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
정도상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인생을 흔히 막을 건너는 일과 바다를 항해하는 일로 비유한다. 인생이라는 게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길이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우리는 사막의 끝엔 지평선이, 바다의 끝에 수평선이 있을 꺼란 막연한 기대를 품는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지평선과 수평선을 마주하는 일이 인생의 마지막 장면일까. 
 
 사막을 걷고 있는 기분으로 낙타를 읽었다. 게르에 누워 별을 보는 상상을 했고, 모래 바람을 생각하며, 양고기로 만든 음식은 무슨 맛일까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사막에 대해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 그저 소설의 주인공 ‘나’의 그림자가 되어, 그와 아들 ‘규’의 뒤를 따를 뿐.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은 짧은 유서를 남기고, 지하철에 몸을 던졌다. 중학교 3학년, 그림을 잘 그리는 열여섯 살이었다. 무엇이 그토록 힘들었기에, 그런 선택을 했을까. 

 너무 어린 나이였다. 인생의 절망과 고통보다는 기쁨과 행복만 알아야 할 나이였다. 그러나, 삶의 고단함은 나이를 가리지 않았다. 아들을 보내고, 나는 고비 사막으로 온다. 그곳에서 규를 만난다. 사막을 건너는 일은, 아들을 떠나 보내는 일이었던 것이다. 잠깐, 이건 꿈일까, 현실일까. 책을 읽는 나는 몽롱해졌다. 그러니까, 규는 소설 속에서 어디에나 존재하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존재인 동시에 부재였다. 

 아들과 여행은 꿈같은 시간이었다. 낙타를 타고 사막을 지나고, 유목민을 만나고, 그들의 삶에 일부가 되어 게르에 누워 별을 보며 못다한 이야기를 나눈다. 양을 모는 그들의 낙후한 삶이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신이 만든 피조물이라는 동질감이 소설을 읽는 내게도 가깝게 느껴졌다. 유목민 소녀 체첵과 규가스럼없이 감정을 나누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한다.

 테비시에 있는 암각화로 향하는 여정은 주술사를 만나고 싶어하는 체첵때문에 지체된다. 한국에서 아픈 몸으로 살고 있을 엄마에 대한 소식을 알고 싶은 것이다. 사막의 하루, 언제 어떤 바람이 불지 모르는 삶에 대한 불안을 주술사가 희망으로 바꿔줄 꺼라는 믿음. 정말 주술사는 희망만 이야기 해줄까? 

 
체첵과 규의 모습을 통해 나는 규에 대해, 잊고 있었던 지난 삶에 대해 생각한다. 규가 살아온 열여섯 해를 떠올리며 나는 유년의 기억과 청소년기의 방황, 혼란했던 20대와 사랑했던 사람과 아들과 아내를 떠올린다. 나를 돌아보고, 규를 기억하는 시간이다. 삼천 년 전 누군가가 거대한 바위에 혼신을 다해 그렸을 암각화. 반복되는 풍화에도 삼천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하게 존재한다. 그것이 삶일까. 

 사막에 숨겨진 오아시스처럼 암각화 속의 낙타를 타고 규가 떠나면서 나의 여행은 끝이 난다. 사막을 건너는 여행의 끝은, 규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인지 모른다. 남겨진 나는 규의 부재를 인정하면서 계속 살아갈 것이다. 주인공이 지나온 사막은 누군가가 지나온, 이제 걸어아야 할 길이리라.  작가의 말에 이런 글이 있다.  ‘지상에 평등한 삶은 없습니다. 삶은 근본적으로 불평등합니다. 낙타와의 여행은 그것을 깨닫는 길이었습니다. 불평등한 삶을 더욱 불평등하게 몰아 세우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영혼의 나태를 경계해야 합니다. 무한경쟁에서 승리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타자를 배려하면서 자기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사막, 모래 바람을 피해 다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인 낙타를 떠올린다. 
정도상의 <낙타>는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끊임없이 묻게 했다. 그러나, 끝내 그 답을 이야기해주진 않았다. 다만, 계속 가야하는 길이라고 나즈막이 일러주는 듯했다. 내게는 그랬다. 낙타엔 어디에나 존재하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상실과 슬픔이 있었고, 존재와 부재가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