 금부스러기 같은 것이다. 분열은 부인할 수 없는 내 세계의 일부이며 나는 이것을 자아를 통해 골똘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내가 그린 자화상 속에서 안구 하나가 얼굴 바깥으로 나와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 안구는 얼굴 바깥에서 내 얼굴을 바라본다.’ p 134  김도언  ‘얼굴 바깥에서 내 얼굴을 바라본다’는 말은 ‘내 안에 들어와 있는 타자의 눈’이라는 이문재의 글과 닮았다. 



김도언의 자화상

   

어린 시절 웃는 얼굴이 아니라며, 머리를 때린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꺼내 놓은 윤이형이 그린 자화상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뚱한 얼굴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지나온 인생을 짧은 글과 그림 속에 모두 담아낸 서영은과 박라연의 자화상을 가만 들여다 보니, 왠지 숙연해진다. 발표하는 작품에 수록된 ‘작가의 말’ 외에는 만날 수 없었던 작가, 개인적으로 특별하게 좋아하는 작가들의 그림까지 접할 수 있는 즐거운 책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자화상이 궁금하다면, <나는 가짜다>를 펼쳐 보라 !!



박범신의 자화상 


김이설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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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용 식탁
윤고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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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에 한끼는 혼자 먹는다.  TV를 보면서 밥을 먹기도 하고, 자장면 한 그릇을 배달시켜 먹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 순간 4인용 식탁은 오로지 나를 위한 1인용 식탁이 되는 셈이다. 집에서 혼자 밥 먹는 일은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곧 익숙해진다.  어느 순간부터는 혼자만의 일상을 즐기게 된다. <무중력 증후군>으로 제 13회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한 윤고은의 첫 번째 소설집 <1인용 식탁>은 그런 일상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외로움, 고독함, 쓸쓸함을 동반한 여유로움까지.

 <무중력 증후군>에서 달의 증식라는 독특한 소재를 선보였던 윤고은은 <1인용 식탁>에서 현대인의 고독한 일상을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수록된 9편중 대표적인 단편을 보면 혼자 식사하는 방법을 강의하는 <1인용 식탁>,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진 백화점 화장실에서 소설을 쓰는 <인베이더 그래픽>, 돈을 주면 원하는 꿈을 살 수 있는 <박현몽 꿈 철학관>, 현실이 아닌 이상 국가를 향한 염원을 다룬 <아이슬란드>은  모두  픽션임과 동시에 논픽션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복잡한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잘 담아냈다 볼 수 있다. 

 <1인용 식탁>은 직장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해 혼자 점심을 먹는 주인공 오인용이 혼자 밥 먹는 방법을 알려주는 학원에 등록한 이야기다. 강의 내용은 정말 흥미롭다. 분식집, 패스트푸드점을 시작으로 절대 혼자서는 가기 힘든 레스토랑, 고깃집으로 확대된다. 정말 이런 학원이 존재하고 있는건 아닐까.  학원에 다니면서 주인공은 어디서든 혼자 당당하게 먹을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나 결국 그가 원했던 것은 동질감이며 소통은 아니었을까. 

 ‘내가 배우고자 했던 것은 혼자 자유롭게 먹는 방법이었으나, 정작 내가 얻은 것은 수강 기간 동안 내가 혼자 먹는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위안이었다. 1인으로 구성된 체인점 같은 것.’ p 43 나만이 군중에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오인용은 핵가족을 너머 1인 가족 세대의 표본은 아닐까 한다.  

 등단했으나, 가족들이 모두 실업자 대우를 하는 소설가가 백화점 화장실에서 휴지에 소설을 쓰는 <인베이더 그래픽>은 작가의 내면을 엿보는 듯하다. 소설가의 이야기와 그녀가 쓰는 소설 이야기로 액자형태를 이룬다. 소설 쓰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춘 백화점 화장실은 안락하기까지하다. 화려하고 거대한 백화점의 순찰대와 CCTV를 피해 다니는 소설가의 모습이 슬퍼보이는 이유는 왜 일까.

 <아이슬란드>에서는 반복되는 일상, 고달픈 현실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욕망과 마주한다. 온라인이라는 공간에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듯, 아이슬란드는 지상 낙원이었다. 아이슬란드는 추상어였다. 사람마다 번역이 다르고, 정의되는 것도 다른,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단어. 그게 아이슬란드였다. 추상어에 대해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반대말을 설정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었던 나는 아이슬란드의 반대쪽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  p 268 소설을 읽는 동안 검색창에 아이슬란드를 넣었다. 정작 그곳은 화산이 폭발로 공황상태였다. 소설의 주인공도, 윤고은도 아마 그랬겠지 싶어, 헛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우리는 또다른 아이슬란드를 여전하게 찾고 있을 게 분명하다.

 빈대로 인한 두려움이 일상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달콤한 휴가>, 무인 모텔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에피소드 <로드킬>은 머지 않아 경험할 수 있는 이야기다. 인간의 자리를 기계가 대신 할 세상에도 한낱 벌레는 거대한 공포가 될 것이다. 

 <무중력 증후군>이 미완성의 조각이었다면, <1인용 식탁>은 거의 완성에 가깝다 하겠다.  장편과 단편이 갖는 장단점이 있겠지만, 윤고은의 단편은 훨씬 좋았다. 터무니 없는 상상이 아닌 현실을 바탕으로 확장된 상상은 매력적이었다. 이제 윤고은의 상상 세계에 서슴없이 발을 내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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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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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이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제임스 설터, 처음 접하는 작가다. 1925년생, 그러니까, 2010년 현재 제임스 설터는 한국 나이로 86세의 고령이다. 분명, 대가일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의 소설은 어젯밤이 처음 번역된 것이다.  단 네편의 소설만 남긴 ‘너새네이얼 웨스트’에 비하면 다행이지 않은가. 앞으로 제임스 설터의 소설을 계속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표제작인 어젯밤을 포함 10편의 단편이 수록되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제일 먼저 어젯밤을 읽었다. 간결한 문장은 매끄러웠고, 솔직했다. 암에 걸린 아내는 아름다운 죽음을 원한다. 남편은 아내의 의견을 존중하고, 안락사에 동의한다. 두렵고 떨리는 순간, 가족도 지인도 아닌, 그저 아는 사람을 손님으로 초대한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최고의 식사를 마치고 죽음을 실천한다. 아내의 팔에 주사를 놓고 남편은 손님과 사랑은 나눈다. 손님은 바로, 남편의 내연녀였다. 세상에나, 이런 일이. 그러나 놀랄 일은 이제 부터. 은밀한 어젯밤이 지난 다음, 아내가 잠에서 깬다면 어떨까?  제임스 설터는 이렇게 모두의 허를 찌른다. 

 <어젯밤>을 시작으로 특히 재미있게 읽었던 단편은 <포기>, <귀고리>,<플라자 호텔>, <혜성>, <뉴욕의 밤>순이다. 자신의 생일날 한 집에 사는 시인과 남편의 관계를 알게 되는 아내, 남편과의 대화를 통해 결혼생활에 정답이 있을까 묻고 있는 <포기>는 많은 생각을 안겨준다.  이런 문장은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그런 얘기를 가끔 했다. 무엇을 바꿀 수 있고 도 바꿀 수 없는가에 대해서. 사람들은 언제나 뭔가, 말하자면 어떤 경험이나 책이나 어떤 인물이 그들을 완전히 바꾸어놨다고들 하지만, 그들이 그 전에 어땠는지 알고 있다면 사실 별로 바뀐 게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p 99 

<귀고리>의 주인공은 성공한  50대 남자, 고급 아파트에 살고 재혼한 아내와의 관계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아내를 배신하고 정부와 사랑에 빠진다. 위험한 사랑은 오래가지 않았다. 설령 남자에겐 그것이 사랑이었다 해도 젊은 정부에겐 잠깐의 쾌락일뿐. 아내의 귀고리를 하고 파티에 등장한 정부는 장인과도 아는 사이였다.  모든 게 드러날까 두려워하는 부와 권력을 가진 어리석은  욕망에 빠진 남자들의 모습을 상상하자니, 통쾌한 웃음을 감출 수 없다. 

 <플라자 호텔>의 주인공은 투자 전문가로 성공했지만, 사랑은 실패했다. 여자가 기회를 주었지만, 남자는 확신이 없었다.  20년이 흐른 뒤 여자가 이혼을 하고 나타났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이제 늙고 뚱뚱한 모습이다. 남자는 그녀를 사랑했지만, 약혼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돌아선다. 거침없이 솔직한 여자처럼 남자가 솔직했더라면 어땠을까. 

 남편이 바람핀 사실에 슬퍼하는 한 여자와, 그 이야기를 들으며 과거 비슷한 욕망을 떠올리는 여자의 이야기<혜성>, , <뉴욕의 밤>은 다른 단편에 비하면 지극히 평범하다. 세 명의 여자 친구들이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눈다. 둘은 이혼을 했고, 성에 적극적이며 자유롭다. 나머지 한 명은 연애도 사랑도 경험이 없다. 욕망을 따르는 삶과 절제의 삶을 우리의 일상에 대입시켜도 좋을 단편이다.    

  제임스 설터의 단편들은  거침없는 표현으로 솔직한 욕망을 드러낸다. 남녀간의 사랑, 집착, 배신, 진부한 소재를 고급스럽게 그려냈다. 그러나, 뭔가 다르다. 그가 그린 욕망의 끝은 모두의 예상을 벗어나 독자를 놀래킨다. 그 놀라움이 매력적이다. 단편 속 인물들은 모두 여유롭고, 화려하다. 하여, 사랑에 대한 욕망뿐,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대한 안타까움에 연민을 느낀다. 때문에 내게는 해가 지는 저녁에 슬그머니 스며드는 슬픔이 밀려왔다. 

 제임스 설터는 ‘이야기의 탄생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어떻게 소재를 얻었는지, 얼마의 시간이 걸렸는지 친절하게 이야기 한다. 소설을 먼저 읽고 이 글을 읽었지만, 반대의 경우라도 좋을 것이다. 강결한 느낌의 단편을 좋아하는 독자에게 <어젯밤>은 신선함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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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정도상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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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인생을 흔히 막을 건너는 일과 바다를 항해하는 일로 비유한다. 인생이라는 게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길이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우리는 사막의 끝엔 지평선이, 바다의 끝에 수평선이 있을 꺼란 막연한 기대를 품는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지평선과 수평선을 마주하는 일이 인생의 마지막 장면일까. 
 
 사막을 걷고 있는 기분으로 낙타를 읽었다. 게르에 누워 별을 보는 상상을 했고, 모래 바람을 생각하며, 양고기로 만든 음식은 무슨 맛일까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사막에 대해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 그저 소설의 주인공 ‘나’의 그림자가 되어, 그와 아들 ‘규’의 뒤를 따를 뿐.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은 짧은 유서를 남기고, 지하철에 몸을 던졌다. 중학교 3학년, 그림을 잘 그리는 열여섯 살이었다. 무엇이 그토록 힘들었기에, 그런 선택을 했을까. 

 너무 어린 나이였다. 인생의 절망과 고통보다는 기쁨과 행복만 알아야 할 나이였다. 그러나, 삶의 고단함은 나이를 가리지 않았다. 아들을 보내고, 나는 고비 사막으로 온다. 그곳에서 규를 만난다. 사막을 건너는 일은, 아들을 떠나 보내는 일이었던 것이다. 잠깐, 이건 꿈일까, 현실일까. 책을 읽는 나는 몽롱해졌다. 그러니까, 규는 소설 속에서 어디에나 존재하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존재인 동시에 부재였다. 

 아들과 여행은 꿈같은 시간이었다. 낙타를 타고 사막을 지나고, 유목민을 만나고, 그들의 삶에 일부가 되어 게르에 누워 별을 보며 못다한 이야기를 나눈다. 양을 모는 그들의 낙후한 삶이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신이 만든 피조물이라는 동질감이 소설을 읽는 내게도 가깝게 느껴졌다. 유목민 소녀 체첵과 규가스럼없이 감정을 나누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한다.

 테비시에 있는 암각화로 향하는 여정은 주술사를 만나고 싶어하는 체첵때문에 지체된다. 한국에서 아픈 몸으로 살고 있을 엄마에 대한 소식을 알고 싶은 것이다. 사막의 하루, 언제 어떤 바람이 불지 모르는 삶에 대한 불안을 주술사가 희망으로 바꿔줄 꺼라는 믿음. 정말 주술사는 희망만 이야기 해줄까? 

 
체첵과 규의 모습을 통해 나는 규에 대해, 잊고 있었던 지난 삶에 대해 생각한다. 규가 살아온 열여섯 해를 떠올리며 나는 유년의 기억과 청소년기의 방황, 혼란했던 20대와 사랑했던 사람과 아들과 아내를 떠올린다. 나를 돌아보고, 규를 기억하는 시간이다. 삼천 년 전 누군가가 거대한 바위에 혼신을 다해 그렸을 암각화. 반복되는 풍화에도 삼천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하게 존재한다. 그것이 삶일까. 

 사막에 숨겨진 오아시스처럼 암각화 속의 낙타를 타고 규가 떠나면서 나의 여행은 끝이 난다. 사막을 건너는 여행의 끝은, 규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인지 모른다. 남겨진 나는 규의 부재를 인정하면서 계속 살아갈 것이다. 주인공이 지나온 사막은 누군가가 지나온, 이제 걸어아야 할 길이리라.  작가의 말에 이런 글이 있다.  ‘지상에 평등한 삶은 없습니다. 삶은 근본적으로 불평등합니다. 낙타와의 여행은 그것을 깨닫는 길이었습니다. 불평등한 삶을 더욱 불평등하게 몰아 세우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영혼의 나태를 경계해야 합니다. 무한경쟁에서 승리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타자를 배려하면서 자기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사막, 모래 바람을 피해 다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인 낙타를 떠올린다. 
정도상의 <낙타>는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끊임없이 묻게 했다. 그러나, 끝내 그 답을 이야기해주진 않았다. 다만, 계속 가야하는 길이라고 나즈막이 일러주는 듯했다. 내게는 그랬다. 낙타엔 어디에나 존재하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상실과 슬픔이 있었고, 존재와 부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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